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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대인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알렉산더는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의 전도자였다. 알렉산더는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뭄, 두라 등과 같은 도시들을 통하여 헬레니즘을 퍼뜨렸다. 아름다운 공회당, 신체수련을 위한 연무장, 노천극장 등이 세워졌다. 헬레니즘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유혹했다. 바벨론 유수 이전의 유대인들이 가나안 인들의 우상숭배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다면, 바벨론 유수 이후의 유대인들은 헬레니즘의 유혹에 노출되었다.
바벨론 유수 이후에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정착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지역, 안디옥, 다마스커스, 소아시아에서 대규모의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충성스러웠다.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들은 성전세를 냈고, 가능하면 성지 순례를 했다.
그러면서도 이웃의 문화에 감염되어 있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유대교 신앙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양식에 동화되고자 하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유대교와 헬레니즘 사이의 종합이 발전하였다.
a. 70인역. 알렉산드리아 유대교의 가장 큰 업적은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잊어 버린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번역했다. 주전250년경 토라번역을 필두로 하여 나머지 정경들과 외경도 번역되었다.
오리겐 시대에 이르러서 이 역본은 70인역(Septuagint)라고 명명되었다. 주전100년경에 기록된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는 문헌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사서인 팔레룸의 데메트리우스의 제안에 따라서 프톨레미 필라델푸스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사절을 보내어 12지파에서 6명씩 선출하여 번역사로 보내도록 부탁했고 이 부탁에 따라서 72장로들이 알렉산드리아로 파송되어 번역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70인역의 어투는 애굽에 있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70인역은 비유대인들과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소식을 전해 주었고, 특히 사도 바울과 그 외의 사도들의 사역을 수월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신약성경이 인용하는 대부분은 70인역세ㅓ 나온 것이다.
b. 알렉산드리아 비유법.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그리스사상과 조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했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가 저속하고 불충분한 것일 때는 숨어 있는 속 뜻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속 뜻을 찾는 방법으로서 그리스의 비유법을 받아 들였다.
그리스에서는 호머와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과 같은 고전들이 세련된 그리스인들이 받아 들일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들은 종교적인 고전들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고전들을 보존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야기들을 역사적인 이야기들로 받아 들일 수는 없지만 정신적 가치의 투쟁을 예증하는 것으로는 받아 들일 수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제우스는 로고스로, 헤르메스는 이성을 예증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주전160년경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는 그리스철학자들이 모세의 율법에서 실제로 많은 사상을 빌려 왔다고 가르침으로써 비유적 해석의 기치를 들기 시작했다. 이어서 주전20년경부터 주후50년경까지 살았던 필로(Philo)는 그리스사상에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으나 모세를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간주했다. 필로는 진리가 언제나 비유적인 해석을 사용하여 발견된다고 생각했다. 비유적인 해석은 완전히 주관적인 해석이었다.
a.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가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것일 경우나 이성에 거스리는 것일 경우에는 모두 비유적으로 해석되었다.
b. 하나님에 관한 언급 중에서 인성을 의미하는 것은 모두 비유적으로 해석되었다.
c. 아브라함의 팔레스타인 여행은 한 스토아철학자가 감각적인 이해(갈대아)를 떠나서 곤경 또는 감각들(하란)에서 잠시 머무른 것으로 해석되었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결혼은 철학자와 추상적인 지혜의 결혼으로 생각되었다.
d. 반복귀절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e. 70인역에 사용된 단어는 그리스어에 들어있는 모든 의미에 의하여 해석될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비유해석법과는 대조적으로 모프수에스티아의 데오도르와 같은 저술가를 포함한 안디옥의 시리아 학파는 문자적인 성경해석을 주장하였다.
팔레스타인지역에서도 강력한 헬레니즘 지지당이 등장했지만, 헬레니즘을 유대교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 들인 반대당도 등장했다. 특히 하시딤은 죽음으로써 조상의 신앙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6.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탄압은 하시딤의 거센 저항의 기폭제가 되었다. 모딘(Modin)이라는 이름없는 작은 마을에 안티오쿠스의 사자들이 이방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 제단 앞에 나와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 마을의 노 제사장인 마티디아스에게 제일 먼저 단에 나와 본을 보이라고 요구했으나 마티디아스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
일부 겁많은 유대인들이 제단에 나아가자 마티디아스는 격분하여 배교자들과 안티오쿠스의 사절을 죽여 버렸다. 마티디아스는 다섯명의 아들과 함께 이방신 제단을 파괴하고 산으로 도망하여 안티오쿠스의 보복을 피했다. 일부 유대인들에 이에 합세했다. 이들은 게릴라 전술로써 마을을 습격하여 왕의 관리들과 헬라니즘에 물든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반란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티디아스는 사망하고 마카비라고 불리우는 셋째 아들 유다가 마티디아스의 지명에 따라 후계자로 선정되었다. 마카비 휘하의 유대인들은 게릴라전에서 연승을 거두면서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마카비는 자신들을 소규모의 실랑이 정도로 간주하여 가볍게 대처한 시리아군을 연파했다.
특히 마카비는 안티오쿠스가 파견한 리시아스 장군 휘하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거대한 전리품을 차지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확보한 마카비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가 메네라우스 일당을 쫓아내고 아크라라는 보루를 제외하고는 성전 안의 모든 이교도의 흔적을 제거했다.
리시아스는 다시 군대를 규합하여 예루살렘 근처에서 마카비군을 패퇴시켰고, 마카비군대를 굶어 죽일 목적으로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러나 리시아스는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이 위험하다는 전갈을 받고 북행하려는 목적으로 유대인들에게 화해를 요청했다. 리시아스는 내정간섭을 중지하고 유대교의 의식을 억압하는 법의 폐기를 약속하고 메네라우스의 직책을 박탈할 것과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할 것을 약속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 회의는 투표를 통하여 리시아스의 강화조약을 받아 들였고, 마카비의 추종자들은 우려하면서 예루살렘을 떠났다. 마카비의 우려대로 알키무스는 대제사장이 되자 수많은 하시딤을 체포하여 처벌했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다시 유다스에게 돌아와서 독립전쟁을 재개했다.
알키무스가 시리아에 원조를 요청했을 때 많은 병력이 파견되었고, 헬레니즘에 물든 많은 유대인들을 설득해 놓은 상태였다. 800명밖에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린 마카비는 대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마카비 유다스는 전사했고, 이로써 제1차 마카비 전쟁은 끝이 났다.
7. 마카비 유다스의 형제들인 시몬, 요나단, 요하난은 수백명의 마카비 군사를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도피했다. 이들의 지도자는 요나단이 맡았다. 알렉산더 발라스가 시리아 왕위를 요구하자 발라스와 데메트리우스2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때 요나단의 군대가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었다.
양 진영은 모두 요나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요나단은 요청을 금방 들어주지 않고 끌다가 발라스를 지지하고 스파르타 및 로마와 조약을 체결했다. 요나단은 대제사장과 유다의 통치자가 되었고 시몬은 팔레스타인 해안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
요나단이 시리아 장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자 시몬이 뒤를 이어 통치했다. 시리아는 다시 둘로 분열되어 한 파는 데메트리우스2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다른 한 파는 안티오쿠스6세를 지원한 트리폰의 일파였다. 마침내 트리폰이 직접 왕권을 장악함으로써 갈등상태는 해결되었다. 시몬은 트리폰을 인정하지 않고 데메트리우스2세를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원래 합법적인 대제사장 가문은 오니아스가였는데, 오니아스가는 투쟁 기간동안 애굽으로 내려가 제사장직을 주장할 권리를 상실했다. 이스라엘 지도자 회의는 시몬의 지혜로운 통치를 인정했다. 이 결정으로 하스몬왕조가 탄생했다. 주전134년에 시몬과 두 아들이 사위에게 살해당하자 셋째 아들인 요한 히르카누스가 간신히 피신하여 유대국의 세습왕으로서 아버지를 계승했다. 마티디아스의 아들들이 사망한 것과 더불어 마카비투쟁의 영웅시대는 끝이 났다.
8. 시몬의 사위들의 살육을 간신히 모면한 시몬의 셋째 아들 히르카누스는 시리아에 충성을 서약하고 왕을 인허받았다(주전134-104). 히르카누스 정부의 등장과 함께 헬라주의자들은 불신임을 받고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헬라주의자들의 이념은 사두개파라는 형태로 전수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하시딤의 이념은 바리새파에게 전수되었다. 이 시기부터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에 대한 언명이 등장한다.
히르카누스는 영토확장정책을 시작했다. 시리아에게 양도했던 팔레스타인 해안도시들을 재정복하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무역로가 있던 에돔 곧 이두메도 정복했다. 이두메인들에게는 할례를 행하게 하고 유대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히르카누스의 영토확장정책은 새로운 상업기회들이 생겨서 부를 증대할 기회를 맞이한 부자와 귀족들에게는 환경받은 반면에, 일반 대중들은 영토가 확장되는 것과 더불어 세속주의가 팽배하여 대제사장직책까지도 돈을 받고 파는 성직매매가 나타나는 것과 전쟁 때문에 인명이 희생되는 것 때문에 반대했다.
히르카누스는 하시딤출신이었기 때문에 서기관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반면에 그의 자녀들은 왕족이라는 교만함과 히브리사상 보다는 헬라사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경멸했다.
히르카누스가 죽자 곧 왕권투쟁이 일어났다. 유다라는 히브리 이름 보다는 아리스토불루스라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더 좋아했던 히르카누스의 장자는 왕권투쟁에서 승리한 후에 세 명의 형제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세 명 중 두 명은 감옥에서 굶어 죽고, 투옥되지 않았던 다른 한 명은 왕궁에서 살해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는 음주, 질병, 반란에 대한 공포 등으로 왕이 된지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주전103).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자 감옥안에서 살아남은 형제인 요나단, 그리스 이름으로는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이 되었다(주전102-76).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영토확장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팔레스타인 본토 전체와 애굽의 국경, 베뢰아, 아스글론, 팔레스타인 해안평야까지 점령했다.
히르카누스때부터 시작된 하스몬왕가출신 통치자들과 바리새인들과의 불화는 얀네우스때 절정에 달했다. 얀네우스는 외국의 보병들을 이용하여 바리새인들을 복종시켰다. 얀네우스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멸감을 표시하기 위하여 땅에 붓도록 되어 있던 헌주를 자기 발에다 부었다.
얀네우스는 이 광경을 보고 거칠게 항의하는 바리새인들 수백명을 학살했다. 이로 인하여 내란이 발생. 바리새인들은 시리아 왕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이상한 동맹이 맺어진 것이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바리새파의 선조들이 핫시딤의 원수였었다. 이 점이 불안했던 바리새인들은 신중히 생각한 끝에 생각을 바꾸어서 오히려 얀네우스편에 서서 시리아군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러나 얀네우스는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패배자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마침내 얀네우스는 바리새파 중에서 자기에게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을 찾아내서 무섭게 징계했고, 사두개인들과 함께 연회를 베푸는 사이에 800명의 바리새인들을 찾아내어 연회석상에서 십자가에 매달았다. 이후부터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이에서의 타협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해사본은 얀네우스를 사악한 제사장으로 호칭했다. 얀네우스는 임종직전에 회개한 것으로 전해진다.
얀네우스의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아리스토불루스와 결혼했다가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자 알렉산더 얀네우스와 재혼했다. 알렉산드라는 70세의 나이로 여왕으로서 왕위를 계승했다. 알렉산드라의 임종이 다가오자 바리새인들은 장자인 히르카누스2세를 지지했고, 사두개인들은 차남인 아리스토불루스2세를 지지했다. 알렉산드라가 죽자 알렉산드라의 두 아들을 둘러싸고 다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장자인 히르카누스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정치적 수완도 없고 왕위에 관심도 없었던 히르카누스2세는 아리스토불루스2세에게 왕위를 양도해 버렸다. 이때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기도 했으나, 이 우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깨질 위험에 처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히르카누스2세는 이두메의 통치자 안티파터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레타스가 이끄는 나바테아의 아랍군의 도움을 빌려서 왕위를 되찾으려고 했다. 마침내 아레타스와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장기전에 들어갔다.
9. 한편 서방에서 새로운 신흥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로마는 주전146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의 지휘 하에 한니발 장군이 거느린 카르타고군과 벌인 포에니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마케도니아, 고린도, 아가야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중이었다. 주전133년에는 페르가뭄의 왕 앗타루스가 영토를 로마인들에게 양도했다.
로마의 장군 폼페이는 아리스토불루스2세와 히르카누스2세간에 벌어진 왕권다툼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아리스토불루스가 로마에 반역하기 위하여 꾸민 증거를 알아낸 폼페이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히르카누스를 지원하여 예루살렘을 장악했다. 이 전투에서 유대인들 12000명이 학살되었다.
폼페이는 장교들을 데리고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갔는데 이 행위가 유대인들을 분개시켰다. 그러나 폼페이는 성전기물에는 손대지 않았고 성전제사도 허용했다. 아리스토불루스가 패배하면서 유다는 로마의 시리아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히르카누스는 폼페이에게 충성한 댓가로 갈릴리와 이두메, 베뢰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대제사장직도 승인받았다. 일년에 한번 로마에 조공을 바쳤다. 아리스토불루스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