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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와 여우" 20세기 대표 석학 이사야 벌린,
영원한 여우였던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논하다
톨스토이의 삶은 대체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불멸의 걸작을 남긴 작가로서의 삶이며, 후반부는 개인적으
로나 사회적으로 거듭 태어난 예언자로서의 삶이다.
또한 전반부는 귀족 출신의 작가로 까다롭고 약간은 접근하기 힘든 천재 소설가로서의 불온한 삶이며, 후반부는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이며 과장을 일삼았지만 나름대로 독특한 세계인 러시아에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른 현인
으로서의 삶이다 .(p.36)
톨스토이의 결정론과 현실주의, 염세적인 세계관, 과학과 세속의 상식이 이성에 부여한 확신에 대한 경멸을 있게 한
근원이 통찰력이다.
모든 것의 근원은 '거기'에 있다. 현명한 사람만이 그 근원을 감지한다.......톨스토이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근원을
간헐적이나마 어렴풋이 보았다.
그 때문에 모든 관례적인 설명, 즉 사려 깊지 못한 '양식'을 근거로 한 과학적 설명과 역사적 설명은 너무나 공허하게
들리고, 더구나 잘난 척하는 설명은 지독한 거짓말처럼 들린다.
톨스토이 자신도 진실이 '여기', 즉 관찰과 구별과 건설적 상상력의 여지가 있는 영역, 요컨대 미시적 인식과 분석이
가능한 영역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톨스토이는 우리 시대에서 미시적 분석의 최고봉이었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보지 못했다. 그에게는 전체를 보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전체를 보는 것처럼 말했을 뿐
이다.
그는 고슴도치가 아니었다. 고슴도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본 것은 하나의 일체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세분화되는 미세한 것들, 무수한 개체로 나뉜 세계를 보았다.
떨쳐낼 수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 재능, 곧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자신의 명철함에 톨스토이는 미치도록 분노했다.
(pp.153-154)
그는 지적인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감, 그러나 도덕적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깨달음에 짓눌려 고뇌
하며 죽어갔다.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것의 갈등을 해소할 수 없었고, 그 갈등을 해소
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도 못한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톨스토이의 현실 감각은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나 통렬해서, 뛰어난 두뇌로 세상을 잘게 쪼개 얻어낸 단위들에서 재
조립해낸 어떤 도덕적 이상과도 양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이런 사실을 부인하는 데 평생 동안 온 힘을 쏟아부었다.
지독히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자기증오에 시달렸고, 박식하면서도 모든 것을 의심했으며, 냉정하면서도 넘치도록
열정적이었고, 남을 경멸하면서도 자기비하가 심했다.
또한 지나친 고뇌에 시달리면서도 초연했고, 가족과 헌신적인 추종자들에서 사랑받고 온 문명세계에서 찬사를 받았
지만 거의 언제나 홀로였다.
톨스토이는 위대한 작가 중에서 가장 애처로운 사람이었고, 콜로누스에서 눈을 가린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해 자포자기한 노인이었다. (pp.179-180)
이사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 _ 우리는 톨스토이를 무엇이라 부르는가.....
The Hedgehog and The Fox...(An essay on Tolstoy's view of history)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자유주의 사상가이자 철학자, 정치이론가이다.
다원주의를 신봉했으며, 사회를 조직하는 문제에 단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시온주의를 확고하게 지지했으며, 단호한 반공주의자였다.
1917년 어린 이사야 벌린은 러시아 혁명을 목격하면서 충격을 받았으며 1921년 런던으로 이주한 뒤, 고전학, 정치학,
철학, 경제학을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비코와 헤르더》《자유의 두 가지 개념》
《러시아 사상가》《개념과 범주》등이 있다.
댄 브라운(Dan Brown)의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처럼 흥미진진한 수필. 고슴도치 코드 vs. 여우 코드.....
하이에크와 케인즈, 김구와 이승만, 김대중과 이명박, 박정희와 김일성의 후계자 박근혜와 김정은....
러시아에서 망명하여 영국에서 주로 활동한 이사야 벌린은 현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그가 지은 《낭만주의의 뿌리》나 《비코와 헤르더》같은 저서도 매우 유명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의 평전 《칼 마르
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의 저자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실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신화화하여 제시한 마르크스의
모습을 깨뜨린다.
또한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마르크스 자산의 심층 심리적 요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의 문체는 간결하고 명확하면서도 아이러니하고, 은근한 유머가 섞여 있어 우리의 흥미어린 관심을 놓치지 않는다.
벌린은 일찍부터 사상사 이외에 러시아 문학에도 관심을 가져 러시아의 대문호 투르게네
프의 여러 작품들을 영어로 변역해왔다.
《고슴도치와 여우》는 이런 문학적 관심과 역사에 대한 관심이 한데 어우러진 작품이다.
여기서 그는 러시아 최대의 소설가인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톨스토이의 대표적 역사소설
《전쟁과 평화》를 통해 살펴본다.
이는 벌린과 같이 원숙한 종합적 사유의 대가가 아니라면 감히 기획하지 못했을 통쾌한
학문적 시도이다.......
벌린은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한 설명에서 독특하게도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우화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고슴도치'란 모든 것을 일원적 원리로 환원하려는 사상가들을 말한다.
궁극적 진리, 최종 목적에 대한 광신적 열광을 통해 이들은 역사적 삶을 폭력적으로 재단
하려 한다. 벌린은 서구에서 낭만주의적ㆍ영웅주의적 역사관이나 계몽주의적인 과학적
사회학이 이런 고슴도치적 역사관이라 규정한다.
이런 사상가들에 반해서 '여우'란 현실의 혼란이나 모순조차 기꺼이 받아들이는 현실주
의적 사상가들을 말한다. 이들은 삶을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살펴보면서, 원리보다는
인간의 실제적 행복에 더 충실하려 한다........
결국 벌린은 톨스토이 내부에서 원리에 대한 열정과 치밀한 세부에 대한 탐구가 서로
대립하면서도 맞물려 있다고 주장한다.
원리에 대한 열정은 더욱 치밀한 세부 연구를 야기했으며, 이런 세부 연구는 갈등과
대립 속에 있으므로, 통합적 원리에 대한 갈증이 더욱 강해졌다는 것이다.
벌린은 여기서 톨스토이의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활동 사이의 간격을 지적하고 있다.
의식적으로는 원리를 믿지만, 그의 실제 연구 활동은 세부를 추구한다.
이는 벌린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론적 확신'과 '본능적 판단' 사이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벌린은 톨스토이를 '고슴도치처럼 보려는 여우의 열망'이라든가 '단원론적 세계관을 향한 여우의
열정적 욕망'이라 규정한다.
따라서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는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한 변호이면서, 동시에 벌린 자신의 사상사적 입장에
대한 변호가 아닐까 싶다.
벌린의 해석은 톨스토이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는 구분된다.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러시아가 궁극적으로 승리한 원인을 러시아 민중의 영적인 각성에 있다고 보았다.
즉 그리스도적 사랑과 구원의 정신을 향한 각성이 나폴레옹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야심의 정신으로부터 러시아
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벌린은 전통적 해석이 톨스토이의 역사관에서 여우적 측면을 간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 추천의 글, 동아대학교 철학과 이병창 교수 -
역사는 무한소(無限小)의 충적(充積)이다....
그리스의 시인, 아르킬로코스(Archilochus)는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
라고 말했다.
학자마다 해석이 다를 정도로 모호한 말이긴 하지만 여우가 온갖 교활한 꾀를 부려도 고슴도치의 한 가지 확실한
호신법을 이겨낼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상징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때, 이 말은 작가와 사상가를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 넓게 말하면 인간 간의
차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이런 시스템은 모든 것을 조직화하는 하나의 보편 원리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시스템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느낀다.
다른 한 부류는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 목표들은 흔히 서로 관계가 없으며 때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물론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이유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관계이지만 도덕적이고 미학적 원리에 근거한 관계는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행동지향적이며, 생각의 방향을 좁혀가기보다는 확산시키는 경향을 띤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은 산만하고 분산적이다. 또한 다양한 면을 다루면서 아주 다채로운 경험과 대상의 본질을 포착
해나간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찾아낸 본질을 받아들일 뿐, 모든 것을 포괄하고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의 비전에
그들 자신을 맞춰 가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런 비전은 간혹 자기모순적이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광적인 경향을 띤다.
첫 번째 부류의 지식인과 예술인이 고슴도치에 속한다면, 두 번째 부류는 여우에 속한다.
지나치게 경직된 분류이고 모순의 위험이 있지만, 이런 구분이 가능하다면 단테는 고슴도치형이고 셰익스피어는
여우형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플라톤, 루크레티우스, 파스칼, 헤겔, 도스토옙스키, 니체, 입센, 프루스트가 고슴도치
형에 속한다면 헤로도토스,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에라스무스, 몰리에르, 괴테, 푸시킨, 발자크, 조이스는 여우형
에 속한다.
물론, 이런 식의 지나친 단순화에 따른 이분법은 압축적이고 인위적이고 학문적이며 불합리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분법이 진지한 비평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피상적이고 무가치한 것이라 일축해버릴
필요는 없다.
어떤 구분이라고 약간의 진실은 담고 있듯이, 이런 구분도 세상을 관찰하고 비교하는 하나의 관점, 즉 진지한 연구
를 위한 출발점을 제시해준다. (pp.21-23)
톨스토이는 일찍부터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과거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기보다는 어떤 사건의 제1원인을 알고 싶은
욕구, 즉 사건이 그런 식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싶은 욕구 때문에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듯하다.
현상을 완전히 설명하지 않은 채 찜찜한 부분을 남겨둔 당시의 설명에 대한 불만에서, 또한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의심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필요한 경우에는 거부까지 하면서 모든 문제의 뿌리까지 파헤치
려는 성향 탓에 역사에 관심을 가진 것 같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이런 성향을 평생 동안 간직해서, '속임수'나 '피상성'이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성향과 더불어 구체적이고 경험적이며 입증 가능한 것을 지극히 사랑했고, 실체가 없고 추상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은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요컨대 적어도 초기에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으로 접근했고, 낭만주의와 추상적 설명 및 형이사항에 그다지 호의적
이지 않았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톨스토이는 '냉혹한' 사실, 즉 보통 사람의 지능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입증할 수
있는 것을 추구했다. (pp.43-44)
톨스토이는 "역사는 과학과 예술과 윤리 간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선과 악의 관계, 종교와 시민다운 미덕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역사는 훈족이 어디에서 왔고, 훈족이 어느 시대에 살았으며, 누가 훈족을 강대국으로 키웠는지에 대해 말해줄 뿐
이다"라고 말했다.....마르크스는 다윈의 새로운 진화론으로 인해 혁명적으로 탈바꿈한 생물학과 해부학의 변화를
꿈꾸었다.
《전쟁과 평화》를 쓸 당시에는 마르크스의 존재조차 몰랐겠지만, 톨스토이도 마르크스처럼 역사가 과학이라면
역사를 지배하는 일련의 법칙을 찾아내서 공식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문학이나 지질학에서 그렇듯이, 경험적 자료를 통해 과거를 복원하거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법칙이어야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런 바람이 성취되지 못했다는 것을 마르크스나 그의 추종자들보다 더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평소처럼 그런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런 목표를 성취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논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보강하고, 이런 과학적 목표의 성취는 곧 인류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라며 논의를 마무리
지었다.
"인간의 삶을 이성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의식적 차원의 자유의지와 관련된 충동적 행위로 인해 삶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역사는 인간과 사건의 상호작용을 기록하는 데 목표를 둔다면서, 이처럼 무한히 복잡한 현상을 일정한 과학적 법칙
에 끼어 맞추려는 사람들도 어떤 의도를 지닌 사기꾼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맹인들에게 길을 안내하겠다고 나선 맹인 지도자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가혹한 비판은 이론가의 우두머리, 즉 나폴레옹까지 겨냥한다. 나폴레옹은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어,
역사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올바로 대답할 수 있는 남다른 지능과 뛰어난 직관으로 사건들을 이해하고 조절했다고
믿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사실 대단한 주장일수록 더욱 큰 거지말이다. 결국 나폴레옹은 이 엄청난 비극에 관련된 모든 인물 중에서 가장 불쌍
한 사람인 동시에 가장 경멸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톨스토이는 '개인이 자력으로 사건들의 흐름을 이해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착각을 폭로하려 애썼다.
또한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단호히 증명하려 노력했다. 이 무성의한 사람들은 반쯤은 착각으로,
그러나 반쯤은 속인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체면을 유지하고 처절한 진실을 피하기 위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아무런 목적도 없이 말을 하고 글을 쓴다.
하지만 인간의 무력함과 무지함을 감추려고 복잡하고 교묘하게 꾸민 세계 뒤에 실제 세계가 존재한다.
인간이 일상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들까지 주시하면서 깨달아야 할 삶의 흐름이다.
톨스토이는 이런 실제의 삶, 즉 개개인이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일상의 삶과, 역사학자들이 꾸민 파노라마 식 삶을
비교했다. 그에게는 어느 쪽이 실제의 삶이고, 어느 쪽이 일목요연하고 때로는 그럴듯하게 꾸며졌지만 거짓에 불과
한 삶인지 분명했다.
문화 역사학자가 사상에 부여하는 중요성에 대해서도 의문은 있다.
모두가 자신의 상품은 중요한 것이라고 과정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사상은 지식인들이 다루는 상품이다.
구두 수선공과 비교하면 가죽과 다를 바가 없다.
교수들은 세상을 지배하는 그 핵심적인 '힘'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톨스토이는 정치 이론가, 윤리학자, 형이상학자 덕분에 '힘'의 미스터리가 훨씬 아리송해졌다고 덧붙였다.
'사회계약'이란 유명한 개념을 예로 들어보자. 일부 자유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계약은 많은 사람의 뜻,
즉 '힘'을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집단에게 '부여'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이런 '부여'는 어떤 유형의 행위일까?.......군주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힘을 어떻게
상품처럼 축적하는가에 대한 사실적 설명은 없다.
그저 힘의 부여가 힘을 만들어낸다고 말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동어반복에서 밝혀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p.47-68)
영웅중심적 역사론을 거부한 후, 톨스토이는 과학적 사회학에 맹폭을 가했다. 과학적 사회학이 역사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사건에 관련된 원인의 수가 인간의 지식이나 계산 능력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많아 실제로는 어떤
법칙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극소수의 사건을 알 뿐이고, 개인적 성향에 따라 무작위로 그런 사건을 선택한다.
만약 우리가 전지전능하다면 라플라스(Pierre-Simon, Marquis de Laplace, 1749년~1827년)의 이상적인 관찰자처럼
역사의 물줄기를 이루는 물방울 하나하나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무지한 존재이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부분과, 톨스토이가 특히 강조했던 것으로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부분에 비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는 극히 미약하다.
의지의 자유는 결코 떨쳐낼 수 없는 환상이지만, 위대한 철학자들이 말했듯이 의지의 자유는 환상이더라도 진정한
원인을 모르는 데서 비롯되는 환상일 뿐이다.
어떤 행위의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을수록 그 행위는 결국 우리에게서 더 멀어지고 그 결과는 머리에서 떨쳐내기
어렵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에 깊이 관련된 현상일수록 다른 변수가 생기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하기 힘들다.
그 현상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즉, 다른 식으로 생각하면 현재의 질서가 크게 뒤집어질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행위와 그 상황을 우리가 밀접하게 결부시킬수록 행위자는 자유롭게 처신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덜어지며, 그 결과로 우리도 그에게 책임을 묻거나 그를 비난하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모든 원인을 찾아낼 수 없고, 인간의 모든 행위를 관련된 상황과 일일이 결부시킬 수 없다고 해서 인간의
행위가 자유롭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가 필연적으로 그렇게 행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우리가 결코 알아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떤 점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칼 마르크스가 한 계급에 국한시킨 부분을 톨스토이는 거의 모든 인류에서 보았
다는 점을 제외하면, 톨스토이가 집중해서 다룬 주제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부르주아 계급의 운명적인 '자기기만'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톨스토이는 자연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법칙이 있듯이 그와 유사한 자연법칙이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은 그 냉혹한 과정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과정을 일련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받아들이
면서,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영웅적 자질을 가진 사람, 즉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에게 사건의 책임을 떠넘
기려 한다.
그런데 위인은 어떤 사람일까? 위인도 무지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다만 사회적 삶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떠맡을
정도로 허영심이 강하고, 그의 의지나 이상과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사건의 흐름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하찮음을
인정하기보다는, 모든 잔혹행위와 불법행위, 재앙에 대한 비난을 고스란히 떠안는 사람일 뿐이다. (pp.69-72)
독일의 전통적인 관념론이 톨스토이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더라도 그는 적어도 쇼펜하우어에 대한
동경심을 감추지는 않았다.
그가 쇼펜하우어를 매력 있게 생각한 이유를 추측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 고독한 사상가는 요지부동인 우주의 법칙과 필사적으로 싸워야 하는 무력한 인간의 의지를 비관적으로 그렸다.
그는 열정의 덧없음, 합리적 시스템의 모순, 행위와 감정의 비합리적 원인을 이해할 수 없는 무력함, 어떤 육신도 벗
어날 수 없는 고통을 말했다.
따라서 극도의 정적(靜寂) 상태에 몰입하면서 인간의 취약함을 줄여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은 열정을 떨쳐내고 초연해서 실망하지도 않으며 굴욕감을 느끼지도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이런 철학은 톨스토이의 후기 세계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즉, 인간이 너무나 많은 것을 탐하고 어리석을 정도로 꿈이 크며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하기 때문에 많은 고통
을 받는다는 세계관이다.
한편 착각에 불과한 자유의지와 세계를 지배하는 현실적인 철칙을 뚜렷이 대조시키는 방법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착각은 쉽게 떨쳐 낼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을 필연적으로 낳게 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쇼펜하우어의 그림
자가 분명히 보인다.
쇼펜하우어와 톨스토이, 둘 모두에게 이런 인과관계는 인간의 삶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비극이다.
아무리 영리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고, 세계의 역사라는 질서정연한 운동을
결정하는 무수한 요인들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간만이 깨우칠 뿐이다.
인간이 무의미한 혼돈밖에 실제로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질서가 틀림없이 존재하리라고 필사적으로 믿기 때문에
질서를 인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뻔뻔스럽고 터무니없는 짓이란 사실도 인간만이 알고 있다.
특히 혼돈의 극한적 형태, 즉 무질서한 인간의 삶이 극도로 반영된 소우주가 바로 전쟁이다. (pp.106-108)
전쟁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전반적인 영향과 더불어 전투와 전쟁의 무질
서와 통제 불능에 대한 메스트르(Maistre)와 톨스토이의 유사한 생각,
그리고 인간의 폭력성과 전쟁욕을 설명하려고 상아탑의 역사학자들이
제시하는 순진한 설명을 향한 두 사람의 경멸은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
알베르 소렐(Albert Sorel)이 1888년 4월 7일 정치학 학교에서 했던 유명
한 강의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소렐은 메스트르와 톨스토이를 비교하면서, 메스트르는 신권주의자인
반면에 톨스토이는 '허무주의자'이지만, 이들 모두 사건의 제1원인을 초
자연적이라 생각하면서 인간의 의지를 무가치한 것으로 왜소화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소렐은 "신권주의자에서 신비주의자까지, 신비주의자에서 허무주의자까
지의 거리가 나비에서 애벌레까지, 애벌레에서 번데기까지, 다시 번데기
에서 나비까지의 거리보다 짧다"라고 말했다......
메스트르와 톨스토이는 심리, 사회, 문화, 종교에서 어떤 교차점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환멸감은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신랄한 회의주의라는 형태
로 구체화되었다. 또한 자유주의, 실증주의, 합리주의 등 당시 서유럽에서 득세하던 고상한 세속주의을 표방한 온갖
이론에 대한 불신으로도 나타났다.
따라서 감상적 낭만주의자, 인본주의적 역사학자, 낙관적 사회 이론가가 눈길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인간사의
'바람직하지 않은 면'을 톨스토이와 메스트르는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
메스트르와 톨스토이는 지식인들에게도 냉소를 퍼붓고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메스트르는 지식인들을 역사적 과정에서 태어난 괴물(신이 인간에게 겁을 주어 옛 로마시대의 신앙으로 돌아가게
만들려고 창조한 요주의 인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 위험한 존재, 즉 젊은이들에게 의혹을 품게 하고 그들
을 타락시키는 해로운 집단으로 보았다.
따라서 신중한 지도자라면 그들의 유해한 행위에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톨스토이는 지식인을 증오하기보다는 경멸하며, 그들을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는 착각에 사로잡힌 불쌍하고
멍청하며 방향감각을 상실한 피조물로 취급했다.
메스트르는 지식인들을 사회와 정치의 문제에 무작정 뛰어드는 메뚜기떼, 가장 신성하게 여겨야 마땅하고 교황과
교황청의 영웅적인 노력으로 지켜내야 할 기독교 문명의 심장을 좀먹는 궤양으로 보았다.
톨스토이는 지식인들을 영리한 바보, 단순한 사람이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현실에는 눈과 귀를 닫아버린 채 세련
된 멋만을 덧없이 추구하는 떠버리라고 해석했다.
때로는 외고집의 늙은 농부처럼 거칠게 지식인들을 공격했고, 오랫동안 침묵한 후에는 '아는 것이 많아서 모든 것을
설명하겠다고 골 빈 소리를 지껄여대며 남보다 우월한 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만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도시에서 자란
원숭이들'이라며 복수의 칼날을 세웠다.....
메스트르는 교황권 지상주의자였고 기존 제도의 열렬한 옹호자였지만 톨스토이는 초기 작품에서 정치와 일정한
경계를 두면서 급진적 성향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둘은 막연하게나마 허무주의적 경향을 띠었다. 달리 말하면, 19세기의 인도주의적인 가치가 그들의 손끝에
서 산산조각 난 것이다. 그들은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불가피한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방법을, 그들의 선천적인 경향
과 기질로 인한 결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광대하고 확고한 진리에서 찾으려 했다......
그 둘은 합리적 수단, 훌륭한 법의 시행, 과학적 지식의 확신 등을 통해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에 똑같이
냉소적이었고 비관적이었다. 그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이론들, 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비책을 빈정댔고,
특히 인간이 만든 몇 가지 공식에 맞춰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고 유지하겠다는 주장에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또한 선의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 몽상가들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며 선전하는 세속적
믿음과 노력, 전문가들과 자연과학적 기술에 대해 메스트르는 노골적으로 회의를 드러냈고 톨스토이도 크게 다르
지는 않았다......
톨스토이의 역사 해석과 메스트르의 사상에서는 포괄적이고 중요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과거의 지식과 관련된 근본적인 원칙이라는 쟁점을 제기한다는 점이다.
비슷하기는 고사하고 적대적이라 할 수도 있는 두 사상가의 생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공통점 하나는 사건의 '가차
없는' 특징, 즉 진행 과정에 대한 집요한 천착이다.
톨스토이와 메스트르는 현재 일어나는 일을 한 치도 내다볼 수 없을만큼 복잡하게 뒤얽힌 망이라 생각했다.
즉 사건, 사물, 사람 등이 문자 그대로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무수한 관계로 연결되고, 그런 결함은 눈에 띄기도
하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보았다. (pp. 123-139)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 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속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도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입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