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 완산구 은행로 34 (풍남동3가 76-1)
063-231-3219
관람시간 : 10:00-17:00
매주 월요일 휴무, 1월 1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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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년간 전개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으며,
1892년에서 1893년 까지 동학교단의 조직적인 교조신원운동과 1894년 1월 고부 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3월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되었다.
피지배 계층의 사상적 견해를 반영하고 있던 동학사상과
전국적 조직이던 동학교단을 매개로 광범위한 농민 대중이 참여하였는 바,
개화파가 주도했던 갑신정변이나 독립협회운동, 재야유생이 주도했던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 항쟁등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나,
동학농민혁명은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이었다.
종래 군·현 단위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던 항쟁을 전국 차원의 항쟁으로,
일시적 투쟁에서 장기 지속적인 항쟁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조선 후기 빈발 했던 농민봉기 단계에서 나타났던 민중의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대규모 농민 대중에 의한 혁명 이었다.
일본의 침략 야욕과, 부패·무능한 조선왕조 봉건 지배층의 외세 의존 및 보수 유생의 체제 수호의 벽에 좌절하였으나,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 3·1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민중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으나,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변화시키고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을미의병 활동, 3·1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모태로서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근대 민족사의 대사건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은 고부농민봉기, 3월봉기, 집강소 통치시기, 9월 재봉기 등 4단계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1단계는 1894년 1월 10일 일어난 고부농민봉기 단계이다.
고부농민봉기는 1월 10일 전봉준(全琫準) ,김도삼(金道三) ,정익서(鄭益瑞) 등의 주도로 고부 농민들이 봉기하여
탐관오리로서 온갖 폭정을 저지른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을 몰아내고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어 버렸던 사건을 말한다.
고부농민봉기는 1892년과 1893년에 동학교단의 주도 하에 금구에서 있었던 교조신원운동과
고부지방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1893년 11월 사발통문(沙鉢通文) 모의 계획과 깊은 관련을 가짐으로써
동학교단의 움직임과 연속성을 가진다는 점과
1월 10일에 시작하여 3월 13일 해산하기까지 무려 두달간이나 계속되는 지속성을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전봉준을 비롯한 강력한 지도부가 중심이 되어 농민들을 민군(民軍)으로 조직하고 무장 하였다는 점에서
종전의 민란과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고부농민봉기 단계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특징은
고부군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고부 일대에 널리 포교되었던 동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2단계는 고부농민봉기를 주도했던 전봉준 등 지도부가
고부농민봉기를 수습하고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李容泰)의 가혹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여
무장(茂長)으로 피신하였다가 손화중의 도움을 받아 그 해 3월 20일 전면적으로 봉기한 무장봉기 단계이다.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포고문을 발표하고 고부로 진격하여 그 해 3월 23일경 고부를 다시 점령하였으며,
3월 25일경에는 고부농민봉기 단계에서 진을 치기도 했던 백산(白山)으로 이동하여
각지에서 참가한 동학농민군으로 진영을 확대 개편하였다.
또한 호남창의대장소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여 민중들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하였고,
4대 명의와 12개조 기율을 발표하여 군율을 정하였다.
그 해 4월 7일 황토현에서 전라감영 군을 격파하고
전라도 서남해안으로 기수를 돌려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는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京軍)을 무찔렀다.
4월 27일에는 호남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 8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하였다.
이 전주화약을 계기로 동학농민군들은 자기들의 고을로 돌아가 폐정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3단계는 동학농민군들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하는 시기인 집강소 통치시기이다.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활동은 새 전라 감사로 부임한 김학진(金鶴鎭)과 전봉준 사이에 담판이 이루어지면서 가속화되어
몇 개 고을별로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며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군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고을에서는 집강소 설치가 수월했을 뿐만 아니라 과감한 폐정개혁 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주, 운봉, 순창의 경우는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는 향리와 지방 유생 및 지방 포군으로 구성된 수성군(守城軍)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등 집강소 설치와 폐정개혁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한편 전라도 각지를 돌며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활동을 독려하던 전봉준은
그 해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재기포(再起捕)를 준비하게 된다.
기포는 그 해 9월 12일경 전라도 삼례에서 이루어지고 이로써 집강소 통치기가 사실상 끝나고
동학농민혁명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4단계는 전봉준이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재기하는 9월 12일부터 그 해 12월 체포되기까지이다.
제2차 기포를 위하여 전봉준은 9월초부터 삼례를 거점으로 하여 동학농민군을 재조직하고
10월에는 서울을 향해 북상을 시작했다.
이 때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경군과 일본군의 연합군대가 세 길로 나누어 내려오기 시작하자
전국 각 지역에서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잇따랐다.
특히 1차 무장 기포 단계에서 봉기하지 않았던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북부지방에서도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반침략항쟁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봉기했으며,
최시형의 영향 아래에 있던 동학 상층지도자들도 휘하 교도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논산의 전봉준과 합류했다.
이들 연합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고,
서울로부터 내려온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1차 대접전이 있었고,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2차 우금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 두 차례의 큰 싸움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선전분투했지만
절대적인 무기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동학농민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지만,
반외세의 항쟁은 계속되어 11월 15일경 논산 황화대에서, 11월 25일 금구, 원평, 구미란에서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원평 전투를 고비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재기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피신하였지만
관군과 일본군에 의한 완전 토벌작전에 밀려 대부분 체포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되고 난 뒤 봉기의 대열에 참가했던 지도자들과 민중들은
지방 유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보군과 관군, 그리고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잔여세력들은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의 대열에 합류하여 항일민족운동에 또 다시 헌신하기도 하였다.
동학농민운동 폐정개혁안 12개조
1. 도인과 정부와의 사이에는 숙혐을 탕척하고 서정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해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배를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배는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6. 칠반천인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머리에 쓰는 평양립은 벗어 버릴 것
7.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 관리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와 간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적으로 분작하게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