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고 있어 상 / 조미숙
꽃 없는 축제가 지나가자 벚꽃이 만개했다. 오늘은 그 꽃이 비가 되어 내린다. 묘하게 아련하다. 오락가락하던 날씨는 며칠째 순풍이다. 이젠 정말 봄이 왔나 보다. 진저리나게 오던 비가 그치니 그새 고사리도 올라와 손맛을 보게 했다. 둘레길 걷다가 한 줌 꺾었다.
시간 있을 때 열심히 걸으려고 한다. 유달산 둘레길을 자주 찾는데 무릎이 아파 며칠에 한 번꼴로 간다. 조금 더 완만한 숲길이 있으면 좋겠는데 선뜻 나설 데가 없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입암산 둘레길로 가기로 했다. 도자기 박물관 옆 생태공원 앞에 주차하고 언덕을 올랐다. 공원은 꽃과 새잎으로 파스텔 그림 같고, 초록으로 물든 잔디밭은 한껏 싱그러운데 느닷없이 불쑥 솟은 건물이 눈에 거슬린다. 작년부터 진행하던 공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보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한가하다. 오르막길이라 다리는 팍팍하고 가슴은 터질 것 같다. 숲은 어느새 온통 연둣빛이다. 큰 키 나무는 제법 나뭇잎이 무성해져 하늘을 가린다. 낮은 키 나무들도 앞다투어 잎을 내민다. 그중에 빨간 꽃 같은 게 있다. 예덕나무 새순이다. 강하게 쏟아지는 자외선에서 어린잎을 보호하려고 안토시아닌이 풍부하게 만들어 놓았다. 단풍나무나 홍가시나무 잎이 그 대표적인데 예덕나무는 가지 끝에 조그맣게 달리기 때문에 더 예쁘게 보인다.
일찌감치 하얀 꽃을 피워올리던 남산제비꽃은 벌써 씨앗을 맺고 있다. 불에 태우면 잿물이 약간 누런빛이 나와 매염제로 쓴다는 검노린재나무도 꽃봉오리를 달았고 옥녀꽃대(옥녀봉에서 발견했고, 홀아비꽃대와 비슷하지만 주로 남부지방에 서식한다.)도 병 솔 같은 하얀 꽃을 피웠다. 병꽃나무꽃도 벌써 색이 변한다. 옛날 술병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인데, 처음에는 옅은 노란색으로 피웠다가 꽃가루받이가 끝나면 붉게 변한다. 땅바닥에 낮게 선 보라색 각시붓꽃도 해사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걸었다. 숲에는 보물이 많다. 나무에서 풀 한 포기까지 온갖 생물이 서로 의지하고 깃들어 산다.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예쁘다. 그중의 하나인 홍점알락나비 애벌레를 찾으려고 어린 팽나무를 만나면 샅샅이 뒤졌다. 주로 초식성 곤충이나 그 애벌레의 먹이가 되는 식물을 기주 식물이라 하는데 엄마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몸을 숨기고 밥도 잘 먹으라고 그 나무나 풀잎에 알을 낳는다. 곤충들은 대부분 편식쟁이여서 대표적 먹이 식물만 알면 된다. 몇 년 전에 처음 만나 키웠는데 뿔을 세우고 있는 게 너무 귀여웠다. 처음에는 나뭇가지 색이라 구별하기 어렵다. 점차 초록색으로 탈바꿈을 하는데 팽나무 잎이 저렇게 자랐으면 애들도 많이 컸겠다.
둘레길 한 바퀴를 다 돌도록 허탕을 친 것 같았는데 뭔가 보인다. 제법 큰 애벌레다. 곧추세운 뿔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집으로 데려오고, 나뭇가지를 꺾는 것이 잘한 일이라 할 수 없어 잠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있을 생태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마음먹었던 터라 과감히 꺾었다. 물병이 없어 꺾자마자 시들기 시작하는 잎을 보며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몇 번이나 혹시 떨어뜨렸나 확인해 보면서 오는데 길가 팽나무에 작은 애벌레가 한 마리 더 보인다. ‘아싸!’ 절로 신바람이 난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난 겨울이 기냐고 자주 투덜거렸는데 이렇게 가까이 와 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제 일을 한다. 나비는 알을 낳아 키우고 나무와 풀은 새싹을 내고 다음 세대를 이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조금 늦거나 빠르긴 해도 자연은 순리대로 제 몫을 다하고 있다. 기후 위기로 날로 혹독한 환경이지만 잘 버티고 있다.
지금껏 자랑할 만한 상 하나 받은 게 없다. 성실성을 대변한다는 개근상쯤이나 있을까? 어릴 때 받은 호남예술제에 입선한 경력이 오늘날 내가 글을 쓰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잘난 게 없으니 물 흐르듯 마주치는 것들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있는 그대로 자연을 닮으려 애쓰며 살고 싶다.
내게 시상자라면 늘 묵묵히 곁에 있어 준 자연에게 ‘잘하고 있어 상'을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