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거참 난감하다.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다.
건달, 주먹, 깡패, 협객?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부르곤 하지만 뭔가 딱 떨어지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주먹이나 깡패 이미지가 줄곧 붙어 다니는 것은 그라는 위인이 10대 시절부터 일찌감치 학교주먹의 세계를 평정했던 유명한 ‘돌주먹’ 출신이기 때문이다.
방동규라는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별명인 배추, 혹은 방배추로 더 유명한 그는 사실 1950년대에 학생 주먹으로 이미 한 차례 떴다.
그건 엄연한 사실이다.
지금 그와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은 소문과 전설속의 배추라는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런 배추가 6.25 전후 무렵 벌였던, 객기와 치기가 뒤섞인 무용담들은 ‘통조림 사회’에 갇혀 사는 우리들의 상상을 가볍게 뛰어 넘어버린다.
감격시대 혹은 낭만시대, 따라서 지금과는 전혀 분위기가 달랐던 중.고교는 물론 심지어 대학가의 조금 세다는 학생어깨들을 상대로 거의 한두 번씩 붙어봤고 장쾌한 승리를 거뒀다.
한참 유명하던 무렵인 53, 54년에는 대학생 건달로 악명을 떨치던 ‘춘하’의 패거리와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 때를 전후에 전국 씨름 왕 출신의 어깨로부터 도전장을 받았다.
물론 승리는 배추의 것이었다.
이전 창경원을 무대로 해서 권총을 찬 특수 군인들과 맞장을 뜨면서 돌주먹 배추의 성가를 다시 한 번 높였는데 심한 경우 당시에 사회악의 하나로 지목되곤 하던 군인 깡패들과 목숨을 건채로 맞부딪치기도 했다.
그 싸움이 바로 서울 성동역 주변의 오고가는 자동차는 물론 전차까지 막은 상태에서 시민과 미군들의 응원 속에 벌였던 싸움이었다.
오죽 판이 컸으면 ‘군인깡패, 학생들에게 혼쭐나다’라는 신문기사까지 등장 했을까.
오해 마시라.
당시의 싸움판은 이해관계나 원한 따위가 얽힌 게 결코 아니었다.
70년대 이후 만들어진 조폭 따위와도 아무 상관없다.
‘네가 세다며? 그러면 누가 더 센지 한번 겨뤄보자’는 식의 싸움이었고, 따라서 스포츠 수준의 승부였다.
주머니칼이나 자전거 줄 따위를 동원하는 이른바 ‘연장질’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렇게 힘과 기량을 겨뤄 싸움에서 진 사람은 바로 패자의 예를 깍듯하게 갖추는 게 보통이었다.
배추와 그 시대 어깨들은 전형적인 낭만 주먹으로 분류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전설의 무용담이 나중 발전을 거듭해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이란 평가로 이어졌다.
소설가 황석영의 입이 진원지였을 것이다.
그건 과장하거나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왕년의 학생 돌주먹 배추는 이후 60년대를 거쳐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잊을 만하면 한두 번씩 ‘맞장의 전설’을 만들어 냈고, 심지어 유럽 같은 유럽 땅을 무대로 결투를 벌이면서 주먹 황제 이미지를 굳혔다.
다만 배추를 둘러싼 시끌벅적한 무용담이란 것이 주로 문단과 화단 쪽에서만 유포됐고 마치 전설인 양 회자됐다.
그들 사이 술자리의 단골 화제이기도 했다.
그쪽에서 배추는 상당한 스타였다.
그게 좀 희한한 일이다.
배추가 놀았던 물이 실은 진보진영 쪽이었기 때문이다.
70년대 이전의 초창기 이후 ‘재야 세력의 든든한 친구’였던 배추는 반독재 민주화를 기치로 내건 문화운동패의 문인, 화가, 그리고 지식인들과 두루 친하다
일반인들에게 배추란 이름이 다소 낯선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런 배추란 위인은 삼류 건달이나 요즘의 조폭들과는 너무도 다르다.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했던 시라소니, 김두환을 포함해 유지광, 이정재, 이화룡 등 50년대 주먹들과도 선명하게 구분된다.
해방이후 나타난 그들 ‘범 낭만주위 주먹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제도 정치권을 기웃 거리면서 여기저기에 줄을 대려 했다.
즉, 우파세력이기 십상이었고, 때로는 노동 현장과 정치권에 ‘백색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배추는 정반대로 놀았다.
‘함께 일하자’라는 그들 우파주먹들의 갖은 유혹과 제안을 그때마다 물리쳤다.
‘내 인생에 멘토(후원자)는 없다. 내 스스로가 주인공일 뿐’이라는 나름대로의 생각 때문이었고, 사회적 해악을 끼치는 그들과는 체질과 생각부터가 다르다는 판단에 따른 선명한 ‘선긋기’였다.
그리고는 내내 문인, 언론인 등 비판적 지식인들과 함께 했다.
실제로 ‘김일성과 무전 교신을 했다’는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간첩죄로 잡혀가 서대문 형무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긴급조치 1,2,3,4호가 쏟아지던 70년대 초 유신시절의 일인데, 결국은 반독재운동에 힘을 보탰다는 이유로 당국에 찍힌 것이다.
뿐인가?
80년대를 달궜던 유명한<말>지 사건에 다시 연루돼 치도곤(治盜棍)당하기도 하였다.
국가보안법위반 협의로 잡혀가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과 맞닥뜨린 것이다.
이런 저런 현대사의 고비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숨은 인물이 바로 이사람 배추인데, 최악의 악연 속에서 만난 왕년의 어깨와 고문 기술자 사이에서 일어난 일화도 기억해 둠직 하다.
보름간 죽을 고문을 당한 뒤 초주검 상태에서 풀려난 배추는 ‘야 인마 너도 왕년에 좀 놀아 봤다는 놈이 왜 사람을 묶어 놓고 패냐?’며 이근안에게 맞장 뜨기를 제안했던 것이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토해 냈던 그 당당한 자세, 그 남자다움과 의협심은 지금도 문단의 전설로 남아 있다.
답답했던 시대,
정의롭지 못한 권력과의 싸움을 자처했던 그를 우리시대의 협객으로 부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
그렇게 문패를 붙어야 오히려 배추에게 썩 잘 어울린다.
평생 가슴에 품어온 생각과 이상이 희한했고, 몽상가에 가까운 이상주의자 기질이 짙었기 때문이다.
단 체 게바라와 달리 총 대신 삽자루와 곡괭이를 냉큼 들었다.
평생 꿈꿔온 공동체운동과 무정부주의 이상을 이 땅위에 실천하려 했던 것이다.
자연주의자이자 몽상가였던 그는 이미 반세기 전에 농촌 계몽 운동과 녹화 운동을 했고, 그만의 이상촌을 세운다며 70년대에는 강원도 철원 땅 100만평 농장을 찾아 들어가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그건 다기가 젊었을 때 읽었던 소설가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속 주인공, 그가 못내 좋아 했던 책인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스콧 니어링 . 핼렌 니어링 부부처럼 자연주의자의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꿈만 꾼게 아니고 실천까지 했다.
그런 모습이야 말로 배추라는 위인의 또 다른 얼굴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보면 배추의 사회 후배들인 정치인 이부영이나 김태홍 등이 힘주어 말하듯이 깡패이니 주먹이니 하는 이미지란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 밑의 수사기관의 악의에 찬 농간에 불과하다.
사실 그는 백기완, 함석헌, 장준하, 계훈제 등 당시 핵심 거물 인사들은 물론이고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 등 저자인 리영희 같은 진보 지식인, 이호철, 신경림, 김지하, 황삭영, 송기원, 백낙청, 염무웅, 김성동, 송기원 등 민중문학 진영의 네로라는 문인들과 두루두루 친하다.
뿐인가.
민중 미술 화가들인 강요배, 여운, 신학철 등과는 물론이고 민중 판화 운동가로 유명한 오윤과도 호형호제 했던 사이다.
한 시절을 휘어 잡아온 문단, 화단의 내로라는 맹장들이 한결같이 배추를 ‘형임’으로 부르고 그를 친구로 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방배추 현 경북궁 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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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에 편승했던 정치 깡패들은 아래처럼 사진 처럼 갔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