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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96
2월5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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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1)매일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
살다보면 우리가 미처 잘 몰라 뵙고 그냥 지나치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은 바로 우리와 매일 동행하시는 주님,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가족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주님,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 안에 숨어계시는 주님, 작고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
너무나 부족해 보이는, 그래서 늘 ‘엄마 친구 아들’,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되어 보이는 내 자식들 안에 ‘가능성’ ‘희망’이란 이름으로 현존해 계시는 주님...
너무나 가까이 계셨던 하느님을 몰라 뵙고 배척했던 예수님의 고향마을 사람들처럼 우리 가까이 살아가시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편견 때문입니다.
선입관 때문입니다.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지나친 기대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숨어계시는 주님을 알아 뵙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영성적인 눈을 뜨는 것입니다. 뒤로 한걸음 크게 물러나는 것입니다. 더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좀 더 밑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기대치를 낮추는 것입니다.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너무 큰 것을 기대하셔서 그렇습니다.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뭔가 찾으려니 그렇습니다. 가까이서가 아니라 멀리서 특별한 것을 찾으려니 그렇게 불행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결, 따로 없습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것, 소박한 것,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 행복은 시작됩니다. 멀리서, 바깥에서, 어느 다른 하늘 아래서 특별한 그 무엇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보물을 찾아나가면 좋겠습니다. 영성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길을 확 끄는 뭔가 대단한 것, 휘황찬란한 것,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매일의 지속적인 기도, 매일의 미사, 매일의 일상적인 사건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나가고 계신다면 제대로 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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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제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어젯밤 MBC 스트레이트 살레시오 청소년 센터편을 보고 난후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살아온 지난 35년간의 제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방송도 나가기전 예고 기사는 벌써 저희 센터를 악의 소굴로 예단해버렸더군요.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과 동역자들을 천하의 쳐줄일 놈, 파렴치범으로 낙인찍어 버렸구요. ‘생지옥’ ‘또 다른 도가니’ ‘아이들의 절규’ 등의 표현을 접하며, 정말이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왜곡되고 조작된 매스미디어의 폭력성과 위험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진행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저희에게 총칼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진위여부도 따져보지 않고 일단 자극적인 제목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유인한 후, ‘아니면 말고!’ 식의 거대 언론의 횡포 앞에, ‘아, 약자들과 피해자들이 이렇게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구나.’하는 생각에 큰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제작진은 강제 약물 투여 같은 어불성설의 사안에 대해서, 진위여부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찌감치 저희를 범인 취급하시더군요.
세상 둘도 없는 의인처럼 비춰지던 진행자와 패널들, 기자들의 언어폭력을 바라보며, 아무런 죄도 없이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수십년 동안이나 매주 센터에 오셔서 개구장이 한명 붙들고 한글을 깨우쳐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던 자원봉사자 선생님들께서도, 지난 삶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라며, 울음을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청소년들이 이 방송을 보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부모와의 사별, 방황, 일탈로 6호처분을 받고 살레시오청소년센터에 와서 느꼈던 따뜻함을 기억하며, 이건 정말 아니라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제작진들에게 엄중이 묻고 싶습니다. 어제 방송 때 보니 사회자분을 비롯해서 패널로 나오신 분들, 기자분들, 이 세상 그 어떤 성자(聖者)보다도 더 끔찍히 요보호 청소년들을 사랑하시는 분위기던데...
솔직히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어미잃은 어린 새같은 아이들과 마주앉아 세시간 네시간씩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있습니까? 방송 중에 참 좋은 말씀 하시더군요. ‘한 아이를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고.’
제작진 여러분, 혹시라도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세상과 부모에 대한 분노로 똘똘 뭉쳐진 아이에게 밥한끼 사주신 적이 있습니까?
악의적으로 편집된 방송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센터장님을 비롯한 임직원 선생님들이었습니다.
한번씩 방문할 때 마다, 주말이나 휴가도 없이 사시사철 온종일 상처많은 아이들 곁에 서서 환하게 미소짓고 계시던 센터장 신부님의 얼굴, 혈기왕성한 아이들과 하루 온종일 뛰어노시느라 언제나 상습피로에 젖어 계시는 성무감 신부님,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백방으로 고민하시는 임직원 선생님들의 얼굴, 언제나 저희 센터를 사랑하고 신뢰해주시던 봉사자들, 후원자들, 협력자들이 떠오르며 그분들이 받았을 상처와 충격, 자괴감을 생각하니 도저히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공영방송임을 자랑하는 MBC입니다. 말 마디 그대로 공영방송은 공공의 복지와 유익을 목적으로 하는 방송입니다. 당연히 공영방송은 공평해야 하고 진실만을 보도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어제 방송에서는 공정성이나 객관성, 형평성, 진실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스트레이트 제작진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상식적이고 균형잡힌 프로그램 제작에 힘써주십시오. 부디 진실만을 보도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갈 수 있기에, 프로그램 제작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주십시오.
객관성과 진실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편파성과 선정성만 가득한 프로그램으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참으로 큽니다.
6호처분 기관에서의 생활을 통해 자신감을 되찾고 새삶을 시작한 수많은 청소년들, 아이들의 변화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부모님들,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신 관련 공무원들, 자주 찾아오셔서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시는 가정법원 판사님들...
그분들이 받으셨을 큰 충격과 상심에 참으로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저희는 진실 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 언젠가 주님께서 시시비비를 가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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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은 밀떡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믿어라>
미국에 있는 UCLA라고 하는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이제 머지않아 의학 공부를 마치고 바로 현지 병원에 나가서 환자들을 진찰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중에 한 사례를 들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아이는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아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우리가 아는 악성 베토벤은 바로 그런 환경 가운데서 1770년에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요, 형제들도 다 병들어 그 모양이지만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그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의사가 저런 상태에서 베토벤을 죽였다면 그가 작곡한 음악은 하나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하느님도 가능성을 열어놓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고향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이 깜짝 놀라는 이유는 ‘새로 태어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0년 동안 나자렛에서 대패질을 하며 사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말도 잘하시고 기적도 행하시게 되었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믿기로 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물론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었지만,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셨지만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기에 은혜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가 믿지 않는 것에 놀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만 믿으면 그 은혜를 주실 텐데 억지로 믿지 않아 그 은혜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밀떡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이런 믿음만이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게 만들고 결국 하느님을 모신 성전이 됩니다. 하느님은 밀떡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잊지 맙시다. 그러면 정말 새로 태어나고 고향 사람들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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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6 :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다. 그 마을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30km 떨어진 곳으로 인물다운 인물을 내지 못한 고장이었다.(요한 1,46 참조)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다섯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2-3절). 예수님의 업적에 대해서 그 기적들과 가르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즉 하느님인가 인간인가?(11,30 참조) 혹은 사탄인가?(3,22 참조)
예수님은 고향사람들 사이에 장인으로 통했다. 목수, 미장이, 석공, 대장장이 일을 두루 다 하신 기술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고 있다. 관례에 따르면 “요셉의 아들”(마태 13,55 참조)이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3절)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살아가지 않도록 이러한 상징들을 통하여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5절) 나자렛에서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6절 참조) 치유가 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치유하는 분에게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상대방이 없으면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 그분의 은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막혀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한 예언자들과 당신을 비교하시면서(4절) 당신 자신도 결국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적이란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믿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 신앙이라는 배경이 없으면 기적이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의 혜택도 있는 것이다.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다.”(5절)는 것은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은총은 당신을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더 힘차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분의 능력은 그들의 불신조차 이겨 내셨다는 뜻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나, 내적인 것인데 볼 줄도 모르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외적인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멋대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 외모로만 판단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 좀 더 이웃의 장점을, 내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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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예수님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단순히 당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건이기에 그러합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셨지만 몇 가지 외에 다른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던 것은 손뼉이 마주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 가정 환경, 친인척만 보고 선입견을 가졌고 예수님께 믿음의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우유 시음 실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연기자 몇 명이 우유를 마시고 그것이 마치 상한 것처럼 구토를 하자 다른 참가자들도 우유를 못 마시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한 명은 정말 식중독에 걸려 입원까지 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 우유는 매우 신선하였는데도 말입니다. 우유가 상하였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생기자, 사람들은 그 우유의 신선함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 우유 자체는 맛과 영양을 지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우유를 마시고 독만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미시는 사랑의 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손을 통하여 기적의 열매가 맺어질 수 있고, 그 열매는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입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 기적은 무용지물, 더 나아가 독이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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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자렛에서>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너희는 왜,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존경을 받으려고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려고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신 분”입니다.(마르 10,45)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야기 끝부분에 있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로 해석됩니다. 당신을 존경하지 않는 것을 서운해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인데, 믿는 것도 거부하고 구원받는 것도 거부하는 사람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 쪽에서 스스로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라는 말도, 예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 쪽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거부하고 배척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으니까 예수님께 청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도 안 받으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입니다. 이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집안과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잘 알고 있다.’ 라는 그 생각이 ‘걸림돌’로 작용한 것입니다. (혹시 나자렛 사람들은 “목수는 목수 일만 해야 한다.”, 또는 “목수가 어디 감히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가?”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당시에 그곳에서는 목수는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부한 일은, 나자렛에서만의 일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도 흔하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또 예수님만 당하신 일이 아니라, 사도들, 예언자들, 선교사들도 흔하게 당한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나자렛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 사람이 나보다 젊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학력이 나보다 모자란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아랫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또 그의 어린 시절의 모습은 나보다 못났었다는 기억만으로, 그의 약점과 그의 과거를 내가 잘 알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그 외에 이런저런 이유로, 그를 무시하고, 비웃고, 그러면서 그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안 받아들이고... (이것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즉 무심코 그런 잘못을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고 보고 있는 것은 정확한 사실이다. 내가 아는 그대로, 또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 사람을 그렇게 대한 것이 무슨 잘못이냐?”라고 따질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은 아닌지,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또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 과연 그 사람의 전부일까? 모르고 있는 것들과 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더 많지 않을까? 어떻든 어떤 경우든지 간에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교만죄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잘난 체 하는 것만 교만죄가 아니라,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도 교만죄입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의 첫 번째 죄는 교만죄입니다.)
‘교만’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만일에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서 그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짓을 하고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고, ‘거짓 겸손’이고, ‘위선’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똑같이 자기를 낮추는 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 앞에서도, 나의 후배인 사람 앞에서도, 아랫사람 앞에서도, 나보다 못난 사람 앞에서도, 또 내가 그의 약점과 결점을 알고 있어도, 그의 과거를 알고 있어도, 나를 낮추고 그 사람을 높이는 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앞에서 당신을 낮추시고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요한 13장) 심지어 유다가 배반한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유다 앞에서 당신을 낮추셨고, 그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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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이태리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부모님이 이태리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의 어머니는 무릎이 좋지 않으셨는데,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캐리어 몇 개를 끌고 오셔서는 저를 위해 가져왔다며 안겨 주셨습니다. 가방을 열어 보니 그 안에는 한약이 가득 담겨져 있었습니다. 유학기간 동안 몸이 약해질까봐 걱정되어 굳이 아픈 무릎을 이끌고 그 무거운 한약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저는 뭐 이런걸 가져왔냐 핀잔을 드렸지만 그 정성이 아까워 평소에는 있어도 먹지 않던 한약을 매번 꺼내 먹었습니다. 그리고 건강에 별다른 탈 없이 유학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어머니의 정성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사실 어렸을 때 제가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말 중 하나가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속담이었습니다. 내가 당장 싫은데, 먹기 싫고 귀찮은데 쓴 약을 먹는 다는 것이 이해가 안되었던 것입니다.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어와 수학 공식, 과학이 중요하다는데 그것이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장의 고통을 참으며 좋은 결과를 기다리지 못했던 제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왔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어보기보다는 당장의 즐거움이나 편안함을 유익한 것이라고 착각하곤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일상 생활 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당신 고향 나자렛을 찾아가신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가정사를 잘 아는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저런 지혜, 저런 기적의 힘이 어디서 났는가 하고 놀라면서도 그 말씀에 진실되이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의 아들이며, 어떻게 자랐고, 어떤 일을 해왔는가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라고 이야기 합니다. 당시의 목수라는 직업은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허드렛 일을 하는 하층 계급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선입견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결과를 불러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진심으로 믿는 소수의 병자들만을 고쳐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기적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십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안다는 것만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음의 말씀을 무조건 거부하는 그들에게,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선입견에 사로잡혀 제대로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나의 단점을 지적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그것이 바른 말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피하거나, “자기가 뭔데 나에게 충고를 하는가?” 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병에 걸린 자가 자기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고쳐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신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남들의 충고를 들을 때 이러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채찍질 하시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입에 쓴 약이 몸에 좋은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여러 가지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지만, 신앙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의 복음의 핵심은 바로 “믿음”입니다. 어떠한 선입견에도, 어떠한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그것이 곧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참 계명임을 기억하며, 오늘 미사 중에, 충실한 믿음의 은사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을 요청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히브 12,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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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믿는 것과 아는 것, 어느 것이 먼저일까?>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권위가 있어서 감히 예수님께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러셨을까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신 것은 그들이 병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로 들어서 믿지 못했다면 직접 눈으로 본 것은 믿어야 하는데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는 그들을 보시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나는 주님을 믿고 있는가? 나는 주님을 알고 있는가? 믿어야 알 수 있고, 알아야 믿을 수 있는 우리 신앙의 신비를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알아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알 수 있는 우리 신앙의 신비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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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종민 마테오 신부님]
고등학교 때, 저를 개신교 교회로 데려가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성경구절을 여기저기서 인용하며 가톨릭은 이단이고 마리아교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들 덕분에 집에 돌아와서 성서를 한 번 더 펼쳐보게 된 것이 지금은 고맙게 생각되지만, 그때는 짜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친구들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들은 나에게 언제부터 성당에 다녔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자랑스럽게 “엄마 뱃속에서부터 성당에 다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내가 가진 신앙에 대해 그들처럼 자신 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 구교우 집안이다, 또 태중교우다 하는 것은 한편 자랑거리입니다. 신앙의 뿌리가 그만큼 깊고 튼튼하다는 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이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될 때도 있습니다. 늘 가까이 하고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거나 신앙의 이야기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만족해 버리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사람과 같은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 지혜와 기적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을 보고 놀라기는 하였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은 한낱 고향사람 예수일 뿐이었으며,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와 기적은 오히려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향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과 나는 동향사람이라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지만, 한편 큰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군중들이 모여들었다고 하지만, 고향에서만큼은 그렇지 못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랑할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구교우 집안의 태중교우라는 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가진 신앙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더 큰 걸림돌이 되어 예수님을 놀라게 해 드리는 일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그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과 같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라 살아가야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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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한국 본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가져야>
신뢰심은 정직한 사람, 능력을 갖춘 사람, 선을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신뢰를 잃은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고, 능력이 없고 선을 행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또한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에 매달리는 사람도 주위에 사람들에게 신뢰 받지 못합니다.
그 외 신뢰심을 받는 사람은 서로 긍정의 삶을 살며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사람입니다. 신뢰를 잃은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아니고 주위에 사람들에 의하여 신뢰를 상실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난 정치 지도자들을 검토해 보면 자신의 잘못 보다 친인척의 잘못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서로 신뢰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변 정리를 잘 하는 것도 신뢰심을 보존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한 공동체의 존폐는 공동체 구성원의 서로 일치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 신뢰심이 보존됩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에게 신뢰심을 잃고 나라를 암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이 집단적 권력욕으로 어느 편이냐 누구와 연계되어야 되느냐? 자기 스스로 서고 나라와 만족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뒷전이고 어디에 붙어야 유리한가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를 잃은 사람들로 과 차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에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는 뒷전이고 자기 편리한대로 살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존재 가치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 고향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배척하는 고향사람들 우리도 내가 그렇게 믿었는데 돌아오는 것이 요것뿐이냐? 하고 하느님을 원망한다면 믿음은 자기를 위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저는 오늘 하느님은 어떤 경우든지 신뢰심을 가지고 저를 이끌어 주시니 주님의 신뢰 안에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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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이 곧 나>
마르코 6,1-6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당신이 곧 나>
당신은 대단해요
라고 할 때에 비로소
나도 대단한 사람이에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라고 할 때에 비로소
나도 자랑스러운 사람이에요
당신은 훌륭해요
라고 할 때에 비로소
나도 훌륭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특별해요
라고 할 때에 비로소
나도 특별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소중해요
라고 할 때에 비로소
나도 소중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사랑스러워요
라고 할 때에 비로소
나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당신이 고마워요
라고 할 때에 비로소
나도 고마운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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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이런 고은님들이….>
저는 영적 일기를 준비하면서, 이런 고운님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구름 속에 비를 보지 아니하고 구름 위의 태양을 볼 줄 아는 고운님들!”
효림 스님이라는 분이 “힘든 세상, 도나 닦지.”라는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중에 있는 나무들 가운데 가장 곧고 잘생긴 나무가 가장 먼저 잘려서 서까래 감으로 쓰인다. 다음으로 다음 못생긴 나무가 큰 나무로 자라서 기둥이 되고, 가장 못생긴 나무는 끝까지 남아서 산을 지키는 큰 고목이 된다. 못생긴 나무는 목수 눈에 띄어 잘리더라도 대들보가 되는 것이다. “잘생긴 나무들이 먼저 잘려나가고, 못생긴 나무가 숲을 지켜나간다.”라는 뜻입니다.
잘 나가는 신자는 매우 바빠서 교회에 잘 안 나오지만, 안 바쁜 우리가 교회를 잘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교회에 큰 고목이 되어서 천국에 대들보가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내 눈 잣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정말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랜만에 고향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차갑기만 하고, 예수님 행동 하나하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만 볼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 사람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리고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시기와 질투, 미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히려 고향에 큰 손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베푸셨던 엄청난 은총. 즉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죽은 이들도 살려내신 수많은 기적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적들은 믿음을 통해서만이 이해할 수 있는데,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분한 마음으로 생긴 미움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얻어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운님들은 하느님의 은총과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을 보면, 사도 바오로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톨스토이라는 분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한 세상을 사는 3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족한 사제는 톨스토이가 말한 3가지를 주님 안에서 매일 매일 거룩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방법으로 생각하기에 함께 나눕니다.
안식년에 있는 저 두레박 사제에게…. 첫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기도하고 영적 일기와 시편 공부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둘째,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이 부족한 사제의 영적 일기를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는 고운님들입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부족한 사제의 영적 일기를 읽고 보는 고운님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맛 들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성령 충만한 은총을 받고, 내 눈 잣대로 남을 판단하지 않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아 주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거룩한 마음으로, 기도와 미사 중에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베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거룩한 마음은 지금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을 내 눈 잣대로 판단하지 않는 것, 하오니 고운님들이 매일 거룩한 마음으로 살아 성령 충만한 복된 날을 만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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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98)
♧♧ 시편 73편 3절….
"내가 어리석은 자들을 시새우고 악인들의 평안함을 보았기 때문이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평안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며,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기 일쑤인 교만한 자를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시새우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나’라는 말은 ‘시기하다.’ ‘질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를 두고 ‘내가 부러워했다.’라고도 번역합니다. 그리고 ‘평안함’이란 악인이나 선인이나 불문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그러한 평안함을 누리게 될 때 비록 그들의 악행은 밉지만 평안함만은 의인의 부러움을 샀다.’라는 것이 이 구절의 요지입니다. 마침내 악인의 평안함은(욥기 21장 7-15절. 시편 37편 1-38절. 예레미야서 12장 1-3절. 참조) 그것을 바라보는 주님께 충실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정의로우심을 의심하게 하는 유혹거리가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악을 미워하시는 하느님께서(시편 5장 6절, 11장 5절, 하바쿡서 1장 13절. 참조) 어떻게 악인을 즉각적으로 징벌하지 않으시고 평안하게 내버려두실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 주기 때문입니다. 시편 73편의 아삽도 바로 이러한 문제로 인해 고민했는데, 그는 결국 하느님께 그 문제를 내어놓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해결책을 찾았습니다.(17절. 참조)
♧♧ 시편 73편 4절….
"그들에게 아픔이라고는 없으며 그들의 몸은 건강하고 기름졌네."
이 구절부터 12절까지에서 시편 73편의 아삽은 자신이 목격한 대로 악인의 평안함을 누린 일들을 열거해보임으로써 자신이 악인의 평안함 때문에 실족(행동을 잘못하는 것)할 뻔 했던 이유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아삽은 인간의 선행과 악행은 현 세상에서 그 보응을 받아야 한다는 예전의 풍습과 세속적인 인과응보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악인의 평안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아삽은 이러한 의문을 결국 하느님은 당신의 특별한 섭리에 따라 악인을 즉각적으로 징벌하시는 경우도 있으나, 때로는 그 심판을 미루셨다가 세상 끝 날에 완전한 심판을 행하신다는 성경적 인과응보 사상에 대한 믿음으로 해결하게 됩니다.
* 그들에게 아픔이라고는 없으며...
이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아무런 아픔을 겪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 그들의 몸은 건강하고 기름졌네...
문자적으로 ‘그들의 몸이 살찌고...’란 뜻입니다.
이는 악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별다른 질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산 것을 가리킵니다. 죄를 범하고도 일생동안 아무런 징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평안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 대해 세속적인 인과응보 사상에 근거해 생각할 때 아삽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욥기 21장 13, 23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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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분이 계셨는데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분께서는 의사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쓸데없는 검사만 실컷 한다고 말하고, 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독약이라면서 먹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것을 자녀들이 억지로 데려간 것입니다.
이 병원에서도 검사를 받지 않겠다, 의사 앞에 내 몸을 보여줄 필요 없다면서 실랑이를 계속해서 벌였습니다. 몸이 너무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또 몸을 보여도 주지 않으며 약을 비롯한 처방도 거부한다면 병이 나을 수 있을까요?
자연히 치료될 수 있는 병이 아니라면 의사의 처방을 받아서 약을 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를 불신하면서 멀리한다면 치료될 수 있는 병도 치료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주 위중한 병을 극복한 사람을 보면 의료진을 불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굳게 믿고 의료진이 하라는 대로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러나 아주 훌륭한 의료진이 투입되어도 믿지 않는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다고 봅니다. 우리는 참 많은 청원 기도를 바칩니다. 그런데 굳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보다, 협박과 공갈의 모습을 띠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이거 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하겠습니다.”, “주님, 이거 안 해 주시면 저는 이제 당신을 믿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보면, ‘그의 믿음’을 보시고 또는 ‘주변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주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환자는 믿음이 그리고 의사에게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처럼, 우리의 굳은 믿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큰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는데 사람들의 믿음을 전혀 볼 수 없었다고 전해줍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했고, 자기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려고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믿음 없는 고향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예수님 기적의 수혜를 입어야 할 사람이 주변의 ‘믿음 없음’으로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 없음’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까지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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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
요즘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옛날과 다른 풍경을 하나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책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서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보고 있습니다. 책을 너무나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모습이 참 아쉽습니다. 얼마 전에 지하철을 탔는데, 제가 서 있는 근처에 앉아 있었던 분이 가방을 열어 책 한 권을 꺼내서 읽는 것입니다.
괜히 반갑고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이분에 대한 호감도가 계속 증가하더군요. 왜 그럴까요? 단순히 책을 꺼내 읽을 뿐인데요. 제가 좋아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좋아하실까요? 또 어떤 모습에 호감을 느끼고 바라보실까요? 당연히 당신의 뜻에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좋아하시는 주님과 달리,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산다면 전혀 관심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주님과 달리, 자신의 영광만을 세상에 알리는 사람에게도 역시 관심을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함께 하는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것처럼,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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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의 가톨릭평화신문으로 오기 전에 저는 교구 성소국에서 5년 동안 있었습니다. 성소국에서 하는 일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젊은이들이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예비 신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했습니다. 예비신학생들은 함께 공부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습니다. 매월 예비신학생을 위한 모임이 신학교에서 있었습니다. 신학생들과 부제님들이 예비신학생 모임을 준비하였고, 함께 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을 선별하고 추천하는 일입니다. 신학교에서 학업과 수련을 마친 부제 후보자와 사제 후보자의 서품식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매년 2월 첫째 주 목요일과 금요일은 부제 서품식과 사제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내일과 모레는 서울대교구 부제, 사제 서품식이 있습니다. 멀리 있지만 부제와 새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29년 사제생활을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이끌어 주셨고, 교우 분들은 저를 이해해 주셨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성사를 정성껏 집전하지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기도를 소홀이 한 적도 많았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제게 필요한 사람을 만난 적도 많았습니다. 몇 번 넘어졌지만 성모님의 전구하심과 부모님의 기도가 있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하고 싶었고, 사제라면 당연히 해야 할 직무를 새 사제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의 아픈 곳을 정확히 진단해야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는 사색, 독서, 경청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꾸준한 독서가 필요합니다.
사제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교회의 서적, 가르침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은 강론을 통해서 선포되기에 강론 준비를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셨고, 말씀이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사제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여유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기도는 꾸준히 해야 합니다. 기도는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사제는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셨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행동하는 사제는 등경위의 등불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많은 기적을 보여주지 못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우 분들이 마음을 열어도 시대의 징표를 모르는 사제가 있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기도에 게으른 사제가 있다면, 행동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복음의 꽃은 피기 어려울 겁니다. 새 사제들이 가는 새로운 임지에서 복음의 꽃이 활짝 피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서 성령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만나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제와 교우가 만나서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꽃피고, 희망이 열매 맺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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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힘>
-기도, 회개, 믿음-
오늘은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루치아, 아녜스, 체칠리아와 더불어 교회의 네 동정 순교자입니다. ‘선하다’라는 아가타 이름 뜻대로 젊은 나이에 참 선하게 살며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성녀입니다. 우리를 감동케 하는,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점검하게 되는 순교자들의 믿음입니다.
“착한 스승이신 주 예수님, 당신은 내가 박해자의 고통을 이기게 하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주여, 내가 당신의 불멸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소서. 아멘.”(성모의 노래 후렴).
바로 동정 순교자 아가타가 순교시 바친, 순교 성녀 아가타의 믿음을 반영하는 기도문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기도와 더불어 회개요 믿음의 은총을 선사받습니다.
오늘 제1독서 다윗이 믿음의 모범입니다. 어제는 압살롬 아들의 죽음에 목놓아 울었던 다윗이 또 죄를 짓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즉각적인 회개에 있습니다. 인구조사를 한 다음 양심의 가책을 느껴 기도하며 회개합니다. 왜 인구 조사가 죄입니까? 해설판 공동 번역 성서는 다음처럼 설명합니다.
‘인구 조사는 다윗의 야심을 입증한다. 그 조사로 세금을 바치는 주민의 등록 대장을 만들 수 있고(경제적 착취), 한편으로는 전쟁을 치를 능력이 있는 남자들을 징집할 수 있었다.(정치적 지배) 이 두가지 사항은 그 자체로 비방을 받아 마땅하다. 권위가 스스로를 절대화하고 자신에게 전적인 신뢰를 기울일 때 그런 짓을 하게 된다.’
다윗은 순간 이런 야심으로 인해 하느님을 잊었으니 바로 믿음 부족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신속히 기도하며 회개합니다.
“주님,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무지의 어리석음이야말로 진정 죄이자 병이자 악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은 참된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죄는 용서 받았지만 죄의 보속은 뒤따르고 그 결과 죽어가는 죄없는 백성을 보자 재차 죄를 고백하며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다윗의 모습도 감동입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을 쳐 주십시오.”
참으로 다윗에게 배워야 할 점이 이런 기도와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불통에서 소통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다윗이 비록 반복하여 죄를 짓고 회개하지만 하느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에 있는지 알게 됩니다. 다음 시편 화답송은 그대로 다윗의 심정을 반영합니다. 고백성사의 은총을 체험한 이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시편32,1-2)
무죄한 성인이 아니라 회개한 성인입니다. 죄가 없어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회개할 때 마음의 순수와 겸손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은총’에 ‘마음의 순수와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에 놀랐지만 곧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해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집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말씀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선입견, 편견으로 인해 가까이 있는 형제들의 진가를 인정하지 못하는 일도 비일비재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믿음 부족을 반영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하여 예수님은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합니다. 참으로 예수님께 대한 선입견과 편견과 더불어 질투심, 열등감도 작용했음을 봅니다.
우리 안에 내재한 ‘선입견, 편견, 질투심, 열등감, 혐오, 배제, 증오’같은 것이 진짜 유해한 영적 바이러스들입니다. 이에 대한 유일한 대책은 참된 믿음뿐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의 은총만이 이런 유해한 영적 바이러스들을 박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화되면 여지없이 스며드는 이런 나쁜 영적 바이러스들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달인, 믿음의 대가 예수님이십니다. 고향 사람들의 냉대와 무시, 배척에 개의치 않고 곧장 일어나 새롭게 본연의 사명에 충실한 오늘 복음의 마지막 예수님의 모습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시고 우리 안에 내재한 온갖 유해한 영적 바이러스들을 말끔히 없애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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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
사랑하면 보입니다. 선한 것이 보이고, 부족한 허물을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보입니다. 꼬투리 잡을 허물이 보입니다. 문제만이 보입니다. 편견과 불신이 있으면 볼 것을 보지 못합니다.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모든 것 안에서 선한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능력을 얻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 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판단력과 방향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 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직업이 대수롭지 않은 목수라는 것,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자랐다는 것, 즉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것,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자기들보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에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 마음이 비딱하면 밖으로 나오는 것도 비딱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고향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시기 질투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고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잘못된 선입관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은총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어진 결과물에 매이지 않고 은총을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이것이 걸어야 할 걸음이다.', '이것이 길이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점을 쳐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했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바꾸지 않는 것, 내 마음대로, 닫힌 내 마음으로 내가 들은 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고집은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죄! '아버지, 어떤 것이 길입니까?' 성령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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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과 함께 '놀라움'을 체험합니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마르 6,2)
고향 나자렛에 가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고향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예수님의 출신과 과거를 속속들이 아는 그들로서는 예수님이 특출한 가문도, 별다른 배움도 없는 존재인데 하느님의 지혜를 풀어주니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그런데 그들의 놀라움은 못마땅함으로 흐릅니다. 사실 놀라움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예상치 못했던 경이로운 순간을 만났을 때 솟아나는 순수하고 건강한 반응으로,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는 중립적 가치를 지닙니다.
이 놀라움이 경탄과 찬미, 감사로 흘러 흐뭇하고 대견하고 보람있는 긍정적 감정을 유발하거나, 아니면 선입견과 편견, 질투로 흘러 불신이 더 팽배해지거나 둘 중 하나를 취하면서 나름의 가치를 획득할 겁니다. 오늘 나자렛 주민들은 후자를 택했지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마르 6,6)
예수님도 놀라십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실망하거나 분노하신 건 아니지요. 그저 놀라셨습니다. 하느님의 경이로운 은총 앞에서 이토록 잽싸게 어둠으로 돌아서는 고향 사람들의 완고함에 놀라신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니 기적도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체험한 이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구원의 원인이고 동력이라고 누차 밝히셨지요. 믿지 않는 이들 앞에서 펼쳐지는 기적은 서커스나 마술 등 쇼에 불과할 뿐 하느님께 올리는 진정한 경탄과 감사를 낳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성왕 다윗의 또다른 죄를 마주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2사무 24,2)
인구 조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행정인데 왜 그것이 죄가 될까요? 이스라엘은 왕정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신정 체제, 곧 하느님의 뜻을 정치에 반영하는 독특한 혼합 구조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 사제의 역할이 중요했지요.
숫자를 파악하는 것은 하느님 현존과 그분 능력에 더 이상 놀라지 않겠다는 뜻도 됩니다. 백성의 수는 곧 병력이니, 이스라엘의 힘은 더 이상 이 백성과 동행하시는 하느님의 개입이 아니라, 백성의 수와 전술과 전투 능력에 달리게 되지요.
놀라기를 거부하고 계산과 예상에 안주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은 변두리로 밀려나 버립니다. 적정한 오차 범위 안에서 기쁠 일도 실망할 일도 없는 데이터 의존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다윗의 죄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에 대해 하느님께 경탄과 경외 드리기를 멈추고 그분을 소외시키는 데 있습니다.
아직 영혼이 완고하고 무디어지지 않았다면 삶 속에는 놀랄 일이 참 많습니다. 사실 삶은 영혼 안으로 신선하게 밀려드는 새로움의 공기를 한껏 들여마시면서 매순간 새로이 하느님께 놀라고 그분 현존에 놀라는 여정의 연속입니다. 경박한 호들갑이 아니라 충만한 설렘입니다. 놀라기를 멈추는 순간 영혼은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박제가 되고 화석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공동번역 시편 139,14)
사랑하는 벗님! 오늘 하루, 우리 각자의 생명과 존재에 놀라고,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님의 가난함에 놀라고, 그분이 이루신 속량의 부요함에 놀라며 감사하고 찬미드리는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놀라움과 경탄의 삶은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와 맞닥게 하고 관상에로 이끌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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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우리 삶의 특별한 목적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든다
무의미함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 병들게 하는 것처럼 삶의 의미와 목적이 회복되면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버니 시겔(Burnie Siegel) 박사는 자신이 치료하는 암환자 가운데 누가 차도가 있을지 미리 알 수 있었다.
환자에게 “백 살까지 살기를 원하나요?”라고 질문했을 때 삶에 대하여 깊은 의미를 가진 사람은 “네.”라고 대답했고, 그들 대부분은 병을 극복하고 살아남았다. 누군가가 “행복의 궁극적 목표는 매일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하며 주어진 삶에 가치와 의미를 더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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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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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마르 6,2)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고.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자신들의 ‘무지’,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요, 동시에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우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
이처럼, 그들은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렇습니다. 잘못된 믿음, 곧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믿게 되면 참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금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의 표현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줍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안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동시에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고, 완고함은 불신의 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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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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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아는 체>
"저 사람이 어디서 ~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는게 아는것이 아니며
눈으로 다봤다고 장담말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알고 있다는 착각을 버려라.
그 많은 시간 그 많은 만남
그 많은 수고 그 많은 고독
그 많은 눈물 그 많은 변화
너는 알지 못한다
늘 붙어다니는
네 눈, 코, 입, 손, 발,
몸의 움직임
생각의 근원도 다 모르면서
상대를 아는 것처럼 단정짓고
판단하지 말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만큼
유익함을 얻지 못하게 된다.
"확대경을 들이대고 상대가
좋게 변한 모습을 발견하고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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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 4)
모질고 질긴
고정관념의
폭력입니다.
늘 어느쪽이든
치우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어리석은
우리들 삶입니다.
고정관념의 크기가
자아의 크기입니다.
신앙은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에 갇힌
우리들의 무지를
깨우십니다.
어제의 그 사람은
오늘의 그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가능성을
믿습니다.
믿음은
가능성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닌
활짝 열어두는
것입니다.
피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고향 방문처럼
우리의 첫 시작에서
하느님을 향한
첫 마음을
새롭게하는 은총의
시간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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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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