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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람<6>: 고 놈 참, 보통 아니네, 알랭 드 보통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제목의 좀 특이한 소설을 쓴 ‘알랭 드 보통’을 소개한다. 책을 읽으면서 ‘알랭 드 보통’이라는 친구가 제 이름과는 달리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몇 구절을 소개한다.
-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그 반대일 경우에는 태평함이 요구되는 이 게임에서 진지한 욕망이 장애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완벽함을 찾고, 그 완벽함과 자신을 비교하면 열등감을 느낀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었다는 뜻이다. 그녀와 비교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열등감을 느끼게 되면, 직접적으로 나 자신이 아닌 인격, 우월한 존재(내가 사랑하는 사람/김원중 주)의 요구를 찾아내고 거기에 부응하려는 구애의 자아를 내세울 필요가 생긴다. 사랑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나? 영원히 그렇지야 않겠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구애의 이 단계에서는 그렇게 된 것이 사실이다. 구애하는 위치 때문에 나는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지 않고, ‘그녀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묻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내 타이가 어떤가?’ 하고 묻지 않고 ‘그녀가 내 타이를 어떻게 볼까?’ 하고 묻게 되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 그 질문의 재귀적인 운동 속에서 나의 자아는 점점 배반과 비진정성에 물들게 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같이 있는 사람에 관계없이 안정된 동일성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 날 저녁 나는 클로이의 욕망을 찾아내고 그에 따라서 나 자신을 바꾸려는 진정하지 못한 시도를 계속했다. 그녀는 남자에게서 뭘 기대할까? 나는 어떤 취향과 지향에 내 행동을 맞추어야 하나? 자신에게 진실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도덕적 자아의 핵심적 기준이라고 한다면, 나는 구애 때문에 이 윤리시험에서는 완전히 탈락하고 말았다. 구애는 나를 둘로 갈라놓았다. 진짜 자아와 거짓된 자아로.
침묵은 저주스러운 고발장이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구제불능일 정도로 따분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어쩌면 침묵과 서툰 태도는 욕망의 애처로운 증거로서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는 사람은 유혹하기가 쉽기 때문에, 유혹이 서툰 사람이 오히려 진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관대하게 봐줄 수도 있다. 정확한 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오히려 정확한 말을 의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리에종’이라는 책에서 드 메르퇴유 후작부인은 드 발몽 자작에게 편지를 쓰는데, 후작부인은 자작의 연애편지가 너무 완벽하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진정한 연인의 말일 수 없다고 까탈을 부린다. 진정한 연인의 생각은 두서가 없고, 조리가 안 선다는 것이다. 언어는 사랑에 걸려 넘어지고, 욕망에는 명료한 표현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에는 나의 말의 변비를 자작의 능란한 어휘와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큼 기쁘면서도 무시무시한 일은 드물다. 스스로 사랑 받을 만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을 경우에는 타인의 애정을 받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훈장을 받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내가 클로이를 얼마나 사랑하든, 그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자 기분이 이상했다. 상대의 그런 관심 표시가 이미 자신이 쭉 생각해왔던 것, 즉 자신은 사랑 받을 만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에 대한 확인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 받을 만하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쉽게 납득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클로이가 나 같은 불한당을 감정 생활의 중심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 아닐까? 클로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녀가 조금이나마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녀가 나를 오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사랑을 바라지만, 나의 진정한 자아가 드러나면 상대가 실망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실망은 과거에 발생한 것이지만[부모가 그랬을 수도 있다], 이제 미래에 투사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의 핵심적 자아가 남들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것이기 때문에,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자신이 협잡꾼이라는 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랑은 얼마 안 있어 철회될 것이 분명한데 왜 그 사랑을 받아들이겠는가? 당신이 지금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면, 언제 당신이 내 전체를 보게 될까 초조해하며 당신의 사랑에 익숙해져 가는 것은 바보짓이다. 이것이 바로 나와 같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그녀와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위험을 잊기 쉽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에 그/그녀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추하고, 멍청하고, 따분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아름답고, 똑똑하고, 재치 있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완벽한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약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그녀가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그녀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이 사람이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면 그 사람 역시 나와 똑같은 의존적 욕구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애초에 우리는 그 요구 때문에 상대에게 끌렸다. 우리 내부에 부족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상대에게도 나와 비슷한 부족상태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답을 찾을 것을 기대했는데,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제품만 발견하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상대 역시 우상에 대한 요구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 역시 우리와 같은 무력감을 피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서양 사상에는 결국 사랑은 보답 받을 수 없는, 일방적인 사모일 수밖에 없다는 오래된 우울한 전통이 있다. 사랑이 보답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사랑은 방향일 뿐 공간은 아니다. 목표를 성취하면, [침대에서건 어떤 식으로건]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면 소진되어 버린다. 몽테뉴는 말했다.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밖에 없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는 말로 같은 입장을 보여주었다.
- 보들레르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여자와 하루 동안 파리를 걸어 다닌 남자에 대한 산문시를 쓴 적이 있다. 그들은 아주 많은 것에 대해서 의견이 같았기 때문에, 저녁이 되었을 무렵 남자는 자신의 영혼과 결합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완벽한 벗을 만났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들은 목이 말라서 대로 한 구석에 있는 화려한 새 카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남자는 가난한 노동계급 가족이 카페의 판유리 너머에서 우아한 손님들, 눈부신 흰 벽, 황금장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 가난한 구경꾼들의 눈은 실내의 부와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남자는 동정심과 더불어 자신이 그런 특권이 있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에 수치를 느꼈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의 눈에도 자신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을 것을 기대하며 여자를 보았다. 그러나 남자가 영혼의 결합을 준비하고 있던 여자는 눈을 크게 뜨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불쌍한 사람들이 눈에 거슬린다며, 남자더러 주인한테 이야기해서 그들을 쫓아버리라고 말했다. 모든 사랑 이야기에는 이런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자신의 생각이 반영되기를 기대하면서 상대의 눈을 찾지만, 결국은 희비극적인 불일치로 끝나버리는 순간 - 그것이 계급투쟁의 문제이건, 구두 한 켤레의 문제이건.
우리가 서로에게 매혹적인 유사성을 아주 많이 확인했음에도, 어쩌면 클로이는 제우스가 잔인한 일격으로 나한테서 끊어버린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3월 중순쯤, 그녀가 나에게 새 구두를 보여주었을 때였다. 클로이의 구두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객관적으로 말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 사람이 객관적으로 사랑에 빠졌는가? 그녀는 어느 토요일 아침 킹스로드 근처의 상점에서 그 구두를 샀다. 저녁에 초대받은 파티의 준비물인 셈이었다. 그 구두는 유행상품이었으며, 잘 만들어졌으며, 깔끔했다. 그럼에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구두였다. 나는 클로이가 내 눈에는 잘 봐주어야 별 매력이 없는 구두에 황홀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그 구두를 살 때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을까를 생각하니 정신이 산란해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 여자는 이런 구두와 나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클로이가 그 구두를 골랐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불편하게도 그녀가 융합이라는 환상 너머에 그녀 나름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녀의 취향이 늘 나와 같을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모순이 없을지 몰라도 그런 조화의 상태가 무한히 뻗어나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어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이 늘 상식적인 생각처럼 유쾌한 과정은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 좋은 유사성과 마주칠 수 있는 가능성만큼이나 위협적인 차이와 만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클로이의 구두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어떤 면들은 알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느꼈다. 그런 면들이 내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 내 상상 속에서 구축되어온 아름다운 이미지를 거스르지 않도록.
클로이의 구두는 우리 관계의 초기, 내적 공상과 외적 현실 사이의 과도기에 탐지해낸 수많은 틀린 음정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녀와 매일매일을 산다는 것은 외국 땅의 새로운 풍토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의 전통과 역사로부터의 이탈로 인한 혼란 때문에 이따금씩 외국 혐오에 젖어드는 것과 비슷했다. 그것은 지리적, 문화적으로 자기 위치에서 이탈했다는 뜻이며, 혼자 사는 습관과 함께 사는 습관이라는 두 습관 사이의 취약한 시기를 지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위협적인 차이는 중요한 점 - 성, 계급, 직업 - 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취향과 의견이라는 사소한 점에서 형성되었다. -
- 나와 클로이의 말다툼에는 사랑과 자유주의의 역설이 담겨있다. 클로이의 구두가 어쨌든 간에 그것이 왜 중요하단 말인가? 클로이에게는 다른 좋은 점이 많으므로, 내가 이 한 가지 자잘한 일에 눈길을 고정시키는 것은 우리의 관계를 망치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왜 보통 친구들에게 하듯이 예의바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나의 유일한 변명은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그녀는 내 이상형이라는 것 - 구두만 빼면 -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결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친구에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말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변명이다.
이상주의적인 분위기에 젖어버리면 우리는 낭만적 사랑이 기독교적 사랑과 비슷하다고 상상하게 된다. 너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라는 보편적 감정. 조건이 없고, 어떤 경계도 설정하지 않고, 마지막 구두까지 사모하는 사랑.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랑. 그러나 연인들에게 말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기독교적인 사랑은 침실로의 이행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적 사랑의 메시지는 특정한 경우보다는 보편적 경우에 어울린다. 모든 여자에 대한 모든 남자의 사랑, 서로 코 고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두 이웃간의 사랑에 어울리는 것이다.
정치는 사랑과 연결시킬 만한 분야가 아닌 듯하지만, 프랑스 혁명이나 파시스트와 공산주의자의 실험이라는 유혈이 낭자한 역사에서도 똑같은 사랑의 구조를 읽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 사랑의 정치의 악명 높은 역사는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국가는 국민을 통치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민은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단두대로 가야했다. 혁명의 시작은 심리적으로 볼 때 남녀관계의 시작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통일에 대한 강조, 연인/국가의 전능에 대한 믿음, 이전의 이기주의를 포기하고 자아의 경계선을 없애라는 촉구, 더 이상 비밀이 없기를 바라는 욕망(비밀에 대한 공포는 곧 연인의 편집증/비밀경찰 조직을 탄생시킨다).
혁명가들이 거창한 진지함이라는 경향을 연인들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젊은 베르테르가 농담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듯이, 스탈린이 농담을 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둘 다 필사적일 정도로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사랑의 정치의 시작이 똑같이 장밋빛이라면, 그 마지막도 똑같이 핏빛이다. 우리는 사랑이 압제로 끝나는 현상, 국가의 진정한 이익을 돌본다는 통치자의 강한 확신이 그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죽일 권리로 끝나고 마는 사례들에 이미 익숙하지 않은가? 사랑도 믿음인 한 비자유주의적이다. 이제까지 자신의 좌절을 반대자와 이단자에게 퍼붓고 싶은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믿음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를 제 마음대로 살게 해 주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상대가 우리더러 마음대로 살라고 허락한다면 그것은 보통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 공동체나 국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나라의 구성원들은 고립되기는 하지만 별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반면, 공동체, 사랑, 형제애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는 나라들의 상당 수 주민들은 학살당하는 것일까?
왜 통치자들은 국민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반대, 차이에 관용을 가질 수 없을까? 자유주의적 사상가들은 통치자들이 국민을 사랑하기 때문에 통치한다는 말을 그만두고, 이자율을 내리거나 기차가 제시간에 들어오게 하는 일에만 집중할 때 따뜻한 마음이 생겨난다고 대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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