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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5일, 성령강림 후 제15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1년 9월 5일, 성령강림 후 제15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성령강림 후 제15주 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찬송가 25장(면류관 벗어서)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교독은 시편125:1~5절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 함께 기도합니다. [윌리엄 템플, William Temple]
(영상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신 분을 위한 기도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은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인 것같이
당신의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셔서
같은 사랑 안에서 당신께 순종함으로
서로 연합하게 하소서.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당신이 주님임을 믿게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7:24~37절입니다. (성경)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 특별 찬양: 373장 (고요한 바다로)
*. 말씀 선포: 주여 옳소이다마는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5주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31-37절까지는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24~30절까지는 이방 여인(수로보니게 족속으로 헬라인)이 예수님께 찾아와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간구, 예수님과의 대화, 그리고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기까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병(病)과 병을 마주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살펴봅니다.
2. 본문1. 31~37
사람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면 참 좋을 텐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의 삶이 그렇지 못합니다. 경중(輕重)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모든 사람들은 병(病, 아픔)을 안고 살기 마련입니다. 요즘이야 병이 나면 병원에 가고 약을 먹고 하면서 치료를 합니다 만은, 예수님 당시만 해도 병원은 생각지도 못한 때였고, 아플 때면 주로 (종교)지도자를 찾을 수 밖에 없었고 [*. 당시의 (종교)지도자(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는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입법, 사법, 행정, 의료 등등 거의 모든 것에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찾을 만큼 삶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요기’와 같은) 광야에서 ‘지혜를 찾는 혹은 선포하는 수행자들’을 찾아 도움을 구했습니다. 마치 옛날 병을 포함해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동네 배우신 어르신을 찾아 자문을 구하듯이 말입니다.
[*. 이런 전통이 남아 있어, (요즘은 이런 분들이 드뭅니다 만은 예전에는) 아플 때 병원을 가지 않고 병 잘 고친다고 소문난 종교인이나 기도원 등등을 먼저 찾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기도원 등에 가보면 병들어 오시는 분이 꽤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병원에서 치료하기 어렵다는 선고를 받고 오시는 분들이 다수입니다 만은.]
사람으로 사는 이상 병(아픈 것)은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과거, 현재 혹은 미래 어느 때든지 간에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데 아픈 것이 꼭 괴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아픈 것이 때로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아파서 울지만, 사람들은 ‘울음을 터트려야 건강한 아이’이기 때문에 기뻐 박수를 칩니다. 울지 않으면 오히려 건강하지 않은 아이가 됩니다. 감기가 걸려 병원을 찾았다가 큰 병이 있음을 조기에 알게 되어 큰 병을 치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감기는 독이 아니라 약이 됩니다. 그러니 아픈 것을 부정적으로 여길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병을 안고 살았지만 주님께서는 치료해 주시기는 커녕 오히려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약한 그 때(곧 아픈 때가)가 오히려 강할 때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2:7~10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병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병을 바라보는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병-고침은 우리가 생각하는 몸의 치료라는 의미의 병-고침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예수님께서는 병을 치료하신 경우가 많을까요? 병을 주는 경우가 많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앉은뱅이도 일으키시고, 귀머거리도 고치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도 하시고, 문둥병, 열병, 하혈, 당시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많은 병, 곧 ‘귀신들린’ 병 등등을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등 많은 병-고침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한 (멀쩡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맹인이라 곧 보지 못한다 하시고(마 15:14, 요 9:41), 농인(聾人)이라 듣지 못한다 하시고(막 4:23), 간음했다 하시고(마 5:28), 심지어 살인했다 하시고(마 5:21~22), 뱀 새끼(마 23:33)로 여기시기까지 하셨습니다.
[*. ref. 마태복음 15:14,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요한복음 9: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마가복음 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태복음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보(인다고 하)는 자를 못 보는 자로, 듣(들린다고 하)는 자를 못 듣는 자로, 음욕을 품은 자를 간음한 자로, 화내는 자를 살인자로,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뱀 새끼로 여기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못 보는 자, 못 듣는 자, 간음자, 살인자, 뱀의 새끼가 되었을까요? 예수님께 병-고침 받은 앉은뱅이, 귀머거리, 소경, 문둥병, 열병, 하혈, 곧 ‘귀신들린’ 병 등등에 걸렸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께 병-고침을 받은 사람보다 예수님께 병을 얻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다시 말씀 드리지만 병(病)이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좋은 것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병(病)을 우리가 생각하는 병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병-고침 하신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 병-고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병(病)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병이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병-고침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병-고침이 아닌 것입니다. 즉, 성경에 (비교적 자세하게) 이야기로 기록된 예수님의 병-고침을 단순히 병-고침으로만 여기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몸의 아픔을 치료하는 병-고침의 치료(治療, treatment)라기 보다는, 전인적(全人的)인 치유(治癒, healing), 곧 ‘병을 생기게 한 원인을 제거한 상태’의 치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치료와 치유가 분리된 예가 10명의 나병 환자들의 병-고침 이야기입니다(누가복음 17:11~19). 치료와 치유의 관점에서 보면 9명의 나병 환자는 치료가 되었지만 치유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1명의 사마리아인만이 치유가 된 것입니다. 즉, ‘온전한 구원(19)’에 이른 것입니다.
[*. 누가복음 17:11~19입니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 치유와 치료의 차이:
“치유와 치료의 차이를 정확히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치유와 치료와의 차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대개는 의사의 의료행위를 치료(treatment)라고 한다. … 하지만 치유(healing)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치료(治 다스릴치, 병고칠료)는 누군가(의사)에 의해서 병이나 상처(處)를 치료 하는 것이고, 치유(治 다스릴치, 병나을 유)는 스스로 병을 낫게 한다는 뜻이다. 치료란 병 자체를 고치려고 하는 행위를 말하지만 치유란 병의 원인을 알고 병의 원인을 풀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치료란 외부의 누군가가 병을 고쳐주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며, 치유는 자신의 본질로 되돌아가므로 자기 스스로 병을 낫게 한다는 뜻이다.
정치나 사회적 의미에서도 치료와 치유의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 인간의 정신이 부패하고 퇴락하여 사회적 문제가 생겼을 때 임시적 처방으로 새로운 규정을 만들고 벌칙을 가하는 것은 치료에 해당하고,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게된 근본 원인을 찾아내 다시는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은 치유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고액과외가 성행한다고 과외를 금지하고 당사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치료이고, 대학 입학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학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을 잠재우기 위해 대학 입시제도를 바꾼다든가 중고등학교의 공고육의 질을 높이든가 하는 장기적 교육정책의 변화를 시도한다면 이는 치유에 해당한다. –인터넷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차여차 하신 후에 ‘에바다’(열리라)’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이 분명해졌다고 했습니다. 공자가 말한 개념을 빌리면, 귀가 열렸다는 것은 이순(耳順), 모든 듣는 것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이고, 혀가 풀려 말이 분명해진 것은 종심(從心) 모든 나가는 것이 걸림이 없이 자유로워졌다는 뜻입니다. 들어 오는 것과 나가는 것이 병(病)에서 고침을 받아 열렸다,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입니다.
[*. “나이를 말할 때 공자의 논어, 위정(爲政) 4장을 보면 15세는 학문에 뜻을 둔다 하여 "지학(志學)" 20세는 비교적 젊은 나이라 하여 "약관(弱冠)" 30세는 뜻을 세우는 나이라 하여 "이립(而立)" 40세는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 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 하여 "불혹(不惑)" 50세는 하늘의 뜻을 안 다하여 "지천명(知天命)" 60세는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한다 하여 "이순(耳順)" 이라고 부른다. 70세는 “종심(從心)”이라 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해도 규범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는 “종심소욕 불유구 (從心所欲 不踰矩)”에서 온 말이다.” –인터넷에서-]
병(病)을 바라보는 마음이 병(病)들지 않게 하십시오. 마음으로 들어 오는 귀도, 마음에서 나가는 혀도 ‘에바다(열리라)’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비로소 온전히 건강한 사람, 인자(人子), 곧 ‘참-인간’의 모습이 됩니다. .
3. 본문2. 24~30
두 번째 살펴 볼 본문은 24~30절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족속의 헬라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15:21~28절 에서도 나옵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 여인은 이방인입니다. .
이 여인에게는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었고,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어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은 이방인을 실제로 그렇게 개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의 눈에는 속이 시원한 사이다 같은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소 모습과는 좀 다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여인은 이렇게 답합니다. 28절입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의 답변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그리고 여인은 집에 돌아가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갔음을 확인합니다. 어린 딸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갔기 때문에 어쨌든 여인은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매정하기 짝이 없는 날 선 말씀을 하신 걸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7장 앞 부분과 함께 보아야 합니다. 7장은 앞 부분, 1~23절에서 유대인, 곧 모세의 율법과 유대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 오늘 본문 24~30절에서 이방인, 곧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하는 예수님을 함께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과 이방인 둘 모두에게 마땅찮은 것이었습니다.
[*. 여인은 수로보니게(수리아) 족속의 헬라인 곧 (유대인의 관점에서) 이방인입니다. 당시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과는 말도 섞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도 나오듯이 심지어 개로 여겼습니다. 게다가 당시에 이방인 여인이라면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7:1~23까지 내용은 유대인의 전통, 곧 모세의 율법과 유대교의 전통적인 교훈이 갖고 있는 권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매정하기 짝이 없는 날 선 비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너희가 (유대인이)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만들었다(8)’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아마도 속 시원한 사이다 같은 말씀이 됩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실, 가만히 속을 들여다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유대인의 전통과 율법을 폐기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살피라는 것입니다. 9-13절을 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바로 이방인(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에게 거침이 없듯, 이방인에게도 거침이 없이 말씀하십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이방인을 보는 일반적인 태도로 말씀하십니다. 2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유대인이 그들의 율법과 전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속이 뒤집혀졌듯이 이 여인도 이방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속이 뒤집혀져야 했는데… 그러나 유대인과는 달리 이 이방 여인은 뜻밖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들입니다. 28절입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유대인들도 이 여인처럼 마땅히 “주여 옳소이다마는 … (이러저러한 우리의 모습을)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자신의 율법과 전통을 내려 놓지 못하고 복음과 담을 쌓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뜻(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은 (택하심을 입지 못했으나) 복음을 받아들인 자요, 유대인은 (택하심을 입었으나) 복음에는 원수된 자’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1:28입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유대인) 너희로(이방인)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유대인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었다고도 말합니다. 로마서 11:12a입니다. “그들의(유대인)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유대인)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눈을 봐야 합니다. 이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눈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눈은 몸과 마음 사이를 오가는 문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눈은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창입니다.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면 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낯선 사람끼리 서로 30초 이상 눈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은 그 마음을 들키기 혹은 들킬까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오랫동안 그 눈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입술이 무엇을 이야기하든 눈을 보는 사람은 그의 마음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간절함에 예수님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 유대인은 자신들의 율법과 전통을 변호하느라 예수님의 눈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눈을 바라봤다면 ‘주여 옳소이다만은~’을 먼저 말했을 것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만은 …’ 하면서 내어 놓는 그녀의 반응에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그리고 3절에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고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은 어떤 말인가요? “…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b)”입니다.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귀신이 나갔다고 합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이방 여인입니다. 그렇다면 귀신은 누가 내 쫓은 것일까요? 예수님이신가요, 이방 여인인가요?
제자는 스승의 도움(가이드)을 받아 자신의 뜻을 이룹니다. 스승은 제자를 도울 뿐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신뢰하고 좇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스스로 이루는 것입니다.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냄도, 여인은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결국은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듯) 스스로 딸의 귀신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많은 예수님의 치유하심이 그러합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마태복음 9:22), 맹인 바디매오(막 10:52),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눅 7:50), 나병환자 사마리아인(눅 17:19) 등 모두가 다 예수님의 선포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입니다. 병은, 비록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 고치는 것입니다. 스스로 고치지 않는 치료는 결국은 치유가 되지 못하는 법입니다.
[*. 마태복음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 마가복음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 누가복음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스승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눈을 바라보라는 것은 스승의 마음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놓쳤고, 이방 여인은 잡았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하고 스승을 인정하고, 자신의 처지를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히 고백할 일입니다. 로마서 11:20입니다. “옳도다 그들은(유대인)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이방인)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4. 나가는 말
사람은 아프지 않으면 건강한 것입니다. 몸에 장애가 있든지 혹은 나이 들어 약해졌든지 해서 혹 삶에 불편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아프지 않으면 다 건강한 것입니다. 아프면 병원에서 혹은 약으로 다스리고, 다스릴 수 없는 아픔을 마주하면 ‘때가 되었나 보다~’ 하시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 됩니다. 천국은 아름답고 좋~은 곳입니다. [*. 어떤 성에서 살던 여인이 다른 나라 왕자의 방문을 받아 청혼을 받고 그렇게 집을 떠나가기 싫어했지만 여차여차 결국은 그 왕자를 따라 나서게 되었는데, 간 곳이 너무나 행복하고 좋더라는 이야기, 왜 그렇게 울며 불며 집 떠나기를 두려워하고 슬퍼했는지 멍청하고 어리석었음을 자책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장자> 이야기에서]
문제는 아픔(병, 病)을 보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병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 마음이 건강하면 육체에 깃드는 병(病)쯤은 쉽게 이겨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병들면 심지어 건강한 몸조차도 병들고 마는 것입니다. 에바다! 귀와 입을 열어주셨습니다. 귀, 들어 오는 모든 것과, 입, 나가는 모든 것을 열어주셨습니다. 귀를 통해 마음으로 들어 오는 모든 것에서, 마음에서 입으로 나가는 모든 것에서 자유하는 이순(耳順)과 종심(從心)의 삶, ‘에바다~’의 삶을 누려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을 건강하게 하려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님의 눈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의 뜻(마음)을 알아챕니다. 지난 주 나누었던 청개구리 이야기 중, 어머니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그 입만 바라봤던 어리석은 청개구리가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채는 청개구리가 되십시오. 마음을 알아채려면 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눈을 맑고 밝게 하십시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눈이 맑고 밝습니다.
*. 찬송가 44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찬송가 50장 3절 부르며 헌금합니다. (찬송가) / *. 헌금 기도합니다. (#.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 헌금 기도합니다.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찬송가 325장(예수가 함께 계시니)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