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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學者 모음
* 孔子(공자, BC. 551~479年): Confucius, 姓은 孔(공)이고, 名은 丘(구), 字는 중니(仲尼)이다, 春秋時期의 魯나라 昌平縣 陬邑人으로 儒學學派를 創始함. 思想家이자 政治家, 敎育家이였다, 50歲 때 暫時 官職에 있었다. (周靈王 21年인 BC 551~周敬王 41年인 BC 479年) 73歲로 世上을 떠났다. 天下를 周遊하다 고향에 돌아와 後學 養成과 古典 整理 作業에 힘썼으며, 私學을 처음 만들었고, 傳統的인 貴族敎育을 打破하였다. 叔梁紇(숙량흘)의 子이며, 現在 山東省 曲阜(곡부, 취푸)에서 出生했고, 그의 墓가 있다. |
그의 말을 모아 弟子들이 수많은 著書를 남겼으며, 그 중 有明한 것으로는 『論語』, 『詩經』, 『書經』, 『周易주역』, 『十翼십익』, 『春秋춘추』 等이 있고, 五經을 修訂하였다고 한다. |
* 孔子 生涯年譜(공자 생애연보): 孔子가 主唱했던 合理的인 道德政治哲學年(德治主義)은 時代를 넘어 後代에 繼承되어 漢나라에서 國政理念으로 採擇되었고, 以後 東洋의 歷史에 큰 影響을 미쳤다. | |
BC 551 出生 | 孔子 出生(父: 叔梁紇(숙량흘), 母: 顔徵在(안징재) |
BC 549年( 3歲) | 父 別世 |
BC 535年(17歲) | 母 別世 |
BC 533年(19歲) | 孔子 結婚 |
BC 532年(20歲) | 아들 鯉(리) 出生, 字는 伯魚(백어). |
BC 522年(30歲) | 子路, 曾點, 冉伯牛(염백우), 冉求=冉有, 仲弓(중궁) 等 弟子를 가르치기 始作함. |
BC 518年(34歲) | 魯나라 孟釐子(맹리자)가 죽으면서 孟懿子(맹의자) 等 두 아들에게 孔子를 스승으로 모시고 禮를 배우라고 當付함. |
BC 517年(35歲) | 齊나라 景公이 政治에 대해 質問함. |
BC 502年(50歲) | 公山弗擾(공산불요)가 孔子를 부름. |
BC 501年(51歲) | 처음 벼슬을 하여 魯나라 中都宰(중도재)가 됨. |
BC 500年(52歲) | 다시 司空이 되고 다시 大司寇(대사구)가 됨. |
BC 497年(55歲) | 魯나라를 떠나 衛(위)나라로 감. |
BC 496年(56歲) | 匡땅에서 厄運을 만남. |
BC 495年(57歲) | BC 495年(57歲) 衛나라 靈公(영공)을 만나 벼슬하고 南子(남자)를 만남. |
BC 494年(58歲) | 벼슬을 그만두고 衛나라를 떠남. |
BC 492年(60歲) | 曹(조)나라를 거쳐 宋나라로 가다가 司馬 桓魋(환퇴)의 厄運을 當함. |
BC 489年(63歲) | 秦(진)나라 蔡(채)나라 楚(초)나라를 거쳐 衛(위)나라로 돌아감. |
BC 488年(64歲) | 다시 衛나라(出公 在位4年)에서 벼슬함. |
BC 484年(68歲) | 魯나라 季康子(魯나라의 實權者)가 孔子를 부름: 故國을 떠난 지 14年만에 魯나라로 돌아온 以後 有若, 曾參, 子夏(蔔商복상), 子張(顓孫師전손사) 等 弟子를 가르침. |
BC 483年(69歲) | 아들 鯉(리)가 죽음. |
BC 481年(71歲) | 弟子 顔回가 죽음. 齊나라 陳恒(진항)이 齊簡公(제간공)을 弑害하자 魯나라 임금에게 討伐을 諫했으나 實現되지 않음. 魯나라 西쪽에서 기린이 사로잡히자 落心하여 『春秋』 著作을 絶筆함. |
BC 480年(72歲) | 子路가 衛나라 亂離에 죽음. |
BC 479年(73歲) | 世上을 떠남.(錢穆 『孔子傳』, 삼련서점, 2002 참조) |
* 朱子(주자, 1,130~1,200年): 姓은 朱(주)이고, 名(諱휘)은 熹(희)이며, 字는 元晦(원회), 仲晦이고, 號는 晦庵(회암)·晦翁(회옹)·雲谷山人(운곡산인)·滄洲病叟(창주병수)·遯翁(둔옹)임. 諡號는 周文公. 福建省(복건성) 南劍州(남검주, 只今의 南平) 尤溪縣(우계현)의 義齋 鄭安道의 別莊에서 태어남. |
經學에 正統하여 宋代의 性理學을 集大成하였음. 李侗에게 修學함. |
周敦頤, 鄭顥, 程頤의 學說을 繼承하고 張載(장재) 邵雍(소옹) 等을 吸水하고 綜合하고, 新儒學의 體系를 完成함. 性理學의 根幹이 되는 理氣論, 心性論, 工夫論을 確立함. 朝鮮時代 儒學에 큰 影響을 끼침. |
著書로는 『太極圖說解』, 『通書解』, 『西銘解義』, 『資治通鑑』, 『四書集註』, 『近思錄』, 『朱子家禮』, 『朱子語類』, 『四書或問』, 『周文公文集』 等이 있으며, 이는 後代에 『朱子全書』, 『朱子大全』 等으로 刊行됨. |
朱子는 程伊川(정이천⇒程子)의 理氣說(이기설)에 立脚, 太極을 理라고 規定하여, 氣와 分離하였다. 張橫渠(張載)는 氣一元의 立場에서 太極을 氣의 本體라고 보고, 朱子는 '理先氣後‘의 觀點에서 陰陽을 낳는 動靜의 理로서 太極을 把握한 것이다. |
** ‘二 程子’(이 정자): 程明道와 程伊川, 곧 程顥, 程頤 두 兄弟를 말함. 宋나라의 大儒學者임 |
* 程明道(정명도, 1,032~1,085年): 名은 程顥(정호)이고, 字는 伯淳(백순), 號는 明道, 諡號는 純公. 河南省 洛陽人. 楊龜山(양귀산)은 明道의 弟子였다. 程伊川의 兄임. 程伯子라고 부름. |
* 程伊川(정이천, 1,033~1,107年): 名은 程頤(정이)이고, 字는 正叔. 號는 伊川. 北宋 河南省(허난성) 洛陽(낙양) 出生. 伊川伯에 封하여졌으므로 伊川先生이라 불림. 諡號는 正公이다. 儒敎哲學者 周敦頤(주돈이: 周濂溪주렴계)에게서 二 程子는 배웠고, 朱子는 伊川의 四傳弟子가 됨. 程朱學의 創始者임. 頣正叔이라고 부름. ‘理’를 最高의 範疇로 삼아 道學을 體系化하고 發展시킴. |
哲宗 初에 司馬光·呂公著 等의 推薦으로 國子監 敎授가 되었고, 이어 秘書省 校書郞·崇政殿說書로 拔擢되었다. 그러나 王安石·蘇軾 等과 뜻이 맞지 않았고, 黨禍(당화)를 입어 四川省(쓰촨성) 涪州(푸저우)로 歸養 간 적 있다. 程子의 理氣說에 入閣, 太極을 理라고 規定해, 氣와 分離함. |
著書로는 『定性書정성서』ㆍ『識仁篇식인편』 等이 있다. |
* 曾子(증자, BC 505~436年頃): 名은 參(삼). 字는 子輿(자여)이다. 孔子의 門下生이며 中國의 哲學者. 只今의 山東省(옛 南武城)에서 태어남. 『大學』은 『禮記』의 한 部分이며 4書 가운데 하나로, 그는 여기에서 儒家의 德目인 忠과 恕의 重要性을 强調했다. 그는 儒家에서 强調하는 '孝'를 再確立하는 데 힘썼는데, "父母를 기리고, 父母를 等閑視하지 않으며, 父母를 扶養한다."라고 하여 孝를 3段階로 列擧했다. 孔子의 德行思想을 子思에게 전함. |
著書로는 『大學』, 『孝經』이 있고, 『孝經』에서 曾子는 ”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身體에 난 털이며 살갗은 父母에게서 받은 것이니 敢히 헐고 傷害를 내지 아니함이 孝道의 始作이다.)“라 하였다. |
* 孟子(맹자, BC 372?∼289年): 姓은 孟이고, 名은 軻이며, 字는 子輿, 子車, 子居이다. 中國 戰國時代에 輩出된 諸子百家의 한 사람이다. 孟子의 故國은 魯(노)나라이고, 그가 出生하여 居處한 곳은 山東省(산둥성) 鄒縣(추현)이다. 子思(孔子의 孫子)의 學統을 繼承한 思想家, 哲人으로 仁義의 王道政治를 主張하였으나 이는 現實과 동떨어진 理想的인 主張이라고 생각되어 諸侯에게 採擇되지 않았다. 그래서 故鄕에 隱居하여 弟子敎育에 專念하였다. 儒學者인 孟子는 仁과 義라는 것을 主張하였지만, 그 基礎가 되는 것은 그 自身이 主張한 性善說 亞聖이었다. 父는 曾點(증점), 父의 名은 檄(격)이고, 字는 公宜(공의)이고, 母는 장氏, 婦人은 田氏이이다. 子思의 門人인데, 己酉年에 태어나서 84歲?에 卒하였다. 孔子보다도 46歲 年下임. |
後에 宋나라(960~1,279年) 時代에서는 先秦時代(선진시대: BC 221年 以前) 儒家의 道通(儒學 傳道의 系統)이 强調됨으로써 孔子→曾子→子思→孟子의 系譜가 重視되었다. 宋나라 神宗은 鄒國公으로 追封하고 孔子廟에 配享함. 元나라 文宗은 鄒國亞聖公으로 하고, 明나라 世宗은 亞聖孟子라 改稱하였음. |
『孟子』는 오랫동안 經書로서 읽혀지지 않다가 唐(당)나라 때 韓愈(한유)가 이 책을 世上에 밝혔고, 그것이 北宋에 繼承되어 차츰 重要視되었으며, 南宋의 朱熹(주희; 朱子)가 孔子의 『論語』, 曾子의 『大學』, 子思의 『中庸』과 함께 孟子의 『孟子』를 四書로 成立시켰다. |
* 孟子 滕文公 下篇에, 居天下之廣居(天下의 넓은 곳에 居處하고), 立天下之正位(天下의 바른 자리에 서며), 行天下之大道(天下의 大道를 行함에), 得之(나의 뜻이 世上에서 받아들여지면), 與民得之(百姓과 더불어 이를 이루고), 不得之(받아들여지지 않으면), 獨行其道(나 홀로 道를 行하리라.), 富貴不能淫(富貴도 나를 放蕩하게 못할 것이고), 貧賤不能移(貧賤도 나의 節槪를 變하게 못할 것이며), 威武不能屈(어떤 權威와 武力도 나를 굽히지 못할 것이니), 此之謂大丈夫(이런 사람을 일러 大丈夫라 하니라.) 하였음. |
* 孟子 年譜 |
BC 372年 4月 2日 鄒(추)나라 (지금의 山東省 太州府 魯縣)에서 태어나다. |
BC 357(15歲) 魯(노)나라에서 배우다. |
BC 333年(40歲) 不動心(부동심)의 境地에 이르다. |
BC 332年(41歲) 鄒(추) 穆公(목공)을 만나다. |
BC 331年(42歲) 魯(노) 平陸(평육)에 머무르다. |
BC 330年(43歲) 鄒(추)에서 任(임)으로 가다. |
BC 329年(44歲) 魯(노) 平陸(평육)에서 齊(제)나라로 가다. |
BC 328年(45歲) 齊(제)의 賓師(빈사)가 되다. |
BC 326年(47歲) 齊(제)를 떠나서 宋(송)나라로 가다. |
BC 325年(48歲) 宋(송)에서 鄒(추)로 돌아오다. |
BC 324年(49歲) 鄒(추)에서 藤(등)나라로 가다. |
BC 322年(51歲) 藤(등)를 버리고 鄒(추)로 돌아오다. |
BC 320年(53歲) 梁惠王(양혜왕)의 招聘을 받고 梁(양)나라로 가다. |
BC 319年(54歲) 梁惠王(양혜왕) 영이 죽자, 梁(양)을 떠나서 齊(제)로 가다. |
BC 318年(55歲) 齊(제)의 卿(경)이 되다. |
BC 317年(56歲) 어머니 喪을 當하여 齊(제)로부터 돌아와 魯(노)에서 葬禮를 모시다. |
BC 315年(58歲) 魯(노)에서 齊(제)로 돌아오다. |
BC 314年(59歲) 齊(제)가 燕(연)을 치고 橫暴(횡포)하니, 齊(제)를 버리고 宋(송)으로 가다. |
BC 313年(60歲) 宋卿(송경)을 石邱(석구)에서 만나 仁義를 勸하다. |
BC 312年(61歲) 宋(송)에서 薛(설)나라로 가다. |
BC 311年(62歲) 薛(설)에서 魯(노)로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鄒(추)로 돌아오다. |
BC 289年(84歲) 1月 15日 卒(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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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覺軒蔡氏(각헌채씨, 1,188~1,246年): 姓은 蔡(채)이고, 名은 模(모)이고, 字는 仲覺(중각). 號는 覺軒(각헌)이고, 覺軒先生으로 불림. 中國 南宋의 理宗(年號는 開慶)때의 文臣이며 易學者임. |
宋나라 純佑年間(1,241~1,252年)에 迪功郞(적공랑)에 任命되어 建寧府學 敎授가 됨. 以後에 隱居하며 學問에 힘씀. 西山 蔡元定의 孫子이며, 九峯 蔡沈(채침)의 맏아들이다. |
著書로는 『周易集解』, 『大易演說』, 『河洛探索』, 『續近思錄』, 『大學演說』, 『論盟集疏』 等이 있다. |
* 慶源輔氏(경원보씨, 寧宗 1,195〜1,203年): 姓은 輔이고, 名은 廣(광)이다. 字는 漢卿(한경), 號는 잠암(潛菴), 潜齋이다. 南宋 性理學者이다. 慶源은 朱子의 門人인 輔廣의 本貫이다. 輔逵(보규)의 아들. |
傳貽書院(전이서원)을 짓고 講學하였기에 當時에 世上사람들은 傳貽先生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그의 原籍(원적)이 趙州(조주) 慶源出身이기 때문에 慶源 輔氏로 더 잘 알려져 있다. 南渡(남도)한 뒤 秀州(수주) 崇德縣(숭덕현)에 살았다. 父恩으로 保義郞(보의랑)이 되고, 네 次例가 科擧試驗을 보았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忠訓郞(충훈랑)에 任命되었다. |
輔廣은 처음에는 呂祖謙에게 修學했으며, 뒤에 朱子(朱熹)에게 배웠음(師事). 朱熹가 그를 매우 아꼈다. 南宋寧宗 元年(1,195年) 61歲에 ‘慶元僞學之禁’을 當하자 學生들이 다들 달아났지만 그는 動搖하지 않고 朱子를 홀로 侍奉하였다. 程朱가 主張한 持敬(지경)을 德에 나아가는 바탕으로 여겨 强調했다. 가정(嘉定) 初에 朝廷에 글을 올려 是非成敗의 狀況에 대해 거듭 强調했다. 黃幹(황간)과 輔廣 두 사람을 아울러 “黃輔(황보)”라고 稱하였다. |
著書로는 『語盟學庸答問』, 『四書纂疏사서찬소』, 『六經集解』, 『常變通攷』, 『通鑑集義』, 『潛菴日誌錄』, 『師訓篇』, 『潛庵日新錄』 等이 있었으나 傳하지 않고, 『詩童子問』 하나만이 『通志堂經解』에 收錄. |
* 孔氏(공씨, BC 156~74年무렵): 姓은 孔이고, 名은 安國이며, 字는 子國으로 孔忠의 次子로, 孔子의 11世孫이다. 漢武帝(한무제)때 博士, 諫議大夫(간의대부), 臨淮太守(임회태수)에 이르렀다. 經學者이다. 魯나라 山東省 曲阜 出身. 申公인 申倍(신배)로부터 『詩經』를 배웠고, 博學多識함. 伏生(복생)에게 『書經』 師事. 弟子로는 司馬遷(사마천)·都尉朝(도위조) 等. 漢武帝 末年에 魯 共(恭)王(武帝의 兄) 劉餘(유여)가 餘暇 宮殿 擴張을 위하여 孔子의 舊宅을 헐었을 때, 壁속에서 蝌蚪文字로 쓰여진 『尙書(상서: 書經』, 『禮記(예기』, 『論語(논어』, 『孝經(효경』 等이 나왔다. 그가 이것을 入手하여 今文과 對照, 考證하고 解讀해서 그 冊에 註釋을 붙임. 『尙書』는 古文學의 始祖이다. 特히 여기서 나온 『尙書』는 當時 伏生이 가르치고 있던 『尙書』보다 10篇이 많았으며 이를 『古文尙書』라 함. |
著書로는 『尙書孔氏傳상서공씨전』을 지었다. |
* 龜山楊氏(귀산양씨, 1,053~1,135年): 名은 時이고, 字는 中立, 號는 龜山先生(晩年에 龜山에 隱居). 諡號는 文靖(문정). 楊時. 北宋의 經學家임. 南劍州 將樂縣(장락현: 지금의 푸젠성(福建省에 屬함) 出身. 游酢(유초), 謝良佐(사량좌), 呂大臨(여대림) 等과 함께 程頤 門人 四大弟子로 꼽힘. 官職이 주어져도 나아가지 않고 明道인 程顥(정호)와 伊川을 師事하였음. 修學을 마치고 程顥․程頤의 門下에서 떠날 때 程顥가 “나의 道가 南쪽으로 가는구나!”(吾道南矣)하고 歎息하였다 한다. 杜門不仕하다가 나중에는 秘書郎(비서랑), 著作郎(저작랑) 工部侍郞까지 지냈고, 龍圖閣(용도각) 直學士(직학사) 主祠(주사)로 致仕(치사)하였고, 熙寧(희령) 年間에 1,076年 進士가 되었다. 그의 學問은 羅從彦․李侗 等을 거쳐 朱熹에게로 이어져, 理學의 形成 發電 課程에 重要한 影響을 끼쳤다. 朱子는 그의 三傳弟子가 됨. 卒年은 83歲이다. |
著述로는 王安石의 新學을 反駁한 『三經義辨삼경의변』과 『二程粹言이정수언』․『龜山語錄구산어록』․『龜山集』이 있다. |
* 南容(남용, 生沒年 未詳): 姓은 南宮(南쪽에 있는 宮闕)이고, 名은 縚(끈 도)이며, 또 适(빠를 괄, 論語),括(괄. 史記), 南宮縚(도)(孔子家語)라고도 한다. 字는 子容, 敬叔, 南宮子容을 줄여 南宮과 南容이며, 諡號는 敬叔이다. 南宮适(남궁괄). 孟懿子(孟彘맹체)의 兄이다. 中國 春秋戰國時代 魯나라의 學者. 孔子의 弟子이며, 조카사위(壻서)임. 德을 崇尙하고 每事 言行을 조심스럽게 處理하여 孔子가 그를 許與(허여)하고 自身의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냄. 《史記 卷67》 星湖僿說(성호사설) |
* 南軒張氏(남헌장씨, 1,133~1,180年): 姓은 張이고, 名은 栻(식)이며, 字는 敬夫와 欽夫이다. 號는 南軒, 諡號는 宣公이다. |
魏나라 公 張浚의 子, 朱子의 親舊. 宋나라 漢州 綿竹人, 後에 湖南省 衡阳市(형양시)로 移徙함. |
張栻의 말로, ‘無所爲(爲한 바가 없는 것⇒義)’ 理解는 따지지 않고, 오직 義理에 따라 行動하는 것이고, ‘有所爲(爲한 바가 있는 것⇒利)’는 利害를 計算하는 마음을 가지고 行動하는 것이다. 五峰 胡先生에게 師事하여 程朱學의 宗匠이 되었다. |
朱子와 呂祖謙(여조겸), 張栻이 함께 南宋의 東南三賢으로 불림. 벼슬은 秘書閣 修撰(비서각 수찬)에 이르렀으며 48歲에 죽었다. |
著書로는 『南軒集』, 『三家禮範』, 『經世編年』, 『論語孟子說』 等이 있다. |
* 東陽許氏(동양허씨, 1,270~1,337年): 姓은 許이고, 名은 謙(겸)으로, 字는 益之, 늙어서는 號는 白雲山人. 諡號는 文懿(문의). 宋나라 末期~元나라 金華 出身. |
金履祥(김이상)의 弟子로 벼슬하지 않고, 東陽의 八華山에서 起居하며 많은 學者를 輩出함. 宋나라가 亡하자 學文에만 專念하여 博學하다는 稱頌을 들었다. |
著書로는 『讀四書總說독사서총설』, 『讀書總說독서총설』, 『讀書傳叢說독서전총설』, 『毛詩名物鈔)모시명물초』, 詩集인 『傳名物鈔전명물초』, 『白雲集백운집』 等이다. 四書 等을 깊이 硏究하여 주소(註疏)를 냈다. |
* 勉齋黃氏(면재황씨, 1,152~1,221年): 姓은 黃이고, 名은 幹(간)이고, 字는 直卿(직경), 號는 勉齋이다. 諡號는 文肅(문숙). 黃直卿, 勉齋先生이라 불림. 黃榦. 宋나라 光宗~寧宗時代의 文臣이자 學者를 말함. |
閩縣(민현) 長溪(장계) 出身으로 벼슬은 知安慶府(지안경부) 等을 지냈으며, 뒤에 直學士를 지냈다. 朱子(朱熹)의 사위로 朱子의 學問을 傳하였다. 朱子가 죽은 뒤 心喪 3年을 지냈다. 朱子는 幹의 堅志苦思함을 稱讚하였다. 黃榦은 師說에서 『論語』의 ‘三人行必有我師焉’을 解釋하여 스승이란 반드시 훌륭한 人物이 아니라 해도 相對的으로 배울 수 있다는 內容인 것으로 判斷하였음. 臨終時에 그 黃幹에게 道通을 傳授하였다. 陽潭溪(양담계)에서 潭溪精舍(담계정사)를 세워 著述活動과 後進敎育에 힘씀. * 黃榦을 黃幹으로 表記한 곳도 있다. * 近思錄을 集註한 葉采(섭채)도 朱子의 사위이다. |
黃榦은 朱子가 編纂한 『儀禮經傳通解』를 完成하고, 儀禮經傳通解續編을 編纂했다. 그밖에 著書로는 『朱子行狀, 『五經通義』, 『四書記聞』, 『勉齋文集』, 『繫辭傳解』 等이 있다. |
黃榦의 弟子인 雙峯饒氏(쌍봉요씨)인 饒魯(요로)는 『五經講義』, 『語孟紀聞』, 『學庸纂說학용찬설』 等을 지어서 朱熹의 學說을 드러내 밝혔다. |
* 勿軒熊氏(물헌웅씨, 1,135~1,195? 1,253~1,312年): 姓은 熊이고, 名은 禾(화)이며, 字는 去非(거비)이나 나중에 名을 鉌(화)로, 字를 位辛(위신)으로 바꿨다. 號는 勿軒 또는 退齋(퇴재)이다. 勿軒先生이라고 불렀다. 宋나라 學者인 웅화(熊鉌, 熊禾)로 고쳤다. |
建州 建陽 出身. 咸淳 10年(1,274年)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宋나라 末期 易學家로 宋나라가 亡한 뒤에 元나라 初期 武夷山(무이산)에 洪源書堂(홍원서당)을 짓고 學問에만 專念하였다. 本來 이름은 洪源書室이며 熊禾가 隱居하던 곳, 明나라때 重修하여 熊勿軒先生書院으로 改稱함. |
勿軒熊氏→周敦頤(주돈이), 程顥(정호)와 程頤(정이), 張載(장재), 朱熹(주희) 等을 師事함. |
著書로는 『禮考異』, 『春秋論考』, 『經序學解』, 『勿軒集』, 『芝山集지산집』, 『淸陰集청음집』, 『詩經集疏』, 『書經集疏』, 『周易集疏주역집소』, 『春秋集疏』, 『翰墨全書한묵전서』 等이 있다. |
* 范氏(범씨, 1,041~1,098年): 姓은 范이고, 名은 祖禹(조우)이다. 字는 淳夫. 北宋나라 儒學者. 唐朝 300年間의 興亡盛衰를 『資治通鑑』의 記事를 土臺로 敍述하고, 거기에 編者 自身의 論評과 論壇을 붙인 『唐鑑당감』을 編纂하였다. |
* 謝氏(사씨, 謝良佐, 1,050~1,103年): 姓은 謝이고, 名은 良佐(양좌)이고, 字는 顯道(현도)이며, 號는 上蔡이다. 諡號는 文肅(문숙)이다. 上蔡謝氏, 上蔡先生이라 稱함. 中國 北宋 河南城 蔡州(채주) 上蔡人 出身으로 文臣이며 程朱學者임. 1,078年 程顥(정호, 伊川)가 扶溝縣(부구현) 知事로 있을 때 程顥를 스승으로 모셨다. 楊時와 함께 二程子의 高弟로 上蔡學派의 祖가 되었다. 楊時(양시)‧游酢(유초)‧呂大臨(여대림)과 함께 程門 四大 弟子로 불렸다. 外的 追求보다는 敬을 通한 意識主體의 改革에 置重하여, 程子로부터 切問近思의 學을 이루었다는 評을 들었다.(靜坐와 居敬의 修養을 强調함.) 天理의 優位를 主張하고 仁을 覺과 生意로, 誠을 實理로 풀었다. 敬을 常惺惺(상성성)이라 풀었다. 神宗 元豊 8年(1,082年) 進士에 及第하였음. 人欲을 除去하는 方法으로는 佛敎의 見性과 儒敎의 窮理를 들었다. 따라서 知識이 없으면 良心 亦是 眞實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宇宙의 根源的 理法을 直觀的으로 把握하여 따른다는 程顥學說을 이어받아 發展시켜서 南宋 陸象山 心學의 先驅가 되었다. 北宋 末 舊法黨에 대한 彈壓 事件에 連坐되어 平民으로 廢해짐. |
著書로는 『論語說』, 『上蔡語錄상채어록』이 있다. 4-24-1 子曰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慾訥章) |
* 雙峯饒氏(쌍봉요씨, 生沒年 未詳): 姓은 饒이고, 名은 魯이다. 字는 伯輿(백여) 또는 仲元, 師魯(사로)임. 號는 雙峯이라 稱함. 諡號는 文元이라 함. 南宋 餘干(여간) 出身, |
어려서부터 朱熹의 弟子이자 사위인 勉齋先生 黃榦(황간)을 從遊하였음. 科擧에 應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聖學에 專念했으며, 四方에서 講義를 付託했다. 致知와 力行을 根本으로 삼았음. 나중에 朝廷에서 벼슬을 내려 屢次 불렀으나 拒絶하고, 朋來館을 지어 學者들을 留宿하게 하고, 또 石洞書院을 지어 後學 養成, 앞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어 號를 雙峯이라 함. |
著書로는 『五經講義』, 『語孟紀聞』, 『春秋節傳』, 『近思錄注』, 『饒雙峯講義』, 『學庸纂述학용찬술』, 『太極三圖태극삼도』, 『庸學十二圖용학십이도』, 『西銘圖서명도』 等이 있다. |
* 雙峯胡氏(쌍봉호씨)=雙湖胡氏(쌍호호씨, 1,427-?年): 姓은 胡(호), 名은 一柱(일계), 字는 庭芳(정방), 號는 雙湖. 雙湖先生이라 불렀다. 元나라 文宗때 道學의 經學함. 安徽省(안휘성) 婺源(무원) 出身. |
弟子로 董眞卿(동진경) 鄱陽董氏(파양동씨)가 有名함. 程朱學을 깊이 硏究하는 한편, 역(易)에 正統하였으며, 胡方平(호방평)의 아들로, 朱子의 『周易本義』에 朱子의 文集과 語錄 中에서 取하여 附錄을 만들었음. |
著書로는 『周易本義附錄纂疏주역본의부록찬소』, 『易學啓蒙翼傳역학계몽익전』, 『朱子詩傳附錄纂疏주자시전부록찬소』, 『十七史纂십칠사찬』 等이 있음. |
* 雙湖胡氏(쌍호호씨): 經學資料集成DB와 影印本에 모두 ‘雙峯胡氏(쌍봉호씨)’로 되어 있으나, 『周易傳義大全주역전의대전』을 살펴 ‘雙湖胡氏’로 바로잡았다. |
* 西山眞氏(서산진씨, 1,178∼1,235年): 姓은 眞이고, 名은 德秀(덕수)이며, 字는 希元(希元)․景元(경원)이다. 뒤에 景希(경희)라 고쳤고, 號는 西山이다. 世上에서는 西山先生으로 불렸다. 諡號는 文忠이다. |
4歲에 책을 주니 한 번 보고 외웠다고 한다. 南宋나라 寧宗과 孝宗 年間의 建州(건주) 浦城(포성: 只今의 福建省) 사람으로, 翰林學士(한림학사)를 지낸 선비이었다. 慶元에 進士가 되어 戶部尙書(호부상서), 翰林學士(한림학사), 參知政事(참지정사)를 歷任했고, 剛直하기로 有名하였다. 그가 朝廷에 있을 때 올린 奏疏(주소)의 數十萬言(수십만언)은 모두 切實한 것이었다. 朱子學을 復興(부흥)시키는 데 큰 貢獻(공헌)을 한 性理學者이었고, 그의 學文은 朱熹의 門人 詹體仁(첨체인)에게 修學하였다. 明나라 正統 때 孔廟에 從祀(종사)되었고, 成化 3年 蒲城伯(포성백)에 追封(추봉)되었다. 書室을 戱綵堂(희채당)이라고 했다. 端平(단평) 2年인 58歲때 죽었다. |
著書로는 『大學衍義대학연의』, 『四書集編사서집편』, 『唐書考疑당서고의』, 『讀書記독서기』, 『文章正宗문장정종』, 『眞文忠公集진문충공집』, 『西山文集서산문집』, 『西山甲乙稿서산갑을고』, 『西事集編서사집편』, 『心經』, 『西山集』56卷, 『宋史』437卷, 『列傳』196卷, 『儒林』7卷, 『宋元學案송원학안』81卷 等 傳이 있다. |
* 石林葉氏(석림섭씨, 1,077~1,148年): 姓은 葉(섭)이고, 名은 夢得(몽득), 字는 少蘊(소온)이다. 葉夢得(섭몽득). 號는 石林(석림)이다. 宋나라 蘇州(소주) 吳縣(오현) 사람. |
哲宗(철종) 紹聖(소성) 4年(1,097年) 進士(진사)가 되어 翰林學士(한림학사)를 맡아 士大夫들이 派黨(파당)을 짓는 일에 대해 極論(극론)했다. 穎昌府(영창부)에서 일할 때 常平粟(상평속)을 열어 貧民들을 救恤했고, 宦官 楊戩(양전) 等의 收奪을 抑制했으며, 貪官汚吏들을 逮捕하다가 結局 逐出되었다. 龍圖閣直學士(용도각직학사) 等을 지냈다. 平生 배우기를 좋아해 博學했고, 特히 詞(사)를 잘 지었다. |
著書로는 『春秋』에 精密하여 『春秋傳춘추전』과 『春秋考춘추고』, 『春秋讞춘추얼』, 『春秋指要總例춘추지요총례』, 『石林春秋석림춘추』 等이 있다. 그 外 著書로는 『建康集건강집』과 『石林詞석림사』, 『避暑錄話피서록화』, 『石林燕語석림연어』, 『石林詩話석림시화』 等이 있다. |
* 蘇氏(소씨, 1,037~1,102年): 姓은 蘇이고, 名은 軾(식)이며, 字는 子瞻(자첨)이고, 號는 시골에서 自身이 耕作하던 땅을 '東坡'라 부르고, 스스로를 '東坡居士'라 稱했다. 흔히 蘇東坡라고도 불린다. 諡號는 文忠이다. 中國 北宋 時代 泗川省 眉山(미산) 사람. 書藝를 代表하는 四大家 中의 一人. 22歲때 進士에 及第하고, 科擧 試驗의 委員長이었던 歐陽脩(구양수)에게 認定을 받아 그의 後援으로 文壇에 登場하였다. 政治的으로는 波瀾萬丈(파란만장)한 一生을 보냈고, 流配生活(海南島)과 隱居生活을 反復하며 自身의 울분과 恨歎을 〈赤壁賦적벽부〉라는 卓越한 詩로 남겼다. 그의 父인 蘇洵(소순), 아우인 蘇轍(소철, 子由)과 함께 ‘三蘇’라고도 일컬어지는데, 家族 모두가 唐宋 八大家에 屬하는 名文家이기도 하다. 詩人. 學者. 畫家. 書藝家. 政治家. 經史에 博學함. 66歲 死亡함. |
* 著書로는 『蘇東坡集소동파집』, 『東坡樂府동파악부』이며, 詩文集으로는 『東坡七集동파칠집』, * 隨筆集으로는 『答謝民師論文帖답사민사론문첩』, 『祭黃幾道文제황기도문』, 『前赤壁賦전적벽부』, 『黃州寒食詩帖황주한식시첩』, 그림 〈枯木怪石圖행목괴석도〉, 〈竹石圖죽석도〉 等 150卷이 傳한다. |
* 唐宋 八大家: 唐의 韓愈(한유), 柳宗元(유종원)과 宋의 歐陽脩(구양수), 蘇洵(소순), 蘇軾(소식), 蘇轍(소철), 王安石, 曾鞏(증공). * 書藝를 代表하는 四大家: 蘇軾(소식), 黃庭堅(황정견), 米芾(미불), 蔡襄(채양). |
* 新安倪氏(신안예씨, 1,303~1,348年): 姓은 倪이고, 名은 士毅(사의)이며, 字는 仲宏(중굉)이다, 號는 道川先生이다. 中國 元나라 文宗에서 順帝 年間에 生存한 休寧人이다. 陳櫟(진력)의 門人으로 祁門山(기문산)에 隱居하며 潛心講學함. |
스승인 陳櫟(진력)이 지은 『四書發明』과 胡炳文이 지은 『四書通』을 合하여 『四書輯釋』을 纂述(찬술)함. 著書로는 『作義要訣』, 『永樂大全』이 있다. |
* 纂述찬술: 學問이나 文藝 等에 關한 글을 모아 著述함. |
* 新安陳氏(신안진씨, 1,252~1,334年): 姓은 陳이고, 名은 櫟(력)이며, 字는 壽翁(수옹), 號는 新安 또는 定宇先生, 東阜老人(동부노인)이다. 元나라 徽州(휘주) 新安 休寧人(휴령인) 出身으로, 朱子를 宗主로 삼아 學問 活動을 하고, 南宋의 滅亡을 經驗하고, 隱居하여 著述하다가 83歲에 죽었다. |
著書로는 『尙書集傳纂疏상서집전찬소』, 『易略역략』, 『歷代通略역대통략』, 『勤有堂隨錄근유당수록』, 『四書發明』, 『書傳纂疏서전찬소』, 『禮記集義예기집의』, 『定宇集정우집』 等이다. |
* 顔回(안회, BC 521~490年): 姓은 颜, 名은 回, 字는 子淵, 春秋末期 魯나라의 賢人. 顔子(顔回를 높인 말), 孔門十哲(孔子의 弟子 中의 뛰어난 10人)의 首位. 좁고 지저분한 거리에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天命을 즐기고 德行으로 이름났다고 하나 夭折함(31歲). 孔子의 首弟子로 學識이 뛰어나다. |
* 雲峯胡氏(운봉호씨, ): 姓은 胡이고, 名은 炳文이며, 字는 仲虎이다. 元나라의 性理學者를 가리킨다. 朱子學에 正統하였으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
著書로는 『易本義通釋역본의통석』, 『書集傳서집전』, 『春秋集解춘추집해』, 『禮書纂述예서찬술』, 『四書通사서통』 等이 있다. 『元史 卷189 胡炳文列傳』, 『宋元學案 卷89』 |
* 潛室陳氏(잠실진씨, 生沒年 未詳): 姓은 陳이고, 名은 埴(식)이며, 字는 器之(기지)이다. 號는 潛室, 木鍾(목종)이다. 南宋의 性理學者. 永嘉(영가) 出身(永嘉陳氏라 부름). 벼슬은 通直郎에 이르렀음. |
葉適(섭적)에게 修學하다가 後代에 朱子의 高弟가 되었다.(朱子의 玉山講義와 關聯하여 便紙를 주고받는 記錄이 『朱子文集』에 收錄되어 있음). 그는 性의 理致는 形體는 없으나 事端의 發現으로 證驗할 수 있다고 하였음. 또한 性에는 義理之性(=本然之性, 天地之性)과 氣質之性의 區分이 있어, 義理之性만 있고 氣質之性이 없으면 義理가 附着할 수 없고(一名 發現處, 發動處가 없고) 氣質之性만 있으면 말라비틀어진 物件과 같다(一名 資賴處가 없음)고 하면서 이와 氣가 合해야만 性이 온전할 수 있다고 했음. 質問의 長點과 效果에 대해 크게 獎勵함. 明道書院의 山長을 지냈고, 潛室先生이라고 불렸다. |
著書로는 『禹貢辯우공변』, 『洪範解홍범해』, 『木童集목동집』 等이 있다. |
* 包咸(포함, BC 6~65年): 姓은 包이고, 名은 咸이며, 字는 子良이다, 會稽 曲阿(회계 곡아; 江蘇省 丹陽) 사람이다. 後漢때 經學家로, 孝廉(효렴)으로 薦擧(천거)되어 郎中(낭중)이 되었으며, 太子에게 『論語』를 가르쳤다. 젊어서 經學博士 右師細君에게 魯詩․論語를 배웠다. 그의 아들 包福이 郎中이 되어 和帝에게 『論語』를 傳授하였다. |
* 河東侯氏(하동후씨, 生沒年 未詳): 姓은 侯(후)이고, 名은 仲良(중량)이다. 字는 師聖이며, 河東人, 程子(程頤와 周敦頤) 等에게 修學하였다. 宋나라 學者. |
著書로는 『論語說(논어설』, 『侯子雅言(후자아언』이 있다. |
* 韓愈(한유; 768~824年): 姓은 韓氏이고, 名은 愈이며, 字는 退之(퇴지)이며, 號는 스스로 昌黎(창려)라고 하였다. 諡號 韓文公으로 불린다. 韓退之. 中國 唐代 中期의 鄧主 河內郡 南陽 出身으로 代表的인 詩人, 儒學者, 文章家, 政治家, 思想家임. 特히 詩文에 뛰어난 才能을 지녀 수많은 名作을 남겼다. 唐宋八大家의 一 人이다. |
官僚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3歲에 孤兒가 되어 兄嫂의 손에서 자랐으며, 어려운 環境에서 學問에 精進하여 儒家를 비롯한 諸子百家의 學問을 두루 涉獵했다. 25歲에 進士試에 合格하고 京兆尹 等 여러 벼슬을 거쳐 吏部侍郎에 이르렀으며, 57歲로 生을 마쳤다. |
著述로는 哲學史에서 注目받는 『原道원도』 外에 『原性원성』이 있다. |
* 邢氏邢昺(형병, 932~1,010年): 姓은 邢이고, 名은 昺이며, 字는 叔明이다. 曹州 濟陰(山東省) 사람이다. 北宋때 經學家로 太宗 太平興國 初에 及第했다. 2年(977年) 國子監丞(국자감승)이 되어 右諫議大夫(우간의대부)와 國子祭酒(국자제주) 等을 지냈다. 侍講學士(시강학사)․ 禮部尙書까지 올랐다. 杜鎬․舒雅․孫奭․李慕淸․崔偓佺 等과 『三禮』․『三傳』․『孝經』․『論語』․『爾雅』 等의 義疏를 矯正하였고, 宋나라 眞宗에게 『孝經』․『禮記』․『論語』․『春秋左氏傳』等을 講하였다. |
著書로는 『論語正義논어정의』․『爾雅正義이아정의』․『爾雅義疏이아의소』․『孝經正義효경정의』等이 있는데, 모두 『十三經注疏십삼경주소』에 收錄되어 있다. - 邢昺 列傳第190 儒林一 - |
* 『論語註疏논어주소』: 魏(위)나라 何晏(하안: 193~249年)이 『論語集解논어집해』를 著述하였고, 그 『論語集解』를 底本으로 하여 梁(양)나라의 黃侃(황간)이 『論語義疏논어의소』를 著述하였고, 그 『論語義疏』에 宋나라 邢昺이 疏를 달아서 『論語註疏』를 著述함. |
* 華陽范氏(화양범씨, 1,041~1,098年): 姓은 范이고, 名은 祖禹(조우), 字는 淳夫(순부)ㆍ純甫(순보)ㆍ夢得(몽득), 號는 華陽이나 醇儒 先生이라 부름. ㅅ諡號는 正獻(정헌)이다. 北宋人 成都 華陽 出身. |
嘉祐 300年間에 진사가 되어 唐朝의 興亡盛衰를 사마광(司馬光)을 따라서 『資治通鑑』을 編修하였으며, 거기에 編者 自身의 論評과 論壇을 붙인 『당감(唐鑑』을 編纂하였다. 華陽學派를 創始함. |
編修를 마친 뒤에 祕書正字가 되었다. 宣仁太后가 죽은 뒤에는 그 틈을 타서 小人輩들이 得勢할까 염려하여 여러 次例 諫言(간언)을 올렸다. 그 뒤 章惇(장돈)을 宰相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內容으로 極言하였다가 外職으로 쫓겨나 있던 中 卒하였다. 范祖禹는 平常時에는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나, 일을 만나서 是非를 判別할 때에는 아주 嚴格하게 하였으며, 이영전(邇英殿)에서 講學할 적에는 바른 道理를 지키고 正論에 依據하여 盡言한 것이 많았는데, 말은 簡略하면서도 뜻은 아주 明白하였으므로 소식(蘇軾)이 ‘講官 第一’이라고 稱讚하였다. 이에 後代에는 講論을 잘한 사람으로 稱頌된다. |
* 胡氏(호씨, 1,098~1,156年): 姓은 胡이고, 名은 寅(인)이며, 字는 明仲이다. 諡號는 文忠이다. 宋나라 建寧(건녕) 崇安(숭안) 사람으로 儒學者, 致堂先生으로 불렀고, 胡安國의 동생의 아들인 조카이다. |
徽宗(휘종) 宣和(선화) 3年(1,121年) 進士가 되었다. 欽宗(흠종) 靖康(정강) 初에 불려 校書郞(교서랑)이 되고, 祭酒 楊時에게서 工夫했다. 高宗 建炎 年間에 張浚(장준)의 薦擧(천거)로 起居郞(기거랑)에 拔擢(발탁)되었다. 上書하여 金나라에 對抗할 對策을 陳述하고 苟且하게 和議하는 것에 反對했는데, 語調가 懇切(간절)하고 剛直(강직)했다. |
紹興(소흥) 年間에 中書舍人이 되어 金나라에 使臣 보내는 것을 極力 沮止(저지)하다가 嚴州(엄주)와 永州의 知州로 나갔다. 官職은 禮部侍郞 兼 直學士院까지 올랐다. 秦檜(진회)가 政權을 잡자 몹시 꺼려하여 朝廷을 誹謗(비방)하고 貶下(폄하)했다는 理由로 罷職(파직)되어 新州에 安置되었다. 秦檜가 죽은 뒤 復職했다. |
著書로는 『論語詳說』, 『讀史管見』, 『斐然集비연집』이 있다. |
* 厚齋馮氏(후재풍씨, 生沒年 未詳): 姓은 馮(풍)이고, 名은 椅(의)이며. 字는 儀之(의지), 奇之(기지), 號는 厚齋이다. |
南宋의 理學家이며 易學者. 敎育者로 南康(남강), 즉 江西 都昌(도창) 出身. 馮去非(풍거비)의 아버지. 紹興 四年인 1,134年부터 官職을 맡음. 博學多識했으며 論孟과 詩·書·易에 일일이 註釋을 달았다. 一說에는 朱子(朱震: 漢上朱氏)의 門人으로 晩年에 집에서 弟子를 받아 가르쳤다고도 하나, 生沒年代와 官職을 맡은 時期 等을 考慮하면 잘못된 듯함. |
著書로는 『孝經章句』, 『西銘輯說』, 『孔子弟子傳』, 『周易輯說明解』, 『讀史記』, 『厚齋易學』 等을 直接 지을 程度로 著述量이 厖大(방대)했다고 傳해지지만 오직 『厚齋易學』 52卷만이 四庫全書에 실려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