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아침에
토요일 어젯밤에
어떤 문인들 모임을 마치고
한 시인의 제안으로
시청 인근의 부민옥에서
문 닫는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
시청역 지하철에서
악수하고 헤어져
걸어가려는데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손에 든 종이봉투에는
시집 다섯 권이 담겨 있다
시청 앞 광장에서
비 맞으며 망설이다가
발끝에 무엇이 닿아 내려보니
검은색 긴 우산이었다
그리고 멀쩡하였다
얼른 우산을 펴고
콧노래 부르며
봉투가 젖지 않게 왔다
집에 도착하여
현관의 불빛 아래
접은 우산을 내려다보니
손잡이에 '경찰 24 기동대' 글이
희미하게 남아 보였다
아뿔사
시청 근처에 근무하는 경찰들의
우중 비품이었구나
경찰이 비 맞는 나를 위해
내 발 아래 우산을
절대 놓아줄 리는 없었다
자주 잃어버리고
잘 줍는 게 우산이라는데
견물생심에 귀차니즘이 더하여
우산을 우산꽂이에 두고
들어와 잠을 청했다.
젊은 시절 군에서
장비를 잃어버리면
다른 곳에서 보충하던 일이 떠올라
누군가 잃어버인 우산 때문에
걱정할 거라는 생각으로
잠을 설쳤다
일요일 아침
아침 첫 예배를 위해
아내가 깨우는 소리를
모른 체하며
숙취로 교회에 가서
술 냄새 피우기 싫다며
교회엔 못 가겠다고 알렸다
아내 혼자 교회로 떠나자
뜨거운 물 한 잔 따르니
마시기엔 너무 뜨겁다
방한 장비를 챙기고
우산 들고 시청으로 향했다
일요일 아침은
시골 들판의 빈 들녘처럼
도심도 한산하니
외국 여행객들만 추운 날씨에도
드문드문 보였다
시청 앞 광장까지
신호등 네 곳을 지나는 중에
세 곳이 내가 다가서자
파란불로 바뀌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어제 그 자리에
우산을 갖다 놓으면 괜찮을까
또 다른 누군가가...
인근 스케이트장에 맡겨둘까?
생각이 많아졌다
주일 아침 예배에 참가하여
백 번을 회개 하기보다
우산 하나 제자리에
돌려놓는 게 내겐 더 급하였다
시청 광장에 도착하니
노란색 형광 쟈켓을 걸친 여경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말하고
무사히 우산을 돌려주니
여경의 경쾌한 목소리에
고운 미소가 배어 있었고
돌아오는 내 발길도 가벼워
온몸에 열이 올랐다
집에 오니 뜨거운 물이
마시기 좋을 만큼 식어있었다.
버벅거린 날의 후회/정동윤
시 한 편 낭송하며
슬프게도
몇 차례나 흔들렸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요청이라도
시인이라면
깊은 강 윤슬처럼
가슴 적실 줄 알아야지
버벅대면서
시어 흐려놓고는
혹시나, 설마에 기대
꼼수로 얼버무리고
듣는 귀 기만하면서
얼렁뚱땅
마무리하였으니
실례도 큰 실례했죠
언제 어디서나
요청의 주제에 맞는
시 한 편 즉시 우러나야
근사한 시인인데
버벅거린 내 변명이
부끄러워지는 것은
달빛은 구름을
탓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