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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미래로 흘러가지 못하고 과거에 묶여있는 사람들
■ 성경에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새 부대는 어떤 것을 의미하나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가끔 곡해돼서 악용되기도 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제거하려 할 때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삶의 방식에 대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사람의 삶의 상태는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거나 하지, 정지한 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에 띄운 배와도 같은 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여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내디디질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사에 매달려서 사는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을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행위가 역설적으로 지금의 고통을 경감시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강박적 회상의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거의 손실에 대한 회상 - 신체적·정신적 긴장 고양 - 욕구 좌절과 무기력 - 눈물을 흘리면서 긴장 방출 - 무감각한 상태에서 잠시의 평온함을 체험’
이런 과정에 익숙해지면 과거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과거에 매여 있으면 현재의 삶이 방향성을 잃게 되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피곤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사는 흘려보내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정치제도적인 것입니다. 인류의 생존은 끊임없는 생각과 그 생각을 실행해나가는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를 통해 이뤄져 왔습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고 구태의연한 나라들은 역사 안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간혹 새로운 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면서 구관이 명관이란 식으로 과거지향적인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과거에 실패한 것들을 다시 사용하려고까지 합니다.
이들은 언어조차 오래전 폐기된 것들을 다시 사용합니다. 새로운 언어가 아닌 구닥다리 언어와 사고방식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그 나라를 퇴행하게 하는 것인데도 새로운 공부를 하지 않는 무지함으로 인해 과거로, 심지어 왕조시대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국가성장의 걸림돌입니다.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해묵은 논쟁을 해왔습니다. 빨갱이 논쟁. 신상털이용 피 냄새가 나는 용어,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게 한 용어인데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런 퇴행적이고 극단적이고 적대적인 용어들은 그 나라를 성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몰하게 합니다. 극단적이고 잔인한 용어는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쓰게 되는데 이것은 사람을 괴물로 만듭니다. 역사상 수없이 많은 학살극이 극단적인 언어에서 비롯됐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2000년 전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볼 시간입니다.
■ 마태 9,14-17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8) 나의 믿음?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절망에 묶인 우릴 구해줍니다
■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종종 하시는데,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요?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주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복음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말씀과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보통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시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하시니 영성심리학자들은 주님께서 심리치료 원리를 아시는 분이라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심리치료에서 강조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힘든 일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외적 원인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생기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잘 안 됐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비난합니다.
“내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면서. 심지어 자신을 학대하기조차 합니다. 스스로 잠을 안 재우고 술을 퍼 먹이고 심지어 마약을 집어넣기도 합니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에도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보다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 밑에서 몸종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그 삶이 궁상맞기 이를 데 없고 시간이 갈수록 나락으로 굴러 떨어집니다. 이런 분들은 이 복음에 나오는 여인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그런 병에 걸렸는지는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병을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진 벌이라거나 자신의 팔자인양 하지 않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그 당시에는 병을 얻으면 하느님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쳐다보지조차 않으시는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까지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서 자아를 조이는 병적인 생각과도 싸워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인의 행동을 보면서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십니다. 이 여인이 자기를 학대하거나 팔자 탓을 하지 않고, 또 무기력한 삶을 살지 않고 적극적으로 삶의 의지를 보인 것에 대해 감동과 감탄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자아가 위축되면서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하거나 “내 팔자가 기구해서 이런 병을 얻는구나” 하면서 한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방정맞은 생각이 마음 안에서 널뛰기를 하면서 자아를 흔들어댈 때 복음의 이 부분을 묵상하고 여인의 모습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소리치면 사람들이 바라봅니다. 힘들 때 주님이 나를 바라보지 않는 듯이 여겨질 때 이 여인처럼 과감하게 주님께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 마태 9,20-22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39) 친구
때론 험난한 인생길… 함께 걸어갈 친구가 있나요
■ 저는 개인적으로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편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럿이 함께, 혹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것에도 이유가 있을까요?
주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병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주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의 믿음뿐만 아니라 이들의 우정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가 있다는 것은 마음이 허물어지는 것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약해서 자신만이 어려운 일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짐이 더 무겁게 느껴지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리고 깊은 외로움 때문에 마음이 병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 어려움은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상당 부분 해소가 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적지 않은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큰 어려움인데 이들이 버티며 살아온 것, 주님께 함께 가서 청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두 사람의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친구를 가지면 좋은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갖거나 우월감을 갖게 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만큼 잘 지낸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친구를 가지는 것에도 유념해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친구는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처지가 비슷해야 서로간의 공감대가 생기고 대화가 원활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인생길의 동반자입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늘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험한 길도 있는데, 이런 때 옆에 사람이 있으면 덜 불안합니다.
우리들의 인생길도 행복 구간과 불행 구간으로 구성돼 있는데, 불행 구간 길을 갈 때 내 옆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으면 그 길을 끝까지 가는데 아주 큰 힘이 됩니다. 그래서 좋은 친구는 금은보화 이상으로 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서도 친구가 많은 사람들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낮다고 합니다. 우리 뇌에는 해마라는 기억신경조직이 있는데 이 해마는 친구들과의 담소를 나누면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치매에 걸린 분들 중 상당수가 친구 없이 사는 분들임을 감안하면 친구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 마태 9, 27-31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40) 마귀란?부정적 메시지 속삭이는 마귀들이 불안을 만듭니다
■ 성경에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화가 많이 등장하는데, 마귀는 정말로 있는 것일까요?
오래전에는 이상한 말을 하고 다중적인 인격상태를 보이고 성수를 싫어하고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면 무조건 “마귀가 들렸다”고 했습니다. 중세에는 이상한 꿈만 꾸어도 마녀로 몰아서 화형을 했습니다.
심지어 현대에 와서도 일부 종교에서 구마를 한다고 환자를 구타해서 죽게 만드는 일이 생기자 사람들은 마귀 운운하는 사람들을 정신병자 취급하고, 마귀란 종교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도 마귀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죄의 길로 끌어가려는 어두운 힘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현대 심리학자들 중에서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신과의 스캇펙 박사는 저서 「거짓의 사람들」에서 자기마음을 들여다보길 완고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을 ‘거짓의 사람들’이라고 지칭하고 이들이 어두운 힘, 악에 휘둘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들린 사람들의 증세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가장 큰 것은 정신적 상실감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해서 더 이상의 성장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이 사용하는 방어기제 중에 고착과 퇴행이란 것이 있습니다. 고착이란 더 이상 성장하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퇴행이란 유치한 어린 아이같은 상태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성장하려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가지 방어기제 모두 외부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것이 지나칠 경우 악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삶에 대한 주인의식을 상실하게 합니다. 주인의식이란 자신이 겪는 모든 일들이 자신을 성장하게 해주는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런 주인의식은 가리는 마음 없이 사람을 만나게 하고 주어진 환경을 감수하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늘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의 세력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늘 불안하게 흔들어댑니다. 비존재로 존재하면서 사람들 마음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온갖 재수 없는 소리들을 지껄여대서 사람들이 복음에 나오는 무덤가를 헤매는 사람처럼 살게 만듭니다.
세 번째, 분노를 극대화시켜서 적대감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살해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래서 영성심리에서는 연쇄살인범들이나 르완다 대학살 같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그들이 악령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문명화돼서 마귀는 오래 전의 허구적 이야기라고 치부하려고 합니다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귀 악령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 마태 9,32-34
그들이 나간 뒤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41) 일꾼
타인 위해 봉사하는 분들, 여러분 마음은 안녕한가요
■ 예수님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하시는데, 최근에는 봉사할 때 여러 가지 면에서 마음이 좀 불편하고 지친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어떻게 해야 지치지 않고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을까요?
복음에서 말하는 일꾼이란 봉사자를 의미합니다. 봉사자들은 교회의 기둥이자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일하는 사회의 백혈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한 나라의 건강성은 마음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렸다고 할 정도로 봉사자들의 사회적 존재의미는 크고 중요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사람들이기에 지켜야할 수칙들도 적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관리를 잘하는 것입니다. 봉사한다면서 자기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초기에는 견딜 만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자신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것을 탈진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이 증세는 망가진 배를 타고 노를 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대개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순종적이어서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 주위 어른들의 부추김에 의해서 지나치게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세입니다. 이들은 자기생각이 없어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입니다.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순명의 삶을 살아가면서 내면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이들의 내면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너는 너 자신으로서는 이 세상에 설 땅이 없다. 너는 바뀌어야 한다. 네가 네 자신으로 남아있으면 아무도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만성적 욕구 억제를 하면서 사는데 이것은 감정차단과 감정정체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하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이 병이 들면 주변 어떤 사람들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주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안겨준다는 것입니다.
대개 쉬지 않고 봉사하는 사람들은 병적인 콤플렉스를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쉬는 시간을 게으름 피우는 시간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으로 이런 사람들에게는 쉬는 시간이 아주 중요합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쉼의 시간을 가져야 지쳐가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인가”하고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 기쁘기도 하지만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짜 나를 앞세우는 것인데 만들어진 나에 익숙해질수록 내적인 공허감이 커져가기에 자기 자신을 아는 작업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보는 분들에게 질문 하나 드립니다. “내가 나를 평가할 때 나의 점수는 몇 점이나 될까?”하는 질문. 점수가 60점 이하로 내려가면 상담을 받으실 필요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마태 9,35-38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42) 그리스도의 제자들
어느 편에 서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 모든 신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들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복음의 이 부분에서 열두제자의 이름이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가톨릭교회의 첫 사도들인 열두제자.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열두제자를 따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가? 여러 가지 답들이 있지만 영성심리에서는 집단 안에서 휩쓸리지 않고 자기 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런 점을 강조하는가? 1960년대 초 MIT대학원생인 제임스 스토너는 위험감수라는 문제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집단이 내린 결정은 개인이 내린 결정보다 위험수위가 높다는 것입니다. 집단은 사람들의 의견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어서 혼자서 결정할 때보다 더 극단적인 결정을 조장합니다. 집단에 속한 개인들의 성향이 비슷할 때 최종결정을 극단적으로 할 위험이 크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종편견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으면 인종문제가 얽힌 문제에 대해 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적·정치적으로 과격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 자신도 갈수록 과격해지고 폭력적인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자신과 같은 의견이나 태도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기존의 생각이 더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렴풋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공공연하게 표현하게 됩니다.
집단은 개인에 비해 독단적·비합리적 행동을 정당화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도덕적인 것으로 여기며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틀에 박힌 견해를 형성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게다가 의지가 강한 사람, 소리가 큰 사람이 집단의 토론을 이끌면 다른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해 동조하게 만들고 만장일치라
환상을 조작해냅니다.
이런 병적인 집단화를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 제자로서의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당대 사람들을 집단화해서 정신적 고문을 하는 것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막으려고 애쓰신 분이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집단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로 양편으로 나뉘어서 ‘빨갱이’, ‘친일파’라고 서로를 매도하며 설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집단화 현상은 내전 내지는 대량학살의 조짐으로 번질 가능성이 큽니다.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이 땅이 피로 얼룩지지 않게 최선을 다해 집단주의를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것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시길 바랍니다.
■ 마태 10,1-4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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