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앙골 교우촌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 첫 번째 편지를 쓴 곳이다. 최양업 신부는 천신만고 끝에 1849년 말 귀국하여 전국 곳곳의 신자들을 찾아 열 달 동안 고된 순방을 마치고, 이곳의 신자 집에서 귀국 뒤 활동 보고서로 첫 편지를 썼다.
들어가는 진입로가 외길이며, 걸어가도 되지만 주변에 주차 할 곳이 마땅치 않아 끝까지 차를 타고 올라가야만 했다.
한 여름의 장마철이라 나뭇잎들과 각종 풀입들이 영양분을 충분히 먹어서인지 푸르름과 싱싱함이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제대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기리는 비석인데 엄청크다.앞면과 측면
그 옛날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활동 보고서를 쓴 집이다. 지붕위의 잡초가 무성하다. 나이드신 분이 우리를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맞이하신다. 하루에도 몇 팀이 와서 귀찮은 듯 우리를 완전 이방인 취급하시는데 삽살개만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홀로 순례객이었지만, 자매님 세 분을 만났다. 나는 제대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집주인이 차를 엉성하게 주차했다고 핀잔을 주신다. 기도 하다 말고 차를 빼야해서 차안에서 마저 기도하고 내려왔다. 깊은 산 속에서 혼자 지내시다 보면 사람이 그리울 듯 할텐데 오히려 사람들을 귀찮아 하시는 걸 보니 기도에 전념하지 못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해본다.
쥔장이 뭐라 하든 집 만큼은 고요하다. 세찬 비를 흠뻑 맞아서인지 촉촉함과, 말없는 평안함을 준다.
2002년도에 토지 후원을 받고 추모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고려 초기(918~943) 우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나 이렇다 할만한 고적 하나 없고 다만 이곳 도앙골에서 천주교를 믿으면서 살으시다 다섯 분이 순교 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자료를 찾아 볼 수 있어서 감히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추모비를 세웁니다. 의 내용이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첫 번째 펴지에서 도앙골 같은 산골에 사는 신자들과 근처 산골에 사는 신자들은 평야 지대의 신자들보다 훨씬 열심히 산다고 설명하였다. 도앙골과 산넘어 삽티골에서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도앙골에서 최양업 신부를 모셨던 신자들의 움막은 떼와 흙과 갈대로 벽을 친 '뗏집'이었다. 하부 내포 성지는 도앙골에 뗏집을 복원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