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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묵사 연우강
율령궁의 우담보 집무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유명계가 부하들을 대동하고 율령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유명계를 쳐다보는 우담보의 얼굴엔 승리의 미소가 어려 있었다. 먼저 만나자고 전갈을 보낸 사람은 자신이었지만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승리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우담보만의 착각이었다.
“ 계속 우리 생사림을 핍박하면 식솔을 데리고 대야벌을 나가버리는 수가 있소. 궁주. 그리고 내 가족을 돌려주시오.”
유명계는 우담보를 쏘아보며 최후통첩을 했다.
“ 지금 핍박이라고 하셨소?”
나가겠다는 말에 움찔 놀랐던 우담보는 언성을 높였다.
“ 그럼 수십 명의 밀정들이 생사림을 감시하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참이오?”
“ 그들은 일상적인 활동일 뿐이외다. 림주. 그렇게 따지면 지금 대야벌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밀정들은 목이 잘려야 하오이다. 그리고 난 림주의 가족에게는 손끝 하나 댄 적이 없소.”
“ 정말 날 막다른 골목으로 몰 생각이오? 난 추소백을 만나 적도 없고, 천마삼경을 가지고 있지도 않소이다. 이건 모함이외다!”
유명계 또한 덩달아 목소리가 커졌다.
“ 좋소. 그럼 한 가지만 증명해 주시오. 그럼 생사림에 있는 모든 밀정을 당장 철수시키겠소.”
“ 뭘 말이오?”
“ 얼마 전 생사림에서 여의선천신단 한 알을 제조한 걸로 알고 있소.”
우담보는 이미 밀정을 통해 여의선천신단이 생사림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생사림에 없다는 말은 유명게가 복용했다는 뜻이 되고 백옥수를 펼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셈이 된다.
“ 여의선천신단은....”
유명계는 할 말이 없었다.
여의선천신단을 제조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하자마자 천으로 보냈고, 지금은 두 번째 연단 중이지만 성공 여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그걸 보여주면 림주를 믿겠소.”
“ 난 백옥수를 익힌 적이 없소이다. 궁주. 믿어주시오.”
“ 여의선천신단을 보여주면 밀정을 철수시키겠다고 하였소. 림주.”
우담보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기댈 단서라고는 여의선천신단 밖에 없었다.
“ 난 생사림의 릶주요. 궁주. 유명계의 목을 걸고 말하는 거요. 난 백옥수를 결코 익힌 적이 없소이다.”
유명계는 핏대를 세웠다.
천마삼경을 얻기는 했지만 아직 해석도 채 끝내지 못했으니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 나도 림주를 믿소이다. 하지만 모든 정황이 림주를 향하고 있소. 그 의심을 말끔하게 풀어줄 사람은 내가 아니고 림주요. 여의선천신단...”
“ 접니다. 림주님.”
바로 그때 밖에서 생사림 총관 강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인가?”
유명계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강사인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이게 왔습니다.”
강사인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 이건....”
< 천마삼경을 내놓지 않으면 앞으로도 손자의 시체를 보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엔 아들의 시체를 보게 될 것이다.>
와락!
첩지를 움켜쥔 유명계는 강사인을 보았다.
“ 진천 도련님입니다. 림주님.”
“ 주, 죽었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강사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서찰과 함께 작은 관에 넣어 생사림으로 전달돼 온 것은 다름아닌 유진천 도련님이었던 것이다.
유명계는 고개를 홱 돌려 안쪽을 보았다.
“ 우담보, 넌 후회하게 될 것이다. 반드시....”
유명계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부하들을 이끌고 율령궁을 떠났다.
“ 무슨 일인데...”
우담보는 의아한 얼굴로 유명계를 보았다.
조금만 더 몰아치면 천마삼경을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서찰을 받더니 느닷없이 원독에 찬 눈으로 노려보다가 떠나고 만 것이다.
“ 정말로 납치를 한 것인가?”
문득 유명계의 자식들이 떠올랐다.
우담보는 유명계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자식들을 숨겨두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공연히 율령궁에서 나갈 핑계를 만들기 위해 그랬을 거야.”
우담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가 유명계다. 여의선천신단의 제조비법을 얻기 위해 삼십 년을 기다린 사람이 아닌가? 바보가 아니라면 그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 알아는 봐야겠지.”
설사 그렇다고 해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우담보는 부하를 불러 생사림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 날 밤 천안원의 원주 음양뇌 유선으로부터 생사림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 정말이란 말인가?”
“ 그렇습니다. 궁주님. 유명계의 손자가 관 속에 넣어져 시체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천마삼경을 내놓으라는 협박장도 함께 들어있었답니다.”
“ 천마삼경을 내놓으라는 협박장이 들어 있었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궁주님.”
“ 아뿔싸....”
우담보는 해쓱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 왜 그러십니까, 궁주님?”
유선은 의아한 얼굴로 우담보를 보았다.
“ 당장 밀정들을.....”
“ 궁주님, 남방집삽니다.”
“ 보고하라!”
“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 북방사잡니다.”
“ 보고하라.”
“ 복면인들이 떼거리로 생사림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다는 보고가 접수됐습니다.”
“ 서방사잡니다. 궁주님.”
“ 동방사잡니다. 궁주님.”
“ 결국.......”
우담보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천마삼경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유명계를 불렀다. 더불어 천마삼경에 대한 소문을 이야기하면서 자칫 잘못하면 벌내쟁투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유명계가 돌아갔고, 결국엔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 설마 벌내쟁투란 말입니까?”
유선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벌내쟁투.
그것은 대야벌에 속한 문파간의 전쟁을 의미한다.
대야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련이나 궐 그리고 림 간의 전쟁은 허용돼 왔고, 서로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대야벌은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벌내쟁투가 흔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짧으면 오십 년, 길게는 백여 년에 한 번씩 일어났는데,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벌내쟁투는 삼십 년 전이었다.
장만보 벌주를 배출했던 낭인림이 공격을 받아 멸문당한 일이 있었다.
곧 낭인림은 새로운 무인들로 채워졌지만, 그 일로 인해 장만보를 따랐던 자들은 대부분 숙청되거나, 대야벌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이번엔 천마삼경을 두고 벌내쟁투가 벌어진 모양이다.
“ 문제는 벌내쟁투가 벌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네, 유선!”
“ 천마삼경 때문입니까?”
“ 자네도 소문으로 들었겠지만 천마삼경은 지천의 성역인 마총으로 들어가는 열쇠네, 만일 천마삼경을 회수해자 못하면 전쟁은 대야벌 외부로 확대될 수밖에 없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벌내쟁투가 벌어지면 우린 나서지 못하네. 지금부터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네.”
“ 그럼 천마삼경은?”
“ 감시는 계속해야 하지 않겠는가?”
“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데 급하게 달려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다름 아닌 범일승과 혁세군이었다.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유선은 집무실로 향했다.
“ 크악!”
“ 아악!”
콰앙! 쾅쾅!
처절한 비명과 동시에 생사림 정문이 터져 나가고 복면인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 적이다!”
“ 적이 침입했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 쳐라!”
복면인들은 생사림 무인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안으로 짓쳐들어갔다.
“ 적이다!”
“ 적이 침입했다!”
“ 성환대 적을 막아라!”
생사림 무인들 또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주변을 정찰하던 자들이 죽임을 당하자 곧바로 대열을 갖추어 일사분란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복면인들은 정문으로 들어온 자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정문 좌우 측 담을 넘어 또 다른 복면인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오백여 명 정도였던 자들이 순식간에 이천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생사림 무인들은 밀리기 시작했다.
“ 독을 사용해라! 독물을 던져라!”
생환대의 대주 마수 정립은 부하들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생환대 대원들은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일제히 복면인들을 향해 내던졌다.
퍽! 퍽퍽퍽! 툭! 툭!
독이 가득 담긴 주머니가 터지고, 불어오는 바람에 하얀 분말이 휘날렸다.
“ 컥!”
“ 큭!”
“ 으윽!”
숨을 들이마시다가 분말을 흡수한 자들이 있는 듯, 복면인들 수십 명이 제목을 감싸쥐고 그 자리에 풀썩풀썩 쓰러졌다.
“ 독이다! 호흡을 멈춰라! 돌파하라!”
복면인들 사이에서 우렁찬 함성이 흘러나오고, 그들이 나아가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 오너라! 놈들! 우리 생사림이 어떤 곳인지 확실하게 보여주겠다.”
하룻밤.
비록 그런 규정은 없었지만 지금껏 선례로 보면 하룻밤만 버텨내면 더는 공격을 받지 않았다. 문제는 그 하룻밤을 생사림 무인들이 버텨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 접니다. 림주님.”
신수 강사인은 굳은 얼굴로 유명계의 처소를 찾았다.
“ 벌내쟁투가 시작된 건가?”
유명계 역시 밝은 얼굴은 아니었다.
천마삼경을 내놓으라는 협박 서찰을 받는 순간 벌내쟁투를 예견했다. 하지만 며칠은 시간을 벌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먼저 들이닥친 것이었다.
“ 어떤가?”
“ 잘만 하면 아침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떠날 준비를 하게.”
“ 떠난단 말입니까?”
강사인은 놀란 얼굴로 유명계를 보았다.
“ 이번 일은 하룻밤으로 끝나지 않네.”
“ 그럼?”
“ 천마삼경이 나올 때까지 계속될 거네.”
“ 정말로 천마삼경을 얻으셨습니까?”
“ 내가 얻은 건 맞네. 하지만 난 천마삼경 상의 무공을 단 한 가지도 익히지 못했네.”
“ 추소백의 죽음과는 상관없단 말입니까?”
“ 그렇다네. 누군가의 치밀한 음모에 빠졌네.”
“ 처음부터 천마삼경에 대해 말을 했더라면?”
“ 마총의 전설을 아는가?”
“ 며칠 전에 들었습니다.”
“ 그 전설은 사실이네. 마총을 열기만 하면 우린 지천의 천주였던 천마의 무공을 비롯하여 그를 따랐던 일백마의 무공을 얻을 수 있네. 그것들을 얻을 수 있다면 대야벌과 버금가는 세력을 세우는 것도 꿈은 아니네.”
“ 의림으로 가실 참입니까?”
의림은 강호에 세운 생사림 지부 중의 한 곳으로 가장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었다.
“ 그곳에서 천마삼경을 해독한 다음 함께 마총을 찾도록 하세.”
“ 인원은 어느 정도나 데리고 가실 참입니까?”
“ 오백 명을 선발하게. 백 명씩 다섯 조로 나누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출발시키게.”
“ 탈출도 쉽지 않겠습니다. 림주님.”
“ 이걸 받게.‘
유명계는 품속에서 흑경을 꺼내 강사인에게 내밀었다.
“ 뭡니까?”
“ 흑경이네. 혈경은 장립에게 줄 참이네. 그것들을 가지고 의림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세.”
유명계는 모험을 걸었다.
지금은 도망보다는 배신에 신경을 써야 할 때였다.
만일 강사인이나 장립 등 수뇌들이 배신을 하게 되면 대야벌을 나가기도 전에 죽임을 당하고 말 터였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천마삼경 중 한 권을 강사인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 나가는 시간은 언제로 하실 겁니까?”
강사인은 비급을 품속으로 넣으며 물었다.
“ 놈들을 진식 안으로 몰아 넣은 다음 빠져나가도록 하세.”
“ 알겠습니다. 림주님. 일단 수뇌들을 불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총에 대해서는 말을 해도 됩니까?”
몸을 돌리던 강사인이 다시 바로 섰다.
아무래도 마총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수뇌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 필요하다면 해주게.”
“ 알겠습니다. 림주님.”
강사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고 했다. 내가 믿는 건 대야벌도 밀천도 아니다. 오직 나만 믿는다.”
창가로 자리를 옮긴 유명계는 낮게 중얼거렸다.
불까지 지른 듯, 멀리 보이는 건물로부터 새빨간 불길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생사림에서 불길이 오르고 죽고 죽이는 벌내쟁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원호 근처에서 연공을 하고 있는 잠룡들이었다. 일 년간의 기초 과정을 끝낸 잠룡들에게는 혼자 무공을 시간이 많이 주어지고, 남궁운화 또한 별도로 무공을 익히는 중이었다.
그녀가 의문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은 보름 전이었다. 처음엔 꿈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그것은 다름 아닌 창궁대연신공의 구결이었던 것이다.
잠을 자면서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밤낮 없이 창궁대연신공에 매달리다 보니 이제는 꿈속에서까지 구결이 들려온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구결이 약간 달랐을 뿐 아니라 목소리 또한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멍한 얼굴로 귓전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목소리의 주인이 밖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한밤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무작정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호위를 맡고 있던 네 사람과 함께 목소리의 주인이 오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만난 분이 바로 노할아버지다.
그분은 호위로 따라왔던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잠시 후 네 사람은 모습을 감추었다.
- 난 네 할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란다. 그분 덕분에 팔황정벌에서 살아 올 수 있었다.
- 제게 비급을 전해주신 분인가요?
- 그렇단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네 사부가 될 사람이기도 하단다. 앞으로 노라고 부르면 된단다.
창궁대연신공을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그분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 날부터 노할아버지로부터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놀랍게도 노할아버지는 창궁대연신공뿐만 아니라 남궁세가 다른 무공마저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 창궁대연신공은 하늘을 담아야 완성할 수 있다. 먼저 단전에 하늘을 담고, 그 다음엔 검에 하늘을 담아야 한다.”
“ 네, 할아버지.”
귓전으로 들려오는 창노한 목소리에 남궁운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지금 창궁대연신공을 바탕으로 펼치는 창궁대연검법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다. 창궁대연검법의 기수식은 검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는 동작이었다.
“ 그 상태에서 창궁대연신공을 운기하면 내기는 저절로 검으로 향하게 된다.”
“ 아!”
남궁운화는 탄성을 내뱉었다.
창궁대연검법의 기수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수식을 먼저 취하고 내기를 운용한다는 사실은 비급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다만 기수식과 내기를 함께해야만 창궁대연검법을 펼칠 수 있다고 돼 있었다. 처음엔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확연하게 이해가 됐다.
“ 몰랐느냐?”
“ 기수식과 내기를 함께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할아버지.”
“ 그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니라. 지금처럼 손을 들어올리고 난 후 내기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손이 들리면서 동시에 내기를 끌어올려야 하고, 기수식을 완전하게 취하는 순간 검 끝에서 검강이 솟구쳐야만 완전한 창궁대연검법이라고 할 수 있다.
“ 제겐 검강은 무리에요, 할아버지.”
“ 그건 걱정할 필요없다. 연공이 끝나기 전에 너는 검법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게 될 테니까.”
“ 말만 들어도 기뻐요. 할아버지.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연 공자에게 마구 자랑할 수 있을 거예요.”
“ 연우강 그 녀석을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창노는 소리없이 웃었다.
“ 좋아하는 것보다는 연 공자 때문에 대야벌에 들어올 수 있었어요. 어떻게든 은혜를 갚고 싶어요.”
“ 그 녀석 때문에 대야벌로 들어왔다는 건 무슨 소리냐?”
“ 사실은.....”
남궁운화는 처음 연우강을 만났을 때부터 시자하여, 열일곱 개의 잠룡쟁패를 얻은 사연까지 자세하게 늘어놓았다.
“ 그러니까 남궁세가는 잠룡쟁패를 하나도 받지 못했다는 말이구나.”
“ 그래요, 할아버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창궁대 대원들도 열한 명이 들어오게 됐으니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거죠.”
“ 그럼 남궁세가는 연우강 그 녀석에게 큰 신세를 진 셈이구나.”
“ 은혜를 꼭 갚을 거예요.”
“ 그 녀석이 널 원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 설마요. 연 공자는 절 여자로 보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리고 이지약 소저나 몽요 소저도 연 공자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 제가 낄 자리가 어디 있어요.”
“ 넌 너에 대해 자신이 없나 보구나.”
“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 이지약 소저나 몽요 소저가 너무 예쁘잖아요.”
“ 난 네가 제일 예쁜 것 같은데.”
“ 헤! 그건 할아버지가 저와 친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요.”
“ 넌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운화야, 기수식은 그만하고 이곳으로 누워라.”
“ 알았어요.”
남궁운화는 얼른 창노 앞으로 누웠다.
남궁운화가 눕자 창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퍽퍽퍽! 퍼퍽! 퍽퍽!
창노의 손이 허공을 격할 때마다 남궁운화의 몸에서 둔탁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창노가 펼치는 수법은 혈도를 두들겨 내상을 치료하는 추궁과혈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타혈법의 한 가지인 만타개정대법이었다.
그는 만타개정대법으로 남궁운화의 혈도를 완벽하게 타통시킴은 물론이고 내공까지 전이해 주고 있었다.
“ 이렇게 하고 나면 내공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
“ 네 몸속에 있는 잠력이 내공으로 변하기 때문이란다. 어린 시절에 영약을 복용하지 않았느냐?”
“ 영약은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한 번 먹은 것 말고는 없는데요?”
“ 아마 너도 모르게 복용시켰을 거다.”
“ 그랬을까요?”
“ 그랬을 거다. 그 정도도 못하면 대남궁세가라고 불릴 자격이 없지. 내 말이 틀렸느냐?”
“ 그럼요, 할아버지. 무궐의 벌주셨던 창궁무제 남궁우문 할아버지를 배출한 가문인데 그 정도는 우습죠.”
남궁운화는 활짝 웃었다.
“ 그래 남궁세가는 무림 제일 가문이지.”
창노의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이렇게 착한 여아를, 이렇게 맑은 아이를.
‘ 개자식들.’
그는 저도 모르게 이를 부드득 갈았다.
“ 악!”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남궁운화가 비명을 지르자 창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미안하구나. 잠시 딴 생각을 했다. 그런데 널 따라 들어왔다는 창궁대 녀석들은 만나볼 수 있겠느냐?”
“ 그들에게도 무공을 가르쳐주시게요?”
“ 내가 좀 바쁘더라도 그렇게 해야겠구나.”
“ 내일 나올 때 데리고 올게요.”
“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해야 한다.”
“ 기초 과정이 끝났으니까 지금부터는 비교적 자유롭게 연공할 수 있어요. 아마 잠을 자지 않는 잠룡들은 저처럼 은밀한 장소에서 연공을 하고 있을 거예요.”
“ 그렇구나. 엎드리거라.”
“ 알았어요. 할아버지.”
“ 힘들지 않느냐?”
창노는 측은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며 물었다.
“ 연 공자 같은 사람도 있는데요, 무.”
“ 연우강이 어쨌는데?”
“ 그분은 업둥이잖아요.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열다섯 살 때 군엘 갔고, 지금은 대야벌에서 고생을 하고 있잖아요. 그분보다는 제가 훨씬 형편이 나아요.”
“ 그래 그래야 한다. 항상 너보다 낮은 곳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훌륭한 가주가 될 수 있단다.”
창노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힘들었을 텐데 밝게 커준 손녀딸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 참!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싶으면 연우강 그 녀석에게 부탁해라.”
“ 뜨거운 물로 하는 목욕이라고요?”
“ 몽요도 가끔 이용하는 것 같더구나.”
“ 공짜는 아니잖아요.”
“ 한 번 목욕하는 데 오십 냥이라고 하더구나.”
“ 와! 하여간 돈 버는 덴 귀신이라니까요. 목욕 한 번 하는데 오십 냥씩 주고 어떻게 해요?”
“ 어차피 외상 장부에 쓸 건데 뭐가 걱정이냐?”
“ 헤! 그런가? 그런데 할아버진 연공자를 잘 아세요?”
“ 잘 알다마다. 그 녀석은 내 말이라면 끔뻑 죽는단다. 내가 부탁을 해 놓을까?”
“ 그래주면 좋고요.”
“ 알았다. 내가 그 녀석에게 언제든지 목욕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 말해 두마.”
“ 연 공자도 무공을 배우면 좋을 텐데.”
남궁운화는 낮게 중얼거렸다.
“ 야! 연우강!”
막장은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뛰어들었다. 그가 급하게 달려온 것은 생사림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안으로 들어선 막장은 깜짝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연우강이 작업복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 추소백이 죽는 바람에 생사림 일을 아직 끝내지 못했거든. 낮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오늘밤에 마무리 하려고.”
연우강은 안쪽에 두었던 궤짝을 들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 지금 생사림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하는 소리냐?”
막장은 연우강을 따르며 소리쳐 물었다.
“ 어떤 상황인데?”
“ 대야벌에 있는 모든 문파의 공격을 받고 있다. 그곳은 지옥으로 변했다고.” “ 지옥? 그런 것도 가능해?”
“ 어떤 것?”
“ 생사림도 대야벌 소속이잖아.”
“ 다른 세력에서 생사림을 공격하는 게 가능하냐고?”
“ 응!”
“ 대야벌에서는 가능하다네.”
대답은 담 너머에서 들려왔다. 담 너머에는 욱일승과 갈인효가 고개를 내민 채 이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 대야벌 존폐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사소한 싸움은 두고 본다는 말이오?”
“ 그렇다네. 대야벌은 그렇게 유지돼 왔네. 한 세력이 독주하는 걸 용납하지 않네. 더불어 벌주를 배출했다고 해서 그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고.”
“ 벌주를 배출한 세력이라고 해도 공격당할 수 있단 말이오?”
“ 그렇다네. 각 림은 벌주를 배출한 걸로 만족해야 하네. 물론 알게 모르게 특혜는 있겠지만, 외부로 드러나게 특혜를 주게 되면 그 세력은 멸망을 당하게 되네.”
“ 대야벌은 재미있는 곳이군요.”
“ 그래서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고 하는 거라네. 오늘 생사림을 공격하는 것도 사전에 모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네. 알게 모르게 서로의 동태를 살피다가 누군가 시작하면 한꺼번에 나서게 된다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전투를 벌내쟁투라고 하는데, 대야벌의 화합을 해치는 역기능도 있지만, 각 세력간의 균형 유지라는 순기능도 있다네.”
“ 필요악이란 뜻이군요.”
“ 그렇다네.”
“ 북로정군의 흑랑기 같은 거군.”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지게 뒤편에 궤짝을 놓고, 지게와 궤짝의 어깨 끝을 하면 걸머졌다.
“ 연우강!”
막장은 연우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 막장, 난 개독새야.”
“ 개독새가 어쨌다고?”
“ 개독새는 말이다. 개 씨부랄놈의 독종새끼의 줄임말인데, 한 번 물면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다고 해서 생겨난 별명이야.”
“ 가면 죽어, 인마.”
“ 그냥 가는 게 아냐. 막장. 개독새는 발톱을 세우고 가는 거야.”
연우강은 오른손을 막장의 얼굴 앞에 대고 활짝 폈다.
철컥! 철컥! 철컥!
그러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사망낭조가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 너?”
막장은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새카만 광채를 흘리고 있는 낭조들은 쳐다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단순한 낭조가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피를 먹어 살기를 내포하게 된 마물이었다. 더하여 연우강에게서 달라진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작업복 아래쪽으로 드러난 옷은 먹물처럼 검었다.
“ 다녀오마.”
다시 사망낭조를 안으로 집어넣은 연우강은 분관을 걸고는 밖으로 나갔다.
“ 야! 나랑 같이 가.”
“ 그만두게, 막장.”
연우강을 따라나가려는 막장을 욱일승이 말렸다.
“ 영감님. 그곳은.....”
“ 지옥에서도 살아나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연공자네. 그는 믿어도 되네.”
“ 도대체 저 녀석은?”
밖으로 나온 막장은 멀어지는 연우강을 보았다.
여전히 어떤 녀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세상사람들에게 이번 일을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생사림이 멸문하고 있는 건 백옥수라는 수공 하나 때문이라면 누가 믿겠는가.
아마도 미친 놈이라며 돌을 던질 것이다.
“ 썼군.”
“ 이제야 완전한 모습이 됐네.”
바로 그때 옆에 있는 두 노인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막장은 고개를 돌려 욱일승을 보았다.
“ 그를 자세히 보게, 막장.”
막장은 고개를 돌려 다시 연우강을 보았다.
“ 머리에 뭘 쓰고 있지 않은가?”
“ 삿갓을 쓴 것 같기는 한데...”
막장은 말끝을 흐렸다.
평소 같았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을 거리였다.
하지만 녀석이 걸치고 있는 야광 옷 때문에 희미하게나마 연우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 응?”
느닷없이 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막장은 홱 고개를 돌려 욱일승을 보았다.
연우강이 삿갓을 쓴 것은 자신도 내공을 끌어올려서야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연우강이 삿갓을 쓴 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 앞으로 연 공자가 삿갓을 쓰고 있을 땐 묵사라고 불려야 할 거네, 막장.”
“ 묵사라고요?”
막장은 멍한 얼굴로 욱일승을 보았다.
“ 그렇다네. 그는 묵사 개독새 연우강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