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잠시 쉬고 있다.
방학이기 때문이다.
1월 8일 1,2학년 방학식과, 3학년 졸업식 이후 15일 오늘 정신이 좀 돌아왔다.
일주일이 걸렸다.
그동안은 새벽부터 뛰어다녀서 잠 하나는 잘잤었다.
그러나 지난 가을학기부터는 불면증이 생겨 정신과 약을 삼키어야만 잠들수가 있게 되었다.
면소재지 목욕탕을 찾아서 삼 세번을 다녀오니 기운이 좀 돌고있다.
여윈 혈관과 심장에 피가 도는 듯하다.
말라비틀어 쪼글쪼글해진 피부도 윤기가 나는 듯하다.
위축되고 딱딱해진 관절과 근육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학교는 들여다 볼수록 노예교 신도들을 양산하는 곳이다.
공부를 깊이 파고들수록 불손한 이단아로 정처가 없어지곤 하는 곳이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질적연구자로서 5년여에 이르러 흔히 생각하는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지겠구나 눈치챘었다.
작년 여름부터 '언어'에 대하여 눈뜨기 시작하면서 12월 즈음에는 주변의 폭력적 언어에 많이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게 한 아이를 잘 가르쳐 보겠다는 마음이 가정에서 먼저 평화가 보상으로 주어졌지만.
자원하는 자들이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던 시간이었다. '너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그래' 저쪽 테이블에서 두 세번을 들리게 말하더니, 내 분단에 다가와선 한 아이에게 '정서가 불안해서 그래'라는 동료교사 말에 참담해졌다. 이 아이는 다행히 얼굴을 붉히며 항의했다. 티나지 않게 대신 사과하고 같이 트리를 만들면서 가장 신뢰하는 그/그녀의 부드러운 음성, 도♪에서 나는 낮은 음, 반 박자 쉬고 시작하는 말습관에 크게 고무되어 있던 차라, 아이들을 대할 때의 언어사용방식은 나를 놀라게했다. 그/그녀에 대한 배신감은 컸다. 남자교사로서 소통능력이 있는 이 분이 이러시면 누구에게 희망이 있단 말인가?
졸업사정회에서 묵언수행아닌 수행을 하는 특수남자아이 '우민'이가 다른 아이를 만지니 절대 터치를 금지하는데 협조해달라고 부탁하는 특수선생님에게 나는 무척이나 또 당황했다. 곧바로 질문해서 금지에 이은, 어떻게 터치를 잘 하는 방법을 아이에게 가르쳐야 하지 않겠냐? 말 그대로 이제 3학년 졸업인데, 그/그녀는 당황해서 깊은 것은 우리 묻지 말자고 대충 얼버무리며 끝냈지만, 정년을 코앞에 둔 그/그녀가 지금까지 특수교육방식과 언어 생활 가르침이 어떠했을까? 우리교사집단은 왜 배움과 성찰이 없을까? ... 혼자 괴로웠다.
3월 개학해서 코로나로 인한 회의나 협의회는 한 번도 없었지만, 11월 말부터 전체교무회의는 10번 이상 개회되었다. 왜 무슨 일로 얼마동안 회의가 있을 거라는 안내는 한 번도 없었다. 특성화고교 활성화 대책의 일환으로 2억 배부에 대한 가부를 결정하는 것도 회의에 가서야 알았고 아무 정보 없이 가부를 결정해야 했다. 미리 회의 전에 방침을 정하고 투표함까지 준비하면서, 정작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것은 관행인 것이다.
보건과목은 ebs와 연동할 것이 없어 3학년 온라인 수업 준비하느라 수업주제와 내용을 담아서 컴퓨터와 씨름하느라, 약간의 짜투리 나는 시간마다 연수 화면 넘기느라 피가 마르는 것이다. 올해는 68시간을 채워넣었다.
흡연예방학교 정산전산망(보건복지부)과 폭력예방실적(여성가족부)전산망 화면 채우기는 증거물 첨부하기로 날로날로 엄밀하고 세세해져서 10~20쪽에 걸쳐 담당자를 고문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옵션처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처럼 취급되는 학교에서 이리저리 끌어다가 아무거나 대충해 붙여도 쉬이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 너무나 고통을 주는 실적 보고시간인 것이다.
특히 참을 수 없는 것은 교사를 연수대상화해서 연수처로 프로그램 개발비가 쏟아져 들어가는 동안 노예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난 학기에 책 한 권씩 나누어주며 독후감 안 써내도 된다고 해도 20권이 다 소모되지 못했다. 대부분 책들을 읽지도 않고 있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책을 읽고 공부하면 신경정신과 병원 상담을 다니거나,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니 누가 연구하고 공부하겠는가? 그저 개나 주어버릴 승진에 취해서 점수딸 때 잠시 책 보는 시늉하는 거 외엔 말이다.
어떻게 해도 학교 제도가 주는 고통과 구속은 회복이 되질 않는다.
어쩌면 입시지옥에 시달려서 벼랑 끝에 매달린 우리나라 아이들 만큼이나 교사들이 위험한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코로나19에 걸리면 치명적인 기저질환 환자가 수증기 고인 목욕탕을 찾아서 바싹 말라버린 혈관을 깨워 심장에 피를 공급해야만 할까?
연구와 탐구생활을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노예를 강요하는 학교생활을 그만두어야만 할 것인가?
교사를 성찰하는 자율적 존재가 아닌 노예들을 이렇게 생산하는 그들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