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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동 여사님
매일 아침 그녀를 만나온 지도 어느덧 6년이 지났다. 아침 출근 길 회사 앞에서 남편과 내게 활짝 웃으며 우유 한통씩을 건네는 그녀는 이 지역을 담당하는 야쿠르트 아줌마다. 하루 중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이란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우유를 주고 받는 단 몇 초 뿐이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같은 시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가 늘 궁금했었다. 수줍게 인터뷰 얘기를 꺼내니 깜짝 놀라며 손사레를 친다. 부담 가질 것 없다는 설명과 함께 은유의 <글쓰기 최전선>을 건네며 책에 담긴 인터뷰 글을 한번 읽어 보시라 권했다. 좀처럼 시간대가 맞지 않는 우리는 할 수 없이 유선상으로 틈틈이 인터뷰를 진행했다.
예순을 바라보는 58년생 개띠, 25년차 베테랑 야쿠르트 아줌마.
"내 이름? 현.정.애. 그러게. 누구는 비슷한 이름에 회장님 소리 들으며 좋은 차 타고 출근하는데 누구는 야쿠르트나 팔고 있네."
2010년 초 그녀 구역의 이 건물로 입주한 H그룹의 회장은 그녀와 이름 마지막 한글자 만이 다르다. H그룹이 이사온 후 달라진 점은 보안상의 이유로 사무실 배달이 금지되었다는 것. 야쿠르트 색깔의 근무복이 낮시간 그녀의 정체성을 대변하듯 초록색 줄에 매달린 사원증은 건물 안과 밖의 사람을 뚜렷이 구분하는 징표였다. 아침 6시40분부터 9시까지 사옥 앞에 내내 서있어야 하는 지금의 일과로 바뀐 것도 그때부터이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해 늘 골골대고 낯가림이 심했던 그녀는 결혼 후 집에서 조용히 남매를 키우는 전업 주부였다. 그런 그녀의 집에 야쿠르트를 배달하던 아주머니로부터 어느 날 이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젊은 사람이 집에만 있으면 뭐하냐, 아이도 초등학생이니 학교 보내놓고 시간 날 때 돈도 벌고 좋지 않겠느냐며 부추겼다. 알고 보니 아줌마 모집 역시 회사에서 실적으로 할당 받은 일이었다. 여러 차례의 강권을 뿌리치지 못해 교육만 받아 보겠다며 나 갔다가 1주일의 교육과 시험까지 치르고 현업에 바로 투입되었다. 얼떨결에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오게 될 줄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다. 건강 때문에 일하는 걸 말렸던 남편이기에 처음 3개월은 일한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다. 앓는 소리에 하루가 멀다하고 붙여대는 파스를 이상하게 생각한 남편이 그녀를 추궁하기 시작했고, 이미 사실을 알고 있던 아이들의 이실직고로 들통이 나고 말았다.
"처음엔 몸도 안좋은 사람이 무슨 돈을 벌겠다고 고생이냐 노발대발 하면서 당장 그만두라는거야. 월급을 얼마나 받느냐 묻더라고. 92년 당시에 첫 월급이 70만원이었어. 그 이후로 한번도 월급을 어디다 쓰냐, 얼마나 모았냐 일절 관여 하질 않았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월급을 70만원으로 계속 알고 있었을 정도니까. 그 사람이 원래 그래."
그녀의 말투에서 남편에 대한 은근한 자랑과 애정이 묻어난다. 그렇게 남편이 캐묻지도 않는 수입을 25년이나 모았으면 꽤 큰 돈이 되지 않았을까.
"남편과 우리 아들, 딸 그리고 친정엄마 보험도 내가 다 들어줬어. 그 돈 다 보험료로 꼬박꼬박 들어갔지."
화장기 없이 기미로 뒤덮인 얼굴, 자기를 꾸미는 것보다 가족이 늘 우선인 그녀, 6남매 중 맏딸로 어려서 부터 살림을 챙겨온 그녀를 알기에 굳이 수입의 쓰임새를 묻지 않는 남편의 마음을 알것도 같다.
얘기 나온 김에 궁금했던 월 수입을 넌지시 물어보았다.
"우리는 100% 실적제야. 내 경우엔 여름처럼 유동인구가 좀 많은 때는 140에서 150만원 정도? 겨울엔 사람이 적어서 100에서 110만원 정도 벌지. 250, 300만원까지 버는 여사님도 있다고 막 선전하고 그러는데, 그런 경우는 고정물량이 많은 시장통 담당이거나 저녁 늦게까지 일해야 돼. 요즘 젊은 사람들은 힘들기만 하고 돈도 얼마 못 받는다고 아무도 하려는 사람이 없어."
여사님? 회사에서는 공식적으로 그녀들을 여사님으로 부른단다. 그녀들끼리도 서로를 '여사님'이란 호칭으로 통일해 부른다. 어쩐지 드라마 속 평창동 사모님을 연상시키며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호칭이다.
25년이 흘렀다지만 70만원에서 시작한 그녀의 월급 역시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다. 당연히 비정규직일 거라 생각하고 여쭤 봤는데, 돌아온 대답 역시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직원이 아니고 여사님 하나하나가 모두 개별 사업자로 등록돼 있어. 회사에서 여사님들한테 개개별로 사업자등록증을 발급해 주거든. 그럼 뭐해. 밖에 나가면 써먹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지. 그래서 우리 매년 부가가치세도 꼬박꼬박 내잖아. 4대 보험이니 보너스, 학자금 같은거 일절 없어. 이렇게 오래 일해도 퇴직금 한푼 없다니까."
지난 8월 대법원 3부는 12년간 야쿠르트를 위탁판매한 정모씨가 "근무기간 동안 연차수당과 근속연수에 따른 퇴직금 2,993만여원을 지급하라"며 (주)한국야쿠르트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정씨의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근무불량이나 실적저조 등으로 인한 징계나 불이익도 없었다"며 "회사로부터 업무에 대한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았다고 볼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현정애 씨는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와 커피 한잔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 배달과 판매로 고정물량을 소진하고 오후 1시반까지 이화 사거리에서 유동물량을 판매한다. 이후 지역관리를 담당하는 근처사무실로 가서 마감을 하고 다음날 판매할 물량까지 미리 챙겨놓고 퇴근하면 거의 4시다. 배고픈 걸 잘 못느낀다는 그녀는 점심도 커피 한잔, 오며 가며 알게 된 사람들이 건네 주는 귤 한개, 떡 몇개로 점심을 때운다. 평일보다는 여유롭지만 토요일도 출근해야 하고 달력의 빨간 날만 쉴 수 있다. 우유값 떼먹고 도망간 사람들의 미수금도 오롯이 그녀들의 주머니에서 나간다. 실적 저조로 인한 징계나 불이익이 없다지만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프로모션을 하며 실적을 채워야 한다. 무엇보다 기본급도 없이 실적이 곧 수입인 여사님들에게 법원의 판결은 어떻게 들릴까.
날이 추워졌다. 동복으로 겨울 점퍼가 제공되지만 종일 바깥에 있어야 하는 그녀는 기본으로 윗옷을 7~8개씩 입고 핫팩으로 겨울을 견딘다. 광고효과를 위해 회사 동복 위에 다른 외투를 입는 것은 금지된다. 정년이 따로 없어 일흔이 넘어서도 일하는 분들이 계시긴 하지만 바깥에서 오래 지내야 하고 무거운 것을 들고 다녀야 하는 일이 쉽진 않다.
"그래도 2년에 한번씩 회사에서 옷 그냥 주는 거야. 개인이라면 자기 돈으로 사입어야 되는건데 다 준다니까. 나 저번에 20주년 근속했다고 베트남이랑 캄보디아도 보내줬잖아."
근로자인 듯 근로자 아닌 근로자 같은 개인사업자. 직원도 아닌 개인 사업자에게 이런 '배려'도 베풀어 주지 않느냐는 듯 덧붙이는 그녀의 말은, 내가 아닌 그녀 자신에게 던지는 위로처럼 들렸다. 밖에선 '아줌마'로 불려도 그네들끼린 '여사님'으로 불러주는 호칭처럼. 내년이 25주년인데 얼마전 회사에서 25년 근속 포상 제도를 없애버렸다며 아쉬워하는 그녀를 보니, 어려운 형편으로 있던 복지마저 사라지는 것은 우리 회사만의 일은 아닌가보다.
강산이 두번 바뀌는 동안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말도 마. 진상, 진상들....돈 안주고 도망가는 사람들 진짜 많아. 지로 청구로 바뀌고 나서 좀 줄긴 했는데 그래도 여전해. 떼먹으려고 작정하면 뭔들 못해. 휴대폰도 안받는다니까."
매일같이 내일 준다 내일 준다하며 차일피일 미루다 회사를 그만두고 도망간 젊은 아가씨가 있었단다. 이름도 잊을 수 없는 그 아가씨를 본 건 한 참 뒤 이화 사거리에서 였다. 신호 대기 중인 택시 뒷자석에 앉은 아가씨를 보고 "택시~"를 외치며 교차로로 뛰어 갔다. 다행히 기다려준 택시 운전사 덕에 뒷문을 열고 3년만에 밀린 우윳값을 돌려 받았단다.
아침에 그녀가 서 있는 H그룹 사옥 앞에는 작은 공원이 있다. 평소엔 노숙자들도 많고 간혹 싸움도 일어나서 깜깜한 새벽녘엔 괜히 무서워지곤 한다.
"거지와 노숙자의 차이가 뭔줄 알아? 거지는 절대 거저 달라고 안해. 돈 내고 먹거나 먼저 건네 주면 먹지. 근데 노숙자는 달라고 막 행패를 부려."
어느날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에 돌아와보니 노숙자가 하나에 350원 하는 야쿠르트를 3개째 먹어 치우고 있었다. 1,050원을 달라 하니 50원만 우선 받고 천원은 외상으로 하자고 해서 한참을 실갱이 했다. 천원만 받을테니 돈을 내라는 아줌마와 50원만 우선 받고 천원을 외상으로 하자는 본인 말을 왜 못알아 듣냐며 오히려 더 성질 부리는 노숙자 아저씨, 웃픈 광경이다. 자기가 일명 '부산 갈매기'라며, 작대기로 시비를 걸면서 우유 하나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던 노숙자도 있었다. 자기가 아는 누군가에게 얘길하면 다신 야쿠르트 장사 못할 줄 알라며 협박을 하더라나. 마침 지나가는 순경에게 붙잡혀 가지 않았다면 한참을 시달렸을 거다.
"부산 갈매기를 내가 어떻게 알아? 차라리 배 고프다고 하나 달라면 내가 준다니까. 왜 사람을 못살게 굴어. 그래도 겨울에 추워지고 안보이면 죽었나 싶다가도 봄 되서 나타나면 또 반갑고 그래."
말끔하게 잘 생기고 괜찮았던 노숙자 한명은 친구가 소개해준 구로동의 회사에 취직했다가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며 다시 노숙자로 컴백하기도 했다.
알지도 못하는 그녀를 붙잡고 인생살이 하소연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어느 날은 근처 서울대 병원에서 남편을 간호하던 중년의 여성이 자기 이야기 좀 들어줄 수 있냐며 다가 왔다. 젊은 시절 남편이 바람을 피워 속을 썩이다 다 늙어 다시 돌아왔는데, 이내 중병이 들어 지금은 간호하느라 고생한다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풀어 놓으며 펑펑 울었다. 가족도 위로가 되지 못하고, 가까운 친구도 소문 낼까 부담스러울 때 오히려 생판 남인 자기 같은 사람이 편할 수도 있지 않겠냐며 공감하는 그녀.
"사람들 겉은 화려해 보이고 잘난 것 같아도 문 하나만 열면 다 똑같더라고."
고등학교 교사인 딸은 늘 이제 일 그만두고 쉬라 하지만, 가족들도 안다. 이 일을 시작한 후 그녀 입에서 아프다는 말이 사라졌다는 걸. 젊은 시절 위가 안좋아 노루모산을 하루 두 깡씩 먹어야 했던 그녀지만, 일을 시작하고 제대로 챙겨먹지 못해도 오히려 속 아픈건 사라졌다. 소심하고 낯가리는 그녀가 집에만 있었다면 지금쯤 몸도 마음도 더 아팠을거라 자평하며 해사하게 웃는다.
"딸래미가 가까이 살면서 자주 들여다 보는데도 매일같이 전화 해서 챙겨줘. 시어머니한테 매달 생활비 드린다고 나한테도 매달 30만원씩 꼬박꼬박 자동이체로 보내준다니까. 그거 다 모아놨다가 애들 돌이나 무슨 행사 있으면 다시 돌려주는 거지만, 그래도 줄때 받아야지. 안그래?"
점심 식사나 함께 하며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육아휴직 중인 딸이 점심을 사주러 온다며 한사코 괜찮다 거절한다. 멀리 살면서도 혼자 계신 엄마께 전화 한통 아끼는 나는 엄마 이야기를 이렇게 정성 들여 들어준 적이 있던가. 자꾸만 그녀 위로 엄마 얼굴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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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앗 딸래미가 부분이 두번 나와요 편집 다시 하셔야 겠어요!
방금 수정 ㅋㅋㅋ
@조르바 ㅎㅎ 글 너무 좋네요. 몰입도 있고 재밌게 잘 읽었어요!
우~와! 조르바님 인터뷰 글. 멋져요. 내용이 '재미+목적+깨달음+공감' 을 주는 글이예요. 성의 있는 인터뷰라는게 온몸으로 전해 지네요. 뒷부분은 동일한 부분이 들어있는 듯요.
부산갈매기 ㅋ..
'추워져 안보이면 죽었다 싶다가도 보 되서 나타나면 반갑다.'는 말은 따뜻하고
'사람들 겉은 화려해 보여도 문 하나만 열면 다 똑같다', '다시 돌려주는 거지만 그래도 줄 때는 받아야지.'는 말은 단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