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 2월 8일, 함 선생님의 영전에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께 좋은 시를 지어 바치고 싶었습니다. 있는 정성을 쏟아 오늘 새벽 두시 반까지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나와서 보니까 이건 휴지같이 느껴져 그대로 살라 버리고 싶은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괜찮아, 읽어!” 이렇게 격려해 주시는 것 같아서 고함이나 질러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너무나 인간적이셨던
우리의 멋쟁이, 겨레의 어버이, 만인의 벗
함석헌 선생님,
그 멋진 수염 흩날리며 88년이나 쳐다보시던
당신의 하늘이 오늘따라 서러운 눈물 뿌리는데
저 북쪽 당신의 고향 고구려의 정기 아직도
태백산 줄기 타고 숨쉬고 있는데
당신이 우리를 떠날 수 있나요?
안됩니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파란만장의 88년 민족사
오늘로 멈출 리 없어
끝없이 흐르고 또 흐를 이 땅이 있어
언제나처럼 우리를 먹여 살릴 텐데
우리는 흙의 문화를 세워나갈 참인데
우리가 당신을 보낼 수 있나요―
안됩니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작년 11월 13일
어린 노동자 전태일 17주기였습니다.
연세대 노천극장을 꽉 메운 5만 명
노동자들의 함성에 묻히면서 우리는
태일이 스물두 살 난 어린 태일이
흰 머리 나부끼는 당신의 역사, 우리의 맥박 속에
폭발하는 힘으로 되살아나는 걸 우리는 보았습니다
선생님―
지난 1월 14일
어린 학생 박종철 2주기였습니다
명동을 휩쓴 대학생 노동자 시민들의
물결에 휩싸이면서 우리는
종철이 갓 스물 종철이,
두루마기 자락 펄럭이는 당신의 역사
우리의 숨결 속에 되살아나
소리 지르는 걸 우리는 들었습니다
선생님!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던
벗 장준하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모든 통일은 좋다―”고
외치던 외로운 그 목소리가 이젠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온 겨레의
주장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선생님!
대견하지 않습니까
이 무더기꽃 같은 죽음들의 부활,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선생님
선생님은 부활을 믿으셨죠?
그런데 그 부활이 이렇게 구체적이군요
손으로 만질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온몸 떨며 가슴으로 발바닥으로 외칠 수 있는
생생한 역사의 현실이군요
우리 모두 모두 한몸, 한마음으로
부활의 역사가 되었군요
예수의 부활이
로마제국을 뒤엎은 갈릴리 민중의 부활이었듯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부활은
분단의 비극 분단의 치욕을 거부하는 민족의 하나됨입니다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이 겨레가, 이 씨ᄋᆞᆯ들이
무덤 돌을 굴려 내면서 걸어 나갑니다―
민주, 자주, 통일을 향해서
당신이 네 살 때의 일이었군요
1905년 우리가 일본놈들의 오라에 묶인 것이
당신이 아홉 살 때의 일이었군요
1910년 이 겨레가 멍석말이를 당해 맞아죽은 것이
당신이 열여덟 살 때의 일이었군요
1919년 죽은 줄 알았던 씨ᄋᆞᆯ들
꿈틀꿈틀하다가 덩더쿵덩더쿵 벌떡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
그 후로 36년
당신은 매를 맞고 징역을 살며
옷깃으로 흐르는 뜨거운 눈물 씻을 생각도 없이
펼친 자주독립운동
이 씨ᄋᆞᆯ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걸
만천하에 보여 준 일 아닙니까
당신이 마흔네 살 되던 때의 일이었군요
1945년 마침내 우리가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것이, 그러나 그것은 해방이 아니었군요
그것은 조국이 두 동강 나는 죽음이었습니다
한겨렌데 둘로 갈라져 찔러 죽이고 죽는
절통한 곤두박질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역사의 반 토막 44년
그 무덤돌을 굴려 내는 데 당신의 반생이 걸렸군요 선생님!
마침내 씨ᄋᆞᆯ들은 한목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통일을 가로막는 외세를 물리치고
휴전선 철조망을 거두려고 일어났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씨ᄋᆞᆯ들을 믿으셨지요
씨ᄋᆞᆯ을 믿지 않음 누굴 믿어
그 믿음이 부끄럽기 그지없는 나의 생애
참담한 88년 수난사를 절망하지 않고
네 활개를 치며 살아오도록 지탱해 준 힘 아니겠어
선생님, 그 믿음이 바로 부활 신앙이었군요
씨ᄋᆞᆯ 땅에 묻혀 죽어야 움이 터지며
새싹으로 다시 살아나는 거 아니겠어
몇만년 전인지 모르지만
북극 얼음 속에서 숨도 못 쉬던
씨ᄋᆞᆯ하나
땅에 심었더니 거기서도 새싹이 나더란 말 못 들어 봤나
예, 들어 봤습니다
그렇게 씨ᄋᆞᆯ은 기다림이군요 희망이군요
깜깜한 절망 속에서 빛을 놓치지 않는 믿음이군요
그 믿음 포기하지 않는 저항이란 것도 잊지를 말게나
여기서 당신은 간디를 만나시는군요
아니 대영제국의 사슬을 끊은 간디가
이 나라의 씨ᄋᆞᆯ을 만난 거지요
당신을 만난 거지요
간디를 아프리카에서 불러들인 건 타골이었다지요
그 타골은 1919년 우리 씨ᄋᆞᆯ들의 만세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고 눈이 열리고 목이 터졌으니까요
그런데 인도는 타골의 나라 간디의 나라
모하멧의 나라로 세 동강이 나 버렸군요
다시 하나로 되는 일 엄두도 못 내는구나!
이 땅의 씨ᄋᆞᆯ들이 44년 분단을 넘어서는 날
타골의 제자들의 귀가 다시 터지고
간디의 후배들의 눈이 열리고
모하멧의 신도들의 목이 터지며
하나로 어울리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구나!
움이 터져서 새싹으로 돋아나
서른 곱 예순 곱 온 곱 즈믄 곱으로 불어날
씨ᄋᆞᆯ이 따로 있는 게 아니죠
씨ᄋᆞᆯ이 씨ᄋᆞᆯ일진대 어떤 씨ᄋᆞᆯ이든 가릴 게 없죠
씨ᄋᆞᆯ이면 새싹을 틔우게 되어 있는 거니까요
이렇게 씨ᄋᆞᆯ은 평등이군요
한 줌 푹 쥐어 땅에 뿌리면
그게 보리건 나락이건 콩이건 팥이건
오이씨건 호박씨건 참깨씨건 해바라기씨건
새싹으로 돋아나게 되어 있는 게 기막힌 자연의 이치거든
땅은 축축한 물기를 내주고
햇빛은 거기에 온기를 더해주고
허공은 바람을 불어넣어 주고
이것이 천지조화의 이치 아니겠어
그렇군요 당신은 씨ᄋᆞᆯ을 믿으셨으 뿐 아니라
씨ᄋᆞᆯ의 평등을 사셨군요
천지조화를 사셨군요
이리하여 모든 사람은
당신의 손과 입김이 닿던 온실의 화초들까지
스스럼없는 당신 앞에서 거드름을 피울 필요가 없었군요
도토리 키재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군요
목소리 색깔을 가리는 일이
목소리 경쟁을 벌이는 일이 부끄러워졌었던 거군요
이렇게 당신은 자연이셨군요
그게 바로 당신의 멋이었군요
그러니 설치실 까닭이 없으셨던 거죠
혁명의 깃발 치켜들고 역사의 앞장을 선다며
그건 정말 내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야
그렇군요 당신은 주춤주춤 미적미적 조금은 수줍은 듯
역사에 밀리며 사셨지요
그렇다고 당신은 그 흔한 기회주의적 먹물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역사의 주체인 씨ᄋᆞᆯ을 믿으셨으니까요
당신도 고만고만한 씨ᄋᆞᆯ의 하나라고 굳게 믿고
사셨으니까요
민주주의가 죽었다고 베옷을 입고 법정에 서시어
당신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여기 이렇게 서게 되었어”라며
조금은 흥분하셨던 걸 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흰 수염 바람에 멋대로 나부끼듯
당신은 어디서고 매이지 않고 네 활개를 치는 자유인이었군요
당신에게 주의라는 말 어디 어울립니까
그래서 제도도 싫고 조직도 싫어 무교회주의자가 되시죠
그랬다가 성서의 글자풀이에나 열을 올리는 것이 싫어
무교회주의와 작별하시는군요
그리고 자유로운 마음만으로 모이는 퀘이커가 되시는군요
당신의 관심은 오직 겨레의 자유였죠
당신의 날개를 묶을 오라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어린 씨ᄋᆞᆯ들에게 불어넣으려고 우리의 역사에서
찾아낸 자유의 넋, 그건 역적들에게밖에 없다는 걸
간파하고 말았군요 이리하여 당신은 일찌감치
불온분자가 되셨군요
만주 벌판을 누비던 옛 고구려의 씩씩한 기개가 그리우셨죠
김춘추의 삼국통일에 가슴을 치셨고
묘청의 평양천도 실패에 분루를 삼키셨죠
박정희가 권좌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하이델베르그 안병무 박사 하숙방에서 통곡하셨다죠
계획된 여행을 중단하시고 허둥지둥 돌아오셔서
장준하와 같이 반독재 투쟁에 나서시는군요
민주주의가 그렇듯 소중한 줄 아시면서도
입을 열었다 하면 “난 정치가 싫어” 하셨죠
정치가 싫다는 건 “자유가 전부”라는 말이었죠
자주와 통일을 온몸으로 외치신 당신이
민족주의는 못마땅하셨죠
국가주의는 더욱 질색이었구요
그것은 평화의 적이었으니까요
당신이 자유만큼 사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평화였죠
주의가 싫어 무교회주의마저 떠나신 당신이지만
평화주의자라는 칭호는 미소로 받으시지요
신조 같은 건 코웃음을 치시던 당신이지만
비폭력 평화는 당신의 신조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우리의 멋쟁이, 겨레의 어버이, 만인의 벗이여,
자유와 평화의 넋이여
당신이 우리를 떠나신다고
우리가 당신을 보낸다고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고이 주무시려거든
우리의 가슴에서 주무세요
눈을 뜨시려거든
우리의 역사에서 눈을 뜨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