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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4-19
몇 번을 치겠습니까? / 김경수 목사
올 해는 호랑이 해입니다. 모두가 국운이 상승하는 해라고 예단합니다. 그 속에는 바람과 희망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과 희망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생각과 사고, 그리고 가치관을 가져야 할까요?
호랑이하면 생각나는 속담이 있습니다. “불입호혈 부득호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풀이하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가만히 있어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수동적으로 호랑이 새끼가 나오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운은 찾아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후자라고 확신합니다. 행운은 우연히 찾아온다고 보지 않습니다. 행운은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여기에도 수동적인 삶의 가치관 아니면 능동적인 삶의 가치관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과 비전, 그리고 축복은 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라는 것입니까?
여기에도 수동적인 믿음과 능동적인 믿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후자를 선호합니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꿈을 꾼 사람도 있습니다. 요셉이 대표적인 사람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대부분 비전과 꿈을 꾸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81:10)-“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요15: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수동적인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꿈과 비전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축복도 하나님께서 주셔야 한다고 기약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2010년을 수동적으로 하염없이 기다리는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고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는, 적은 믿음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대다수 믿음의 사람들은 적은 믿음에 안주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물론 적은 믿음은 신앙생활에 긴장감을 주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입으로 고백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만으로 만족하고 안주하는 믿음에는 긴장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은 믿음을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나 치유, 축복을 반드시 받아야 하는 부담감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하나님의 기적이나 치유, 그리고 축복이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기다리고 확신하는 것이 부담이 된다든지 스트레스가 된다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포기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께서도 방언을 모두가 하기를 바라지만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위해 기도하지만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기 때문에 아예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이치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고백에는 문제가 없지만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생각은 지극히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로부터 믿음이 크다고 칭찬받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신앙고백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와서 치유와 축복을 받고 누림을 선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치유를 받지 못함에 대한 걱정이나 축복을 받지 못함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인이 중풍병으로 앓던 한 백부장은 과감히 주님 앞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얼마나 큰 믿음이었는지 그는 환자를 대동하지 않고 오직 말씀으로만 하셔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종국적으로 그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음과 동시에 치유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문제나 소원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을 박대하시거나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간혹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거절의 모양새를 갖출 때가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그들을 포함하여 모두가 치유를 받고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적은 믿음을 선호하지 마십시오.
큰 믿음을 가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적은 믿음을 선호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사기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대하심을 보았지만 끊임없이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에 믿음으로 전진하여야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런 일들이 반복되었습니까?
사사 시대를 지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주변국들은 모두 왕정 제도를 가지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자기들보다 더 향상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제도를 흠모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이의제기를 하며 신앙회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보다 주변국의 왕정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연약하게 살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끈질기게 하나님께 자신들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구합니다.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은 하나님께 무례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노하기도 했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조차 외면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최선책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에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급조된 왕이 세워지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울 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선책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에는 인본주의적이며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오직 신앙고백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신경을 외우십니까? 주기도문을 외우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신다면 지극히 적은 믿음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알아도 그 위대하신 하나님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믿음은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은 믿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적은 믿음으로 안주하지 마십시오.
신앙고백 하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적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적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치유를 제한하지 마십시오.
적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적은 믿음으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하는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는 기대를 가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미래와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또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에 이스라엘 왕인 요아스가 나옵니다. 비교적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왕이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당시 사역하였던 엘리사는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요아스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임종을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요아스는 역대 이스라엘 왕 중에서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믿음을 가지고 찾아온 요아스에게 마지막 축복을 염원해 줍니다. 그로 하여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동쪽 창문을 열고 활을 쏘게 한 것입니다.
(17)-“엘리사가 이르되 쏘소서 하는지라 곧 쏘매 엘리사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요아스의 손을 잡고 그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함으로 인해 승리와 구원의 축복을 기원해 준 것입니다. 그런즉 앞으로 요아스는 아람과의 전쟁을 할 때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축복을 빌었으니 그는 승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승리를 기원했으니 그는 반드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 종의 축복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들으시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연해서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화살을 집어 들고 땅을 치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에 요아스는 세 번 땅을 칩니다. 아마도 엘리사의 일련의 명령들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그는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을 화살을 들어 땅에 친 것입니다. 그는 세 번을 치면서 나름대로는 많이 쳤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진노하면서 불호령이 내립니다.
(19)-“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왜 세 번만 땅을 쳤느냐는 질책입니다.
결국 요아스는 엘리사가 죽고 난 이후에 아람과의 전쟁에서 세 번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아람을 전멸하지 못함으로 인해 미래가 불행스럽게 될 것이라는 여지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큰 믿음을 발견했을 때에 이상하게 여기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이상히 여겼습니다. 이방 여인으로 주님의 멸시조차 자존심 상한다고 여기면서 뒤돌아 간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은혜를 사모했던 가나안 여인도 큰 믿음이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것 또한 이상하게 여기셨습니다. 믿음이 큰 경우에는 기뻐하시면서 칭찬하셨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 무리들에게는 진노하시면서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오늘 엘리사가 화살로 세 번 땅을 친 요아스에게 화를 낸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대를 가지십시오. 미래가 형통할 것이라고 기대하십시오.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하십시오. 올 한 해는 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셔야 합니다. 기대는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크게 할수록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애굽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근성을 가지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일들에 대해 언제나 두려워했습니다. 능동적인 삶을 거부했습니다. 창의적 삶을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아니 들어가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조금은 불편하고 막막했지만 광야의 생활이 그 나름대로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적당히 먹을 것도 제공되었습니다. 마실 물도 공급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의 기적은 아침 저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매일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갈 길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하루 이틀 살다보니 면역도 되었습니다. 미래지향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부족함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수동적인 삶이죠. 가만히 있어도 먹고 마실 것이 제공되니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아니하면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삶이 좋다고 느껴지십니까? 이런 삶을 선호하는 아닙니까? 크게 잘 되는 것은 없을지 몰라도 그렇다고 크게 부족함도 느끼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진실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면 경계해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가만히 있어도 먹고 마실 것이 주어지는 광야의 삶을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수동적인 삶을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수동적인 삶은 어린아이와 같은 삶입니다.
그러므로 기대를 가지십시오.
조석간에 먹고 마실 것이 주어지며 남달리 창의적이거나 능동적인 사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광야의 삶을 거절해야 합니다. 약간의 대가를 지불하는 한이 있어도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피를 흘리는 고통이 따라도 미래와 희망을 가지고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능동적이고 창의적 삶은 성숙한 사람의 삶의 태도입니다.
사실 광야의 생활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있어서 갈등의 기간입니다.
애굽에서 태어난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는 부정적이면서도 수동적 무리들과 광야에서 태어나서 가나안 땅을 희망하는 능동적이면서 창의적 사고를 하는 무리들의 갈등입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은 과거의 세대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사건건 무슨 일이든지 안 된다고 하고 못 한다고 우깁니다. 결국 이 갈등의 공동체는 40년 이라고 하는 긴 세월 동안 기다려야 했습니다.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무리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드디어 새로운 공동체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것을 보십시오. 절대 복종을 서약하면서 자신들의 리더인 여호수아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축복의 땅을 희망합니다. 미래를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을 소원합니다.
더 이상 조석간에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기적만을 바라는 수동적인 삶의 태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믿음으로 양육하시고 성장시켜 주셨으니 이제부터는 이 믿음으로 자신들이 직접 능동적으로 나아가서 땅을 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삶을 거부합니다. 그럭저럭 사는 것을 단호히 차단합니다.
조석간에 하나님의 기적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제부터는 불구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지 않으셔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고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비록 대가를 지불하는 한이 있어도 역동적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기를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제부터는 앞으로 믿음으로 나아가시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기다리십시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으며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믿음이 없을 때는 앞에서 끌고 가시지만 믿음이 있을 때에는 뒤에서 밀어주시기를 희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루가 복될 것을 알고 나아가십시오.
새해가 형통할 것을 알고 나아가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시고 나아가십시오.
무서워하지 마시고 나아가십시오.
완치를 감사하면서 나아가십시오.
100억의 매출을 올릴 것을 감사하면서 나아가십시오.
직장에서 머리가 될 것을 기대하면서 나아가십시오.
세 번째로, 기대를 가진 만큼 기도하십시오.
잘 되기를 희망하신다면 절대적으로 기도하십시오.
형통할 것을 기대하셨다면 기도하십시오.
미래와 희망을 가지셨다면 기도하십시오.
100억의 매출을 목표하셨다면 기도하십시오.
(마7:7-8)-“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막9:29)-“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빌4: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손들고 기도하면 100억의 매출을 올릴 것입니다.
손들고 기도하면 마음의 소원이 응답될 것입니다.
손들고 기도하면 완치가 될 것입니다.
손들고 기도하면 승리할 것입니다.
손들고 기도하면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손들고 기도하면 미래는 열릴 것입니다.
손들고 기도하면 축복은 나의 것이 될 것입니다.
20 년 기도의 손을 내리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