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묵을 짓다
문은주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만 잤다. 눈을 떴을 땐 사방은 고요하다. 느닷없이 엄마의 메밀묵이 생각난다. 한 그릇만 먹으면 어제의 체기가 쓱 내려갈 것 같다. 머릿속은 따스한 멸치육수로 곱게 채를 친 묵을 토렴하느라 바쁘다. 냉장고에 넣어 둔 메밀묵 한 덩이에 마음이 스르르 풀린다.
메밀묵 한 모에는 고향의 흙내음이 풍긴다. 노동의 굳은살에 갇힌 수도승 같은 엄마의 모습도 보인다. 푸석한 땅에서 자라 꽃을 피우고 맺은 열매가 무념의 과정을 지나 한 덩이의 묵이 완성될 때까지 누구라도 정형화된 성질과 모양을 짐작하지 못한다. 말갛게 모습을 드러낸 메밀묵 한 모가 도마 위에서 지나간 시간을 읊조린다.
가난한 살림에 자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해 부모님은 밭을 갈아엎어 논을 만들었다.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빌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모내기 때를 놓쳤다. 순박한 농심으로 종일을 흙에 엎드려 살아온 부모님은 답을 알고 있었다. 땅을 놀릴 수가 없어 부랴부랴 심은 게 메밀이었다. 거친 땅에 푸른 싹이 돋던 날 부모님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게 시작된 메밀은 지난해까지 가을이면 하얀 별꽃이 지천으로 피어났다.
설날을 앞두고 친정에 다녀왔다. 엄마와 함께 방앗간에서 떡가래를 빼고 메밀을 빻았다. 부모님은 힘에 부친 농사를 해마다 올해만 올해만 하시면서 미련의 끈을 놓지 못했다. 메밀 농사를 지금까지 고집했다. 이제는 건강이 나빠져 더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엄마가 톡톡 터진 메밀을 매만진다. 껍질을 깨고 나온 뽀얀 속살이 엄마의 손가락에서 주춤거린다. 한참 동안 무슨 생각일까.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다.
메밀묵을 쑤는 엄마의 손놀림이 진지하다. 긴 나무 주걱이 천천히 원을 그리며 하얀 물결을 접으며 지나간다. 한 방향으로만 가고 있는 길에서 자칫 어긋날세라 오직 젓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마을 앞 당산나무처럼 굳건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며 실눈으로 솥 안을 살피는 옆모습은 근엄하기까지 하다. 유년 시절부터 묵을 먹어 왔지만, 묵 쑤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기는 처음이다.
엄마와의 관계는 살갑지 못했다. 늘 식구의 생계를 위해 바깥일을 하였던 엄마의 표정은 어두운 그늘에 가리어 무뚝뚝했다. 어린 나이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했던 나는 그런 엄마에게 마음을 비치지 않았다. 여느 집처럼 화목하지 못한 것은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유부단하고 마음 좋기만 한 아버지에게 퍼붓는 악에 받친 고함이 듣기 싫어 엄마의 우아하지 못한 성품을 탓했다. 오 남매의 먹거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어미의 마음이 차갑게 비어가는 걸 헤아리지 못했다.
학창 시절, 아버지에게 용돈을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날마다 차비를 받아서 학교에 가야 하는 처지가 말라비틀어진 가지처럼 주눅 들었다. “왜 나한테만 돈 달라고 하노? 너 아부지한테 돈 달라고 해라.”하는 한마디가 얼마나 서러운 말인지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어깨를 들썩였다. 엄마는 새벽일을 가면서 오늘은 조선생님 집에 가서 차비를 빌려서 가란다. 어제 미리 이야기해 두었다고…. 어떻게 초등학교 담임선생님한테서 돈을 빌리라고 할 수 있는지. 사춘기의 여린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반항심에 오늘 결석해야지 하는 마음은 버스 올 시간이 다가오자 조급해졌다. 나는 엄마가 챙겨 놓은 메밀묵을 들고 길을 나섰다. 선뜻 대문을 들어서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 선생님과 마주쳤다. 선생님은 묵 덩이를 보더니 “내가 어제 메밀묵 먹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 묵 쑤는 솜씨는 최고지.” 하면서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나는 어찌할지 몰라 몸만 배배 꼬꼬 있는데 누런 봉투를 손에 쥐여준다.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골목길을 달려 나갔다. “어머니 많이 도와드리고 공부 열심히 해라.” 선생님의 당부가 눈썹 담을 돌아 나를 쫓아왔지만,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어젯밤, 마당에서 묵을 쑤던 엄마의 모습만 거친 숨결을 따라왔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메밀껍질처럼 부석거린다. 딸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기 위해 엄마는 메밀 주머니를 주무르고 또 주물렀다. 사시사철 팥죽 같은 땀을 흘렸지만, 온전히 밥술 떠 넣기 어려운 사람이 대부분인 동네였다. 조선생님 집은 돈을 빌릴 수 있는 마지막 집이었다고 한다. 당신이 당당하기 위해 딸이 주눅 들지 않았으면 바랐던 그 날의 메밀묵 맛은 담백하다 못해 밋밋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한 그때의 기억은 세모진 메밀처럼 각지고 거칠어 누구도 감히 껍질을 벗지 못했다. 하얀 속살을 마주하는 두려움을 애써 외면했다. 훗날 엄마는 그 일을 두고 메밀묵이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주문처럼 말한다. 언니의 결혼식, 아버지의 팔순 잔칫상, 아이의 돌잔치에도 메밀묵채가 올랐다. 메밀묵은 엄마의 자존심이었고 삶의 빈약함을 채워주는 기쁨이었다.
반복되던 손놀림이 잦아들고 주걱이 지나간 자리에 선명한 길이 선다. 나무 주걱이 넘어지지 않고 솥 가운데 우뚝 섰다. 자식들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는 여장부의 모습을 보는듯하다. 나무 주걱을 맞잡은 두 손은 기도하듯 경건하다. 순간, 긴 나무 주걱이 쑤욱 허공으로 치솟는다. 비스듬히 닳은 나무 주걱의 모습도 골골이 주름진 엄마의 얼굴도 많이 늙었다. 굴곡진 삶을 간직한 앙금이 틀에 부어졌다. 나무 주걱으로 천천히 매흙질하듯 상처 난 구멍을 채우는 뭉툭한 손길이 부드럽다. 엄마는 담담하게 마지막 메밀묵을 지었다. 아궁이 앞에 버려진 까만 껍질이 내 어미의 몸피처럼 가볍다. 치열하게 내달렸던 당신의 삶은 이제야 안식을 얻는다.
양념도 고명도 없는 말간 메밀묵을 한 숟갈 삼킨다. 씹을 사이도 없이 허겁지겁 넘어가지만 왜 이렇게 허우룩한지 어머니의 마지막 메밀묵 한 그릇에 기어이 목이 멘다. ‘고추가 죽은 자리에, 배추가 시든 한 뼘의 땅에도 메밀꽃은 피더라….’ 달빛을 흠뻑 뒤집어쓴 메밀꽃 닮은 어머니의 미소가 창가에 떠오른다.
(《수필문예》 제21집, 2022.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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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수필문예회 회원
2016 달서 책사랑 전국주부수필 공모전 동상.
2017,2018,2019 경북문화체험수필대전 수상.
2020 대구의 코로나19 기억법 공모전 최우수 수상.
2021공직문학상 동상
2021 달구벌문예대전 대상
제8회 수필문예회 작품상 수상
대구수필문예대학 26기 수료
moj6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