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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 강의록 -1
김석수 경북대 철학과
Epistemologie
1. 인식론이란 무엇인가?
: 인식론은 철학의 일부분이며 인식·지식의 기원·구조·범위·방법 등을 탐구하는 학문.
'인식론'이라는 말 자체는 근대의 소산이며 'Erkenntnistheorie'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K.라인홀트의 《인간의 표상능력(表象能力) 신론(新論)의 시도》(1789)에서이다. 영어의 'epistemology'는 그리스어의 'episteme(지식)+logos(논리·방법론)'에서 유래되었지만, 이 말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J.F페리어의 《형이상학원론》(1754)에서이다. 물론 인식의 철학적 고찰은 고대나 중세에서도 신의 인식으로서 행하여지기는 했으나 인간 주체의 인식 문제로서 철학의 중심부문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근세에 이르러서이다.
이런 인식론에 대해서 나름대로 내려진 정의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인식론 또는 지식론이란 철학의 한 분야로서 지식의 본성과 그 영역, 지식이 이루어지는 전제 조건들과 토대, 그리고 무엇인가를 안다고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갖고 있는지 등을 탐구의 대상으로 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서양철학자들은 이러한 인식론 분야에는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반면에 이들은 변화의 성질은 무엇이며, 변화란 과연 가능한가에 관해 주로 관심을 쏟았다. 이들 초기의 철학자들은 참된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해서는 이견을 보였으나 자연에 대한 참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 참된 인식이 과연 가능한가에 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은 궤변론자로 알려진 소피스트들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기원적 5세기 경 부터이다. … 인식론의 진정한 시조인 플라톤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 의문점들에 답변하고자 노력하였다. 지식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평소에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 어느 정도나 사실상 참된 지식인가? 감각이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가? 이성이 지식을 가져올 수 있는가? 지식과 참된 믿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인식론은 왜 인간이 스스로 믿는 믿음을 갖게 되며, 그 과정이 어떠한가에 관하여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심리학과 구별된다.(햄린1: 9-11)
인식론자들은 전형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반적 질문에 관계한다. (1) 인간 지식이란 무엇인가? 그 지식의 본질적인 구성 성분은 무엇인가? (2) 인간 지식의 원천과 기초는 무엇인가? 인간의 모든 지식이 감각이나 지각에 기원하는가? 아니면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독립된 원천에 의존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 아는가? (3) 인간 지식의 범위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식을 지닐 수 있는가? 인간의 지식은 지각되는 것에 한정되어 있는가? 우리는 지각되지 않는 과거, 미래에 대해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인간 지식의 본성, 기원, 그리고 한계 등에 대한 질문이 인식론을 가능하게 한다.(P. Moser:)
인식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인식론은 대부분 의미, 정당화, 진리 등의 서로 연관된 세 가지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진술이 어떻게 그 의미를 얻는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우리 믿음의 명제 내용이 지니고 있는 진리성이나 허위성은 어디에서 성립하는가?(델라니:
2. 인간지식 : 그것의 본성, 원천, 그리고 한계
인식론주의자들은 전형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1) 인간의 지식이란 무엇인가? 특히 그 지식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들이 무엇인가? (2) 인간의 지식의 원천들, 기원들은 무엇인가? 모든 인간의 지식은 감각작용에 기초하는가, 아니면 그 지식의 몇 가지는 감각적 경험으로 독립되어 것에 기원을 두고 있는가? 간략히 말해서 우리는 어떻게 어떤 것을 아는가? (3) 인간 지식의 범위와 정도는 어떠한가? 우리는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만약에 가질 수 있다면 누가 그것을 현실적으로 가지는가? 게다가 모든 인간의 지식은 현재 지각되는 것에 제한되어 있는가? 우리는 과거와 미래, 현재 지각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인간 지식의 본성, 원천, 한계들에 관한 물음들은 과거와 현재의 인식을 고민하도록 만든다.
인간의 명제적 지식에 관한 전통적 견해들은, 이것들은 플라톤의 Meno편이나 Theaetetus편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그러한 지식을 구성하는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인정한다. 이 요소들은 지식이란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라는 견해에 의해서 포착된다.
다음의 부분은 믿음, 진리, 지식의 정당한 구성요소들에 관해서 접근하고 있다.
1-1. 지식의 본성
철학자들은 보통 인간의 지식의 상이한 종류들을 구별한다. : (1) 경험적(후험적) 지식, (2) 비경험적(선험적) 지식, (3) 기술(description)에 의한 지식 (일종의 명제적 지식), (4) 대면함에 의해서 알게 되는 지식 (일종의 비명제적 지식), (5) 어떤 것을 어떻게 행하는가에 관한 지식. 하지만 몇몇 철학자들은 이들 중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거나 몇몇은 다른 더 기초적인 지식에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문제되는 지식들 중 몇 가지를 특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험적(후험적) 지식은 감각적 경험에 기초하여 그것의 증거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정당화에 의존한다. 반대로 비경험적(선험적) 지식은 자체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하여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칸트나 다른 사람들이 ‘순수이성’이나 ‘순수지성’이라고 부른 것에 의존한다. 선험적 지식과 후험적 지식의 구별에 관한 현대적 이해는 주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으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이러한 구별의 양상들은 칸트에 앞서서 라이프니츠나 흄에게도 등장한다.
철학자들은 감각적 경험이 경험적 지식에 적절한 증거를 산출한다는 현실적 조건들에 대해서 통일된 설명을 공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비경험적 지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물리적 대상들에 관한 지식은 경험적 지식의 표준적인 예가 되며, 반면에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진리들은 비경험적인 지식의 표준적인 사례가 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지식은 분명히 그 진리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하여 감각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철학적 문제는 우리가 감각경험으로부터 얻게 되는 증거로부터 독립하여 정당화된 믿음과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는가에 관한 정확한 설명을 하는 것이다.
B. Russell은 기술에 의한 명제적 지식을 대면함에 의한 비명제적 지식으로부터 구별한다. 그는 진리에 관한 지식(즉 참된 명제들에 관한 지식)을 사물들에 관한 지식(즉 비명제적 대상들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구별한다. 사물들에 관한 지식은 대면함에 의해서 확보되는 사물들에 관한 지식이 될 수도 있고, 기술에 의해서 확보되는 지식이 될 수도 있다. 기술에 의한 지식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진리, 즉 ‘어떤 것이 그 경우이다’는 지식을 포함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대면함에 의한 지식은 어떤 것에 관해서 비명제적으로 곧장 알아차림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 대상에 관해서 지식을 가지게 될 때 기술에 의한 부분과 대면함에 의한 부분 두 가지 모두를 가진다. (*예 : 한 사람을 직접 대면해서 알게 되는 지식과 그 사람에 관해서 기술된 부분과 관련해서 가지게 되는 지식이 함께 하여 그 사람에 관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우선 명제적 지식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자.
1-2. 믿음의 조건
지식과 믿음은 서로 직접 연관되어 있다. 지식은 믿음을 필요로 하지만, 믿음은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9개의 위성이 있다는 것을 이것을 믿지 않고도 알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가끔씩 사람들은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물을 믿으며 심지어 잘못이기조차 한 것들을 믿는다. 지식은 특정한 종류의 믿음이다. 즉 지식은 어떤 조건을 만족시키는 믿음이다. 지식에 대한 전통적인 조건에 기초해서 볼 때 이러한 필연적인 조건들은 믿게 되는 것에 관한 진리가 되며, 그리고 믿게 되는 것을 위한 정당화나 증거가 된다.
여기서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명제적 지식이다. ‘어떤 것이 그 경우이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예를 들어 9개의 위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주관 관심은 명제적 믿음에 관한 것이다. 명제적 믿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믿음이 믿음의 대상에 관련된 어떤 것, 즉 명제라는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occurrent) 믿음과 현재 일어나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standing) 믿음 사이를 구별하였다. 전자의 믿음은 믿게 되는 그 명제에 대한 현재의 동의를 요한다. 그 동의가 의식되면 그 믿음은 드러나는 명백한 믿음이 된다. 동의자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그러한 믿음은 암묵적인 발생적 믿음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명백히 의식하게 되면 명시적인 발생적 믿음이 된다.
모든 우리의 믿음들이 그것들이 암시적이든 명시적이든 발생적 믿음들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지구는 둥글다든지 2X2=4라는 믿음은 일순간에 일어나는 발생적 차원의 믿음이 아니고 그야말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믿음이다.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발생적 동의를 포함하지 않는 믿음이다.
정말 믿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이 문제에 관한 주목할 만한 두 가지 견해들이 있다. 즉 성향적 견해(dispositional view)와 대상진술적 견해(state-object view)이다. 전자의 경우부터 살펴보면 이것은 믿음이 단지 일정한 방식으로 행해질 성향으로만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바로 C. Peirce와 G. Ryle이다. 가령 내 앞에 있는 음료수가 독약이 들어 있다는 믿음은 사실 그것을 먹는 것을 피하려는 성향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적 견해는 지식의 정의인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라는 부분을 상당히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이것은 그 믿음이 현실적으로 실행되었을 때 잘못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즉 믿음에 관한 성향적 견해는 사실상 명제적 내용에 관한 언급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지식의 수준이 되기에는 미흡하다.
한편 믿음에 관한 대상진술적 견해는 한 사람과 믿음의 대상 사이의 특정한 관계를 이룬다. 한편에서는 믿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믿게 되는 대상이 있다. 즉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 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믿음의 특정한 대상에 연관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문제되고 있는 특정한 관계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이 대상은 G. Frege가 주장하듯이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추상적 명제(abstract propositions)로서 명제적 대상이다. 그 대상을 믿는다는 것은 명제적 태도(propositional attitude)2)이다. 그러나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적 대상에 관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물리적 관찰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신비적이거나 공허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나온 것이 믿음의 대상이 문장(sentences)이라는 학설이다. 이것은 R. Carnap, I. Scheffler, W. V. Quine 등이다. 이들은 sentence token과 sentence type을 구분하고자 한다. 전자는 누군가가 특정한 시간에 말하거나 쓰는 것으로부터 결과하는 단지 물리적 문장일 뿐이다. 반면에 후자는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추상적인 부류의 모든 표현들이다. 만약에 믿음의 대상이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면 한 사람과 믿음의 대상 사이의 믿음 관계는 자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물리적 발생 사건은 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 가능하게 관련지을 수 있는 사물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될 경우 사실 그에게는 믿음의 대상은 없고 확인된 대상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확인되지 않은 많은 믿음들이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많은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를 피하려면 믿음의 대상이 전자가 아닌 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이미 믿음의 대상으로서 추상적 명제를 취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추상적 sentence type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부담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전통적 인식론에서는 믿음의 대상을 추상적 명제로 보지 않고 정신적 명제(mental propositions)로 보았다. 이 정신적 명제는 공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사적 영역이 담겨 있다. 이 입장은 플라톤과 달리 우리의 정신을 초월해 있는 대상을 허용하지 않으며, 또한 그렇다고 완전히 주관주의로 흐르지도 않는다. 이들은 현재 지속하고 있는 믿음(2X2=4)을 기억 속에 저장된 정신적 명제와 동일시함으로써 발생적 믿음들과 지속적 믿음들 사이를 구별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 물어 들어가면 정신적 명제들은 한 사람의 정신적 삶 안에 존재하는 개별자들이기 때문에, 결국 사적 언어게임이 지니고 있는 주관성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여기에서 다시 정신적 명제를 token과 type의 차원에서 구별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의 대상들은 정신적 명제들의 token으로 보고, 두 사람이 자신들의 믿음의 대상들이 동일한 정신적 명제의 type에 속한다면 두 사람은 동일한 것을 믿는 셈이 될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것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type의 동일성을 믿는다는 것이지 token의 동일성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플라톤에서처럼 믿음의 관계는 token 차원이 아니고 다만 type 차원 일뿐이다.(칸트의 규제적 이념)
We can apply the token/type distinction to sentences to distinguish between sentence tokens and sentence types. A sentence type is grammatically complete, while a sentence token is a concrete occurrence, that is, an actual inscription or utterance. “I am thirsty” is a sentence type. However, this sentence can be uttered by particular people on particular occasions. These particular utterances of the same sentence type are sentence tokens. This distinction is philosophically useful because it is believed that only sentence tokens can be either true or false.“A sentence token is just the physical sentence resulting from someone's speaking or writing at a particular time; a sentence type, in contrast, is the abstract class of all such sentence utterances or inscriptions that, roughly speaking, have the same form.”
1-3. 진리조건
한 명제가 참인지 아닌지의 판별은 진리론에 대한 논의와 직결되어 있다.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에 입각하여 크게 대응설, 정합설, 실용설, 합의설 등이 있다. 대응설은 믿음 내용과 사실이 일치하는 경우이며, 정합설은 하나의 믿음 내용이 다른 믿음 내용과 정합성을 지니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실용설은 믿음 내용이 현재 실용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의하여 판별한다. 즉 어떤 믿음이 그것을 받아들여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유용하면 참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마지막으로 합의설은 실용설의 긍정적인 점은 수용하되 부정적인 점은 지양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정합설과 실용설의 지양적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하나의 믿음이 나에게만 일관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그 믿음이 단순히 주체인 나 안에서만 일관성을 지니거나 또는 실용성을 지닌다고 정당한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 네 가지 이론 모두 각기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대응설의 경우 믿음 내용인 명제와 사실이 일치하는지를 궁극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따르며, 둘째 정합설의 경우 믿음 내용들 사이의 정합성은 확보된다고 하더라도 사실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또 실용설의 경우 믿음 내용들이 실용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리가 아닐 수 있다. 또 역으로 진리라고 하더라도 실용적이지 않을 때도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 사이의 믿음의 내용들이 합의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사실과 조응하는지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더 심화된 논의는 결국 존재론, 형이상학의 문제에 닿아 있다.
1-4. 인식정당성의 조건
인식정당성의 경우는 단순히 사실을 기술하는 차원이 아니라 무엇이 옳다 틀리다를 평가하는 기능이 동반되어 있다. 즉 어떤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화된 믿음인가는 이미 그 믿음이 적절한 근거에 기초한 올바른 믿음인가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런 평가 차원은 단순한 유용성이나 바람직한 대처의 차원을 넘어 진리성을 지향하는 평가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실제로 너무나 지능지수가 떨어져 공부를 못하는데 너는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 그 경우 그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너라는 사람에게 유용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 참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참인 믿음들의 내용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3)
그렇지만 우리들의 믿음이 오류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을 시인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처럼 오류가능성을 거부하는 쪽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연역적 방식이 취하고 있는 결함, 즉 더 이상의 지식의 증대를 기대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오류가능성을 열어주면서 동시에 참인 지식을 증대시킬 수 있는 귀납적 방식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다. 아무튼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 성립되는 데 있어서 긍정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상태가 될 수 있는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 즉 포퍼의 주장처럼 오류가능성의 요건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적극적 주장과 소극적 주장이 항시 상호 견제 기능을 하면서 발전되어야 한다.
게티어(Gettier)는 지식을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라고 정의한 전통적 정의에 대해서 정면 비판을 시도하였다.4) 그에 의하면 인식적으로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지식이 될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보았다. 가령 태암과 일화 중 이번에 한 사람이 대통령상을 받게 되어있다. 그런데 태암은 일화가 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반의 학생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일화의 책상에는 성문기본영어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태암의 책상에도 성문기본영어가 들어 있게 되었다. 그는 성문기본영어가 들어 있는 사람이 대통령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일화와 관련하여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문기본영어가 들어 있는 사람이 대통령상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태암이가 대통령상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럴 경우 태암 역시 책상 속에 성문기본영어가 들어 있었고, 또 그것이 들어 있는 사람이 대통령상을 받는다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당화된 참된 믿음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대통령상을 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시 고려해 볼 여지가 남아 있다. 왜냐하면 게티어의 주장은 거짓된 전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짓된 전제를 배제하기만 하면 여전히 ’정당화된 참된 믿음‘을 지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거짓된 전제에 의존하지 않는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라고 조건을 제시하면 그것은 지식이 되는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아무 것도 지식이 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거짓된 전제가 아니라는 완벽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 완벽한 지식의 성립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지식의 완벽한 조건이 될 수 있다.
3. 인식론의 역사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인식론은 인간의 앎의 작용과 관련하여 산출되는 지식의 정당성을 탐구하는 분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니게 되는 지식 자체의 성립 요건을 분석하는 것도 인식론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적 요소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인식 작용이 전개되는 양상을 인간의 삶의 존재론적 조건과 관련하여 분석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간은 왜 알고 싶어 하는가? 왜 우리에게 인식작용이 일어나는가? 원래 ‘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philosophia로서 이것은 philo+sophia의 결합형이다. 그야말로 철학은 소피아에 대한 사랑이다. 이 말의 뜻에 근거해서 볼 때 철학은 궁극적 존재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면 인간은 왜 존재에 대한 사랑, 즉 알고 싶어 함의 활동이 작동하게 된 것인가? 아마도 그것은 존재에 대한 궁금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궁금증의 발동 요인은 어디에 있은 것일까?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존재 세계에 대한 불안감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한다. 즉 인간은 정치적 억압이든, 경제적 억압이든, 심리적 억압이든, 그 억압이 어떠한 형태이든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마주해 있는 모든 불안의 존재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이 불안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불안의 대상으로 마주하고 있는 존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우리의 인식 활동은 존재 활동이다. 즉 인간은 인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려고 하는 주체가 알려고 하는 인식 작용 역시 그 존재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가령 내가 어떤 존재를 알고 싶을 때 내 안에 그를 알 수 있는 능동적 능력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어, 그리고 내가 그 존재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음을 의식하게 될 때는 나는 그를 자기 속에 끌어들여 일방적으로 밝혀낼 수 있겠지만, 나의 능력이 부족하고 내가 대면하고 있는 그 존재가 너무나 웅대하여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위엄으로 자리하고 있으면, 나는 그 속에 들어가서 그를 만나도록 허락 받음으로써만 비로소 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자의 경우는 존재에 대한 노에시스(noesis)적 태도라면 후자의 경우는 미메시스(mimesis)적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유년기와 성인기를 가지고 있듯이, 전자의 경우는 미메시스적 태도로 삶을 꾸려간다면, 후자의 경우는 노에시스적 태도로 삶을 꾸려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물론 동물에게는 노에시스적 계기가 거의 없다고 보아야겠지만).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도 유년기의 역사는 전자의 경향을, 성인기의 역사는 후자의 경향을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류 초창기의 문화는 존재에 제물을 받치고 제사를 지내는 태도, 이른바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삶의 형태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존재님에게 잘 보여서 자신의 불안한 삶을 극복하고자 태도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초창기 문화는 존재에 도전하는 문화가 아니라 존재 안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앎의 활동은 존재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라 존재 속에 들어가 그 존재로부터 영속성을 기약 받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동․서양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징이었다. 서양이 궁극적 존재를 향해 나아갔던 과정이나 동양이 천(天)을 향해 달려갔던 과정 모두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인식론은 이미 존재론에 근거를 하고 있다. 존재가 인식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존재론적 토대 위에서 인식론이 정립되었다. 따라서 고대의 인식론은 존재론적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도가 계속적으로 지속되는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로 향해 있고, 존재에 바탕을 둔 인식 활동의 구도에는 약자가 자기 존재를 유지하는 방식이지만, 그것은 자신을 진정으로 독립적인 주체로 자리하는 것을 구속하고 있다. 언제나 자기가 만나는 존재는 존재를 통한 자기 만남이지, 자기를 통한 존재의 만남이 완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유의 완성을 위해서는 자기를 통해서 존재를 정립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그래서 존재론은 인식론에 바탕을 두고 정립되어야 진정한 자기 정립이 확보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기 정립을 위한 인식 활동은 이미 그 활동의 주체가 처해 있는 존재의 조건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앞에 무릎을 꿇고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다. 그의 과거는 그의 자유를 위한 교훈의 장소는 되어도 그를 온전히 실현하는 해답의 장소가 될 수는 없다. 그는 현재의 지평에서 자기에게 다가서 있는 존재와 인식의 갈등을 미래의 지평 속에서 해결하고자 한다. 그래서 인식 주체는 자신의 활동 속에 존재가 포섭되는 날을 기약하면서 쉼 없는 발명의 길을 강구한다. 자신의 정박장소는 자기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의식이다. 이것이 바로 주체적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 활동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바깥의 타자를 절대적인 존재로 만나면 바로 자기가 모신 그 타자로부터 종속성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상태에 빠지듯이, 자기 속에 자기를 절대자로 모시는 자기 모심의 과정은 자기 속에 자기가 구속되는 형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 절대화 못지않게 자기 절대화도 이미 자기 자유를 유린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결국 존재론적 인식론이 인식이 존재에 갇히는 불행함이 자리하고 있다면, 주체적 인식론은 존재가 인식에 갇히는 불행함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존재에서 주체로 돌아온 인식론적 존재론은 다시 한 번 존재론적 인식론의 전망에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반성은 필히 주체의 자기 권력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으로써 주체를 해체시키거나 주체를 다원적 주체 안에 다시 자리 매김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같은 과정은 주체도 존재도 아닌 주체와 존재를, 주체와 주체를 만나게 해주는 제 삼의 공간, 이른바 언어 공간을 추구하도록 만든다. 나와 세계가 만나고, 나와 네가 만나는 언어라는 공간은 그 누구도 우위에 있음을 허용하지 않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언어 역시 나의 위대함이나 존재의 위대함에 구조적으로 연루되어 나도 존재도 제대로 노닐 수 없는 부조리한 공간일 수 있다. 그래서 순종하는 언어, 소유하는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거대담론의 거물망을 해체하는 새로운 인식론, 새로운 존재론의 구축을 위한 작업이 수행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언어적 놀이 공간 안에 다원성을 인정하는 방향과 담론성을 찾아가는 방향 등이 제각기 모색되고 있다.
우리는 이 각축전을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이 서론에서 고민을 안고 가야 할 부분은 존재론적 인식론, 주체적 인식론 내지는 인식론적 존재론, 언어적 인식론 내지는 언어적 존재론의 거대한 물줄기와 인간의 삶의 과정 사이의 관계를 더 근원적으로 물어야 한다는 점이다. 존재와 인간과 언어, 그 어느 곳에도 헤게모니를 안겨 줄 수 없는 이카로스와 같은 삶의 운명을 우리는 더듬어 가야 할 것이다.
1)믿음조건). 한편 그러나 이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는 내용이 진리여야 한다(진리조건). 즉 <태양계의 행성이 11개다>라는 주장은 거짓이 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믿는 것은 지식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지식은 참된 믿음(진리조건+믿음조건)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누군가가 어떤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믿을 만한 적절한 근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가령 나의 형이 눈이 오기 때문에 오늘 차를 몰고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비로 그 믿음이 참이라고 하더라도 형이 실제로는 차를 몰고 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식은 S가 P를 적절한 근거에 의거하여 믿을 때에만 S는 P를 안다”고 주장할 수 있다(인식정당성의 조건). 결론적으로 지식을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한 근거에 의하여 참된 내용을 믿는다는 주장이 된다(자세한 내용은 김기현, 『현대 인식론』, 민음사, 1998년 31-32쪽 참조).
4) Gettier,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