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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1:7-11; 6:4-10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지만, 아가서 1:2-6; 2:3-7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사랑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주석의 도움 없이 그냥 성경만 읽어서는 그 뜻이 확 와 닿지 않습니다. 아래에 해당 내용 관련 매튜 헨리 주석의 내용을 타붙하여 올립니다.
아가서2:3-7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사랑과 찬양(아가 2:3-7)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신부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찬양하며 그를 딴 모든 자보다 우위에 둔다. "수풀 가운데 사과 나무 같구나."
이 나무는 딴 나무들처럼 그렇게 높이 자라지도 않고 넓게 퍼지지도 않지만 사람한테는 유용하고 쓸모가 있다. 딴 나무들은 거의 쓸모가 없으며 백향목 같은 나무조차도 벌목되어 재목이 되기까지는 별반 소용이 없는 반면에 이 나무는 맛있고도 유익한 열매를 맺는다.
"남자들(혹은 "아들들")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이와 같구나." 이와 같이 그는 그 모든 자들보다 빼어나시니─즉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 즉 천사들보다 월등하시며(천사들에게는 예정되지 않는 존귀가 그에게는 베풀어졌다. 히 1:4), 인간의 모든 "아들들"보다 월등하시다. 그는 모든 인간보다 "더 아름다우시며" 인간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자보다 더 훌륭하시다(시 45:2). 너희가 너의 마음에 드는 어떤 피조물을 지적하든지 간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것들보다 빼어난 분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영혼에 대하여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으나 그리스도는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이다.
Ⅱ. 이 여인은 자기가 그와 교제하는 중에 얻은 풍족한 위로를 기억하고 있다. 이 여인은 목자들이 때로 나무 그늘 밑에 앉아 휴식하며 서로 담소하듯 그의 곁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다." 교회가 주 예수 가까이 앉음으로써 발견하는 혜택은 두 가지이다.
1.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그늘로서의 혜택이 있다. "내가 그의 그늘 밑에 앉음"은 그를 피난처로 삼아 찌는 듯한 태양의 열기로부터 보호받고 시원함을 얻으며 다소의 휴식을 취하고자 함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큰 나무 "그늘 같으며"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 같다"(사 32:2; 25:4). 불쌍한 영혼이 죄의 확신과 율법의 공포로 인해 다윗처럼 바싹 타들어 갈 때(시 32:4), 또 기진맥진 하여 로뎀 나무 아래 앉았던 엘리야처럼(왕상 19:4) 이 세상 환란에 지칠 때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그 그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메마른 불쌍한 영혼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은혜와 위로 속에서 또 불쌍한 죄인을 떠맡으시는 그의 사랑 안에서 이 그늘을 발견하게 되며, 이 그늘은 저들을 소생시켜 주고 그들이 약해지지 않도록 해 준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휴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그늘"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우리는 이 "그늘 아래 앉아야"만 한다(여기에 내가 거할 것은 내가 그것을 사모하였음이라). 그리고 우리는 이 그늘이 요나의 박 넝쿨처럼 곧 시들어버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더위를 입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나무와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생명의 나무의 잎사귀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줄 뿐만 아니라 만민들의 병 치료에도 소용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기쁨으로 이 그늘 아래 앉지" 않으면 안 되며 그 보호를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고(삿 9:15 처럼) 그 휴식에 매우 만족해야 한다.
2. 그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맛있고 자양분 있는 음식물이 있다. 이 나무는 "그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실과를 떨어뜨려 준다. 그들은 그 열매를 마음대로 먹으며, 그 실과가 타인들에게는 어떠하든지 간에 자기들의 "입에는 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자들은 주 예수님의 "은혜로우심"을 맛보았다(벧전 2:3). 그의 "열매"는 모든 값진 새 언약의 특전이며 그의 피로써 얻으신 것이요 그의 성령으로 전달해 주시는 것이다. 약속은 신자들에게는 단것이며 교훈도 또한 그러하다.
"나는 속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노라." 용서해 주시는 것도 달며 양심의 평안도 달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나 성령의 기쁨이나 영생에 대한 소망도 달며, 현재의 영생에 대한 전조도 달다. 영적인 감각을 활동시키는 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단 것이다. 만약 우리 입에서 죄악의 쾌락에 대한 미각을 제하여 버린다면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 입에 달 것"이며 "꿀과 꿀통보다 더 달 것"이다.
Ⅲ. 이 여인은 자기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얻은 은총과 위로를 감사하고 있다(4절). "내가 사과나무 아래 앉아 기뻐하였고 그는 나를 영접하셨다. 더욱이 그는 나에게 자기와 보다 친밀한 교제를 하도록 재촉하셨다." "주 여호와께 복 받은 자여! 들어오라. 어찌하여 밖에 섰느냐?" "그는 나를 인도하여 잔치 집(포도주의 집이라고도 해석됨)에 들어갔다."
즉 이 잔치 집은 그가 자기의 특별한 손들을 접대하는 곳으로, 그는 그들을 낮은 정도의 안락에서 고급의 안락으로 "사과나무"의 열매에서 보다 풍부한 포도나무 열매로 이끄는 것이다. 자기가 "가진" 신적 기쁨을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는 더욱 많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 랍비 중 한 사람은 "잔치집"이란 말을 "율법의 해석이 행해진 회중의 장막"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확실하게 이 말씀을 기독교의 집회에다 적용할 수 있다. 크리스천의 집회에서는 복음이 선포되며 복음의 의식이 거행되는데 바로 저 "포도주의 잔치"인 주의 성찬만은 특히 그러하다. 특별히 이 잔치가 복음 교회의 성례와 부합되는 것은 이 의식에서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점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항을 살펴보자.
1. 이 여인은 어떻게 인도되었는가. "그가 나를 인도하여, 즉 그가 내 안에 역사하사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고, 나를 도와 나의 낙심을 극복하게 하시며 내 손을 붙잡고 안내하고 인도하셨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담대히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셨다"(엡 2:18).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천을 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인도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잔치집에 들어갈 수도 신령한 즐거움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2. 이 여인은 어떤 향응을 받는가. "그의 사랑은 내 위에 기로구나." 즉 "그는" 내게 대한 승리자(triumph over) 로서가 아니라 나의 승리를 기뻐하는(triumph in)자로서 내 머리 위에 나부끼는 깃발로 "나를 인도해" 들이셨다. 또 그는 언제나 우리를 자기와 함께 그리고 자기 안에서 승리하게 하신다(고후 2:14).
복음은 "깃발"이나 "기호"에 비유된다(사 11:12). 그리고 이 깃발에 나타난 것, 즉 황금 글자로 깃발에 씌여진 "사랑"이며, 피로 씌어진 글자도 "사랑"이다. 그리고 이 깃발은 곧 그 "잔치 집"에서 내어 놓는 대접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의 대장"이시며 그는 자기의 모든 병사들을 사랑의 깃발 아래로 불러 모으신다. 그들은 그 깃발을 중심으로 모인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 깃발에 시선을 보내고 있어야 하며 그것에 의해 활력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들을 "속박하여" 대장부답게 싸우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성읍을 빼앗으면 정복자는 자기의 군기를 새 점령지에 세운다. "그는 나를 그의 사랑으로 정복하셨고 인자하심으로써 나를 압도해 버리셨으니 그것이 곧 내 위에 기로다." 이와 같이 이 여인은 이전에 자신이 경험하였던 사실을 말하고 있고, 이제 그 체험을 기쁨으로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먹는 빵을 잊어서는 안 되며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만나로 먹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Ⅳ.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강렬한 애정과 가장 정열적인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5절).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으니, 이는 그 사랑에 의해 압도되고 그 힘을 못 견디어 냈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110편에서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주의 규례를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오며(20절),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내 영혼이 피곤하오니(81절), 주의 법도와 주의 구원을 확신하려는 노력과 그것이 부족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기진맥진하였나이다." 이 여인은 아마 그 때에 자기의 사랑하는 이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와 그의 지체 때문에 슬픔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랑에 대한 과식으로 탈이 나는 때보다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병 나는 것이 영혼에게는 얼마나 더 나은 것인지 모른다. 이 여인은 강심제를 달라고 요구한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도우라. 혹은 기름이나 꽃, 그 외에 기운 나게 하는 것이면 어떤 것으로든 내 힘을 도우라.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즉 사과나무 되신 그리스도의 열매로(3절) 나를 시원하게 하며, 그의 공로와 중보로 나를 위안시키고 내 영혼에 대한 그의 사랑의 감각으로 나를 위로케 하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병이 난" 자들은 신령한 위로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영적 양식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Ⅴ. 그녀는 기진맥진해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됨으로써 신적 은혜의 효능과 따사로움을 체험하게 된다(6절). 그는 비록 물러난 듯이 보였었지만 이런 때에는 조속한 도움을 주셨다.
1. 사랑에 병든 영혼을 부지시키고 혼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머리를 떠받쳐 베개처럼 편히 눕게 하신다." 다윗은 "자기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랐을" 때(시 63:8)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붙들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였고, 욥은 사면초가의 궁지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힘을 넣어 주신다"는 것을 발견하였다(욥 23:6). "모든 성도는 다 그의 수중에 있으며" 그의 손은 저들의 아픈 머리를 부드럽게 잡아 주신다.
2. 사랑에 병든 영혼을 격려하여 자기가 돌아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는 중에 그는 오른손으로 나를 안으시는구나. 그럼으로써 그는 내게 대한 사랑의 확증을 명백하게 보여 주신다." 신자들의 모든 힘과 위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왼 손이 받쳐주시고 오른손이 안아 주시는 데서 나온다.
Ⅵ. 이 여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가 이처럼 자기에게 가까이 계심을 보고 그와의 교제가 방해를 받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7절). "예루살렘 여자(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예루살렘이 그의 모든 딸들에게, 교회가 그 모든 지체들에게, 믿는 영혼이 자기의 모든 능력과 기능에게, 신부가 자기와 자기 주위의 모든 자에게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도록" 부탁하고 있으니 이는 그녀가 그의 팔에 안겨 있었듯이(6절), 그가 그녀의 팔에서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루와 들 사슴으로" 그들에게 이 부탁을 하고 있다. 즉 "사랑스러운 사슴과 즐거운 노루처럼" 그들이 보기에 사랑스럽고 그들에게 소중한 모든 것으로써 부탁한다. "내 사랑은 그들 사슴과 노루가 너희에게 소중한 것보다 나에게는 더 소중하며, 매우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노루나 사슴처럼 내 사랑도 작은 소리에 방해받을 것이다.
1.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감미롭고 그의 사랑은 인식의 범위 안에 밝히 계시되고 있다. 이 교제와 사랑을 경험하는 이들이라면 이 복된 장면과 이 복된 방문이 계속되기를 소원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는 거룩한 변화산상에 초막을 지었으면 하고 원하였던 것이다(마 17:4).
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원하실 때에는 이런 비상한 자기 전달도 회수해 가신다. 그는 자유로운 행위자이시며 성령은 "바람처럼" 원하시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분다." 그러므로 그가 원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묵묵히 따라가야 마땅한 것이다.
3. 그러나 우리는 그를 노엽게 하여 물러가시도록 만들거나 얼굴을 숨기시게 할 만한 일을 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주의 깊게 감시하여 그의 선하신 성령을 비탄에 잠기게 할 그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로를 얻고 있는 이들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 위로를 잃을까봐 두려워해야 한다.
출처: 매튜 헨리 주석, 아가서.
첫댓글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상호간의 사랑에 대해서 쓴 책입니다. 내용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주석의 도움을 받으면 이해가 되고 은혜도 얻을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톰슨3 성경주석은 초신자도 하나씩 구비하고, 기성 신자는 호크마 주석 정도를 구비하면 좋겠습니다. new호크마 주석이 되면서 가성비가 높아졌거든요.
@장코뱅 네, 큰 맘 먹고 하나씩 구비하면 좋겠어요.
<호크마 주석>, 아가서
=====2:3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 솔로몬의 찬사(2절)에 대해 화답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사과나무'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시트론(citron)이나 살구나무(apricot)로 이해된다. 시트론은 구연(拘椽)나무로도 일컬어지는 것으로 겨울에도 그 잎이 떨어지지 않는 상록수이다. 그 열매는 황금빛 과일로서 맛은 레몬과 오렌지를 섞은 것과 같다 한다. 그리고 살구나무는 약10m정도 자라며 팔레스틴 지역 곳곳에 자생하는데, 그 열매 또한 황금빛을 내고 냄새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과나무는 욜 1:12에도 언급되어지는데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등과 같이 팔레스틴에서 소중히 여겨지던 나무였던 것 같다. 한편 '수풀'에 해당하는 '야아르(* )는 거칠고 울퉁불퉁한 것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들과 숲(Delitzsch)또는 경작하지 않은 거칠은 장소(G. Loyyd Carr)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솔로몬 왕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칠은 들판의 초목이나 숲의 나무들과는 달리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특출하고 유용한 존재임을 암시한 것이다.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 술람미 여인이 소로몬의 보살핌 속에 안식과 즐거움을 누림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예표론적인 의미에서는 성도들이그리스도 안에서 안식과 기쁨을 누림을 예시해 준다(마 11:28-30).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에게 삶의 기쁨과 희망, 원동력 또는 삶의 생기(Lange)를 공급해 주는 자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이것 역시 예표론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삶의 생기(生氣), 원동력, 힘을 공급해 주시는 분임을 예시한다(골 2:10).
=====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 3절에 이어 계속해서 술람미 여인의 말이 언급된다. 여기서 '잔치집'(* , 베이트 하야인)이란 문자적으로'포도주의 집'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잔치 집을 포도주의 집과 동일시하는 것은 구약 잔치 때에는 으례 포도주를 내어 놓아 흥을 돋구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 구절에서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자를 포도주의 집에 초대한 것은 곧 기쁨과 환희의 자리에 초대한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랑이 내 위에 기(旗)로구나 - 본 구절에서 '기'(* , 데겔)란 흔히 군대에서 집결의 또는
소속의 위치 등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군기(軍旗)를 의미한다(민1:52; 2:2, 3). 따라서 본절은, 두려워하거나 어색해 질 수도 있는 잔치석상에서 술람미 여자가 늘름한 솔로몬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안락감을 누리게 됨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표현이다. 즉 자신이 솔로몬 왕에게 속하여 그 보호 아래 있음을 암시한다.
=====2: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 여기서 술람미 여인은 단순히 굶주림으로 인한 육체적 허기를 메우기 위해 음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 왕을 너무 간절히 사랑한 나머지 병이 날 지경이 되어 음식을 먹고 새로운 힘과생기를 얻고자 함이다. 어떤 면에서 이는 주의 계명을 사모하는 시편 기자의 심정과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시 119:131). 한편 본 구절에서 '건포도'(* , 에쉬쇼트)란 일반적인 마른 포도와는 달리 말리긴 했으되 비교적 포도즙이 많이 나오는 포도의 뭉치 또는 포도 떡을 말한다.
=====2:6
그가 왼손으로 ... 나를 안는구나 - 이는 8:3에서 반복되는 표현으로써 사랑하는 남녀의 포옹, 애무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본절은 술람미 여인의 소원이나 과거 사실의 회상(Lange), 또는
현재적 사실(Wycliffe) 등 여러 각도에서 추측해 볼 수 있겠다.아무튼 분명한 것은 솔로몬이 애정 어린 손길로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며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예표론적인 의미에서 이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신부된 성도(교회)를 사랑으로 돌보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을 예시한다.
=====2: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 혹자는 본절을 솔로몬의 말이라고 주장하나(Hengstenberg), 6절에 이어 계속해서 술람미 여자가 한 말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Delitzsch, Lange, Carr). 본 구절에서 화자(話者)가' 노루와 들사슴'을 언급한 것에 대해서는 2:9, 17; 4:5; 7:3; 8:14 등에 근거하여 순수한 연인의 상징을 등장시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주로 비유적 표현으로 전개되는 문맥상의 기조(基調)를 유지하기 위해 첨가된 구절로서 노루나 들사슴이 쉽게 동요하며 뛴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부탁하는 말이다. 즉 사랑하는 자로 하여금 쉽게 동요하거나 놀라 깨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강조적 표현법으로 쓰인 듯하다(삼하 2:18; 22:34).
@장코뱅 나무 이름과 특성까지 알려주니 도움이 많이 됩니다. o.k.
@장코뱅 좋은 설교가 아닌 어설픈 설교보다는 이렇게 주석의 설명을 듣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장코뱅 주석의 도움으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감사합니다.
읽어 보니 주석 없이 혼자 읽어서는 쉽게 이해될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의적 해석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양질의 주석은 몇 권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