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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쓴 시편들
―『나비와 은하』라는 행복론
이영숙 (시인ㆍ문학평론가)
1. 코로나19라는 위기
이런 날이 결국 또 오고야 말았다. 팬데믹 상황을 오롯이 담은 조창환의 시집 『나비와 은하』가 우리 앞에 막 도착한 것이다. 위기의 징표인 이 시집은 위기를 경유하지 않았다면 써지지 않았을 선행 시집들의 연장선에 있다. 생각나는 대로 거칠게 톺아보자. 조금 멀게는 노동 현장을 시로 옮겨온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풀빛, 1984)이 있고, 가까이로는 일본군의 만행과 종군 위안부의 눈물을 담은 권순자의 『천 개의 눈물』(포엠포엠, 2015)이 있으며, ‘세월호 희생자 해원解冤과 진상규명을 위한’ 나해철의 연작시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문학과행동, 2016)과 DMZ 접경 대마리의 개척 역사로 민족의 비극을 조명한 『지뢰꽃 마을 대마리』(실천문학사, 2020) 등이 있다. 그 무엇 하나 해결된 게 없고,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날’은 미완의 역사와, 진행 중인 고통과,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할 상흔과, 무의식에까지 드리워진 얼룩으로 온다. 인류가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의 시간대를 통과하고 있는 시점에서 『나비와 은하』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오고야 말 것이었고, 또한 계속 오고 있을 다른 시집들의 앞에 놓인 미래완료진행 시제로 존재하게 될 그 무엇이 되었다.
코로나19와 관련하여 ‘이런 날’의 전조를 필자는 이미 두 편의 평론에서 짚어낸 바 있다. 「코비드-19시대 마스크를 쓴 시들」과 「코비드-19시대 마스크를 쓴 시들, 그 이후」가 그것이다. 두 편의 글에서 인용한 시들은 도합 40편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찾아 읽은 시들은 수백 편에 이른다. 이들 개별 시편들이 보여준 양상은 코로나19의 진행 상황과 비슷한 박동을 보여주었는데, 현재를 기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략 초기에는 혼란과 공포, 중기에는 패배 의식과 문명(자아) 성찰, 후기에는 적응과 극복 의지라는 물줄기가 주를 이루었다. 관련 시들을 접하면서 코로나19라는 테마 만으로 이루어진 시집이 출간될 것이라는 예상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그 시집에는 현재까지 코로나19의 초기-중기-후기의 상황들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우연의 소치인데, 필자가 예상했던 그 미래의 시집에 대한 글을 청탁받아 <마스크를 쓴 시편들>이란 제목의 글을 쓰게 된 인연은 조금 기이하기까지 하다. 문예지에 게재된 「마스크 안의 기도」가 두 번째 평론에서 인용된 시 중 하나였다는 사실과, 그 시가 『나비와 은하』의 첫머리에 놓인 시라는 점에서 우연은 세 겹이 된다. 『나비와 은하』는 코로나19라는 위기를 경유하면서 탄생하여 다가온 ‘이런 날’이다.
자연스럽게 글의 맥락이 잡혔다. 『나비와 은하』에는 초기-중기-후기의 시적 정황이 어떻게 그려졌는가.
2. 혼란과 공포
혼란과 공포는 대상에 대해 무지하거나 상황을 예측할 수 없을 때 생기는 현상이나 감정이다. 2020년 1월 20일에 국내 첫 환자가 발생한 이후, 팬데믹(세계 대유행)이 선언된 3월 11일까지는 불과 2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시되었음에도 대구를 중심으로 1차 폭발이 있었고, 3월 15일에는 대구ㆍ경북지역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다. 당일 누적 확진자가 8,162명이고, 누적 사망자는 75명일 무렵이었다. 치명률이 다를 뿐 아니라 당시에는 백신 개발의 초기 단계였으므로 단순비교가 의미 없긴 하지만, 2022년 1월 20일에 누적 확진자가 712,503명이었고, 누적 사망자가 6,408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그로부터 1개월 후인 2월 21일에는 누적 확진자가 200만 명을, 3월 23일에는 1,000만 명을 돌파했음), 현재 시점에서 돌이켜 봤을 때 연이어 2, 3, 4차 폭발을 마주한 당시의 혼란과 공포는 오히려 어이없을 정도다.
초기의 혼란과 공포는 시집 속의 「사회적 거리두기 1ㆍ2」, 「비대면 1ㆍ2」, 「코호트 격리」, 「선별진료소」, 「마스크와 맹견」 등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의 일상은 거주지역의 보건소에서 수시로 보내는 “Web 발신”으로 “코로나19 확진자 동선”(「불안한 평온」)을 파악하고 그 동선을 피하거나, 조심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확진 판정을 받는 순간 “사람 아니고 송충이”로 보는 배타적 시선에 쫓겨 “숨어버”(「이런 세상 2」)릴 수밖에 없도록 사회는 시시각각 각박해졌다. 그 와중에 “요양병원 병실에서 환자복 입은 치매 할머니와/ 방호복 입은 간호사가 마주앉아 화투장을 들여다”(「꽃그림 맞추기」)보는 사진 한 장이 감동을 준 것은 면회가 금지되어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치매 할머니’의 내면을 ‘방호복 입은 간호사’가 위무해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뿐 아니라 조창환은 “따뜻한 물을 채운” “라텍스 장갑”을 “식어가는 손이 단단히 움켜”(「따뜻한 손」)쥔 채 이 세상의 마지막 온기를 느끼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나, “쭈그러지고 일그러지고 허물 벗어진” “방호복 속에서 땀에 젖고 짓물러져/ 손금도 안 보이고 지문도 안 보이게/ 두 겹 세 겹 장갑 끼고 진종일 일한” “경기도의료원 이천병원 이학도 간호사 손”(「이 손 보아라!」)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누구라도 “무서워 고개 돌리는 코로나 사망자”의 “식은 몸을” “씻기고 묶고 자루에 넣어서/ 한줌 흰 재로 남을 때까지/ 가시는 길 배웅하는/ 성인이” 된 “염장이 강씨”(「염장이 강씨 1」)와, “엄마; 코로나로 얼굴도 못 보고/ 치료도 못 받은 상태로 임종도/ 못 지켜 드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날개 달고 훨훨 날아가세요/ 아프지 않은 곳으로!”라고 적힌 “서울추모공원 바깥/ 추모의 벽”을 거쳐 그의 시선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인 “저 화상”에 꽂힌다.
독하기도 하고 모질기도 한
저 얼굴
입 가리고 코 가리고 악착같이 버텨보겠다는
능글맞기도 하고 뻔뻔스럽기도 한 저 웃음
저 화상도 제 명줄 늘이자고 하는 짓인데 싶어
잠이나 청하면 꿈에서 나타나고
이승 더럽다고 저승에 가려하니
거기서도 만나겠네, 저 화상!
저 세상에서 또 저 화상 만날까 두려워
나 다른 천국 찾아 가야하리
―「저 화상」 전문
어떤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겨 얕잡아 부를 때 비유적으로 쓰이는 ‘화상’이란 단어는 이 시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가리킨다. “저 얼굴”과 “저 웃음”과 “저 세상”과 “저 화상”에 포함된 ‘저’라는 관형사는 시적 화자인 “나”나 “이승”과의 거리감을 강조하고 있는데, 시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저승”조차 ‘저’를 머금고 저만치로 더욱 물러나고야 만다. 도무지 가까이할 수 없는 면모에도 불구하고 “저 화상” 역시 생명체 임을 연민하려 하지만(“제 명줄 늘이자고 하는 짓인데 싶어”), 그는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만날까 “두려”웁고 역겨운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혹여 “천국”에조차 있을지 모르는 그를 피해 종국엔 “다른 천국”을 “찾아 가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더러운 이름을 청사에 남기기로 작정한 세월”(「정읍 지나며」)인 것만 같은 코로나19 초기의 엄혹한 상황과 시적 정황은 이렇게 동행한다.
3. 패배 의식과 문명[자아] 성찰
앞 못 보는 개가 문간에 앉아있다
눈빛이 진녹색이다
녹내장이란다
당뇨도 있고, 고지혈증도 있어
앞 못 보는 개는 거기서 움직이지 않는다
병은 이상한 권력이 되고
체념은 눈 먼 개를 길들인다
권력과 체념과 눈 먼 개가
적막한 불안 속에 웅크리고 있다
―「눈 먼 개」 전문
한 마리의 “눈 먼 개” 속에 “권력과 체념”과 패배 의식이 다 들어있다. 이 “눈 먼 개”는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권력”에 감염되자 저항하기를 그만두고 “체념”함으로써 “권력”에 “길들”여진 사람, 혹은 길들여진 운명을 상징한다. 생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으므로 다가올 미래를 보지 못하는 “눈 먼 개”는 막연히 “적막한 불안 속에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현존하는 인류는 여기 이 패배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 것인가? 시인의 시선은 저 밖의 문명이 드리운 그늘을 향하지 않고 안을 향한다. 내면을 응시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세상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찼으니 코 가리게 하시고
세상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찼으니 입 가리게 하시고
뭉쳐서 못된 짓 하니 흩어져 살게 하시고
밖에서 남 해코지할까봐 나가지 못하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하느님
(중략)
멀리 계셔서 지금 안 보이고
오래 쉬셔서 오늘도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아주 인연 끊으시지는 않은 것 이제 깨달았으니
용서해주소서, 하느님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모르옵니다.
―「마스크 안의 기도」 부분
그대 이승에서 지은 죄 낱낱이 떠올라
묵언 중에 부끄럽고, 맹목 중에 부질없고
역병보다 더 무서운
비굴과 치욕과 위선과 오만의
나날이 떠올라 고개 들 수 없으리니
그게 코로나 블루라우.
도박중독보다 더 무서운 건
빈 방에 홀로 앉아 발가벗은 제 꼴 돌아다보고
부끄러워 낯 못 들고 허공에 제 목 매다는 일
그게 바로 코로나 블루라우.
―「코로나 블루」 부분
하나는 시선을 외부로 돌려 인간과 문명이라는 객관적 타자를 비판하는 대신 먼저 회개하며 엎드리는 자가 되는 것이다. 현재의 역경과 시련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낮추는 자의 태도가 그것이다. 또 하나는 “비굴과 치욕과 위선과 오만의/ 나날”을 보내던 우리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두 편의 시에서 화자가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지만, 전자는 “하느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는 대신, 후자는 역병을 높이고 나를 낮춤으로써 “부끄러워 낯 못 들고 허공에 제 목 매다는 일”로 귀결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역병보다 더 무서운” “코로나 블루”의 ‘권력’에 지배당하는 행위다. 우리는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시인은 이를 현실적으로 치환해서 제시한다. “어수선한 시절”이지만 “마스크 쓰고”라도 “도다리쑥국 그리워 통영”가고, “동백꽃 보고 싶어 장사도” 가서 “풍류를 즐기”(「도다리쑥국」)라고 부추기는 것 같기도 하다. 코로나19에 감염된 개인(“지금 인후통, 두통, 오한, 발열, 기침으로 고생하시더라도”)에게도 “이름도 다 댈 수 없는 그 많은 돌림병”을 이겨낸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들어 “지금 겪는 일도 세월 지나가면 잊혀지고/ 다만 몇 줄로 역사 속에 기록될 뿐임을 잊지 마시게.”(「기다리시게」)라고 인류사적인 위로를 전한다. “그날이 오면, 아아 그날이 와서/ 막걸리집, 불고깃집, 해장국집, 짜장면집/ 음식점 술집에 젊은이들 늙은이들 바글거리고/ 커피숍에 백화점에 여자들도 넘쳐나”(「그날이 오면」)던 풍경이나, “이런 시절 끝나거든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상 세 분 중 가운데 계신 부처님 꼭 찾아 뵙고 인사드리세요”(「포스트 코로나」)라는 권유―‘그날이 오면’과 ‘이런 시절 끝나거든’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어도―역시 코로나19 이전의 우리의 일상적 풍경이고 보면,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분투가 결국 ‘포스트 코로나’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4. 적응과 극복 의지
나팔꽃 새 순 돋아 허공에서 길 찾는 거 보셨수?
뾰족한 끄트머리가 아침 이슬 어루만지는 거 참 신기하쥬?
아직 눈 안 뜬 두 이레 강아지 꼬물거리는 거 보셨수?
보드랍고 연하고 따뜻하쥬?
(중략)
자고 깨면 사람들은 전염병 걱정으로 가득 차
입 가리고 코 가리고 서로 경계하고 눈치 보며 피할 때
집에 일찍 들어가
당신 마누라 작고 못생긴 발 씻겨줘 보슈.
가슴 한 구석에 애틋하고 아릿한 덩어리가 느껴지쥬?
그게 당신이 살아 숨 쉬어야 할 까닭이유.
―「당신이 살아 숨 쉬어야 할 까닭」 부분
패배 의식에서 자아 성찰로 진화하는 게 코로나19 시대의 중기(중간적 지대)적 특성이었다면, 후기에는 적응과 극복 의지가 자리한다. 물론, 적응은 패배 의식이나 체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대상에 길들어져 그에 복무하는 것이 패배 의식이라면, 대상을 길들이고 대상과 내가 함께 변화하는 것이 적응이다. 패배 의식은 수직적이고 적응은 수평적이다. “코로나 블루”로 가는 것이 전자라면, 후자는 극복 의지로 방향을 잡는다. 이 시 역시 일상적 풍경의 회복을 염두에 두지만, 그동안 간과했던 사물과 대상에 대해 새로 눈뜨는 것만으로도 삶의 동력을 얻게 됨을 말해준다. “나팔꽃 새 순”이 “허공에서 길 찾는” 것이나, “아직 눈 안 뜬 두 이레 강아지 꼬물거리는” 모습에 몰두하는 일은 바삐 살아가던 현대인이 시계를 멈추고 대신 시간이라는 감각을 회복하는 행위다. “당신 마누라 작고 못생긴 발 씻겨줘 보”는 초유의 시도가 생존의 이유가 되고,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코로나19라는 위기의 연통관을 함께 지나가고 있는 동지적 우애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성찰한 뒤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세상은 역병으로 뒤덮였는데/ 풀잎에는 이슬 자국이 영롱하다”(「풀잎」)거나, “바깥세상은 역병으로 흉흉한데/ 우리 집은 바다 밑처럼 고요하구나”(「낮달」), “저쪽 세상은 코로나 블루라는데/ 흩어져 지내니 쓸쓸하고 허전하다는데 나는, 여기, 홀로 있어 행복하구나/ 아득해지고, 아슴아슴해지고, 깊어지는구나”(「적요(寂寥)를 만나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병’이라는 여전한 상황 속에서 나는 ‘고요’를 만끽하고 있다. “꽃을 보면서 위로를 받는 날/ 역병 번진 세상에서도 희망을 본다”(「꽃을 보며」)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이는 현실로부터의 한낱 도피가 아니다. 이미 적응을 마친 자의 극복 의지이기 때문이다.
명옥헌 배롱나무에
짙붉은 안개 자욱하네
저 붉은 꽃
가슴 푸르르 떨리게 하는
아찔한 황홀이 번져나네
그늘 환해지고
바람 그윽해지고
역병 근심 스러지네
다른 세상에서 온 저 빛
화두(話頭)로 삼아
풍경소리 내는 물고기 되고 싶네
―「붉은 꽃」 전문
실제로 역병을 통과하면서 많은 이들이 역병 이전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심지어는 느끼지만 못했을 뿐 그때가 유토피아였노라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크고, 강하고, 빠른 것에 경도되었던 과거의 삶이 행복했었나 복기해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여전히 그런 가치가 생존의 이유가 되는 이도 있겠지만, 세상사에 대한 불만이 많은 “김불만 시인”이 정작 “행복을 느낀 일은” “나무를 안고 나무에 볼 비빌 때, 노루귀꽃 보며 꽃 속에 숨은 바람소리 들을 때, 하늘과 바다가 내통하는 수평선 바라볼 때, 촛불 속에서 허공을 볼 때,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같은 인생을 우두커니 바라만 보시는 하느님 만날 때”이다.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같은 인생을 우두커니 바라만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이 얼마나 서늘하고 따뜻한지, “김불만 시인”은 “자신의 시신을” “의과대학”에 “연구용으로 기증”하여, 지상에 “장지”(「김불만 시인의 갈빗대」) 한 뼘 남기지 않고 떠났다. “명옥헌 배롱나무”의 “붉은 꽃”을 “다른 세상에서 온 저 빛”으로 보는 시인의 섬세한 시선도 ‘김불만’ 씨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세속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세속에 머물며 세속 너머를 보는 일이다. “다른 세상에서 온 저 빛”을 “화두로 삼아/ 풍경소리 내는 물고기 되”어보는 일은 내남없이 살아생전에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5. 마스크 시대의 행복론
시인은 역병을 경유하면서 내면을 닦아 행복을 깨닫는 방법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집은 ‘코로나19 시대의 행복 찾기’라는 부제가 붙어도 될 만한 방법론으로 출렁거린다.
막힌 숨 내 쉬며 창밖을 내다보니
비 그친 허공에 나비 난다
나비는 비틀거리지만, 주저앉지 않는다
(중략)
비틀거리면서, 흔들거리면서
100억 광년 저쪽으로 막힌 숨 내보낼 뿐.
―「나비와 은하」 부분
시인은 왜 코로나19에 관한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시를 한 권 가득 쓰는 그 지난한 작업을 자처했을까. 표제작인 이 시가 표방하듯이 그것은 “나비”인 우리가 “100억 광년 저쪽으로 막힌 숨 내보”내는 정도의 스케일로 빛난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시집을 덮으면서 조금은 알 것 같아진다. 한 번 더 정독해야겠다.
―《문학저널》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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