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까지는 여성도 부모의 유산을 균등하게 물려받았다. 집안의 재산이라 해도 남편이 상속받은 재산인 부변(夫邊)과 아내가 상속받은 재산인 처변(妻邊)이 나뉘어 있어, 친정 부모에게 물려받은 처변은 여성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명의만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성이 자기 몫의 재산을 남편과 별개로 매매하거나 거래할 수 있었다. 이기빈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이 죽은 뒤에도 처변은 다른 부인이나 첩의 자식에게 가지 않고, 온전히 자신이 낳은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자식 없이 죽으면 재산은 친정으로 되돌아갔다. 58
이처럼 국가를 통해 위로받는 원귀도 있었지만, 사실 주로 조상이 되지 못한 귀신들을 위로한 것은 유교가 아닌 무속과 불교였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죽은 사람은 3년에 걸친 상례를 통해 조상신으로 거듭나고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병치레를 하다 죽은 아이, 결혼하기 전에 죽은 젊은이, 자식을 얻지 못한 이는 제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과거 시험을 보거나 장사를 하러 집을 떠났다가 객사한 이,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고 호랑이에게 물려 횡사한 이는 죽어 원귀가 된다고도 믿었다.
무속과 불교는 이들을 포용했다. 무속에서 죽은 사람은 진오귀굿이나 씻김굿, 오구굿과 같은 사령제를 통해 저승으로 갔고, 불교에서는 49제와 천도재를 통해 극락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한 집안에서, 이와 같은 무속 의례와 불교 의례를 주관한 이들은 여성이었다. 즉 한 가족, 일가 친척 안에서 여귀와 원귀를 위로하는 것은 주로 여성들의 일이었다. 217,8
이와 같은 가정 신앙은 주부가 딸이나 며느리에게 가르쳐 계승해 나갔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대, 남성은 제사로 대표되는 유교 의례를 장남에게 상속하고, 여성은 무속 의례를 딸이나 며느리에게 대물림 한 것이다. 그릇에 신을 모시고 고사를 지내는 가정 신앙의 방식은, 종이나 나무에 조상의 이름을 기록한 신주를 사당에 봉안하는 유교 의례의 제사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즉 조선의 집에는 유교 의례에 따라 세워진 사당과 집 구석구석에 모셔진 가정신령의 신체들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형태의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227
수풀당과 살군당, 양지당은 왕십리 일대의 아기씨당이다. 공주 아기씨들은 나라를 잃고 피난을 왔다가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고 말았다. 이들이 죽고 난 뒤 사람들이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짓고 마을 신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던 것이 지금까지 내려왔을 것이다.
공주들은 찔레꽃을 입에 물로 죽었다. 찔레꽃은 당시 천연두에 쓰던 약재 중 하나였으므로, 다섯 공주는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이 피난 온 왕십리 일대는 본래 사대문 안의 시신을 내보내던 광희문, 가난한 병자들을 돌보던 활인서, 공동묘지 등이 자리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죽음은 일상이었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활인서에 오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이 오가며 병이 쉽게 번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이런 이유로 다섯 공주는 전염병, 특히 천연두를 관장하는 호구신으로 여겨졌다.
권선경은 천연두신이 젊은 여성신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여성과 천연두신 모두 외부에서 온 위험한 존재로 보았고,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통과의례로 자리매김시켜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성은 태어난 집에서 죽지 못했다. 가문의 입장에서 여성은 외부에서 왔거나 언젠가 혼인해 다른 집으로 가야하는 존재였다. 젊은 여성과 천연두신은 언젠가 결혼과 마마배송이라는 통과의례를 통해 제대로 떠나보내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다는 이야기다. 2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