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산문의 창작(詩⋅poetry)적 변화>
솔 기
박종희
(수필가)
어머니가 또, 옷을 벗었다. 밤도깨비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혼자 숟가락질도 못 하시는 분이 단추가 달린 환자복을 술술 벗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노인병원의 간병사는 “그러니 이곳에 계시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건 괜찮은데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죠.”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은 퍽 언짢은 표정이었다.
밤새 환자복과 실랑이하던 어머니는 날이 밝으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싶어 고민하다가 어머니가 벗어놓은 환자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뒤집힌 환자복의 솔기 부분이 내가 입어도 불편할 만큼 거칠었다. 수선이 필요 없는 환자복이라 그런지 겨우 솔기를 박을 수 있을 만큼 좁은 시접이 휘갑치기도 안 된 채 뭉쳐있었다. 그제야 옷을 벗는 어머니 심정이 이해됐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밤에 옷 벗으면 큰일 난다며 어머니께 으름장을 놓았으니.
땀 흘린다고 맨살에 환자복을 입혔으니 얼마나 불편하고 성가셨을까. 종일 누워 지내는 어머니한테 솔기가 배겨 자국이 남았다. 나약한 어머니한테 솔기는 어쩌면 주삿바늘 같은 무기였을 지도 모른다. 뭉쳐진 솔기를 보니 아버님한테 가려져 평생 덧니처럼 살아온 어머니의 삶과 닮아 보였다. 정신이 흐려도 생각은 있으신지 솔기를 뜯다 만 환자복에서 어머니의 지난 한 세월이 웅성거렸다.
어머니는 가난하고 형제 많은 집안에 장녀로 태어나 공부를 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바깥사돈끼리 중매 서는 바람에 어머니는 종갓집 둘째 아들인 시아버님과 얼굴도 안 보고 혼인했다.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 아버님은 성품이 바르고 인물이 출중해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학자였다. 그때만 해도 자식을 대학까지 보내는 집은 거의 없었다. 할아버님은 시아버지를 공부시킨 대가로 나이 어린 동생과 조카들을 공부시키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신혼 때부터 시동생과 큰댁 조카의 도시락을 싸느라 허리를 졸라매었다. 박봉의 교사월급을 쪼개 시동생 뒷바라지하느라 늘 허기가 졌다. 아버님의 힘으로 대학까지 마친 작은아버님은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대기업에 취직하고 간호사로 일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키도 작고 전라도 여자라고 집안에서 반대하던 작은아버지의 결혼성사에 큰 역할을 한 아버님께 작은어머니는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따지고 보면 작은아버님이 큰 인물이 되기까지 밥해 먹이고 빨래해준 어머니의 공도 컸는데 작은어머니는 아버님한테만 인심을 베풀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마을에서도 내로라했던 아버님과 배움이 없는 어머니와의 혼사는 애초부터 기울었다. 옷 속에 숨어 존재가 무색한 솔기처럼 잘나신 아버님에 묻힌 어머니의 자리는 늘 옹색했다. 직장생활을 오래 해 요령 많고 약삭빠른 작은어머니에 비하면 촌부인 어머니를 아버님도 은근히 무시했다. 아버님은 술만 드시면 어머니께 술주정했다. 미련한 곰 같다며 술 주전자를 방바닥에 집어 던지기도 했다. 아버님이 어머니를 무시하니 자식들도 어머니를 우습게 여겼다.
그런 아버님께 한마디 불평을 할 만도 한데 잔사설이 없던 어머니는 가타부타 입을 떼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쓸쓸하던 마음 자락을 접어 솔기처럼 봉합했던 것 같다.
솔기는 옷감을 이어주는 재봉선이다. 옷감이 아버님이라면 솔기는 어머니였다. 부부가 일심동체이듯 솔기를 꿰매야 비로소 옷의 모양을 갖춘다. 솔기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바람을 막아주고 속살이 보이지 않게 내밀히 옷을 보호해준다. 그러고 보면 솔기는 단순히 옷감을 꿰맨 자국이 아니라 묵묵히 아내의 자리를 지키게 하는 마법의 바늘땀이었다.
숙명처럼 순종하고 살던 어머니한테 자유를 주고 싶으셨던 걸까. 아버님이 먼저 세상을 뜨셨다. 아버님을 떠나보내고 나서 어머니가 조금씩 이상해졌다. 아버님이 계실 때는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어머니가 변하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에도 벌컥벌컥 화를 내기 일쑤였다. 어둠 속에서 혼자 감칠질 하던 세월이 길었던지 어머니는 꿰매던 솔기를 풀어헤쳤다. 치매를 앓는 사람처럼 변덕스러워진 어머니의 마음이 날씨처럼 맑았다가 흐렸다가 갈마들었다.
봉합했던 마음 자락을 뜯어내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어머니는 물건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사시는 동안 천 원짜리 팬티 한 장도 당신 손으로 사 입은 적이 없는 어머니는 옷에 욕심을 부리고 화장품에도 관심을 가졌다.
얼마나 부럽고 한이 되었으면 그랬을까. 어머니는 매일 당신 것을 만들었다. 화장실에서 치약이 없어지고 찬장에서 접시가 없어졌다. 어떤 날은 프라이팬이 없어지고 쟁반도 없어졌다. 그렇게 없어진 물건은 어머니의 장롱 깊숙이 숨어 있었다.
평생 당신의 의견 한 가지 못 내고 사시던 분이 매사에 간섭하는 일도 잦아졌다. 내가 퇴근해 돌아오면 놀다가 늦게 다닌다고 억지를 부렸다. 목욕을 자주 간다, 음식이 싱거워 간이 맞지 않는다며 며느리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셨다. 항상 뒷전에서 아버님 눈치만 보던 어머니가 어른 노릇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기분이 맑은 날이면 어머니는 아버님 뒤에서 솔기처럼 사시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일 저일 아버님과의 일을 순서 없이 늘어놓으면 내가 알아서 대충 솔기를 꿰매야 했다. 어머니를 보면 가끔 이해 안 되는 것이 있다. 과거가 무엇이길래,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놈이길래 금방 왔다 간 사람도 잊어버리는 어머니가 과거에 있었던 일은 깨알같이 꿰고 계실까.
밤마다 알몸 소동으로 간병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어머니의 환자복을 바꾸었다. 솔기가 뭉쳐 상처를 내는 환자복 대신 시접 처리가 잘 된 우주복으로 샀다.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환자복을 뒤집어 보여 드렸다.
문득 무슨 생각이라도 나는 것일까. 솔기를 말아 쥔 어머니가 잇몸을 다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아버님이 어머니의 솔기가 되어주시는 걸까. 순하게 웃는 어머니의 얼굴 위에 아슴아슴 낯익은 아버님의 모습이 보인다.
([선수필] 2018 가을 호)
<수필산문의 창작(詩⋅poetry)적 변화>
|작법공부|
필자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으로부터 지난 2천 수백 년 동안 지구촌에서 논의되어 온 모든 문학이론들을 한 품에 안고 있는 지난한 질문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곧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직결되는 질문이면서 그 위에 ‘예술’이라는 짐까지 얹고 있는 질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대답은 ‘문학이란 창작이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창작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있을법한’ 즉 ‘개연성(蓋然性⋅probable)’을 만들어내는 일이라 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더 구체적으로 ‘허구’를 창작하는 일이라고 한다.
‘수필도 문학이냐?’는 1백 년 묵은 세상의 힐문은 두 가지 뜻을 품고 있는 발길질이다. 첫째, 그것이 설사 문학의 한 종류라 해도 ‘허구’를 창작하는 순수문학은 아니라는 뜻이다. 둘째, 그런데 그나마 수필은 비허구 문학, 즉 일반산문에도 들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수필에 대한 세상의 발길질에 수필은 무려 1백 년 동안 단 한 마디의 합당한 대답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수필이 현대문학 초창기부터 ‘신변잡기’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려고 하였다면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분명하게 선택하였어야 되었다. 첫 번째는 ‘수필은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적 수필이다.’라는 선택을 하였거나, 아니면 갑오경장(1894)이래 시, 소설, 희곡 등 문학 전반은 물론 음악, 미술 등 예술전반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서구현대문예사조’에 의한, 즉 현대문학 이론에 근거한 문학을 선택하였어야 되었다.
그러나 ‘수필’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분명하게 선택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필의 개념을 지구촌 문학사에서 보도 듣고 못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이다.’라고 해 버린 것이다.
수필이 ‘우리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 수필이다.’를 선택하였더라면 진즉에 <창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창작적>인 아름다운 작품들을 생산했을 것이다. 우리 고전수필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창작수필이 그득히 쌓여 있다.
또 수필이 현대문학 이론에 근거한 문학을 하기를 선택하였더라면 <창작적> 뿐만 아니라 김형석 교수와 이어령 교수 같은 불출세의 빼어난 에세이 작품들에는 못 미친다 해도 저분들의 명성에 함께 휩싸이는 남부끄럽지 않은 에세이문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은 현대문학 초창기에 이 두 가지 선택을 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학적 국적불명의 ‘붓 가는 대로’를 자신들의 글쓰기 정신으로 삼아버리고 만 것이다. 이로써 수필은 ‘창작’은 물론 ‘창작적’ 변화의 길마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들 끼리만 북치고 장구치는’ 글쓰기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해마다 북치고 장구치는 <수필의 날>이 그 적나라한 모습이다.
문학이란 앞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있을 법한 이야기’ 즉 ‘허구’를 창작하는 일이다. 이 같은 문학 동네 이웃에라도 살면서 문학동네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허구’는 아니더라도 ‘허구적’인 이야기는 만들어내야 나도 문학동네 근처에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필가들은 ‘허구’라는 말만 나오면 문학적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다.
문학에서 말하는 ‘허구’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가? 시는 ‘시어’라는 ‘허구적 언어’를 창작한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할 때 현실에는 ‘마음이라는 호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누가 이 시어를 읽으며 ‘뻥 까지 말라’고 하는가? 소설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던 이야기를 창작한다.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 속 소년 소녀의 풋사랑 이야기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놓고 누가 ‘샛빨간 거짓말’이라고 고개를 흔들 것인가?
인류는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 두 가지 큰 허구적 창작세계를 창작하여왔다.
그렇다면 본래 창작문학이 아닌 일반산문문학이던 몽테뉴의 에세이가 찰스 램을 만나 순문학적 에세이(백철)로 변한 후의 그 <순문학적 에세이>라는 것은 무엇을 창작하는 문학인가? 창작에세이, 즉 우리말로 <창작산문>은 시처럼 시어를 창작하는가? 아니다. 그러면 소설처럼 허구적 이야기를 창작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창작산문은 무엇을 창작하는가? 시어는 시문학이 일찍부터 차지해 버리고, 허구적 이야기는 고전문학시대부터 서사문학이 차지해 버렸다. 그렇다면 남은 것이 무엇인가? 더구나 에세이는 <순문학적 에세이>로 변한 후에도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문학양식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사실의 소재를 작품 속에 끌고 들어와서 그것을 허구적 창작물로 바꿔놓을 수 문학적 방법이 무엇인가? 이 지난한 문제에 대한 대답을 명쾌하게 해 주고 있는 것이 이 작품 <솔기>다. 필자가 30년 이민에서 돌아오자마자 등단지 [現代文學]지로부터 ‘수필은 신변잡기’ 이유로 쫓겨난 충격을 안고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알아보기 시작하였을 때 발견한 것이 찰스 램에서 본격 시작된 <창작적 에세이>의 대표적 양식이 다름 아닌 <소재에 대한 비유창작>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 후 필자는 <창작산문>의 이론 창안을 하는 한편 작법지도를 하여 근 10여 권의 창작작품집을 출간하게 하였다.
이 작품은 필자가 가르쳐서 창작하게 한 어느 작품에 못지않게 뛰어난 작품이다. 필자는 이 작품의 작가 박종희 작가를 전혀 모른다. 그래서 더욱 묻고 싶다. “어디서 누구에게 이 같은 작법을 배웠습니까?” 내가 이 같은 질문을 하고 싶은 까닭은 대한민국 수필문단에는 ‘비유을 쓰지말라’고 가르치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산문’이 1백 년 전에 듣기 시작한 ‘신변잡기’ 손가락질을 1백 년이 지난 지금도 듣고 있게 된 책임이 바로 이 같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 수필교실 선생, 수필계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박종희 작가가 속해있는 그 동네 수필문학 단체 회장이나 수필교실 선생은 ‘신변잡기’, ‘수필도 문학이냐’는 세상의 손가락질로부터 박종희 작가를 변호해 주고 문학적으로 지켜주고 있는가? 사교단체 회원들은 세상이 사교집단이라고 손가락질 해도 오히려 똘똘 뭉친다. 수필도 그런 것인가?
문학을 좀 아는 독자라면 이 작품에서 시도 읽고, 소설도 읽은 것 같은 감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찰스 램에서 비롯된 제3의 새로운 창작문학 양식의 기본 구조다. 창작산문(산문의 시)은 시문학의 전통과 소설문학의 전통을 하나의 양식 속에 융화시키고 있는 문학양식이다.
<산문의 시> 문학은 실제 작품에서 어떤 창작구조를 보여주는가? 이 작품의 소재 ‘옷을 벗는 어머님’ 이야기는 ‘사실의 이야기’이다. 사실의 이야기는 창작이 아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사실의 이야기만 있는가?
눈들이 있다면 똑바로 보라! 그리고 정직하게 대답하라! 이 작품에는 ‘옷을 벗는 어머님 이야기’만 있는가?
아니다!
<‘옷을 벗는 어머님 이야기’라는 사실의 이야기 이것>을 [‘솔기’라는 저것]에 빗대어 꿰매(빗대)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창작이다. 만약에 이 작품이 <환자복을 자꾸 벗는 시어머니가 이상해서 살펴봤더니 환자복 솔기가 거칠어서 몸에 찔려 그랬다는 것을 알았다.>는 <이것> 이야기만 하고 말았다면 그것이 다름 아닌 ‘신변잡기’다.
그러면 어머니의 생애를 [솔기라는 저것]에 <빗대는 이야기>는 사실의 이야기인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수필교실 선생, 수필비평가(?), 수필단체 회장, 수필잡지 발행인들아!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할 때 ‘마음을 호수에 빗댄’ 그것은 사실의 이야기인가?
비유창작은 모든 예술창작의 원형이다. 산문의 시(창작산문)는 바로 그 모든 예술의 창작원형을 창작형식으로 삼는 문학양식이다. 이를 가리켜 <허구적 사실의 소재 형식>이라 한다.(창작에세이학 원론 이관희 도서출판 비유 2017)
‘허구적 사실의 소재 형식’이란 ‘한 손으로는 사실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구의 손을 잡고 있는 형식’이라는 뜻이다. 현대인이라면 이것이 무엇인가 누구나 너무나도 잘 알 것이다. 가상현실 형식이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은 ‘사실’이 ‘허구’를 입고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공부는 학교 정문을 들락거리는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학위가 공부를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다. 공부는 학교에서도 오직 책을 가지고만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는 감옥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개론서 한 권만 읽으면 면할 수 있는 문학적 무식을 1백 년 동안 책 한 권을 읽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무식’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것이다.
이 작품은 ‘환자복을 벗어버리는 어머님 이야기’라는 사실의 이야기를 ‘옷의 솔기에 빗대이므로’ <옷의 솔기 같이 살아오신 한 여인의 지난 한 삶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다. 한국에서 찰스 램의 뒤를 잇는 이 같은 새운 양식의 창작이 발아하기 시작한 것은 최남선 때 부터다.(「가을」 1917 –최남선 「가을」 발표 1백 주년 기념행사를 2017년 11월에 뉴서울 국제호텔 연회장에서 거행한 바 있음)
예술창작은 매뉴얼을 보고 따라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창작’이라는 용어의 뜻 그대로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는 것이 창작이다. 그 같은 창작을 하려면 창조적 작용을 할 수 있는 뇌 구조 형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정도로 뛰어난 창작을 할 수 있는 뇌 구조를 갖춘 사람이 ‘신변잡기’ 손가락질이나 받는 수필계에 몸 담고 있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알 수 없다.
<산문의 시 발행인, 문학평론가/ 이관희>
첫댓글 가슴을 후벼파는 평입니다.
수필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봐야 할 글입니다.
모처럼 제대로 된 글 읽은 기분이 상쾌합니다.
이관희 평론가님께서 솔기에 날개를 달아주셨어요. 읽어주시고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