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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복음 깨달으면 율법 필요해요? 안 필요해요? 율법대로 살아야해요? 안 살아야해요? 예수님이 ‘율법은 뭐라고 하더냐?’ 그대로 정리해서 율법사가 말했을 때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우리 이 말씀을 오해를 많이해요. 그래서 우리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만큼은 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폐기 시키는 사람들이 있어요. ’끝났다 이제는, 율법은 복음이 오기 까지 필요했던 것이다.‘ 하면서 율법을 무시해요. 예수님이 율법을 인용하잖아요. 율법사 수준이 얼마나 높아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옳도다. 부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를 행하라.‘ 따라서 합시다. 이대로 행합시다. 조금 이렇게 말을 따라 하면서도 조금 이상하게 들리지 않아요? 우리 안에 이 부분이 혼돈해요. 또 육신 속에서 믿었던 만큼 율법에 대한 상처가 있어요. 그런 만큼은 뭔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도 있어. 율법 폐기 됐으면 좋겠다고. 우리 안에 상처가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에 구원파 사상처럼 그리스도, 모든 문제 끝. 그렇게 믿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그냥 땡겨 오는 거야. 그래서 율법 없이 자기 죄 끝났다 하면서 죄를 짓더라고, 나는 정죄 받을 사람이 아니야! 이제는 다 해방됐기 때문에. 그게 담대함이에요? 뭐에요? 그래서 제가 그러죠. 율법을 무시해? 율법을 그대로 당할 것이다. 무시한다고 무시되는게 아니라. 내가 무시당해요.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에요. ’옳도다.‘ 율법이 맞는 말씀이에요. 맞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를 행하라.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았어요? 말씀대로 살아라. 가만히 보면 은혜를 주신 만큼은 이미 믿음으로 살아지는 삶의 변화 속에 율법은 이미 성취 되고 있는데, 우리는 이걸 몰랐던 거예요. 그때는 말씀대로 순종하라고 하지 않아도 순종이 됐었고, 그때는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쉽고 참 가벼운 것이었어요. 문제는 뭐냐. 행하는 거는 행하는 건데 이걸 선악 속에 받다 보니 그대로 말씀대로 사는 것이 믿음의 행위로 가르쳤고, 그렇게 받은 만큼 살다 보니 쉽고 가벼운 행위가 점점 무겁고 힘든 것으로 바뀌어지면서 나중에는 못 살아. 안 살아. 그런 만큼 율법에 상처를 받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이 이를 행하라라는 말은 뭡니까? 어떻게 우리에게 행하게 하시는 것을 나타내셨잖아요. 내가 믿지만 그 분이 믿게 하셨고 그런 만큼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함이 내가 행했지만, 그 분이 내 인생을 살아주심 속에 행하게 하신 것을 나타내주셨는데, 우리는 선악 속에서 혼돈. 혼돈인 만큼은 은혜의 의하여 믿음으로 살아졌던 쉽고 가벼운 것을 체험했으면서 선악 속에 내가 말씀대로 사는 것을 믿음의 행위로 몰아갔던 만큼은 점점 무겁고 힘들어 지면서 나중에는 말씀대로 살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도 한 마디로 영적인 혼돈. 그렇기 때문에 이를 행하라. 그리 하면 살리라. 사는게 뭐에요? 구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몰라도 은혜 주신 만큼은 율법이 성취 되어지는 쉽고 가벼운 삶의 변화가 이미 행함으로 나타나고 있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율법이 왜 필요하냐. 온전하게 살아집니까? 아직도 우리는 선악 속에 죄성으로 살아 갈수 밖에 없는 죄의 영향력 때문에, 죄의 영향력 속에서 아직도 스스로 선악의 육신 속에 묶여 살수 밖에 없는 만큼 선악의 눈이 밝아, 그런 기준 속에 묶여 있는 만큼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도다. 그때는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그 죄를 통하여, 내가 율법대로 살려고만 했지, 살수 없는 선악의 죄성, 옛사람을 죽음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내어주면서 내 인생을 그리스도가 살아주시는 만큼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함이 살아지는 변화를 이게 믿는 자의 믿음 생활 속에 이 과정이 됐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살기도 하고 행함도 나와지고 할렐루야. 이 혼돈을 풀지 못하니까 몰라도 속일 수 없는 사실로 은혜 주신 만큼 믿음은 행함과 함께 쉽고 가볍고 감사로 살아졌던 율법의 성취가 내가 그렇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살려고 하다가 죄로 드러나니까. 혼돈 속에서 어떻게 할바를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행함도 점점 없어지게 되고 사는것도 없어지게 되고 죽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예수님은 율법사가 자신을 시험하는 것을 알면서도 무시해 버릴 텐데, 우리는 답이 없으니까, 그걸 받아 주시면서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나타내시는 거예요. 우리는 이 말을 받았어요? 아니요 종교 속에 받은 거예요. 그럼 껍데기는 다 맞는 거예요. 옳도다. 이를 행해라. 이것만 안돼요.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믿는 자의 삶이 영생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을 아는것 뿐이지 실제는 나는 믿어, 생명하고만 점점 상관없어져요. 사는것만 안되는것만 아니라, 행함도 은혜 주셨던 만큼 살아졌던 것도 점점 자기의 죄성에 옛습성으로 묶여 가고 굳어지고, 그럼 봅시다. 율법사가 율법으로 시험하는데 예수님이 그걸 가지고 구원하시는 일을 하세요. 빛을 비추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빛을 받고 있겠어요? 못 받고 있겠어요? 몰라. 왜 몰라? 선악의 율법 속에 갇혀 있는 거예요. 아는 만큼 갇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29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자기 지식 자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지금 율법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자신의 혼돈과 어둠속에 빛으로 깨닫는 게 아니라, 구원하고 상관없는 지금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그래서 이런 종교 생활 하면 할수록 이게 종교 괴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생활 속에서 영적 상태가 느껴지면 나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도망치고 싶더라고,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까지 왔잖아요. 복음을 던지면 이 땅에 어떻게 받아질 것을 알면서도 하고 있잖아요. 분명히 사람들 속에 어떻게 반응 될것을 알면서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첫 번째 왔을 때 그때 여러분 안왔어야해. 그때 오면 시험 들어요. 집회야? 예배야? 교제야? 나눔이야? 아무것도 안 돼. 나눔이든, 말씀 증거든, 해도 받아들이는 자들의 영적 상태가, 이게 뭐냐 싶은, 여러분 단단한 것일수록 던져 봤자 통통 튕기거든요. 그런데 조금 아까 말씀 증거 할때 땅이 움직였잖아요. 나는 그걸 보며 여러분 지금 그거 보다 더한 일이 여러분 속에 일어난 것이 보여요. 여러분, 땅 갈라져 봤자 골치만 아프거든요. 소동은 일어나겠지, 충격은 받고, 그건 사망의 일 밖에 안 일어나요. 이건 구원을 이루어가는 지진이에요. 워낙 견고하니까 흔들리지 않으면 안 돼. 돌을 옮겨 놓아라. 이게 안 되면 나사로야 나오라. 구원의 생명의 말씀이 죽은 나사로의 심령 속에 비췰 수가 없어. 세 번 만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나 일본에 살까봐.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의 소원은 있지만 이제는 믿음으로 그 분이 하신 다는 것을 믿고 우리는 우리 수준의 얘기를 던지는 것이지 그것을 나로 받지 말세요. 그 분의 뜻만 이루어지면 되죠. 아멘? 참 이게 지금 구원하시는 이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그리스도가 오신 그 구원의 일을 속을 뻔히 아는데도 그걸 받아 주시면서 아니 그가 가지고 있는 율법의 지식 까지도 그걸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 구원의 일을 율법 선생에게 나타내고 계신데 도대체 어디에서 놀고 있는 겁니까?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이건 뭐냐고? 지금 구원만 집중해도 될까 말까인데, 이게 혼잡한 영이에요.
그래서 제가 어제 나눔에서 그랬지만, 나는 중국에서 하나님이 17년 동안 하신일을 보면서 2016년 갑자기 추방을 당하면서 한국에서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모여서 교회를 시작하게 됐잖아요. 제 수준에는 한국은 쉬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17년의 과정이 그냥 과정입니까? 증거 가 있잖아요. 열매가 있잖아요. 그 과정이 그냥입니까? 세상 말로 노하우가 있는데, 노하우로 되는 게 아닌데도 내 수준은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런데 은혜로 깨닫게 하셨고, 체험케 하셨고 열매로 나타내셨기 때문에 난 내 수준 속에 확신으로 끌어당겨서 한국은 이미 너무 많이 도와줬기 때문에 이것까지 다 필요한 도움이 될줄 알았어. 도움이 되는 게 있는데 도움되는 만큼 복잡하고 쉽지 않은 과정임을 보게 하신거야.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빨리 됐을까? 한마디로 예를 들어서 설명해줄게요. 여러분 새집 지을때 헌집 허물고 집 짓는 게 나아요? 없는데 짓는 게 나아요? 헌집이 문제에요. 선악 속에 종교 바벨탑 세운 만큼은 복잡한 거야. 율법사 보라고, 얼마나 수준 높은지, ‘옳도다. 네 말이. 그를 행하라. 그리 하면 살리라.‘ 이게 빛을 비추는 건데, 사람들에게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그런데 이게 이 율법사만 그런게 아니에요. 앞서 애기 했지만 그렇게 우리가 선악 속에 하나님께 옳게 여기는지 알고 잘 믿는 줄 알고 믿다 보면, 우리는 목사님에게 왜 그렇게 의식해요? 왜 사람들 앞에 나를 의식하고, 사람들의 반응에 왜 그렇게 민감해요? 그래서 요즘에 한국에서 13년이에요. 그런데 이 과정이 보니까, 종교의 무덤을 파해지는 과정이었더라고, 과정은 간단치 않았지만, 개인과 가정과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 참 그렇게 생각 하려고 한게 아니라, 나타낸 것속에 과정을 보게 하시면서 참 이게 바로 복음의 능력이구나. 제가 우리 이권사님에게 월요모임 나눔을 보내줄테니까, 일본 분들과 나눠 들으시라고, 어제 말한 것처럼 미국에서 나누신 분, 어떻게 저렇게 목사님 앞에서 스스럼없이, 그런데 예수님이 열두제자와 함께 할때 어떻게 대한 줄 보세요. 하나님처럼 대했죠? 우리가 하나님처럼 대하는 것과 완전히 달라, 우리가 하나님처럼 대하면 나는 완전히 목사님을 그렇게 대하거든요. 옳게 여김을 받으려고, 그런 만큼 목사 말 한마디에 얼마나 민감한지, 오해를 잘하는지, 그런 만큼 마귀가 성도들의 마음속에 목사에게도 그런 말을 자기도 모르게 하게끔 만들기도 하지만, 그런 말이 아닌데도 사람들 속에 선악 속에 혹 하게 만들어. 시험 걸리도록.
여기 보세요.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쭈어 이르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쯤 되면 우리가 같으면 참아도 한계가 와요. 에잇 끝내 버려. 따라서 합시다. 이걸 또 받아 주시는 예수님. 그래서 저도 이전에 사람들에게 할 수 있으면 나누는 것을 싫어했어요. 복잡한 만큼, 또 나도 내 수준이 있는 만큼 선악이 없을 수 없잖아. 그래서 안하는 게 좋겠더라고. 조금씩 은혜를 받아 가니까. 자기 수준대로 해야지. 옳게 여기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 조금씩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발견해 오게 하신 만큼은 신기 하더라고, 어떤 수준의 얘기를 들어도 무시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받아 주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 속에서 구원의 일을 나타내게 되더라고요. 전에는 우리는 들으면 선악 속에서, 그래 네가? 그런 만큼 공격 아니면 무시 아니면 같은 편으로. 사망의 일 밖에 없어요. 그러한 수준 속에 하나님은 받아 주시고, 그래서 본격 적으로 비유가 나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이게 인내 입니까? 아닙니다. 살아지는 믿음 안에 삶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아가다 보니까 나이가 66인가봐. 우리 교단에서 만70이면 은퇴해야 하거든요. 뭐 은퇴해도 목회는 내려놓겠지만 평생 하나님이 하게 하신다면, 주책 부리지 않고, 하나님이 하게 하심을 따라서 아직도 부족한 종을 통해서 증거될 이유가 있다라면 편안하게 해야 되는것도 아니고, 안한다고 문제되지 않는, 누구를 통해서 하실 일을 아직도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다면 하나님이 부르실 날 까지 해야죠. 그런 것은 자유해요. 내려 놔도 되고 안 내려 놔도 되고, 방법만 다를 뿐이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동일한 거니까.
동경 집회 7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