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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一心), 일심법계(一心法界)>
일심(一心)이란 분열되지 않는 우리의 본마음을 의미한다.
일심과 같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마음으로 정돈된 마음을 진여심(眞如心),
불심(佛心)이라고도 하며, 전형적인 대승사상의 표현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일심이란 어떤 일에 오롯이 전일(專一)해 마음이 흐트러짐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일념(一念)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곧 어떤 일을 할 때에 다른 일들에 마음이 끌려 흐트러지지 않고 오로지 그 일에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일편단심’에 가까운 의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 일심이란 여기서 훨씬 더 전진한 의미로서 마음의 본체를 나타내는 말이며, ‘한 마음’을 의미한다. 즉, 일체의 잡념, 번뇌, 망상이 끊어진 온전한 마음의 경지를 일심이라 한다. 이는 만유의 실체라고 보는 ‘참마음’이다.
일심(一心)은 대승의 유일한 법(法)이며, 여래의 마음이고,
중생의 본성이다. 불심(佛心)은 부처와 같이 깨달은 마음을 의미한다. 이 불심을 일심이라고 한다.
그런데 좀 더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가면 종파에 따라 ‘일심’에 대한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 특히 <화엄경>에서 일심을 강조한다. 화엄종에서는 일심을 우주만유의 근본원리이며, 절대 무이(無二)의
심성으로, 진여(眞如) 혹은 여래장심(如來藏心), 여래장청정심(如來藏淸淨心)으로 해석한다.
• <능가경>에는 탐ㆍ진ㆍ치 삼독을 소멸한 적멸자(寂滅者)를 가리키며, 일심이라 하는 것은 여래장(如來藏)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여래장이라 한 점에서는 화엄종과 같다.
• <반야경>에서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뜻하고,
• 정토종의 정토문(淨土門)에서는 아미타불에 두 마음이 없음을 말한 것으로 일심전념(一心專心),
일심불란(一心紛亂) 등의 뜻이라고 했다.
• 유식(唯識)의 법상종에서는 만유를 능히 변화케 하는 마음으로 아뢰야식으로 일심을 해석하고
만법유식(萬法唯識)임을 주장했다.
• <아미타경소>에서는 이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중생심의 바탕 됨(衆生心之爲心地)은 모양도 없고 성품도 없어서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일심은 연기의 세계관을 신해(信解)해서 ‘연기즉공(緣起卽空)’을 통찰함으로써, 일체경계는 일심임을 주체적으로 증득한 지혜라고 말했다.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일심을 두 개의 문으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대승(大乘)이라는 것은 일심(一心)이고, 그 일심에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유명한 <기신론>의 핵심내용인 일심이문(一心二門)이다. 일심이문(一心二門)에서 일심은 대승이고, 두 개의 문은 모든 괴로움을 여읜 해탈의 삶인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지금 우리들의 삶인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나뉜다. 이와 같이 하나의 마음은, 마음의 이치와 마음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두 가지 문(門-분야)으로 이뤄지니 곧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 했다.
• 원효 대사는 <무량수경종요>에서 일심(一心)은 번뇌에 물든 중생심이 아니라 중생심의 본체, 중생심의 본성(衆生心性)이라고 했다. 불성의 바탕이 바로 일심이라 했다. 더러운 땅과 깨끗한 나라가 본래 일심이고, 생사와 열반이 마침내 둘이 아니다. 모든 경계가 무한하지만 다 일심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부처의 지혜는 모양을 떠나 마음의 원천으로 돌아가고, 지혜와 일심은 완전히 같아서 둘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염정(染淨)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없어, 진망(眞妄)의 이문(二門)이 다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일(一)'이라 이름하며,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 중의 실체인지라 허공과 같지 아니해 본성이 스스로 신해(神解-신비하게 감지한다는 말)하기 때문에 ‘심(心)’이라고 이름 한다”고 했다. 다시 이어서 "그러나 이미 둘이 없는데 어떻게 일(一)이 될 수 있는가? '일(一)'도 있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심(心)'이라 말하는가?" 이와 같이 묻고 스스로 답하기를, "이러한 도리는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은 것이니 무엇이라고 지목할지를 모르겠으나, 억지로 이름 붙여 일심(一心)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간추려서 정리하면, 일심의 ‘일(一)’은 수적 또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고, 개체가 일심으로 어느 하나 속에 전체가 살아있으며, 그 전체 속에 하나가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한 여기서 ‘한 마음’은 숫자로서 마음이 한 개란 뜻이 아니라, 전체의 하나, 유일무이의 하나, 전 우주에 펼쳐진 통일체로서의 하나를 뜻한다. 우주에 가득한 기운, 그 밝은 기운을 통 털어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즉, 마음이란 하나 둘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허공처럼 텅 비어서 실체가 없지만 그것이 수많은 생각과 행동을 나타낼 수 있다. 그래서 신령하다고 하며, 마음 자체는 좋고 나쁜 것이 아니므로 어떤 개념이나 경계를 떠난 것으로 둘, 셋으로 나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므로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일심(一心)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일심이란 크다거나 작다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빠르다거나 늦다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며, 일방적으로 동적(動的)인 것이라거나 정적(靜的)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수량으로 말해 하나라거니 많다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고,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그냥 ‘한 마음’이라는 단어로써 표현하고 있다.
불성(佛性)을 마음으로 보고 깨달을 수는 있어도 불성 자체를 수행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온 세상이 오직 일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도 마음에 있고 마구니도 마음에 있다.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이 말하기를 수행해서 완성을 이루는 것이거늘 세상 사람들이 수행도 하지 않으면서 부처라고 말한다고 비판하지만 실제로 누구나 불성을 지니고 있어서 부처이다. 다만 지혜가 있느냐와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수행자는 마음을 보고 견성을 해 깨닫는다. 그리고 모든 행동은 마음으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은 이 마음이고 여래청정심은 연이 있기 전의 청정한 본심,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 마음은 불성이 아니다. 마음은 상대유한세계에 국한돼 있다. 불성은 국한돼 있지 않다. 어머님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몸도 마음조차도 없는 곳에서 이것이 존재한다. 몸도 마음도 없으나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불성이라고 이름 해 말한다.
이러한 일심사상을 우리나라 불교 속에 정착시키고 독특한 사상으로 발전시킨 분이 원효(元曉) 대사이다. 원효 대사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는 것은 다툼을 없애고 화합하자는 의미이고, 원융회통은 융합하고 서로 통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때 나오는 게 일심사상이다. 즉, 현재의 상황에서 다투지 말 고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보면 다 똑같은 하나의 마음(一心)이며, 이것이 곧 부처의 마음이란 말이다. 원효는 마음을 일심(一心)의 바다로 표현했다.
당시 신라에서의 다양한 종파와 사상이 어지럽게 난무하며 분쟁을 일으킬 때에 일심사상으로 십문화쟁(十門和諍)의 정신을 담아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십문’이란 여러 가지 종파를 종합해 ‘십문’으로 표현했다. 다시 말해서 ‘십문’ 사이의 논쟁을 화해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이다.
원효의 일심사상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사상을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구현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한 다양성 속에서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포용과 관용의 정신이기도 했다.
그리고 <화엄경> ‘야마천궁보살설게품’에 “삼계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이루어졌고, 마음 밖에 다른 법이 없다. 마음과 부처, 중생, 이 세 가지에는 차별이 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즉, 마음이 만유의 본질이며, 불ㆍ중생ㆍ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유식론에서 공통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부분이다. 세포 하나에서 동물 한 마리의 복제가 나오듯이 일심에서 무량심(無量心)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쓸 수 있는 마음의 종류가 무궁무진하다.
일심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① 더러운 땅과 깨끗한 나라가 본래 일심이고, 생사와 열반이 마침내 둘이 아니다.
② 모든 경계가 무한하지만 다 일심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부처의 지혜는 모양을 떠나 마음의 원천으로 돌아가고, 지혜와 일심은 완전히 같아서 둘이 없는 것이다.
③ 불성(佛性)의 바탕은 바로 일심이다.
④ 일심은 모든 사물들을 다 감싸 안는 거울과 같이, 무수한 강줄기들을 다 머금는 바다와 같은 큰마음이며 한마음이다.
그리하여 원효 대사는 ‘일체경계는 일심’이라는 부처님의 지혜를 우러러 믿어야 한다(仰信)고 했다. ‘우러러 믿어야 한다’는 것은 곧 종교적 신념이다. 원효 대사에게는 깨달음 혹은 열반이라 해도 그것은 일심의 다른 이름이며, 정토 역시 종교적 신념으로 염원해야 할 세계인 동시에 스스로 깨달아 일심의 바다에 나아가는 한 문이다. 이치가 이러하기 때문에 허망한 번뇌를 여의고 꿈에서 깨어나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면, 예토와 정토, 생사와 열반 등 일체의 상대적 경계는 일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심은 곧 삼보이다.
• 일심의 근원에 있는 사람이 불보이다. 즉, 일심을 증득하고 삼신(법신, 보신, 화신)의 지혜를 성취하면 불보(佛寶)이다.
• 일심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법보이다. 즉, 일심의 근원으로 인도하는 모든 가르침이 법보(法寶)이다.
• 일심으로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승보이다. 즉, 일심의 근원으로 향해 정진하는 수행자가 승보(僧寶)이다. 그러므로 일심이 곧 삼보이다.
이와 같이 일심은 모든 사물들을 다 감싸 안는 거울과 같이, 무수한 강줄기들을 다 머금는 바다와 같은 큰마음이며 한마음이다. 당시 삼국통일 전쟁으로 인해 벌어진 민심과 적대감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이념은 무엇이겠는가?
원효에게 그것은 부처님의 뜻에 부합되면서도 모든 것의 근거가 되는 일심이었던 것이다. 원수와 동포, 죽음과 삶이라는 이항 대립을 극복할 근거도 역시 일심이었다. 원효는 부처님의 뜻이자 모든 것의 근거인 이 일심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가 뭇 주장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모색했던 화쟁 역시 바로 일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그러한 노력의 구체적 표현이 바로 자재무애(自在無礙)의 행위였던 것이다. 무애행(無礙行)이 자리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일심이었다.
위에서와 같이 불교에서는 우주 만유를 일심(一心)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법계(法界)라고 하는 것은 우주만유란 말과 같은 것인데, 법계 전체를 일심의 그림자로 본다. 법계의 체가 일심이란 말이다. 우주만유는 그 본체인 일심으로부터 연기된 것이요, 이 연기한 우주만유를 총섭한 것이 일심으로서 서로 주(主)가 되고 반(伴)이 돼 무진연기 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일심법계(一心法界)의 도리이다. 일심(一心)의 ‘일(一)’은 단순히 숫자 하나를 뜻하는 것이 아닌 전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심은 전체의 마음, 큰마음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세계가 한 마음에서 벌어진 것이므로 하나가 곧 일체(一卽一切)이고 일체가 곧 하나(一切卽一)라는 것이다. <화엄경>의 세계관은 바로 이러한 일심법계(一心法界)로 요약된다. 온갖 물듦이 깨끗이 사라진 진실 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이다. 그 세계는 객관적 사실의 세계,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는 모든 번뇌가 다한 바른 깨달음의 경지에서 펼쳐진다. 깨달음의 눈, 부처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바로 일심법계이다.
일심법계에는 물질적 유기세계(有機世界, 器世間),
중생들의 세계(衆生世間),
바른 깨달음의 의한 지혜의 세계(知情覺世間)가 있는 그대로 다 나타난다.
마치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져 바다가 고요해지면 거기에 우주의 만 가지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나듯이, 그리하여 이러한 경지가 곧 해인삼매(海印三昧)이기도 한 것이다.
일심법계란 어리석음과 번뇌가 없는 참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를 일컫는다. 참된 지혜의 눈으로 보면 일체의 모든 것들이 본래 참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해인삼매이며, 부처님이 이룬 깨달음의 내용이다. 이러한 일심법계가 바로 화엄경의 세계관이라 하겠다. 삼라만상이 모두 일심법계 안에 있고, 일심법계를 벗어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겠다.
일심(一心)이 불(佛)이요, 일심이 법(法)이요, 일심이 승(僧)이다.
일심 이외에 다른 아무런 의지할 것도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歸一心源], 널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만이 참된 삼귀의(三歸依)의 태도라고 하겠다.
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이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 첫 번째 문으로 문의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일직선상의 2개의 기둥이 버티고 있는 위에 지붕을 얹는, 정교한 건축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역학적으로 중심의 힘을 이용해 절대의 건축미를 살린 불교만의 특유의 양식이다.
이와 같이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지은 이 문의 뜻은 일(一, 하나)라는 데에 있다.
즉, 한 곳으로 마음을 모으는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일심의 의미는 신성한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세속의 번뇌를 깨끗이 씻어내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뜻이다.
자타(自他), 안팎, 옮고 그름이 둘이 아니며 모든 세계가 한 마음에서 벌어진 일심법계(一心法界)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사바세계에서 피안인 열반의 세계로, 또 속세에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자신의 한 마음(一心)에서 일어난 현상이라 보는 것이 불교가 가지는 본질적 세계관이다. 이 문을 경계로 해, 문 밖을 속계(俗界)이고, 문안은 진계(眞界)로 나눌 수 있으며, 이 문을 들어설 때 (부처님께)일심으로 귀의하겠다는 마음을 촉진시키고 결심하게 하는데 그 뜻이 있다.
불교에서는 우주 만유를 일심(一心)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며, 법계(法界) 전체를 일심의 그림자로 보기에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으며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했고,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