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을 '합리'에 갇힌 사람으로 살았다. 공부를 할 때,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 축구를 할 때, 영화를 볼 때 등
위와 같은 모든 일상적 순간을 마주하기 전에 미리 수립된 완벽한(적어도 완벽에 가까운) 계획이 내 앞에 제시되어 있지 않으면 몹시 불안했다.
그런 나에게 인생에 있어 절대 잊을 수 없는,
직관이 선사한, 나는 이 순간을 기적이라 부르고 싶다. 그 순간은 다음과 같다.
동생이 2018년도 2학기 UC버클리 교환학생으로 선정(결과가 나온 날이 2018년 3월 중순~말 정도로 기억된다)되었는데, 자기가 집에 돌아올 때는 퍼스트 클래스 좌석을 타고 싶다며,
그 좌석으로 티켓을 예매를 하려면 남은 마일리지가 제주도를 왕복할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며 나에게 제주도를 갔다 올 것을 종용 및 명령(?)했다.
처음엔 무조건 반대했다. 나는 아무리 국내여행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2달 전에 숙소를 미리 예약하고, 맛집을 미리 알아보고, 이동수단을 미리 알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철저히 합리에 종속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작년엔 우리 과 학생회 부회장으로 일을 할 때라 그 후에 바로 연합엠티를 떠나야 해서 선뜻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내 동생은 나에게 끊임없이 요청했고, 부모님께서도 다녀오실 상황이 아니라 결국 일단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 승낙을 한 날은 3월 마지막 주로 기억한다. 여행을 가기 7일 전이었다.
야속하게도, 심지어 내 마음대로 가는 날짜와 오는 날짜를 정할 수도 없었다. 덧붙여, 가야 하는 시간과 와야 하는 시간도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4월 2일 저녁 출발 ~4월 4일 저녁 돌아오는 것으로 일단 나의 첫 나홀로 여행 및 비자발적 여행이 정해졌다.

<출발하기 직전, 김포공항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름 제주도 상징인 귤룩(?)으로 색깔을 맞춰보고자 노력을 했다. 유감스럽게도, 저 옷은 4월 2일 출발 당일날 후문 모X X이에서 샀다..자발적인 여행의 형태가 아니라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음이 표정에 드러난다. 원래 사진 찍을 땐 무조건 V 또는 엄지척을 취하는 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찍었다는 건 엄청난 변화다. 지금 다시 보니 찍어주신 분이 꽤 잘 찍어주신 것 같다.>
도착하자마자 제주공항에서 가까운 동문시장 쪽 어느 게스트하우스로 숙소를 정했다. 나홀로여행의 초심자에게 깃든 행복(?)이었을까. 숙소에 짐을 풀고, 잠을 청하려는데, 도통 시끌벅적한 소리에 잠을 잘 수 없어 밖으로 조금 걸어가다보니 동문시장에서 야시장이 한창이었다.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던 차에, 맛있게 즐겼다. 그저그런 야시장이 아니었다. 적어도 축제 때 오는 푸드트럭들을 합친 것들보다 많고, 제주도에서만 즐길 수 있는 음식들을 활용한 먹거리가 많았다.

<면허를 2013년에 따고, 한 번도 제대로 운전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이동을 하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렌트를 하거나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스쿠터를 빌려야 했다. 뭔가 면허를 가지고 있긴 했어도 실제 차 운전은 좀 부담이 됐다. 차선으로 결정한 것이 바로 스쿠터다. 스쿠터 사장님께서 자전거를 잘 타면 스쿠터도 분명 잘 탈 거라고 격려(?)해주신 덕분에, 연습주행 30분을 마친 후 스쿠터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스쿠터를 탈 때부터 찍은 사진들의 표정은 다 밝았다. 그렇게 쌀쌀하지도 않고 딱 스쿠터 타기 좋은 제주도의 4월 날씨였다. 시속 50~60 정도까지 달릴 수 있어서 뭔가 다음 날까지 제주도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뿜뿜 들었다.>

<4.3사건 제70주기 추념식 현장에서 추모사를 낭독하는 문재인 대통령>
그 날은 4.3사건 70주기이자 나의 여행 두 번째 날이었다. 사실 그저 한국사를 공부하거나 가끔 기사로만 접했던(제대로 배운 적은 없었다) 그 날의 아픔에 대해 나는 무지했다. 어찌보면 여행을 가고자 마음을 굳게 먹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좀더 4.3사건에 대해 알고 싶고,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고 싶었다. 바로 스쿠터를 놔두고, 4.3평화공원기념관으로 택시를 이용해 갔다. 기념관으로 가는 길은 스쿠터가 이용하기 어려운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약 한 시간 정도가 걸려 도착해 추념식이 진행되기 전, 기념관 여러 곳에 가 4.3사건의 참상 및 그 이후, 현재를 알게 되었다. 아직 제주도는 4.3에서 다 낫지 않았다고 한다. 명백하게, 가감없이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리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민간인 분들에 대한 적절한 조치도 충분히 이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주4.3평화공원기념관 정문에서 찍은 사진>
제주도 분들의 아픔을 뒤로 한 채, 다시 숙소로 돌아와 스쿠터를 타고 성산일출봉을 목적지 삼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살면서 제주도를 20번 이상 갔다고 부모님께서 말씀해주셨는데, 당최 성산일출봉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더욱이 제주도의 상징과도 같은 성산일출봉을 가지 않고선 제주도 여행을 했다 할 수 없기 때문에 꼭 들러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갔다.

<일출봉 정상까지 오르고 나서(되게 높은 줄 알았지만 해발 180M밖에 안 된다고 한다..ㅎㅎ)> 여기에 오르자마자 감격에 겨워 원래 사는 집이 제주도인 후배에게 바로 영상 통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뜻밖에 오히려 또 가야 할 제주도 명소를 추천을 해줬다. 그게 바로 우도였다.

<일출봉에서 한 컷>
정말 예뻤다. 왜 사람들이 성산일출봉, 성산 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해발 180M밖에 안 되는데, 당시 오를 땐 꽤 힘들었던 기억이다. 그동안 수없이 수학여행이나 가족여행으로 제주도에 왔더라도 정상까지 가보진 않았던 차에, '무조건 이번엔 가자'라는 내 직관 덕분에 제주도를 한 눈에 담는 진귀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제주도를 갈 때마다, 나는 성산일출봉만큼은 꼭 매번 가고 싶다. 괜히 호기로워지는 상쾌하고 멋진 장소다.

<우도 감성 돈까스 맛집 온x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이 집 땅콩라떼 잘 하네)>
친구에게 정보를 얻어 성산항에서 우도까지 배를 타고(약 20분 정도 소요)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우도가 정말 대박이다. 우도 역시 아버지께서 같이 여행가본 적이 있다 하셨는데 전혀 기억이..
솔직히 제주도보다 우도였다. 몇 분들은 공감하실 거라 믿는다..해변이 그냥 호주 골드코스트 뺨친다. 그리고 모래가 그렇게나 부드럽고 곱다.

<우도 서빈백사에서 찍은 자그마한 돌들 너무 예쁘다ㅠ>
이렇게 나의 첫 나홀로 제주도 여행을 마쳤다. 인스타에도 올렸지만, 다시 한번 적어본다. 최갑수 여행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여행은 언제나 부족했고 사랑은 언제나 목말랐다. 사랑이 그랬던 것처럼, 여행 역시 넘쳤던 적은 없었다. 구원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떠나야 했다. 떠난다는 행위 그 자체가 어차피 구원이었기 때문이다."
혼자 여행을 떠나기 전까진 합리가 걱정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나를 저울질 했다.
하지만 직관이 나에게 준 '용기'는 결심을 내린 것에 대한 보답을 주었다.
돌아온 지 1년이 넘었는데도, 그리고 올해 교생을 나가기 전 한 번 더 제주도에 다녀왔는데도,
작년의 그 느낌은 도통 잊을 수가 없다.
너무나 소중한 추억을 선사해준 '나의 직관'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이제 조금 더 '직관'적으로 살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