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낯선 도시 청주에서 수습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언론계가 다른 분야보다 엄격한 위계질서(일명 똥군기)를 강조한다는 걸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하는 노동의 강도는 상상초월이었다. 수습기자의 하루 일과는 대략 이랬다. 새벽 3시 40분에 일어나 사수에게 기상 보고를 한 다음, 택시를 타고 청주 시내 경찰서 세 군데와 지구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건사고를 파악한다. 한 시간 간격으로 소방서와 고속도로순찰대에 전화를 걸어 큰 사고를 체크한다. 물론 이 모든 건 그날 저녁에 내보내야하는 뉴스제작과 동시에 이뤄진다. 인터뷰이를 섭외하고 촬영하고 기사를 쓰고 편집까지 끝내면 저녁 7시. 이때부턴 야간 교육(?)을 빌미로 자정이 넘어서까지 선배들이 돌아가며 술을 먹였다. 주 52시간 근무도, 휴일도 수습기자에겐 예외였다. 아,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날들이 계속됐는데,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나에게 사수는 비웃음섞인 웃음과 함께 “수습은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질문을 업으로 삼는 기자가 직장 선배에게 질문을 했다가는 엄청난 호통을 맞아야 했다. 모든 선배의 말에는 “네, 알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 알아보고 보고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하는 다나까말투로 답해야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 말도 안 되는 군기잡기에 제대로 저항한 번 못해 봤을까 웃음이 나지만. 아무튼 이 암흑의 시간, 수습기자 3개월째 내게 주어진 또다른 과제는 ‘운전’이었다. 동기와 나를 ‘꺼비’(사수 선배를 부르는 우리들의 은어, 두꺼비 닮아서)가 불러서 하는 말. “너네 다음달 때까지 면허 안 따면 수습 해제 안 되는 줄 알아” (그는 늘 같은 말이라도 재수없게 하는 습관이 있었다). 매일 같이 사건 사고 현장에 ‘알아서’ 가야하고, 택시비를 한 달에 160만원 씩 쓰던 때였다. 이렇게는 월급으로도 감당이 안될 터이니 극한의 일상 속에 면허를 따고, 차도 사라는 얘기였다. 소심하게 던진 질문. “선배님. 주말에도 출근하는데 운전면허 교육을 언제받나요?” 꺼비의 호통 섞인 답변. “잠을 줄여야 될거 아냐!! 운전교육 시간은 회사에서 배려해줄거니까 그렇게 알아.”
기계치에다 몸치인 내가 운전면허시험을 한 번에 통과한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전날 억지로 먹은 술이 덜 깬 상태로 도착한 면허시험장에서 나는 완벽한 T자 주차실력을 뽐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면허시험장에선 음주 측정을 하지 않았다...) 이제 차만 사면 되는데, 새 차를 뽑을 돈도 실력도 없는 나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차가 바로 ‘빨간 아반떼’였다. 엄마의 성당 지인이 5년 정도 몰았지만, 도로를 달리던 시간보다 주차장에 멈춰있던 시간이 더 길었던 차를 오백만 원에 넘겨받고, 나는 빨간 아반떼 차주가 되었다.
그냥 아반떼가 아닌 ‘빨간 아반떼’를 모는 건 초보 운전자에게 훨씬 더 가혹한 경험이었다. 처음엔 내가 운전이 서툴러서 다른 운전자들이 그렇게나 경적을 울리나 싶었는데, 운전경력 30년 차인 아버지가 빨간 아반떼를 몰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신호가 바뀌기 전 조금만 늦게 출발한다 싶으면 내 차를 앞지르면서 노려보고 가는 식으로 성화였는데, 아버지가 창문을 열어 굵은 팔을 창밖으로 내밀면 잠잠해졌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차가 빨간색이면 으레 운전자가 여성이라 생각하고 함부로 하는 차들이 많았던 거다.
그렇지만 빨간 아반떼와 좋은 기억이 훨씬 많다. 일도 서툰데다 아는 사람도 없던 도시에서 유일하게 내가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차 안이었다. 기사거리를 찾아오라는 선배의 지시에 풀이 죽은 채로 차를 타고 나가, 동기와 실컷 선배 욕을 하면 다시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친구도 가족도 없던 외로운 도시에서 사회초년생이던 나의 두 발이 되어준 나의 빨간 아반떼. 그렇게 꿈꾸던 기자가 됐지만, 쓰고 싶은 기사보다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기사를 처리하기 급급한 일상에 지쳐가던 순간마다 나의 차가 함께 있었다. 작은 수첩을 들고 사건 현장으로 뛰어가는 나,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선배에게 보고하는 나, 몰래 지하주차장에 숨어있다가 전화를 못 받아 혼나는 어설픈 수습기자 생활을 이 차와 함께 했으니까.
너무 지치는 날에는 7평짜리 오피스텔에도 있기가 싫어서 차를 몰고 마트 지하주차장으로 갔다. 따로 주차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데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주차장 구석에 차를 대놓고 운전석 의자를 한껏 제친, 다음 박준 시인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같은 책을 읽었다.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을 빨간 아반떼가 함께 했다.
서울로 이직하면서 빨간 아반떼는 내 손을 떠났다. 반듯했던 외관이 나와 함께 한 2년 동안 긁히고 찌그러져 성한 곳이 없는 채로 말이다. 그러는 새 수습기자였던 나는 후배가 꽤 여럿 생긴 주니어 기자가 됐다. 그때처럼 괴롭히던 선배는 없지만, 부끄러움은 여전하다.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뉴스에 내보낸다는 원대한 꿈은 자꾸만 작아지고, 조직 눈치를 더 많이 보는 겁쟁이가 되는 것 같다. 겉으로만 공정한 척하며 스피커들의 목소리를 더 크게 다루는 언론계에서 일하면서 느낀 자괴감은 이미 지구 내핵을 파고들 정도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지닌 젊은 동료 기자들이 많이 있고, 한 사람의 힘으로, 하루 아침에 달라질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자책한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부디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으로 살자고 다짐한다.
첫댓글 작은나무님에게 빨간 아반떼가 없어서는 안될 공간이었다는게 잘 느껴졌어요. 차를 살 여력도, 이유도 없는 제게 언젠기 차가 생긴다면 어떨까 상상해봤어요. 이 글 덕분에 이동수단 정도로 생각했던 것을 공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ㅎㅎ 감사해요
제 배우자도 하루에 그 복잡한 일이 생겨도 차에 타 차문을 닫는순간 그 고요함에 녹아들때가 가장 좋다고 하더라구요. 하루에 3-4시간 운전하면서 힘들기도 하지만 생각 정리하는게 좋다고 말한 적있어요. 그래서인지 공동비용으로 산 저희 첫차에 애정을 많이 갖더라구요.
저는 운전을 안하지만 여자여서 막 대하는 비겁한 찌질이 운전자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제 배우자도 한 센 인상이라 창문만 열면 조용히 간다는 얘기부터, 일본차 타고 다닌다고 샹년소리까지 들었던 여자 동생 친구 얘기까지 들어보면 짜증이 확 솓구치죠.
무엇보다 정말 힘든 직업 속에서 빨간 아반테를 동료로 열심히 헤쳐나가셨군요. 제가 애정하는 동생도 기자인데, 몇년 사이에 건강이 너무 안 좋아져서 걱정이 많아요. 노동환경 들어보면 경악할 정도더라구요. 그럼에도 군기에 저항할 수 없는건 작은나무님만의 책임은 아닌 것같아요. 개인이 그렇게 못하도록 구조가 얼마나 견고하게 짜여져있게요. 전 그 안에 있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집니다. 휴. 어떻게든 개선되면 좋겠네요..
앗 빨간 아반떼라니! 저의 첫 차 초록 엑센트가 생각나네요. 선팅도 안 된 10년된 중고차 액센트를 타고 씽씽 달리면서 얼마나 행복했던지. 비오는 날이면 갬성 충만해가지고는 길에 차 세워놓고 노래 크게 부르고 그랬네요. 아반떼와 갔던 첫 여행지라거나, 아반떼 안에서 울거나 웃었던 이야기. 연애한 이야기 등등이 더 채워지면 좋겠어요. 빨간 아반떼와 작은나무님의 이미지가 너무 잘 어울리는 느낌이라서 아반떼가 주인공인 이야기면 엄청 귀여울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꺼비 너무 재수없네요. 왠지 얼굴과 육성이 떠오른달까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