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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수 목사
아가서는 성경 66권 중 매우 특이한 책입니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야하기까지 한 에로스적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늘 논란 거리였습니다. 우선 ‘과연 아가서를 성경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즉 정경성의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아가서를 정경으로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즉 해석에 관한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이 아가서를 성경 66권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책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가서는 이중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직접적인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사랑이라는 유비적인 해석입니다.
우리는 아가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기쁨에 관해서 몇 가지를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이 놀라운 사랑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 그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 그 안에서 맛보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을 점입니다. 이 사랑의 기쁨을 맛보며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결혼식에 참여했다가 민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축가를 부르는 분이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이란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장 폴 마르티니가 작곡한 가곡입니다. 그런데 전설적인 샹송 가수 에디뜨 피아프와 지금도 활약하고 있는 나나무스꾸리가 불러서 샹송처럼 알려진 노래입니다. 그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사라진 별이여 영원한 사랑이여 눈물에 은하수 건너서 만나리
그대여 내 사랑 어디서 나를 보나 잡힌듯 멀어진 무지개 꿈인가.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사실 제목이 사랑의 기쁨이지 내용은 사랑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결혼식에 와서는 사랑의 아픔을 축가랍시고 부르니 얼마나 민망합니까?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아닐까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이 우리 인간이 겪는 사랑의 참 모습입니다. 사랑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맛보려 사랑을 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픔이요 맛보는 것은 슬픔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며 눈물짓고, 사랑하며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본문 아가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참다운 사랑을 하게 되고, 그 참다운 사랑 안에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축가로 그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사랑의 기쁨
아가서는 표면적으로는 두 건강한 남녀 연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시적인 대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두 연인이 주고받는 사랑의 고백 안에 저들이 맛보는 불같은 사랑의 기쁨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기쁨
아가서는 어찌 보면 충격적인 고백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바로 여자가 먼저 사랑을 고백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3000년 전 이야기입니다. 당시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던 때이고, 남자가 쉽게 여자를 버릴 수 있던 때입니다. 이럴 때 여자가 먼저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 고백도 얼마나 적극적인지 모릅니다. 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 구나” 한 마디로 키스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아가서는 왜 이런 충격적인 여인의 사랑고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기쁨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당시 일반 여인들처럼 사랑 받기를 고대하고 기다리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에 큰 기쁨이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고 나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맛보며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일전에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아사모”란 모임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둔 남편들의 모임입니다. 이 모임에는 머리가 희긋희긋한 60대 남편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분은 8년 또 어떤 분은 10년이 넘게 치매로 점점 퇴행되어가는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아온 분들입니다.
아내는 외모는 벌써 다 망가질 대로 망가졌습니다. 곁에서 돌봐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난처하게 만들고 짜증나게 만듭니다. 자기를 보고 “누구세요?”할 때는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직장도 퇴직한 채 다 버리고 오로지 아내 뒷바라지에 헌신합니다.
어떻게 10년씩이나 그렇게 아내 곁을 지킬 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생뚱맞은 대답을 합니다. “내 아내는 예쁜 치매에 걸려서 사랑스럽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도대체 뭐가 예쁘냐고 묻습니다. “아내는 점점 순수해 져갑니다. 조금만 슬픈 일이 있으면 울어버리고 조금만 좋은 일이 있으면 방끗 웃습니다. 그렇게 자기감정에 솔직한 아내의 모습이 사랑스럽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그 남편을 보면서 가슴이 뻐근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기쁨” 그 깊은 경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아내가 치매에 걸려 저리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일을 다 접고 아내 뒷바라지에 헌신할 수 있을까?” 마음이 묵직해 옵니다. 하나님께서 힘주시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랑 이야기에 한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기쁨”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기쁨을 맛보더라도 그 사랑이 에로스적 사랑의 달콤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에로스적 사랑이 불꽃처럼 피었다 사라지면 사랑의 기쁨도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사랑의 기쁨이 곧 사랑의 슬픔으로 변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고, 부모와 자녀를 사랑하고, 교우를 사랑하고, 가까운 이들을 사랑하면서 그 안에서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받는 기쁨
본문 5-7절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랑을 고백하던 이 여인이 갑자기 자기의 콤플렉스 이야기를 합니다.
5절을 보면 “내가 비록 검으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그리고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자기가 여자지만 포도원 지기로 일하다가 햇볕에 얼굴이 타서 예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남자들 앞에서 얼굴을 가려야 할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라고 남자가 부릅니다. 비록 검게 탄 얼굴이지만 이 남자는 어여쁜 여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9-11절을 보면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여자의 고운 자태에 반해서 보석으로 치장을 해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외모가 아름답지 않지만 그래도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래도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받는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 상담가 딘 마틴이라는 분이 아내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조사했습니다.
“당신은 좋은 남편을 만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결혼하고 1년 정도 지난 아내들은 이 질문에 98%가 예라고 대답했고, 2년이 지난 아내들은 거의 절반인 56%만 “예”라고 대답했고, 결혼 10년이 지난 아내들은 겨우 6%만 자신의 남편이 좋은 남자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러나 결혼한 지 20년이 지난 아내들은 무려 95%가 “나는 좋은 남자를 만났습니다”라고 답을 했답니다.
이 분이 통계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부부가 상대를 이해하고 서로 하나가 되려면 적어도 20년은 걸린다는 것입니다. 20년은 돼야 나같은 것을 아내로 남편으로 믿고 함께 살아준 서로에게 감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랑 이야기 가운데 또 한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 받는 기쁨”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달콤함이 있더라도 내가 예쁘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랑 받는 자랑스러움이 있더라도 내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사랑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 부부 갈등이 있습니다.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데 왜 사랑해 주지 않는냐고 따지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사람들 사이의 사랑에 트러블이 생깁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 이렇게 사랑 받는다고 감사할 때 그 사랑은 기쁨이요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영감 왜 불러”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영감과 할멈이 주거니 받거니 장단 맞춰 부르는 노래입니다.
영감! 왜 불러? 뒤뜰에 뛰어 놀던 씨암탉 한 마리 보았소? 보았지! 어쨌오? 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하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 했군 잘 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여보 마누라! 뒤뜰에 매어놓은 송아지 한 마리 보았나? 보았지 어쨌오! 친정 집 오라버님 장사밑천으로 주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 했군 잘 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이 가사 내용을 잘 살펴보면 정말 잘해서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같이 속이 쓰린 것들입니다. 씨암탉을 잡아먹어 버리고 송아지를 친정집에 주어버렸으니 싸워도 한 참 싸울 일들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했으니 잘했다는 것이고, 또 그것을 잘했다고 해 줄 사람 당신 밖에 없으니 고마운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하는 기쁨, 사랑 받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면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사랑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사랑 받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의 기쁨
이 아가서는 표면적으로는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이면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사랑하며 맛보는 사랑의 기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기쁨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사랑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안에서 참된 기쁨을 맛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영성가 헨리 나우엔이야기입니다. 이분은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영성에 대해 강의하던 교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성공한 사람이요 모두가 부러워할 위치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1986년 8월 갑자기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데이브레이크라는 장애인 공동체의 사목(chaplain)이 됩니다.
이분이 이곳에서 한 일은 아담이라는 전신이 마비된 장애인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아침 7시에 그를 깨워서 잠옷을 벗기고 욕실에 데려가 조심스럽게 면도를 해 주고 목욕을 시킵니다. 그리고 옷을 골라 입히고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아침을 먹입니다. 식후에 휠체어에 태워서 주간 프로그램 하는 곳으로 보냅니다.
매일을 이렇게 보내던 이분에게 내부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장애인 아담의 발을 씻어주며 섬기면서 그 아담 안에 또 다른 아담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자신이 아담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바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날 장애인 아담이 더듬거리는 말로 이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때 헨리 나우엔은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기뻐하는 자라” 이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놀라운 기쁨을 맛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그 안에서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 받는 기쁨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자신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받으며 그 안에서 사랑 받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깨닫고 사랑 받는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말하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절한 사랑 고백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거절하는 철 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백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 62: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이라” 하나님께서 “아주바”와 “세마마” 즉 “버림 받은자”요 “쫓겨난 아내”였던 하나님의 백성을 “헵시바”와 “쁄라” 즉 “사랑하는 여인”이요 “결혼할 여인”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절한 사랑 고백입니다. 버림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사랑하는 여인이요 결혼할 여인이라고 고백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자격 없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백하고 계십니다. 버림 받아 마땅한 저와 여러분을 향해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고백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망극한 하나님의 사랑고백을 깨닫고 눈물로 그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그 큰 사랑 앞에 사랑 받는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의 기쁨을 맛보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랑하는 기쁨과 사랑 받는 기쁨을 맛보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기쁨을 맛보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랑의 기쁨 안에 우리 삶의 더할 수 없는 풍성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