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릴 때는 휴가를 가는 일이 가족의 일원으로 꼭 참여해야만 하는 연례행사 같은 느낌이었다. 줄곧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모님 뜻대로 행선지를 정하고, 그나마도 새로운 일이 있기보다는 할머니댁을 주로 찾아뵙곤 했다. 친가는 부산이라 너무 멀었고, 주로 강릉의 외가댁으로 여름 휴가를 갔다. 유년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는 그 산골 깊은 곳의 개울이나, 외할머니표 백숙 같은 건 아직까지도 종종 그립게 느껴진다.
이제는 거기에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할머니는 토종닭으로 백숙을 해주던 민박을 그만두셨고, 그 개울은 주변을 펜션촌으로 개발하는 탓에 매립되어 버렸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막내 외삼촌 가족들과 함께 살고 계셔서 찾아 뵙고 편하게 지내다 오는 것도 쉽지 않다.
변하지 않고 거기에 그대로 있는 것은 바다 뿐이다. 동해 특유의 깊고 새파란 바다색을 좋아한다. 아주 어릴 적부터 수십 번도 더 찾아갔던 바다인데 볼 때마다 여전히 좋다. 작년 5월 골든 위크에 그녀와 동해를 보러 갔다. 맛있는 걸 잔뜩 먹고, 술도 마시면서 하릴 없이 바다를 보며 앉아있었다. 지나간 유행가를 틀어놓고 반짝거리는 바다를 목덜미가 새빨갛게 익도록 바라보았다.
가족들과 함께 했던 장소를, 앞으로 내 가족이 될 사람과 새롭게 찾아가는 건 조금 기분이 이상한 일인 것 같다. 하나씩 서로의 지나간 기억들을 꺼내 얘기하고, 그 장소를 그녀와의 새로운 추억으로 덧칠하는 설레는 기분. 서로의 어린 날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는 그 바다 앞에 아주 오래 앉아있었다.
2.
작년 휴가는 세부의 플랜테이션베이 리조트로 다녀왔다. 학기가 끝날 적마다 꼬박꼬박 방학이 있던 시절이 저물고, 하는 일이라곤 먹고 자고 게임 뿐이던 무직백수의 세월을 지나, 월급쟁이 직장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맞는 휴가였다. 휴양지라니 내 형편에 너무 사치가 아닐까 싶어, "이번에는 제주도라던가ㅡ"하고 운을 떼는 나에게 성수기 제주도 물가야말로 동남아 휴양지 못지 않다는 그녀의 타박이 돌아왔다. 틈나는대로 적당한 비행기며 숙소를 찾아보는 데 잔뜩 취미가 있는 그녀 덕분에 아주 괜찮은 리조트에 그렇게나 좋은 조건으로 다녀올 수 있었던 건, 그때나 지금이나 아주 고맙게 생각한다. 요즘 유행하는 #얘랑_사귀면_좋은_점 같은 해시태그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닐까.
떠올리기만 해도 눈 앞에 천국의 풍경이 그려지는 그곳에서의 기억이 이제는 나에게 '휴가'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태양 아래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이는 커다란 해수풀. 키가 크고 잎도 커다란 이국의 나무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조금 축축하고 짠내가 나는 바람. 맛 좋은 음식들과 시원한 맥주를 생각만 해도 행복해진다. 리조트 길목마다 마주치던 방긋방긋 웃는 얼굴들까지, 그 모든 게 전부 환상적으로 어우러졌던 시간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세부!"를 외치게 되는 휴가 후유증을 한참이나 겪은 것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해수욕을 한다. 허기가 지면 룸서비스를 시켜 식사를 하고, 배가 불러 졸음이 오면 다시 쿨쿨 낮잠을 잤다. 시간을 맞춰 데리러 오는 택시를 타고 마사지를 받으러 다녀오면 저무는 하루.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끊임없이 받는 바쁜 일상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 잔득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더없이 완벽한 휴식 속에도 그녀가 있었다.
3.
작년 봄 유채꽃이 한창일 무렵 제주도에 다녀왔다. 취업이 결정되자마자 급하게 떠난 여행이었다. 사촌언니와 여행을 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썩 잘 맞는 여행메이트는 아니었다. 혈연관계라는 것이 어떤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단숨에 상쇄시켜주는 것은 아주 어릴 적에나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빠른 년생인 사촌언니는 여행 내내 남자얘기에 골몰했고, 자신의 연애사라던가 앞으로의 인생계획ㅡ주로 결혼과 가정을 꾸려나가는 일에 대해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애인이 있는지 여부를 묻지도 않고, "넌 결혼은 언제 할꺼야?"하고 묻는 부류와 당연히 죽이 맞을래야 맞을 수가 없다.
그래서 더 그녀를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최근 몇 년 사이의 즐거운 여행, 즐거운 휴가, 즐거운 기억들 속에는 전부 그녀가 있다. 그 여행 당시에는 아직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었는데, 맛있는걸 먹을 때, 좋은 풍경을 볼 때마다 그녀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같이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곳을 sns로 여행 내내 떠들었다.
벼르던 끝에 이번 여름 휴가는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오붓한 시간을 위해 성수기를 조금 비껴, 8월의 끝자락에 4박 5일 일정을 잡아 두었다. 차를 빌려서 제주도 일주를 할 생각이다. 구석구석 보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곳을 잔뜩 찾아 계획을 세우는 재미로 여름을 흘려 보내고 있다. 제주도를 다녀오고 나면 또 함께 보낸 시간만큼, 함께 만들어온 추억만큼ㅡ 서로에 대한 사랑이 무거워져있는 우리가 되기를.
"조금 두서 없이 엮인 이야기들이지만
전부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들,
함께 만들어 갈 기억들이라 두근두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