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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문학동네 신인상
비평 / 이현아
그곳에서 나는 연극배우였다. 이 연극에는 미친 사람들만 출연했고 그들은 돈이나 죽음이나 직업이나 생활 같은 것 모두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울거나 웃었고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하였으며, 그러므로 이 연극에는 극단적으로 화합만이 존재하거나 갈등만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 연극에는 대본이 있다.
이 연극에서 어떤 미친 사람은 단 한 권의 책만 읽었다. 그 책은 책자처럼 아주 얇았고 책 읽는 사람은 책을 다 읽으면 거꾸로 뒤집어서 다시 읽었다. 그는 책을 읽다가 가끔 노트에 뭐라고 끄적이기도 하였는데 절대 자기 노트를 보여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면 노트의 페이지를 찢어서 먹어버렸다.
극의 중반부에서 나는 미친 사람들과 춤을 춘다. 이것은 대본에 있는 내용이고 음악이나 인디언 분장이나 북소리 같은 것은 없다.
(미친 사람처럼 자유롭게 춤을 추시오.)
다들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고 누군가는 바닥을 굴렀다. 넘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 춤을 추다가 나를 때렸고 나는 분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개 많은 관객은 우리의 율동이 만들어내는 거대하고도 불규칙한 운동에 집중하였으나
그날, 그 사람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오랫동안 응시하다가 시선을 거두고 들고 온 수첩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부터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갑자기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소리를 지르고 가슴을 주무르고 문질러도 나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것 같았고
오로지 수치심만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연극배우 일을 그만두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몇 번이고 미친 사람이 되고자 집에서도 바닥을 기고 머리를 쥐어뜯고 그것을 먹어보기도 하였지만 내가 연기하는 미친 사람은 나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역류성식도염에 걸린 환자였다.
그러나 관객을 연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 옆에 앉은 누군가 작게 웃으면 나도 작게 웃었고, 사람들이 크게 웃으면 나도 크게 웃었다. 눈물을 흘리면 조용히 했다. 지루한 표정을 지으면 눈을 가늘게 떴다. 연극이 끝나면 극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면 되었고 누군가 감상을 물으면 "옛날 생각이 나더군"이라거나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 대답하면 되었다.
동조할 수 없는 관객도 있다. 지금 내 옆에 앉은 사람은 감동하지도 웃지도 따분해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장면은 보지도 않고
리플릿만 읽어대거나 고요하게 무대의 배우들을 관찰하고 노트를 꺼내 무언가 적고만 있다.
내가 노트를 슬쩍 훔쳐보려고 하자 그는 노트를 찢었고
그것을 구겨서 한입에 넣었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진 나를 보고 종이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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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경위
2024년 문학동네신인상 시 부문에는총916명이 응모했다. 김상혁, 박상수, 안미옥 세 명의 심사위원이 한달 동안 총 5,976편의 작품을 나눠 읽으며 예심을 진행했고 응모자의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경우에는 해당 작품을 다른 심사위원에게 재배정했다. 이 과정을 거쳐 각 심사위원이 5명 내외의 작품을 추천했다. 본심에 오른 16명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김나단, [휴거] 외 4편
김도현, [징후와 세기] 외 4편
김미라, [화재경보] 외4편
김민성, [다이브J 외 4편
김보배, [유성우가 키링, 하고 떨어질 때] 외 4편
김사라, [몽 소리를 하는 거니] 외 4편
김윤리, [곳간 길들이기] 외 6편
김태훈, [기대와 대기] 외 4편
김하은, [모로반사] 외 9편
김해서, [구상도 구상도] 외 7편
모연지, [새광장] 외 4편
손승연, [플로깅] 외 4편
윤세희, [미니멀 라이프] 외 4편
이현아, [비평] 외 4편
진수정, [목줄과 냉탕] 외 5편
하늘빛, [이해] 외 4편
본심은 다시 한 달 뒤, 장마 속 폭염이 한창인 7월 말에 열렸다. 인상적이었던 작품들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다보니 각자가 생각하는 매력적인 부분이 겹치면서도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심시위원들은 중점적으로 논의하고 싶은 작품을 몇 편씩 추천했고 [곳간 길들이기] 외 6편, [비평] 외 4편, [이해] 외 4편이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각 작품의 장단점에 대해 추가로 의견을 교환한 끝에 [비평] 외4편, [이해] 외 4편이 최종 논의 대상으로 추려졌다. 논의 결과, 독특한 비실감의 감각에 기반하여 안정적이면서도 담담하게 발화하는 작품보다는 적극적인 에너지와 묘한 서사적 매력을 가진 작품 쪽으로 지지가 모아졌다. 혹여나 전자가 지닌 특별한 가능성이 더 없을지 혹은 후자가 지닌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없을지 검토하는 시간을 재차 가졌으나 거듭된 독해를 견디는 후자의 밀도가 만만치 않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고 마침내 [비평] 외4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풀어 쓰니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 그동안의 문학동네신인상 시 부문 중 가장 짧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심사위원 : 김상혁 박상수 안미옥
당선 소감 발췌
제가 불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어서 그랬어요. 어쩔 땐 남들이 나를 사랑하면 나도 사랑이라는 걸 가질 수 있을 줄 알았죠. 그래서 시를 썼어요. (.....)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사람들이 저를 사랑하지 않더군요. 저를 좋아하기만 하더군요. 그게 참 슬폈어요. 그러다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주려고 시를 썼어요. 김승일 선생님의 가르침이었어요. (....) 도하야, 나 너한테 주려고 쓴 시로 당선됐어. 너무 늦어서 미안해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 못해줘서 미안해.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썼어. 영원히 함께 살자고 말하고 싶어서 썼어. 차도하 정말 끔찍하게 보고 싶고 죽을 만큼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 이수명 선생님, 신해욱 선생님, 서대경 선생님 좋은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시를 긍정적으로 읽어주신 심사위원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이현아 / 1999년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원 예술학과에 재학 중. 2024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당선.
ㅡ계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