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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이윤재목사/탄식을 넘어 소망으로 (롬 8:18-25)
7월의 한복판에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길 바랍니다. 한때 유행했던 말중에 “용서 시리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 남자입니다. “과거있는 남자는 용서해도 미래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오리탕 좋아하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오리발 내미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머리칼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머리에 든 것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키작은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배나온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다음은 여자입니다. “얼굴 못생긴 여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마음이 못 생긴 여자는 용서할 수 없다. 안면고치는 여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안면 바꾸는 여자는 용서할 수 없다. 과거있는 여자는 용서할 수 없어도 과거에 붙잡혀 사는 여자는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이 과거가 없습니까? 그리고 누가 과거와 무관하게 삽니까? 우리는 과거가 없기 때문에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가지고 미래를 사는 것입니다. 아픈 상처가 없기 때문이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픈 상처와 함께 미래가 있습니다.
지난 7월 6일은 열흘동안 계속된 캄보디아, 베트남 선교를 마치는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지난 열흘동안 있었던 선교를 정리하고자 베트남 숙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성경앞에 앉았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말씀 하옵소서. 열흘동안 의 선교를 통하여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저에게 주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한참동안 씨름하는 데 롬8장이 떠 올랐습니다. 성경을 폈습니다. 그랬더니 롬8:22이 눈이 들어왔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탄식”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탄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23절에 또 나왔습니다. 롬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2절,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23절, “성령의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탄식하며”. 22절은 모든 피조물이 탄식합니다. 23절은 그리스도인도 탄식합니다. 22절의 탄식은 드러내놓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23절은 속으로 탄식하는 것입니다. “탄식하며 탄식하고”.
왜 성경은 탄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찼을까? 왜 세상은 탄식하고 살까? 여러분, 탄식이 무엇입니까? 탄식은 신음소리입니다. 산 사람이 고통스러워 지르는 아픔의 소리입니다. 탄식은 비명소리입니다. 사람이 죽어가면서 지르는 외마디 소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탄식하며 살고 탄식하며 죽습니다. 탄식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사는 방식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 아침에 그 말씀을 읽게 했는지 모릅니다. 은혜가운데 선교를 잘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왜 그 무거운 말씀을 주셨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탄식”이란 말처럼 캄보디아, 베트남의 상황을 잘 요약할 말은 없습니다. 두 나라의 역사는 “탄식”으로 가득찬 역사입니다. 두 나라는 똑같이 외세의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두 나라는 똑같이 내전과 공산주의 혁명으로 상처를 입었고 지금도 그 상처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1975년에서 1979년 사이, 캄보디아 공산당 게릴라 조직인 크메르 루즈에 의해 인구 700만 명 중 1/3에 해당하는 200만의 국민들을 학살당했습니다. 베트남도 1955년부터 시작된 베트남 전쟁으로 약 천만명이 죽고, 미군도 6만명, 한국군인도 5천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두 나라에서만 지난 3-40년동안 1500만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 땅은 죽음의 땅입니다. 전쟁은 상처를 가져오고 상처는 탄식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얼굴이 밝지 않습니다. 저들의 조상, 가족중 누군가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그 상처를 안고 삽니다.
캄보디아에서 3박 4일동안 목회자 세미나를 했습니다. 전국에서 온 100여명의 목회자가 모였습니다. 수도 프놈펜에서 온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열악한 교통편을 타고 털털거리고 5시간, 10시간, 달려 왔습니다. 그들의 눈은 기대로 가득찼으나 얼굴은 핏기가 없고 깡말라 있었습니다. 나이가 50도 못되었다는 데 언뜻 보기에는 70은 넘어 보였습니다. 한 눈에 보아도 제대로 교육받은 목회자는 없어 보였습니다.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은 이미 다 학살당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 교사의 공식 월급이 40불이랍니다. 우리 돈 5만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사하면서도 따로 노동하고 목회하면서도 농사짓습니다. 그래야 먹고 삽니다. 목회자 세미나 끝나고 한 분씩 안아드렸는 데 누구도 안을 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못먹고 깡말라 제 품속에 쏙 들어왔습니다.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그들의 몸을 안으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작은 한숨이 나왔습니다. 깊은 곳에서 나온 탄식이었습니다.
베트남은 공산국가라는 것을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막상 가보았더니 모든 것이 공산당 종교국에 의해 통제되고 감시되고 있었습니다. 강의내용도 점검되고 녹음되었습니다. 목회자 세미나도 이름이 상부에 다 올라가기 때문에 오려고 했다가 못 온 분이 많았습니다. 그마나 제가 강의하는 데 공산당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팔짱을 끼고 시종 감시하듯이 저를 쳐다봅니다. 이러니 목회자가 마음대로 목회할 수 없슴은 분명합니다. 베트남 목회자는 한해동안의 목회 계획을 연초에 당에 보고하고 허락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허락받았어도 당에서 한 시간 전에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가 목회를 잘해도 당이 그만 두라면 하루 아침에 그만 두어야 합니다. 제가 설교한 콩빈 교회 목사는 적은 교회를 열심히 목회해서 2천명까지 성장시켰다가 공산당이 그만 두라고 해서 하루 아침에 그만 두고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베트남 현지 선교사가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써서 저에게 교회로 보냈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떠나는 날까지 보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합니다. 제가 알았다면 베트남에 안 갔을 것입니다. 제가 몰랐으니 갔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겁 없이 베트남 교회 목회자들 모여 놓고 세미나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여러분에게 선교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기도를 듣고 제가 용기를 내서 더 세게 했습니다. 저에게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더 세게 “아멘”하라고 하고 “따라 하라”고 하고 “손들라”고 하고, “예수님은 베트남의 소망이다. 예수님을 믿어야 베트남이 산다” 소리 쳤습니다. 왜 공산당이 참석한 것을 알았는가 하면 다 손을 드는 데 두 사람만 안 들어요. 그래서 그 쪽을 향해 더 세게 “아멘 하라, 따라 하라. 손들라” 했더니 나중엔 그들도 손을 들었습니다. 현지 목회자에 의하면 목회자 세미나는 베트남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하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안 한 일이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합니다.
문제는 왜 우리에게 탄식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탄식하겠습니까?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나 왜 탄식하겠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20절입니다. 롬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으라”. 바울이 말하는 탄식의 첫 번째 이유는 “허무”입니다. 허무가 무엇입니까? “덧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헛되다”는 말을 “하벨”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숨”이라는 “헤벨”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본래 숨에 달려 있습니다. 숨이 멈추면 죽고 숨을 쉬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숨을 들이 마실 수 있으나 내쉬지 못하면 죽습니다. 죽음 때문에 인간은 탄식합니다. 이번에도 캄보디아 킬링필드에 가 보았습니다. 죄없는 백성을 산채로 구덩이에 밀어 넣었습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 구덩이에 집단으로 쓸어 넣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새처럼 공중으로 던져 총으로 쏴서 구덩이에 떨어지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묻은 구덩이가 수백, 수천개입니다. 죽음앞에서는 누구나 탄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악명높은 “투올스랭” 감옥에도 가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크메르 루즈는 1만 4천명을 투옥하여 고문하고 때리고 굶겨서 죽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세워 놓고 머리를 드릴로 뚷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21절입니다.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여기에 “썩어짐”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부패했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부패하게 합니까? 두말할 것이 없이 죄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부패하게 한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렘17:9절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마는 나 여호아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가장 부패한 것이 우리 마음의 죄입니다.
캄보디아, 베트남의 탄식의 본질적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정치가가 정치를 못해서가 아닙니다. 먹고 살기 어려워서도 아닙니다. 한때 캄보디아는 아시아를 주름잡던 대국이었습니다. 크메르 제국이 세계적인 문화 유산 앙코르 와트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화가 발달해도 죄가 들어오면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고 죄는 반드시 죽음을 가져옵니다. 19세기, 프랑스가 갑자기 욕심을 내더니 인도 차이나 반도를 침략합니다. 그리고 베트남, 캄보디아 식민지로 만듭니다. 식민지배가 무엇입니까? 남의 나라를 짓밟고 주권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합리화해도 죄의 산물입니다. 식민지배의 죄는 탐욕의 죄요 압제의 죄입니다.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이 일어납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가 들어옵니다. 공산주의가 들어오자 그것을 막기 위한 강력한 우익정부가 들어섭니다. 문제는 우익정부가 잘 했으면 거기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익정권들이 하나같이 부패합니다. 베트남의 고딘 디엠 정권, 티우 정권, 캄보디아의 론논 정권이 다 부패합니다. 전쟁중에도 베트남 관리들은 보급물자를 민간에 팔아 넘겨 사리사욕을 채웁니다. 티우 부인은 해외에서 사치품 관광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삽니다. 캄보디아의 론논정권은 강경한 반공정책으로 수많은 백성을 적으로 만듭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자연히 공산당을 의지하지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의 기대를 받은 공산당이 잘했느냐? 더 큰 죄를 짓습니다. 죄는 또 다른 죄를 낳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폴포트처럼 자기 백성을 200만이나 죽입니다. 베트남은 공산당이 통일을 했지만 통일되는 과정에서 천만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나마 군사적 통일이지 평화적 통일도 아닙니다. 통일로 백성들이 진정으로 자유를 찾은 것도 아닙니다. 아직도 교회는 짓밟히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은 공식적인 교회보다 지하교회가 더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하나의 원인이 있습니다. 죄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입니다. 남의 민족을 강제로 약탈하는 죄, 부정하고 부패하여 자기 배만 채우는 죄, 억울한 사람을 빨갱이로, 공산당으로 모는 사이비 우익정부의 죄, 믿어준 백성들을 배신하고 자기 백성을 학살한 공산당의 죄,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이유에서 나옵니다. "죄“. 죄가 모든 것의 원흉입니다.
여러분, 죄의 심각성을 아십니까? 어떤 사람은 죄를 인간의 도덕적 실수정도로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약속을 깜빡 잊었다거나, 어쩌다 말실수로 사람에게 상처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수입니다. 그러나 죄는 어쩌다 일어난 실수가 아닙니다. 뿌리깊은 악입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본질적인 악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가 교육을 받지 않아서 생긴 줄로 압니다. 그래서 교육을 잘하면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더 크고 악한 죄는 교육을 많이 받은 선진국에서 일어납니다. 선진국에서 더 많이 가정이 파괴되고 선진국에서 더 많은 마약, 중독, 성폭행이 일어납니다. 죄는 우리 존재의 깊은 뿌리안에 있습니다. 죄는 지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롬5:14,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죄는 반드시 죄지은 사람을 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는 은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정치나 법이나 교육으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망하게 합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자.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죄는 탄식하게 하고 상처받고 하고 마지막에 반드시 죽게 만듭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탄식의 원인이 “죄”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어떤 사람 때문에 내가 불편합니까? 그 사람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주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니고 그 사람속에 있는 죄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괜히 속지 마십시오. 그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죄입니다. 그러나 더 큰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미워하는 내 속에 있는 죄입니다. 언제나 가장 큰 죄는 내 속에 있는 죄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할 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싫어할 때 그 사람이 나빠졌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과 어떤 일 나쁜 을 겪은 후에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본래 좋았다가 이제는 나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인 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사람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내 이미지가 나빠진 것입니다. 그 사람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가졌던 내 이미지가 바뀐 것입니다. 그가 바뀐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뀐 것입니다. 그의 실체가 바뀐 것이 아니라 내 이미지가 바뀐 것입니다. 이미지는 실체가 아니라 허상입니다. 내가 스스로 머릿속으로 만들고 그를 나쁘게 생각하는 나의 죄악성이 문제입니다. 그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속에 내 중심주의, 내 욕심,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는 이기주의, 내 판단, 내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결국은 내 문제입니다. 결국은 내 죄입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위하여 진심으로 권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든 모든 문제의 본질을 자기 죄로부터 찾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과 나쁜 관계에 있을 때 문제를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풀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풀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문제를 자기 속에서 찾고 하나님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해법은 무엇인가?” 19절이 답입니다. 롬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 그것이 죄가운데 사는 사람들의 해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23절 맨 뒤,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 자라”. 속량은 값을 주고 산 것입니다. 대가를 주고 빚을 갚아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준 곳입니다. 죄는 더러운 오물입니다. 씻어 내야 합니다. 죄가 빚입니다. 갚아져야 합니다. 죄가 무거운 짐입니다. 누군가 대신 들어줘야 합니다. 죄가 심각한 장애물입니다.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속량”입니다.
죄로 인해 탄식하는 개인이나 민족의 문제는 죄만 있고 죄를 씻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있는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처벌은 하는 데 대신 용서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씻어주지 않고 갚아주지 않으니 죄는 계속 재생산됩니다. 그래서 개인도 망하고 나라가 망합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개인이나 민족을 살리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 믿는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돌아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로 돌아가 모두 용서받고 죄씻음받고 마음으로부터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정치체제가 바뀌고 경제가 좋아지고 지도자가 바뀐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탄식하는 세상의 치유자입니다. 우리는 그를 19절 고대합니다. 23절, 기다립니다. 25절, 바라고 참고 기다립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를 기다립니다. 모든 나라와 족속이 그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탄식을 오래 듣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탄식과 상처를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꾸십니다. 탄식을 바꾸십니다.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을 좋아합니까? 여기서 “합력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 “쉰에르게오”(synergeo)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 쓰는 단어 “시너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은 우리의 눈에 안되는 것 같은 데 하나님이 역전시킨다는 말입니다. 안되는 것이 결과적으로 잘 되는 것이라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고통과 상처가운데 있는 개인과 민족을 역전시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고 안되는 일이 많은 곳에 되는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가진 찬송가중 가장 많이 찬송가를 지은 분이 있습니다. 크로스비여사입니다. 그런데 크로스는 우리처럼 건강한 분이 아닙니다. 의사의 오진으로 태어난 지 6주만에 완전히 눈이 멀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너무 고통스러웠으나 어린 딸을 위로하면서, 하나님이 그의 자녀에게 시각이나 청각을 주시지 않았다면 반드시 다른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크러스비는 이 말을 듣고 자라 어려서부터 탁월한 기억력을 갖게 되었고 많은 성경을 암송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찬송의 영감이 터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찬송과 복음성가들을 쏟아져 나왔습니다. 1903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의사는 내가 시력을 잃어버린 이후 늘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내 눈을 멀게 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그에게 하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눈이 먼 것이 그의 과실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실수는 결코 아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평생 육신의 흑암 속에서 살더라도 이를 통해 그를 찬미하는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그ㅜ리고 다른 사람을 자극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게 하려고 나를 눈 멀게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신앙고백으로 쓴 찬양중의 하나가 “나의 갈길 다가도록 “입니다. ”나의 길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 믿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자세히 이 찬양을 음미해보면 하나님이 맹인 크로스비에게 어떤 믿음과 확신을 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눈이 먼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수많은 위대한 찬송가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합력해서 선을 만드신 하나님”.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나라나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그 민족이 가장 힘들고 고난당할 때 그 민족에 복음이 들어가게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선교역사가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올 때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19세기 말, 이 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올 때는 민족의 역사상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대였습니다. 갑신정변, 동학란으로 민중혁명이 일어나고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청일전쟁으로 전국이 강대국의 전장터가 된 지 얼마안돼 또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고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더니 마침내 1910년 한일합방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일본 자객에 의해 국모가 살해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민심이 어지럽고 러시아, 일본등 강대국에 의해 민족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이 나라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복음은 가장 어려운 시대에 들어와서 가장 어려운 시대를 통과합니다. 1930-40년 신사참배, 1945년 해방과 혼란, 1950년 6.25전쟁, 1970년대 인권탄압의 시대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안된다고 말할 때 우리가 가장 힘들고 탄식할 때, 우리 속에 들어와 “악을 선으로 바꾸고, 상처를 별로 바꾸고, 탄식을 소망으로 바꾼 능력, 그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계적으로 부흥하는 민족과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고난을 많이 겪는 나라에 가장 위대한 복음이 들어갑니다. 남미의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이들은 오랜 군부독재에 눌려 살기 힘든 나라였습니다. 그 속에 복음이 들어가 악을 선으로 바꿨습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오랜 세월, 공산주의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가난속에 헤매던 나라, 복음이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에게 희망이 되고 정신적 좌표가 되었습니다. 중국, 죽의 장막으로, 문화혁명으로 무자비한 공산주의 탄압으로 그나마 있던 기독교 마저 철저히 말살했던 중국, 그렇다면 중국의 교회는 진즉 무너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중국교회는 세계 제1의 교회로 계속해서 부흥되고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탄식속에 들어가 탄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절망을 희망으로, 죄를 의로, 안된다는 된다로, 할 수 없다를 할 수 있다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킬링필드 캄보디아에도, 베트남에도 역사하하셔서 그 민족을 살리시고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그러나 공산주의 정부 정책이 기독교 부흥의 기초를 닦아 놓은 것들을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많은 중국의 우상이 문화혁명 때 사라졌다. 수천 개의 사찰과 우상들이 부숴져 수억 명의 사람들 가슴 속에 영적인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2. 정부가 대대적으로 하나님을 없애고 초자연적 존재를 부인하는 정책을 펼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하나님의 실체와 기적을 인격적으로 체험했고 대중 회심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3. 기찻길과 도로와 비행장이 건설되어 전도자들이 이전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지역에도 쉽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4. 표준 중국어(만다린어)가 공식 언어로 채택되어 지금 모든 교육 기관과 미디어에 사용되고 있다. 이전에는 수천 가지의 방언을 사용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5. 대규모의 문맹 타파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6. 방송을 통제함으로써 출판된 글에 대한 갈망과 경외심을 불어넣었다. 기독교 단체들은 이것을 잘 이용하여 수천만 권의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출판하는 한편, 라디오 방송 사역자들은 단파 라디오를 통해 복음을 신속하게 방송했다. 중국의 수백만 그리스도인들은 라디오 사역을 통해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7. 문화혁명 때의 습관을 따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비행을 비판하고 자신의 삶을 개혁해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백 문화는 사람들이 복음을 접했을 때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쉽게 회개하고 고백하게 해 주었다.
롬8:18-25, 28 2010.7.11(일)
탄식을 넘어 소망으로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롬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으라”.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마는 나 여호아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자.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나의 길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 믿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