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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는 없다
[1] 박경석 X 파일 2
사람은 한두 가지 비밀을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나 알리고 싶지 않은 그 비밀은 사소한 문제일 수 있지만 때로는 국가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가 간직했던 비밀을 털어 버리려는 양심이 솔곳이 솟아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도 이제 이른바 고희를 넘기고 88세 미수(米壽}도 지났다. 원래 고희란 중국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곡강시(曲江詩)에 있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의 구절에서 유래한다.
장수를 축복하는 옛 풍습에는 40세부터 시작하여 10년 마다 기념하였으나 중세 이후 70세만 남았다. 환갑, 희수(喜壽 77세), 미수(米壽 88세) 따위는 중세 이후에 생겨났지만 지금은 차츰 퇴색되어가고 있다. 그 까닭은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는 장수 연령 때문이다.
나는 88세 미수가 지났지만 건강이나 지적 능력이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한국의 명시』로 선정된 시들도 근래의 작품이다. 특히 전쟁기념관을 비롯한 전국 여러 곳에 세워진 나의 시비(詩碑) 또한 전역 이후의 작품들이 많다.
그러나 가끔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래서 뭔가 홀가분하게 털어내야 되겠다는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나의 첫 ‘X 파일은 2005년 6월 월간 한국논단에 발표한 '정규 육사생도의 꿈을 앗아간 6.25’였다. 그 글은 노년층과 보수층에게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X파일 2’는 보수층 사람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내용이다.
나는 때때로 노년층 보수층 사람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격렬한 언쟁도 빈번했다.
‘용산미군기지 이전’, ‘미국 이외의 국가와의 무기 구매’ 등을 비롯하여 민감한 사항마다 여러 예비역 장성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나를 좌파라고 손가락질한다. 천만에 말씀이다. 20세기 최대 실패작으로 나는 ‘공산주의’를 꼽았고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련을 해체한 ‘고르바초프’를 내세우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이기 때문이다.
나의 ‘X 파일 2’는 그래서 민감한 내용이 될 수 있고 보수진영 사람들로부터는 욕을 먹을 것이고 진보세력으로부터는 당연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X 파일 2’의 골자는 이 논단의 제목처럼 ‘국군 포로는 없다’이다. 국군의 구성원이 포로가 되어 모군(母軍)과 조국을 배신한 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충실한 인민이 되었던 자가 어찌 금의환향한 영웅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포로가 된 후 조국과 모군을 위해 그 굴레로부터 얼마든지 탈출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적군에 귀순하여 조국과 모군을 향해 총질한 자를 어찌 거금을 주어가며 애국자 대접을 해야 하는가.
나는 그런 엄청난 모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X 파일 2’를 공개하기로 결정 하였다.
[2] 17세의 육군소위
나는 6년제 대전중학교 5학년 초, 대한민국 최초의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험에 월반 응시, 예비 시험 및 2차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규정상 만 19세 이상에서 2년 모자라 불합격 통보를 받고 5학년 교실에 되돌아가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하였으니 빨리 등록하라.”라는 담임선생님의 전갈을 받고 태릉 육사를 찾았다.
그 연유가 희한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절대 신임을 받고 있던 실세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준장의 장남 원창희를 육사에 편법 입학시키려 했는데 그 역시 만 17세였다. 그렇다면 학과시험과 신체검사, 구두시험까지 합격했지만 연령미달이란 이유로 불합격 통보한 박경석도 같이 합격시키자는 학교 당국의 결정으로 추가 입학하게 된 것이다.
기구한 운명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입교 25일째인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남침이 시작되자 다급한 육군본부 수뇌부는 화랑대의 육사생도들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입교 25일째인 청소년이 소총인들 제대로 쏠 줄 알았겠는가. 글자 그대로 전투에서는 맹물이었다. 포천전투에서 막강한 인민군의 공격을 받은 생도들은 명령대로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웠다. 솔직히 나는 그때 M1 소총의 실탄 8발 한 묶음인 클립을 소총에 장전하는 것도 서툴렀다. 벌벌 떨다가 겨우 방아쇠를 당겼으나 인민군을 적중시키지는 못했다.
이 첫 전투에서 청소년인 동기생 330명 가운데 86명이 전사했다. 나는 천행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계속하여 생도들은 태릉전투, 한강선방어전투, 수원전투 등에 투입되어 만신창이가 되었다.
수원전투를 끝으로 생도들은 부산 동래로 후송되어 동래중학교에 육사의 새 현판을 달고 9주라는 단기 교육훈련을 받고 그해 10월 23일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나는 이렇게 하여 육군소위 법정 연령 만 21세에서 4년이 모자라는 17세의 육군소위가 된 것이다.
당시 육군소위의 별칭은 ‘소모품‘이였다. 그만큼 전선에서의 희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총 졸업생 전원이 보병 제9사단 소대장 요원으로 발령했는데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소장의 장남 원창희 소위만 나이가 어리다는 구실로 육군본부로 발령한 후 헌병장교로 전과시켜 부산역 파견 헌병대장으로 보내졌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이 사실에 매우 분노했다. 같은 나이인 17세의 내가 애국심이 샘솟겠는가.
어디 원용덕 뿐이랴. 당시 전선에서 싸우는 장병들 가운데 지도층 가족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전장에서 죽을 때 빽이 없어 죽는다고 “빽”하고 숨을 거둔다는 말이 유행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지도층 인사들의 솔선수범의 책무를 뜻한다. 고귀한 신분에는 반드시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서구 선진국 사상의 기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지도층은 그렇지 못했다.
6.25전쟁 당시 벤프리트 장군의 아들을 비롯해 많은 미국의 고위 장성들의 자제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상당수가 전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적국인 중공의 모택동 역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그래서 자기 아들을 바쳤다.
나는 불만을 잔뜩 품고 9사단 30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소대원 40명이 모두 20세 이상이었다. 소대 선임하사관은 27세였다. 그러니 소대 지휘가 될 리 없었다. 소대원들은 나를 애숭이 취급했고 실제 소대 지휘는 선임하사관이 하는 꼴이었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나는 앞장서야 했고 선임하사관은 내 지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러다가 그해 12월 말, 강원도 평창전투에서 고지 정상부분까지 올라간 나에게 던져진 적 수류탄에 의해 중상을 입고 눈에 파묻혀 버렸다.
그후 야전치료소에서 인민군 위생병으로부터 들은바에 의하면 전장정리를 하던 인민군이 나를 발견하고 여군 소위로 착각하다가 소년인 것을 확인하고는 전상자 정리를 하지 않고 후송했다고 했다. 원래 전투가 끝난 다음 전장정리시에는 피아 공히 상대편 중상자는 확인사살하는게 통례였다.
전투 중에 적의 중상자까지 후송하는 군대는 거의 드문 일인데 나는 소년 육군 소위인 탓으로 살아남았다.
[3] 해방군관 동무
소년 육군소위는 인민군에게도 희소가치가 있었는지 병상에 누워있는 나를 신기롭게 생각하며 군관들이 몰려와 이것저것을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민군 병사들이 깍듯이 경어를 쓰며 인민군 군관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내 호칭은 ‘해방군관동무’였다.
미제의 앞잡이로 싸움터에 끌려왔다가 이제야 인민군 보호하에 있고 국방군 장교를 해방시켰으니 우리 쪽 군관이란 것이다. 적에 대한 공포심이 사라지면서 같은 언어를 쓰는 동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착잡하였다. 포로가 되면 죽도록 고문하고 끝내 죽인다고 교육받았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중상부위가 완쾌되면서 나는 다수리라는 부락에 보내졌다. 그곳에는 많은 국군 포로가 있었다. 그 부락에는 철조망이 없었으며 경계병도 없었다. 때때로 죽지 않을 만큼의 식량도 보내주었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도 공급되었다. 가끔 인민군 군관이 와서 이른바 ‘교양’이라는 설교 같은 말을 하고 갔다.
만일, 이곳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향해 간다면 얼마든지 대한민국을 찾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나는 국군에 복귀 후 단편소설이나 논픽션에서 반공작품을 써댔다. 학대와 포악한 고문, 사형장에서의 탈출 등 전혀 다른 내용의 작품을 발표하여 반공정신의 고양에 힘썼다. 당시 상황에서 진실을 쓸 용기도 없었을 뿐 아니라 반공정신으로 장병들을 무장시키려면 그 길 밖에 도리가 없었다.그것이 상관의 지시사항이었다.
그렇다면, 인민군은 국군포로를 왜 그렇게 대우했을까. 그 해답은 중공군에게 다시 포로가 되었을 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포로를 수용했던 곳에서 인민군 사단장의 배려로 남행길로 향할 수 있었다. 경계병이 없었으니 탈출이라기보다 남쪽으로 향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인민군이 싫어서라기보다 고향이 그리웠고 국군에 복귀해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이틀을 꼬박 남쪽을 향해 가다가 다시 중공군에게 잡혔다. 중공군 또한 인민군과 같이 모진 고문이나 학대 같은 것 없이 국군장교임을 확인하고는 군관동무라는 호칭으로 대우해 주었다.
[4] 중공군 사단장과의 대화
나는 어린 탓에 그리고 신기하게도 17세의 육군 소위라는 점 때문에 중공군도 경계의 눈초리로 보지 않았고 동정심으로 대해 주었다.
중공군에게 잡힌 지 이틀이 지나자 중공군 사단장이 나를 불렀다. 놀랍게도 우리말이 유창하였다. 그는 따듯한 어조로 나를 위로한 뒤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성실히 대답했지만 군사기밀 같은 민감한 내용이 아니라 가족관계 학생 시절 그리고 육사를 지원하게 된 동기 등을 신비롭게 생각하면서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나는 솔직히 적군인데도 이상하리만치 적대감 같은 나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중공군 사단장에게 내가 질문한 내용 즉 ‘왜 적군의 포로를 적으로 대해주지 않고 경계도 하지 않았느냐?’라는 의문에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중국 내전에서 중공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은 물이고 군대는 고기’라는 모택동 주석의 교훈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이 없으면 고기는 죽기 마련이므로 인민과 군대의 관계가 밀접한 유대가 맺어질 때 혁명에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 국민정부군과 싸울 때에도 그쪽 인민이나 군관들 또는 전사들에게 동지의식을 갖게 해서 적대감정을 희석시켜 포용함으로써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묶을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의 이 전쟁은 동족간의 전쟁인데 이 전쟁에서 상대 군대가 적이라 하여도 적대감을 희석시켜 포용하는 방책이 더 효과적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받아 어리광 비슷하게 ‘만일 지금 내가 이곳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간다면 또 체포하겠느냐?’는 질문에 ‘동무가 그것을 선택한다면 나는 말리지 않겠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나는 감동했다. 내가 속해 있던 대한민국 국군의 장군 아들을 후방에 빼돌리는 따위의 불공평한 짓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는데 적군의 장군(당시 중공군에는 계급이 없었다. 다만 직책뿐이고 계급은 다 같다고 했다.)은 한 차원 높은 도덕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원대복귀 후 국군 생활 중 가끔 그 중공군 사단장의 말을 상기하면서 군 복무를 했다. 특히 베트남전쟁에 제1진으로 파견된 맹호사단 제1연대 재구대대장(在求大隊長) 시절 중공군 사단장의 그 방식대로 베트남인에게 포용과 대민지원을 통해 많은 귀순병을 얻었고 하나의 신화를 창조했었다.
중공군 사단장과 헤어진 후 나는 남행을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다. 중공군들은 내 남행을 말리지 않았고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행길에서 내무서원(우리의 경찰)에 의해 연행 돼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는 사뭇 달랐다. 혹독한 심문이 이어젔고 삼엄한 감시하에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탈출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의 용기로 그 사슬을 벗어나 마침내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5] 배신자의 속출
1950년 12월 말부터 1951년 4월 초까지 약 3개월간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수치스러운 기간이었다. 인민군 포로, 중공군포로로서 군인으로서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씻을 수 없는 오욕의 시간이었다.
인민군 포로 생활에서 형용할 수 없는 모욕은 적군으로부터 가해진 박해가 아니라 전우간의 갈등이었다.
계급이 뒤바뀌는 것과 같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가해지는 모욕은 이 글로 형용할 수 없는 전우들간의 치욕이었다.
인민군은 국군포로에게 충성을 강제하지 않았다. 다만, 관망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전우들 가운데 충성을 맹세하고 스스로 인민군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볼 때는 정말 죽고 싶은 모욕을 느꼈다.
배신자는 곳곳에 있었다. 살기 위한 방편이라면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민군이나 중공군이 철책에 가두지도 않고 경계병도 세우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탈출하거나 남행의 기회가 있는데도 그 길을 포기하고 적의 대열에 합류함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족간의 전쟁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사실에 그 당위를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심각하다. 그때 배신했던 전우들이 국군포로로 둔갑하여 대한민국을 찾아 수억 원의 보상금을 챙기는가 하면 인민군으로 변절하여 국군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배신자가 다시 국군으로 돌아와 복귀신고를 하고 영웅대접을 받는다면 얼마나 중대한 모순일까. 이 보다 더 비열한 희극이 또 있을까. 이렇게 어수룩한 국가가 세계 어느 나라에 또 있을까.
국군포로 송환을 촉구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6] 국군포로의 실체
6.25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이란 점에서 그 비극이 어느 전쟁보다 심각했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아직 그 후유증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국군만 해도 15만여 명의 전사자와 그보다 훨씬 많은 전상자, 실종자를 냈다. 여기서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피해 그리고 군인보다 더 많은 희생을 입은 민간인의 피해까지 합산하면 그 수는 수백만에 달할 것이다.
어디 인명뿐이랴.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천만 이산가족의 발생 등으로 온 겨레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김일성과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6.25전쟁은 남북간의 원한을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동질성까지 헤쳐 이방인보다 더 깊은 괴리현상을 초래하고 말았다.
남북간 교류가 시작된 일은 한번 겪어야 될 순서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지금의 상황에서 남북교류를 해야 되고 제한된 원조의 제공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양해하고 있다. 우리에게 큰 상처를 입힌 옛 소련 그리고 중공과도 정상 교류 중에 있는데 유독 북한만 적대시하는 정책에는 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점 일부 과격보수층과 다른 나의 시국관이다.
이러한 현실 상황에서 국군포로 송환을 끈질기게 들고 나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북한 당국은 코웃음 치고 있을지 모른다.
국방부에 한 통계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국군 실종자는 모두 41,900여 명인데 이중 유가족 또는 출신별 동기생들의 신고에 의해 22,500여 명이 전사 처리되었고 나머지 19,300여 명은 실종자로 분류하고 있다.
지난 1990년 중국이 발간한 ‘항미원조전사(抗美援朝戰史)’에는 국군포로 37,81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기준으로 인수 포로 8,333명을 빼면 29,482명이 북한에 잔류해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전쟁 후의 포로교환에서 우리가 75,778명을 넘겨준 데 비하면 북한당국이 보낸 포로의 수에 의문이 생긴다. 특히 우리가 석방한 반공포로 27,000여 명까지 합산하면 국군과 유엔군이 획득한 포로의 수는 무려 10만 명이 넘는다. 그에 비해 북한 당국이 보낸 포로의 수는 10%에도 못 미치니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협상 당시로 되돌아가 그때 협상 내용의 실체를 분석해야 한다.
반공포로를 기습적으로 석방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이승만 대통령이 순수 국군포로가 20,000여 명이나 북에 억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가만히 있겠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협상에 임하고 있던 미군당국도 잔류포로 송환 없이는 그렇게 많은 인민군 포로를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포로교환에 합의한 내용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고 우리 정부 당국자나 미국 당국도 그 문제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쌍방 포로교환이 성사된 것이었다. 그 문제란 돌아오지 않은 국군 포로를 우리의 반공포로와 같은 맥락에서 상쇄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인민군 포로 가운데 3만 명 가까운 반공포로를 석방하여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유독 우리 포로가 돌아오기를 거부하고 그쪽 체제에 합류한 사실을 입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포로 기간 중 수없이 변절하는 국군포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7] 가면을 쓴 국군포로
인민군은 중공군 방식대로 이른바 ‘미제의 괴뢰’인 국군에 끌려갔다가 자기들에 의해 해방되었으니 자기네들과 신분이 같다는 논리를 폈다. 따라서 국군포로를 해방군관, 해방전사로 대우했다.
물론 인민군은 보이지 않는 감시망을 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충성이 인정되면 인민군으로 편입하여 국군과 유엔군에 총부리를 겨누게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인민군의 실상을 보며 도저히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국군포로는 그 굴레에서 벗어났고 이렇게 하여 탈출한 국군포로는 6.25전쟁을 통해 수천 명 이상에 달했다.
탈출 포로의 정확한 통계는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국군포로가 탈출 후 즉시 원대 복귀하여 다시 국군으로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 공세에 의하여 유재흥 소장이 지휘하는 제3군단이 강원도 현리전투에서 한국군 최대의 참패를 당하였다. 그때 5월 20일 현재 제3군단 예하 제3사단이 약 35%, 제9사단이 약 37%의 잔류 병력만 남을 정도로 거의 전멸 상태였다. 그러나 5월 27일에는 평균 70% 선으로 회복되었다. 이 회복과정에서 일시 포로가 되었다가 중공군의 묵인하에 탈출한 병력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중공군은 군에 복귀하지 말고 귀향하라고 권했다. 바로 중국내전 시 중공군이 국민정부군 포로에게 행했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국군포로들은 귀향하지 않았고 즉각 원대 복귀했다.
인민군이나 중공군은 6.25전쟁을 통해 국군포로에 대한 포용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북한에 남아있는 이른바 국군포로는 어느 경우에 해당할 것인가. 그 유추는 어렵지 않다.
첫째, 인민군이나 중공군의 권유에 따라 혹은 스스로 조국과 모군(母軍)을 배신하고 인민군 또는 그와 유사한 직책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위해 충성한 자들이다.
둘째, 적극적으로 적을 위해 충성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의지가 약해 남행을 결행하지 못한 자, 그러나 그 후 충성대열에 합류한 자들이다.
셋째, 부모 또는 형제들이 각종 반란사건에 연유되어 남행했다 하여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북한체제를 선택한자들이다.
끝으로 적극적인 적색분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이른바 북한에 남아있는 국군포로라면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북한체제를 선택한 후 결혼하여 아들딸까지 낳아 김일성 만세를 부르며 살아가고 있다가 남쪽이 잘 산다기에 다시 살던 체제를 배신하여 자기가 책임져야 할 처자식까지 버리고 자기만 잘 살자고 남쪽을 찾았다면 그는 영웅도 아니고 국군 귀향병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바라는 ‘국군포로’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바로 이것이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제발 이제 국군포로 송환 따위의 우둔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국군포로였던 자가 귀환하면 조용히 정착금만 주고 회개하고 살아가라고 하면 된다.
복귀신고다 뭐다 하는 해프닝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들판에 묶어둔 소가 웃을 일이다.
[8] 고해하는 심정으로
6.25전쟁 종전 후 황폐된 대한민국의 각 분야의 재건과 정신무장을 위해 반공교육은 필수적이었다. 국기(國基)를 다지고 공산당의 재침을 막아내기 위해서 반공은 국민을 통합하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북한집단이 휴전임에도 불구하고 휴전선 곳곳에서 공작원을 침투시키는 등 도발을 일삼았고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그 과장에서 국군장병은 물론 국민에게도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정신적 무장은 당연한 방어책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나는 현역시절 때때로 필명 한사랑(韓史郞)으로 장편소설 ‘녹슨 훈장’을 비롯한 문학 작품에서 인민군에 잡힌 국군포로에 대한 이야기를 혹독한 고문과 총살 등의 잔혹성으로 그렸다. 그 작품들은 픽션(Fiction, 허구-소설)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교재나 교양을 위한 글에서는 거짓이 되기 때문에 분명히 잘못된 집필이었다고 생각이 되었다. 특히 군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던 내가 집필한 저서 지휘관 시리즈 전3권. 즉, 제1권 『지휘관(指揮官)의 사생관(死生觀)』, 제2권 『지휘관(指揮官)의 조건(條件)』, 제3권 『지휘관(指揮官)의 역사관(歷史觀)』(1981년 兵學社) 가운데 ‘생(生)과 사(死)의 분수령(分水嶺)’은 완전한 허구임을 밝힌다.
그간 이 글로 교육을 받은 장병들에게 고해하는 마음으로 정중히 사과한다. 앞으로 복간될 경우에는 그 부분을 삭제할 것을 약속한다.
[9] 확실한 대비책
지금 우리나라는 북한 핵문제를 비롯하여 상호교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여러 난제에 봉착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로 양극화된 의식세계의 현상은 국력을 소모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판단하고 있다. 반목과 갈등은 상호 적대관계처럼 첨예화되어가고 있고 양측 모두 일보도 양보하지 않을 대립관계에서 소모전만 전개하고 있는 꼴이다.
상호 자기들의 원죄(原罪)를 숨기고 애국자인양하는 양측 극렬세력에게 나는 자중할 것을 권하고 싶다.
강정구 교수 같은 노골적 친공주의자의 출현은 과도기적이라고는 하나 현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고 보수측의 무조건 정부 당국자들을 좌익으로 몰아대는 것 또한 자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1983년 통일원 정책자문위원에 위촉되어 있는 동안 『역사(歷史)에서 본 민족통일(民族統一)』이라는 통일문고10(민족통일중앙협의회)을 저술하였다. 그 저서 내용 가운데 고려의 왕건이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보여준 포용정책을 모델로 하는 ‘포용정책’을 주장했다가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제한된 포용정책은 통일 위한 하나의 방책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퍼주기’가 아니라 최선의 ‘투자’라는 걸 믿고 싶다. 그 점을 보수층 일각의 이해를 구하고 싶다.
다만, 전제가 있다. 북한 당국의 군사적 동향에 철저한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 한반도의 현 정세에서 북한의 재래식 군사태세는 최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현대적 군사력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5.16 쿠데타나 12.12 군사반란은 기계화된 사단병력이 아니라 소총으로 경무장한 몇 개의 중대병력만으로 국권을 뒤엎을 수 있었다는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첨언할 것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규모가 큰 적극적 대북 지원은 계속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북한의 국력에 미칠만한 지속적인 지원도 용인될 수 없다. 원래 포용정책은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양산하는 가운데 우리가 지원을 계속한다면 바로 우리의 자멸을 의미한다. 그 점 명백히 하고 넘어가야겠다.
[10] 법령 개정 등 일부 성과
국군 포로에 대해 일괄 거액 지원금을 지급했던 법령이 나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 2006년 말 일부 법령이 개정되어 정밀 심사후 3단계로 차등을 두고 지급하기로 확정하였다. 즉 인민군에 복무했거나 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이 확인되면 지원금 액수가 삭감된다.
당연한 결정이다. 그러나 심사과정에서 거짓진술을 할 것은 뻔한 노롯이 아닌가. 나는 100% 이적행위자로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심사가 필요 없는 사안이다.
결정된 내용
귀환 국군포로는 1~3급으로 구분되며 국군으로서 품위를 지켰거나 억류국의 회유정책에 휘말리지 않고 귀환 중요한 첩보를 제공한 경우는 1등급 (필자의 판단으로는 해당자가 있을수 없다고 봄).억류국에서 군 복무 등 부정적 행적이 없으면 2등급을,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강압에 의해 억류국에 협조한 자는 3등급으로 분류.
억류국의 군에서 복무한 기간은 보수 산정 기간에서 제외되며 억류국 체제 선전 활동에 가담하거나 노동당에 가입한 경우에는 지급액에서 각각 20%, 10%가 삭감된다. 특히 국내 송환 과정에서 위장 가족 동반 등 부정한 행동을 한 사실이 들어나면 퇴직 연금 또는 퇴직연금일시금 지급액 20%를 삭감.
귀환을 목적으로 억류지를 벗어난 국군포로에 대한 국내 주거지원금은 국내가족이 송환 비용 부담 능력 이 없을 경우에 한해 정부가 우선 지급하되 송환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사용했다면 그 금액을 환수한다. 귀환포로의 의료 약제비 가운데 본인 부담 비용은 국가에서 지원 한다.
이상 결정 사항이 2006년 11월 26일 국무회의를 열어 상기 내용의'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을 의결했다.필자의 생각으로는 매우 파격적 관용을 베픈 결정으로 본다. 왜냐하면 조국과 모군을 배신한 자에게도 혜택을 주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이적행위자까지 온정과 용서의 길을 선택했다.
원칙적으로 국제적 관행은 조국을 배신해 적대국 군에 입대 복무하거나 적대국을 위해 충성을 다한 자는 귀환하면 당연히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처벌을 받는다. 국군포로는 예외없이 모두 이 항목에 해당된다.
2022년 현재,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원로 장군의 증언
나는 작가로 활동하는 기간에 17명의 원로 장군의 회고록을 집필 감수했다. 내가 집필한 이유는 작업을 통해 원로 장군들의 정확한 전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나는 원로 장군들의 회고록 집필을 선별하면서 수락했다. 그 가운데 박정인 장군(육사6기)과 문홍구 장군(육사9기)이 6.25한국전쟁 시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느슨한 경계를 틈타 탈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준비한 적지 탈출기를 보여 그 경우를 비교해달라는 요구에 두 원로 장군은 이구동성으로 자신이 겪은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영웅처럼 되돌아오는 국군포로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나의 견해와 일치하는 경우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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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북침으로 남침을 유도한것은 이승만과 미국이다?
https://blog.naver.com/bmss4050/223350273928
이 서재는 정치 중립입니다.
정치 색이 짙은 내용은 삭제하니 양해 바랍니다.
@박경석 이것은 진실을 전달하는건데요
ㅡ진실은 미영소중이 짜고친 고수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