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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_25_228p The widening horizon
It was Europe that had become 'unchanging', Asia that was on the move. I need not continue this familiar story down to the present time. The historian is hardly yet in a position to assess the scope and significance of the Asian and African revolution. But the spread of modern technological and industrial processes, and of the beginnings of education and political consciousness, to millions of the population of Asia and Africa, is changing the face of those continents; and, while I cannot peer into the future, I do not know of any standard of judgement which would allow me to regard this as anything but a progressive development in the perspective of world history. The changed shape of the world resulting from these events has brought with it a relative decline in the weight, certainly of this country, perhaps of the English-speaking countries as a whole, in world affairs. But relative decline is not absolute decline; and what disturbs and alarms me is not the march of progress in Asia and Africa, but the tendency of dominant groups in this country-and perhaps elsewhere-to turn a blind or uncomprehending eye on these developments, to adapt towards them an attitude oscillating between mistrustful disdain and affable condescension, and to sink back into a paralyzing nostalgia for the past. 유럽은 변하지 않고, 아시아는 변화 과정에 있다. 나는 이 익숙한 이야기를 현재 다시 계속할 필요가 없다. 역사가는 아직 어떤 위치에 있지 않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혁명의 범위와 중요성을 평가해 볼 위치에 있지 않다. 현대 기술과 산업과정의 확장과 교육과 정치적 각성의 시작의 확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수백만 사람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그 대륙의 모양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나는 미래를 꿰뚤어 볼 수는 없지만, 그리고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을 세계 역사의 전망에서 진보라고 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고. 이와 같은 사건들로부터 일어나는 세계의 변화는 모양은 무게감에서 상대적 저하를 가져왔다. 이 나라(영국)에서. 그리고 아마 영어권 국가들에서 상대적인 무게감의 저하를 가져왔다. 그러나 상대적인 쇠퇴는 절대적인 쇠락이 아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놀라게 하는 것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의 진보의 진군이 아니라 이 나라에 있는 주류들의 경향이다. 맹목적으로 눈을 감고 또는 애써 이해가 안 가는 듯이 발달에 대해 바라보는 자세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진행되고 있는 진보들에 대해 의심스러운 경멸이나 다정한 저자세(제법인데?)를 취하는. 그리고 과거에 대해 무분별한 향수에 젖어 들어가는
Chapter 6_26_229p The widening horizon
What I have called the expansion of reason in our twentieth-century revolution has particular consequences for the historian; for the expansion of reason means, in essence, the emergence into history of groups and classes, of peoples and continents, that hitherto lay outside it. In my first lecture I suggested that the tendency of medieval historians to view medieval society through the spectacles of religion was due to the exclusive character of their sources. I should like to pursue this explanation a little further. It has, I think, correctly, though no doubt with some exaggeration, been said that the Christian church was 'the one rational institution of the Middle Ages'. Being the one rational institution, it was the one historical institution; it alone was subject to a rational course of development which could be comprehended by the historiaSecular society was moulded and organised by the church, and had no rational life of its own. The mass of people belonged, like prehistoric peoples, to nature rather than to history. Modern history begins- when more and more people emerge into social and political consciousness, become aware of their respective groups as historical entities having a past and a future, and enter fully into history. It is only within the last 200 years at most, even in a few advanced countries, that social, political, and historical consciousness has begun to spread to anything like a majority of the population. 내가 이성의 확대라 부르는 20세기 혁명의 시대에 역사가에게 특별한 결과를 가진다. 왜냐하면 이성의 확대는 본질적으로 어떤 그룹이나 계급들이 역사에 나타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까지는 역사밖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첫 강의에서 제시했다. 중세 역사가들이 중세 사회를 종교적인 시각으로 보게 된 경향을 띤 것은 그들의 자료 소스의 배타적인 성격 때문이었다고. 나는 이 설명을 좀 더 하고자 한다. 중세의 교회는 중세에 있어서는 유일한 합법적 제도였다고 하는 것은 물론 다소간의 과장은 있지만 사실 정당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유일한 합리적 제도였기 때문에 하나의 역사적 기관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발달의 합리적인 과정에 종속된다. 역사가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 세속 사회는 교회에 의해 형성되었고 조직되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합리적인 삶은 없었다. 대중들은 전사시대 사람들과 같이 자연에 속했다. 역사에 속했다기보다는. 근대 역사는 시작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정치적 각성에 들어가고 그들의 각 그룹들이 역사적 실체로서 자각할 때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자각을 할 때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많아야 200년밖에 안 된다. 소수의 발달된 국가들에서 조차도, 정치적 역사적 각성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게 된 것은?
Chapter 6_27_230p The widening horizon
It is only today that it has become possible for the first time even to imagine a whole world consisting of peoples who have in the fullest sense entered into history and become the concern, no longer of the colonial administrator or of the anthropologist, but of the historian. This is a revolution in our conception of history. In the eighteenth century history was still a history of elite’s. In the nineteenth century British historians began, haltingly and spasmodically, to advance towards a view of history as the history of the whole national community. J. R. Green, a rather pedestrian historian, won fame by writing the first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In the twentieth century every historian pays lip service to this view; and, though performance lags behind profession, I shall not dwell on these shortcomings, since I am much more concerned with our failure as historians to take account of the widening horizon of history outside this country and outside western Europe. Acton in his report of 1896 spoke of universal history as 'that which is distinct from the combined history of all countries'. He continued: 단지 요즘 최근이다. 처음으로 가능해진 것은. 전 세계를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은. 더 이상 인류학자나 식민지 통치자들의 시각이 아닌 역사가의 시각으로 보게 된 것은. 이것은 역사라는 개념에서 혁명이다. 18세기까지는 아직 엘리트 역사 시대였다. 19세기에 영국 역사가들은 망설임과 산발적으로 역사를 전 국민 사회라는 관점으로 진전했다. 그린은 약간 현장에서 발로 뛰는 역사가인데 그는 명성을 얻었다. 영국 사람들의 역사를 처음으로 서술해서. 20세기에 모든 역사가는 이 견해에 대해 립 서비스를 한다. 그리고 물론 실행은 말보다는 늦어지지만 나는 이런 단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의 실패에 대해 더 많이 관심 있기 때문이다. 우리(영국)의 역사가들이 이 나라의 밖이나 서유럽 밖의 넓어지는 지평선의 확대를 보는 것을 실패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더 걱정스러운 것이다. 1896년 액튼은 말하기를 보편적인 역사란 모든 나라의 역사를 합쳐놓은 것과는 다르다고 말하면서 계속했다.
Chapter 6_28_231p The widening horizon
It moves in a succession to which the nations are subsidiary. Their story will be told, not for their own sake, but in reference and subordination to a higher series, according to the time and degree in which they contribute to the common fortunes of mankind.' It went without saying for Acton that universal history, as he conceived it, was the concern of any serious historian. What are we at present doing to facilitate the approach to universal history in this sense? I did not intend in these lectures to touch on the study of history in this university: but it provides me with such striking examples of what I am trying to say that it would be cowardly of me to avoid grasping the nettle. In the past forty years we have made a substantial place in our curriculum for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This is an important advance. But it has carried with it a certain risk of reinforcing the parochialism of English history, which already weighs like a dead hand on our curriculum, with a more insidious and equally dangerous parochialismof the English-speaking world. The history of the English- speaking world in the last 400 years has beyond question been a great period of history. But to treat it as the centre-piece of universal history, and everything else as peripheral to it, is an unhappy distortion of perspective. 그것은 연속 과정에 움직인다. 그 과정에 국가들이 부속된다. 그들의 이야기는 들려진다.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높은 연속성에 대한 참고와 종속으로 그리고 그들이 인간의 공통 운명에 대한 시간과 정도에 따라 이야기 되어지는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액튼이라고까지. 보편적인 역사는 액튼이 생각한 것이지만 모든 진지한 역사가의 관심사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보편적인 역사에 대한 접근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나는 이 강의들에서 이 대학의 역사 연구에 대한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눈에 띄는 예를 제공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해서 아마 비겁할 것이다. 이와 같이 나를 초조해 하는 것을 붙잡으려는 시도를 피한다면 지난 40년간 우리는 미국사에 중요한 지위를 부여해 왔다. 이것은 큰 진보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위험을 가져왔다. 영국 역사의 지방주의를 강화하는 위험성을 가져왔다. 그것은 우리의 교과 과정에 죽은 손같이 바꿀 수 없는 것 같이 우리를 누르고 있다. 더 음성적이고 똑같이 위험한 지방주의를 가지고서, 영어권 세계들에 지방주의를 강화하는. 영어권 세계의 역사는 지난 400년간 의심할 여지 없이 위대한 역사 시기가 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을 보편적인 역사의 중심으로 보고 다른 것들은 그것의 주변부라고 보는 것은 전망에 대한 unhappy distortion 이다.
Chapter 6_29_232p The widening horizon
It is the duty of a university to correct such popular distortions. The school of modern history in this university seems to me to fall short in the discharge of this duty. It is surely wrong that a candidate should be allowed to sit for an honours degree in history in a major university without an adequate knowledge of any modern language other than English; let us take warning by what happened in Oxford to the ancient and respected discipline of philosophy when its practitioners came to the conclusion that they could get on very nicely with plain everyday English. It is surely wrong that no facilities should be offered to the candidate to study the modern history of any continental European country above the text-book level. A candidate possessing some knowledge of the affairs of Asia, Africa, or Latin America has at present a very limited opportunity of displaying it in a paper called with magnificent nineteenth-century panache(위풍당당) 'The Expansion of Europe'. The title unfortunately fits the contents: the candidate is not invited to know anything even of countries with an important and well-documented history like China or Persia, except what happened when the Europeans attempted to take them over. Lectures are, I am told, delivered in this university on the history of Russia and Persia and China-but not by members of the faculty of history. 그러한 일반적인 왜곡을 바로잡는 것은 대학의 임무이다. 이 대학의 근대 역사학은 이러한 의무를 discharge하는 데 있어서는 부족한 듯하다.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어떤 후보자가 역사에서 학위를 받기 위해 후보자가 되는 것. 이 주요한 대학에서. 충분한 지식없이. 영어외의 어떤 다른 언어에 관해서는 충분한 지식없이 학위 취득 후보자가 된다는 것. 예를 들어 옥스포드에서 일어났던 예를 경고로 들어보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통과 역사에 빛나는 철학 훈련 과정에 전공자들이(practitioners)들이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평범한 일상 영어만으로도 훌륭하게 일을 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잘못이다. 어떠한 편의들도 제공되지 않은 것. 근대 역사를 연구하는 후보자들이 교과 과정 이상의 대륙 유럽 역사를 공부하기 위한 어떤 편의도 제공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아시아, 아프리카, 또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지식을 보유한 후보자가 현재 매우 제한된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기회를 펼칠 제한된 기회를 갖는다. 시험이나 논문에서. 위대한 19세기 당당한 유럽의 팽창이라는 시험에서 기회를 펼칠 기회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불행히도 이 표제는 내용과 일치한다. 후보자는 어떤 것도 알아야 한다고 초대받지 않는다. 중국이나 페르시아 같이 문서화가 잘 되어 있는 역사를 가진 중요한 나라들에 조차도. 단지 유럽 사람들이 그들(중국이나 페르시아)를 차지하기 위해 시도했던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외에는 몰라도 된다는 것은 불행한 것이다. 내가 듣기에 이 대학에서 러시아, 페르시아, 중국에 대해서 강의되었다고 듣는다. 그러나 그 강의는 역사학부의 구성원에 의해서가 아니다.
Chapter 6_30_233p The widening horizon
The conviction expressed by the professor of Chinese in his inaugural lecture five years ago that China cannot be regarded as outside the mainstream of human history' has fallen on deaf ears among Cambridge historians. What may well be regarded in the future as the greatest historical work produced in Cambridge during the past decade has bees written entirely outside the history department and without any assistance from it: I refer to Dr Needham's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This is a sobering thought. I should not have exposed these domestic sores to the public gaze, but for the fact that I believe them to be typical of most other British universities and of British intellectuals in general in the middle years of the twentieth century. That stale old quip about Victorian insularity 'Storms in the Channel-the Continent Isolated', has an-uncomfortably topical ring today. Once more storms are raging in the world beyond; and, while we in the English-speaking countries huddle(떼지어 모이다[together]) together and tell ourselves in plain everyday English that other countries and other continents are isolated-by their extraordinary behaviour from the boons and blessings of our civilization, it sometimes looks as if we, by our inability or unwillingness to understand, were isolating ourselves from what is really going on in the world. 표현된 확신(역설) 중국어 교수가 행한, 취임사에서, 5년 전, 중국은 인간의 역사의 주류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한 역설은 캠브리지 역사가들에게는 소귀에 경읽기로 간주되어 왔다. 미래에 가장 위대한 역사적 업적이라고 간주될 것이, 캠브리지에서, 지난 10년 동안, 씌어져 왔다. 완전히 역사학부의 외부에서, 역사학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나는 니담 박사의 ‘중국에서의 과학과 문명’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sobering 한 생각이다. 나는 이와 같은 내부적인 아픔을 대중들의 시선에 노출시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현상이 다른 대학들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고, 20세기 중반의 영국 지성인들 사이에 이런 현상들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이 없었다면 나는 이런 내부적인 아픔을 대중들의 시선에 노출시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래된 빅토리안 섬나라 근성에 관한 빈정거리는 말 ‘해협에 폭풍이 일어나면, 대륙은 고립된다.’ 라는 말은 불쾌하게 현재적 울림을 가진다. 한 번 더 폭풍이 더 너머에서 몰아치고 있다. 우리가(영어권 국가들)삼삼오오 모여서 평범한 영어로 지껄이면서 다른 나라들이나 다른 대륙은 고립되었다고 말할 때(그들의 특별한 행동에 의해 우리 문명의 혜택이나 축복으로부터 고립되었다고 말할 때) 때때로 인 듯 보인다. 만약 우리가 이해 불가나 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우리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부터 고립되고 있는 듯하게 보일 것이다.
quip: 신랄한 말, 빈정거리는 말
uncomfortably: 불쾌하게, 기분이 언짢아서, 초조하게
[역사란 무엇인가_시즌2] 7월 30일(토)_234~240p
Chapter 6_31_234p The widening horizon
In the opening sentences of my first lecture I drew attention to the sharp difference of outlook which separates the middle years of the twentieth century from the last years of the nineteenth. I should like in conclusion to develop this contrast; and, if in this context I use the words 'liberal' and 'conservative', it will be readily understood that I am not using them in their sense as labels for British political parties. When Acton spoke of progress, he did not think in terms of the popular British concept of' gradualism'. 'The Revolution, or as we say Liberalism' is a striking phrase from a letter of 1887. 'The method of modern progress', he said in a lecture on modern history ten years later, 'was revolution’; and in another lecture he spoke of ‘the advent of general ideas which we call revolution'. This is explained in one of his unpublished manuscript notes: 'The Whig governed by compromise: the Liberal begins the reign of ideas.'' Acton believed that 'the reign of ideas' meant liberalism, and that liberalism meant revolution. In Acton's lifetime, liberalism had not yet spent its force as a dynamic of social change. In our day, what survives of liberalism has everywhere become a conservative factor in society. It would be meaningless today to preach a return to Acton. 1장 강의를 열면서 나는 뚜렷한 차이를 환기했었다. 20세기 중반의 전망과 19세기 후반의 전망의 뚜렷한 차이에 대해. 나는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비교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그리고 내가 ‘liberal’, 'conservative'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할 때, 문맥상 그것이 즉각적으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내가 영국 정당들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액튼이 진보라고 얘기할 때 그는 일반적인 영국의 점진주의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혁명, 또는 자유주의라는 것은 1887년 편지에서 눈에 띄는 문구이다. 근대 진보의 방법은, 그가 10년 후 근대 역사에 관한 강의에서 말하길, 혁명이다. 그리고 다른 강의에서는 그는 일반적인 이념들의 도래이다. 우리가 혁명이라 부르는. 이것은 그의 미발표 원고 중의 하나에서 발견된다. 휘그는 타협으로 통치한다. 리버럴은 이념의 통치를 시작한다. 액튼은 믿었다. 이념의 통치는 자유주의라고. 그리고 자유주의는 혁명이라고 믿었다. 액튼의 시대에 자유주의는 아직 사회변화의 동적인 힘을 잃지 않았었다. 오늘날 자유주의에서 남은 것은 어디서나 우리사회의 보수적인 요인으로 남아왔다. 액튼 시대로 돌아가자고 역설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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