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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의 금강경 핵심강좌 (3회)제2 선현기청분(수보리가 법을 물음)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까>
제2.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반야는 흔히 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 공의 이치를 가장 잘 안다는 수보리가 평소에 의심스러웠던 점과 알고 싶었던 점들을 부처님께 묻는 대목이다.
즉 보리심을 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다시 말하면 반야의 삶은 무엇이며 부처로서의 삶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꼭 밖을 향해서 남에게 물어야 하는가. 무엇이나 다 수보리 자신 속에 있고 어떠한 길도 다 수보리 자신 속에 있고 어떠한 길도 다 수보리 자신이거늘 어찌 밖을 향해서 찾는단 말인가. 밖에서 과연 찾아지고 얻어질 것인가. 그러한 사실을 이미 부처님은 걸식으로 다 보여줬다. 자리를 펴고 앉음으로써 다 보여줬다. 인간의 본래면목을. 반야의 참모습을.
제2. 선현기청분(제이 수보리가 법을 물음)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까>
시 장로 수보리 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경 이백불언. 희유세존
時 長老 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希有世尊.
그때 대중 가운데 있던 수보리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무릎을 땅에 대며 합장하고 공손히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여래께서는 보살들을 잘 보호해주시며 보살들을
잘 격려해 주십니다.
세존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世尊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세존이시여!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불언. 선재선재. 수보리 여여소설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여금제청. 당위여설.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請. 當爲汝說.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수보리여! 그대의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해주며 보살들을 잘 격려해 준다.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그대에게 설하리라.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여시주 여시항복기심. 유연 세존 원요욕문
善男子 善女人 發阿褥多羅三邈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唯然 世尊 願樂欲聞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은 이와 같이 살아야 하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예, 세존이시여 라고 하며 수보리는 즐거이 듣고자 하였습니다.
第二 善現起請分
제이 선현기청분
時에 長老須菩提가 在大衆中이라가 卽從座起하사 偏袒右肩
시 장로수보리 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하시며 右膝著地하시고 合掌恭敬하사 而白佛言하사대
우슬착지 합장공경 이백불언
時에 長老須菩提가 在大衆中이라가 卽從座起하사 偏袒右肩
시 장로수보리 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그랬습니다.
偏袒右肩하시며 右膝著地하시고
편단우견 우슬착지
편단우견(偏袒右肩), 우슬착지(右膝著地), 이건 이제 인도에서, 물론 가사(袈裟)도 여기에 해당되겠습니다마는 우슬착지 같은 경우는, 우리 뭐 사극 같은데서도 흔히 볼 수 있듯이, 전선에 있던 사람이 왕에게 전황을 보고한다든지 또 장군에게 전황을 보고할 때 하는 그런 모습인데, 역시 인도에서 이것이 이제 윗사람들에게 무엇을 아뢸 때, 고할 때 으레 이렇게 했던 모습이고, 또 이것은 진실을 이야기한다하는, 조금도 거짓이 없노라 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답니다.
合掌恭敬하사 而白佛言하사대
합장공경 이백불언
합장공경하시고 이백불언 하사대
時에 長老須菩提가 在大衆中이라가 卽從座起하사 偏袒右肩
시 장로수보리 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그랬습니다.
偏袒右肩하시며 右膝著地하시고
편단우견 우슬착지
편단우견(偏袒右肩), 우슬착지(右膝著地), 이건 이제 인도에서, 물론 가사(袈裟)도 여기에 해당되겠습니다마는 우슬착지 같은 경우는, 우리 뭐 사극 같은데서도 흔히 볼 수 있듯이, 전선에 있던 사람이 왕에게 전황을 보고한다든지 또 장군에게 전황을 보고할 때 하는 그런 모습인데, 역시 인도에서 이것이 이제 윗사람들에게 무엇을 아뢸 때, 고할 때 으레 이렇게 했던 모습이고, 또 이것은 진실을 이야기한다하는, 조금도 거짓이 없노라 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답니다.
合掌恭敬하사 而白佛言하사대
합장공경 이백불언
합장공경하시고 이백불언 하사대
希有世尊하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시며 善付囑諸菩薩하시나니
희유세존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世尊하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세존 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應云何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希有世尊하
희유세존
“희유 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뭐가 그렇게 희유합니까?
우리 삶이 희유한 것이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희유하고, 거기에 불법을 만났으니 희유하고, 또 세존 같은 분을 모시고 있으니 희유하고, 세존을 중심으로 해서 훌륭한 도반들,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만 모였으니, 정말 착하게만 살고자 하는 그런 사람들이 모였으니 희유하고, 희유한 것만 따지자면 백 가지도 넘습니다.
우리가 정말 시대의 어떤 변천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이 강당에, 이 좋은 강당에 우리가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하게 된 것, 이 또한 희유한 일입니다.
어느 날 부근에 내가 왔다가 여기를 내가 견학을 했어요. 이 회관을 보고는 ‘야! 여기서 법회하면 좋겠다.’하는 그런 말을 했어요.
그 한마디의 씨앗이 오늘 이런 결과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참 희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를 다 포함해서
“아!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그 중에서도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시며 善付囑諸菩薩하시나니
여래 선호렴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여래께서 선호렴제보살(善護念諸菩薩)하시며 선부촉제보살(善付囑諸菩薩)하시나니,
그랬어요.
하아! 천하의 부처님 같은 분이, 모든 보살들을 선호렴(善護念)한다, 잘 보호하고, 늘 염려해주고, 아낀다.
그리고, 선부촉제보살(善付囑諸菩薩), 마음 속에 아끼고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만 가지곤 소용없어요.
부촉(付囑)을 해야돼요. 잘 가르쳐야 돼요. 꾸중도 하고, 당부도 하고, 지시도 하
고, 이게 전부 부촉이란 말에 포함됩니다.
사찰에서 신도들에게 무슨 소임을 준다든지, 또 무슨 삼직이나, 칠직이나, 기타 무슨 단체장을 이렇게 주지스님이 부촉을 할 때, 반드시 부촉이란 말을 써야 됩니다. 임명이란 말 그것 좀 쓰지 마세요 이제.
부촉 받았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부처님으로부터 우리가 지시와 당부를 받은 거와 같은 그런 느낌, 스님은, 특히 주지스님은 부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부촉이란 낱말을 우리가 잘 써야 돼요.
절대 뭐 신도회장에 명했다, 무슨 총무회에 임명했다, 이런 말 보다는 부촉이란 말을 썼으면 하고 당부드립니다. 그런 의미가 다 부촉이에요.
소임을 이제 받게 되면 어떻습니까?
별별 소리를 다 듣고, 꾸중도 듣고, 부탁도 듣고 뭐 권유도 듣고, 이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한 게 부촉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보살들에게 다 그렇게 하는 것이죠.
世尊하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세존 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 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이렇게 했는데 이번에 반야심경 한 것도 위에 없는 깨달음, 이렇게 했더라구요. 아, 그것 참 잘못 번역한 겁니다. 우리 종단적으로 이번에 발표된 반야심경 있죠. 거기에 ‘위 없는 깨달음’, 이렇게 해놨어요. 큰일 났어요, 그거.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해야 됩니다. 위없다는 말은 이거는 해당 안 돼요. 무상이지 물론, 없을· 무(無)자, 위· 상(上)자 입니다마는 그걸 그대로 글자대로 번역을 하면 우리 말하고는 전혀 딴 데로 가버려요. ‘최상의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위없는 깨달음’ 이건 말이 안 돼요. 사실 제대로 할려면 ‘이것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깨달음’,이 뜻이거든요. ‘이것보다 더 위가 없는 깨달음’그런 뜻인데, 그걸 그냥 딱 잘라가지고 ‘위없는 깨달음’하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최상의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최상의 깨달음의 마음을 내었다. 아무튼 인생을 최고로 살고자 하는 사람, 최고로 살고자 하는 사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應云何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이게 두 가지 질문이죠.
응운하주(應云何住)며
어떻게 머물러야합니까?
어떻게 주(住), 꼭 어떻게 주해야 하느냐?
머물·주(住)자인데, 이게 살·주(住)자도 돼요. 사는 곳을 주소라 하듯이 사는 곳도 됩니다마는 뭐 ‘어떻게 머무느냐?’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금강경은 ‘무주로 위체’라 그랬어요. 답을 드리면, 여기 수보리가 막 물었습니다만는, 성급하게 답을 드리면, ‘머묾이 없는 것으로써 머묾을 삼는다’ 이 뜻입니다.
그것 참, 세속적인 논리로는 얼토당토 않죠.
그러나 불교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세속적인 언어의 표현을 그대로 쓰긴 쓰지마는 그러나, 뜻은 제대로 전달이 안 됩니다. 전달이 안 되니까 이건 비논리라고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마는 정말 ‘머묾이 없는데 머무는 것’,
논리하고는 어긋납니다마는 그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거예요. 그게 이제 주(住)자의 뜻입니다.
그 다음,
何降伏其心하리잇고
운하항복기심
운하항복기심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됩니까?”
그렇죠? 이 마음, 정말 문제가 많은 마음입니다. 우리 보통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문제가 많아서 이건 꼭 항복받아야 돼요.
항복받는다는 게 결국은 뭣고 하면은, 묘유로 위용이라, 묘하게 있는 것으로써 그 작용을 삼는다, 그것이 이제 이 마음 항복받는 거죠.
그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이니까
선현이 일어나서 수보리가 말하자면 법을 청하는 내용이니까 요게 법을 청하는 거예요. 질문이 그럴 듯하면 답도 참 그럴 듯하게 나갑니다.
질문이 시원찮으면 답도 거기에 맞게 잘 나갈 수가 없는 거죠.
그래 수보리는 참으로 뛰어난 분이라 이렇게 질문을 잘 했습니다.
佛言하사대 善哉善哉라 須菩提야 如汝所說하야
불언 선재선재 수보리 여여소설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며 善付囑諸菩薩하노니 汝今諦聽하라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여금제청
當爲汝說호리라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당위여설 선남자선 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應如是住하며 如是降伏其心이니라 唯然世尊하 願樂欲聞하노이다
응여시주 여시항복기심 유연세존 원요욕문
佛言하사대 善哉善哉라 須菩提야
불언 선재선재 수보리
“ 훌륭하고 훌륭하여라 수보리여!
如汝所說하야
여여소설
그대의 말과 같아서
如來가 善護念諸菩薩하며 善付囑諸菩薩하노니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선부촉제보살’한다 말이야. 사실 내 임무는 그거다. 네가 말한 대로 그거다!
汝今諦聽하라
여금제청
그대는 지금 자세히 들어라!
當爲汝說호리라
당위여설
마땅히 그대들을 위해서 설하겠다.
여기도,
그대만을 위해서 설한다고 할 수도 있고, 그대를 위해서 설한다고 할 수도 있고, 그대들을 위해서 설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해석을.
그래도 ‘그대들’이라고 하는 게 좋겠죠.
‘여등(汝等)’ 이라고 하는 등(等)자가 없어도, 여등(汝等)그런 의미입니다.
앞에서 대중이, 청중이 1250인(人)이 모였었습니다. 그런데 수보리 보고 ‘ 수보리
너 혼자만 들어라’ 할 까닭이 없죠.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선남자선 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선남자 선여인이 발심한 사람,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낸 사람은
應如是住하며 如是降伏其心이니라
응여시주 여시항복기심
이와 같이 머물며, 이와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니라. ”
唯然世尊하 願樂欲聞하노이다
유연세존 원요욕문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예!”그렇게 하겠습니다.
‘오직 그렇습니다’가 아닙니다. “예!”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유(唯)예요. “유(唯)!”,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唯)!”야.
世尊하 願樂欲聞하노이다
세존 원요욕문
세존이시여! 원컨대 듣고 싶어합니다. ”
그러는데, 여기서 우리가 제일 잘 쓰는 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또 줄이면 보리심, 그것을 또 줄이면 발심(發心), 심자 하나로 표현되는데 ‘보리심’,‘보리심’, 참 이게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낱말인데, 이게 이제 잘 쓰면서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요. 우리 T.V에서 보면은 달라이라마가 이 ‘보리심’이란 말을 참 잘 써요. 티벳불교에서 ‘보리심’이라는 말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씁니다. ‘보리심’,‘보리심’...그런데 이건 범어거든요. 크게 확 드러나지 않는다고 뜻이. 물론 뭐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만.
며칠 전에 티벳스님이 또 왔어. 부산에 사는 티벳스님이랑 한국말을 잘해. 그래서 달라이라마가 티벳불교를 대표를 하고 있고, 달라이라마의 말씀은 바로 티벳 불교를 말씀하신 것인데, ‘보리심’,‘보리심’하는데,“‘보리심’이 뭐냐?”하고 내가 물었어요.
“만 중생들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그런 비원(悲願), 그것이다.”라고 해요. 만 중생들을 모두 깨닫게 하고자, 모두 성불하게 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말하자면 ‘보리심’이다.
“그러면 내가 잘 쓰는, 내 나름대로 해석을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다’라고 하는데, 그건 거기에 맞나? 틀리나?” 내가 또 그래 물었어요.
아 “맞다.”는 거예요.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 보리심이라고 한다.”그렇게 인정을 받았어. 나는 늘 ‘보리심’을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다, 지혜가 있어야 되고, 그 지혜를 공유하고자 하는, 많은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는 그런 자비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 보리심속에는 그 두 가지가 다 포함된 마음이 ‘보리심’이다. 이렇게 하면 명확해져요.
우리가 늘 ‘보리심’,‘보리심’뭐‘ 발보리심’뭐 소나 다른 축생보고도 다‘보리심 발해라, 보리심 발해라,’ 그렇게 했는데 그 보리심이 애매한 거야, 사실은.
왜냐하면 범어다 보니까, 한문 뜻을 지닌 것이라면 그나마 좀 이해가 되겠는데, 이게 범어를 가지고 이야기하다보니까 알듯알듯하면서도 명확하지가 않아가지고 저는 늘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다. ‘만중생을 전부 깨닫게 하려고 해야 되겠다. 어떻게 하더라도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그런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한다. 참 꿈이 너무 커요. 그러고 보면은. 꿈은 큰데, 아무튼 그런 좋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제 2분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은 중요한 것이 말하자면,
‘운하주(應云何住), 운하항복기심 (云何降伏其心)’,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되는까? 이것이 제일 중요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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