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은 이 세상에서 절대로 형통하지 못하고 갑자기 멸망한다는 소발과 친구들의 말에, 욥은 오히려 현실에서는 악인들이 더 잘된다고 반박합니다.
1-6절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한 고난의 현실에 짓눌려 하나님에게 애타게 호소하는 욥에게, 친구들은 고난은 악인이 받는 벌이므로 회개해야 한다는 논리만 반복했습니다. 고통에 비명 지르는 욥에게, 비명이 불경하다며 입을 닫으라 했습니다. 고난에 대한 온갖 인간적 지혜가 담긴 그들의 충고를 욥은 조롱으로 느낍니다.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차라리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차라리 고통에 몸서리치는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고난당하는 자들에게는 논리정연한 말보다 침묵으로 곁을 지키는 것이 더 위로가 됨을 기억합시다.
7-16절 소발은 하나님이 반드시 악인에게 죄의 대가로 고난을 주신다고 주장했습니다(20장). 원칙적으로는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도 커서, 인간이 정리한 원리와 공식을 따라 기계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잠언과 같이 인간이 추구하려 노력해야 할 규범적 지혜도 있지만, 전도서와 같이 걷잡을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인간이 속수무책임을 겸손히 고백하는 반성적 지혜도 있습니다. 소발은 욥에게 줄곧 정답만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정답에 가둘 수 없음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욥의 말대로, 현실 속에서는 악인이 더 오래 살고, 더 힘이 있고, 더 부유하며, 더 재미있게 살고, 자식들도 잘 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합니다. 소발은 자신의 인과응보 공식을 고수하기 위해 그런 악인의 번영은 잠시 뿐이고 금방 고난이 임할 것이다 라고 설명하겠지만, 악인 중에서도 그저 행복하게 살다가 평안하게 눈을 감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반대로 욥처럼 의롭게 살지만 복이 아닌 저주를 경험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 현실을 아예 인정하지 않고 보응신학의 틀로 단순화하려는 세 친구, 그리고 이 현실을 인정하지만 보응신학의 틀 안에서 부당함을 호소하는 욥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무지하고 어리석을 뿐입니다. 우리 또한 이 보응의 원리로만 내 상황을 판단하고, 다른 이의 아픔과 고통을 함부로 진단하지는 않습니까? (매일성경, 2023.11/12, p.86-87, 내가 말한 후에 조롱랄지라, 욥기 21:1-16에서 인용).
① 악인은 이 세상에서 절대로 형통하지 못하고 갑자기 멸망한다는 소발과 친구들의 말에, 욥은 오히려 현실에서는 악인들이 더 잘된다고 반박합니다.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한 고난의 현실에 짓눌려 하나님에게 애타게 호소하는 욥에게, 친구들은 고난은 악인이 받는 벌이므로 회개해야 한다는 논리만 반복했습니다. 고통에 비명 지르는 욥에게, 비명이 불경하다며 입을 닫으라 했습니다. 고난에 대한 온갖 인간적 지혜가 담긴 그들의 충고를 욥은 조롱으로 느낍니다.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차라리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차라리 고통에 몸서리치는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고난당하는 자들에게는 논리정연한 말보다 침묵으로 곁을 지키는 것이 더 위로가 됨을 기억합시다.
② 소발은 하나님이 반드시 악인에게 죄의 대가로 고난을 주신다고 주장했습니다(20장). 원칙적으로는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도 커서, 인간이 정리한 원리와 공식을 따라 기계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잠언과 같이 인간이 추구하려 노력해야 할 규범적 지혜도 있지만, 전도서와 같이 걷잡을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인간이 속수무책임을 겸손히 고백하는 반성적 지혜도 있습니다. 소발은 욥에게 줄곧 정답만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정답에 가둘 수 없음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욥의 말대로, 현실 속에서는 악인이 더 오래 살고, 더 힘이 있고, 더 부유하며, 더 재미있게 살고, 자식들도 잘 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합니다. 소발은 자신의 인과응보 공식을 고수하기 위해 그런 악인의 번영은 잠시 뿐이고 금방 고난이 임할 것이다 라고 설명하겠지만, 악인 중에서도 그저 행복하게 살다가 평안하게 눈을 감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반대로 욥처럼 의롭게 살지만 복이 아닌 저주를 경험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 현실을 아예 인정하지 않고 보응신학의 틀로 단순화하려는 세 친구, 그리고 이 현실을 인정하지만 보응신학의 틀 안에서 부당함을 호소하는 욥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무지하고 어리석을 뿐입니다. 우리 또한 이 보응의 원리로만 내 상황을 판단하고, 다른 이의 아픔과 고통을 함부로 진단하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