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빌립보서 3:10-11 2024/4/7 부활절 제2주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우리는 예수를 바라봅니다.’라는 찬양으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숙적(宿敵)이다. 오늘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값싼 은혜란 투매(投賣)상품인 은혜, 헐값에 팔리는 용서, 헐값에 팔리는 위로, 헐값에 팔리는 성찬,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무분별한 손으로 거침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 대가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의미한다.”
본회퍼는 말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비극, 교회의 아픔은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값싼 은혜만을 바라보는 것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의 값을 지불했던 희생(대속)의 십자가, 그 고난과 죽음에, 어느 누구도 자원하여 기쁨으로 참여하지 않는 다는 것, 이것이 교회의 아픔이요 이 시대의 비극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자부하는 목회자나 평신도 지도자들조차 십자가의 길을 한사코 외면하려 합니다. 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은 이제 부담스러운 찬양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가사들 때문일 것입니다
1.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2.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 없이 드리리다
3.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 가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그 시작은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기인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의 왜곡이지요.
예수님을 바라보는 첫 번째 시선
유대 지도자들(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장로들, 율법학자들)부터 보겠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눈엣 가시 곧 제거해야할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신앙의 가치들을 모두 뒤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장로의 유전(미쉬나와 미드라쉬)에 따라 행하는 경건 생활, 자선 생활, 기도 생활, 금식 생활, 이 모든 것들을 예수님이 뒤흔들었기 때문입니다.(마6)
또한,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지요.
금식하는 날 금식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무법적 행동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제거해야할 존재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유대 지도자들의 시선이 증오와 폭력으로 가득하게 된 것은 이 말씀들 때문이었습니다.
막7: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7 사람의 계명(미쉬나/미드라쉬/탈무드)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미쉬나/미드라쉬/탈무드)을 지키느니라
그러니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 유대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내버려둘 리 없겠지요.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마26: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26: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26: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26: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이것이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져온 유대인들의 시선이었습니다.
예수, 제거해야할 대상이지요.
두 번째 예수님을 바라보는 총독 빌라도의 시선은 회피, 무책임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할 만한 죄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절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놓아주려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군중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놀란 빌라도가 다시 군중에게 묻습니다.
마27: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결국 빌라도는 총독, 사람을 살리는 권세를 부여받고도 무책임하고 비겁한 결정을 내립니다.
마27: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손을 씻은 빌라도, 과연 죄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 2000년 동안 교회는 빌라도의 죄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것이 무책임하고 비겁한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시선이었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을 바라보는 군중들의 시선은 어둠이었습니다.
‘요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는 말씀처럼 옳고 그름을 깨닫지 못하는 어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이렇게 소리쳤던 것입니다.
마27: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7: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네 번째 로마 병사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희롱(모욕)이었습니다.
판결이 끝나자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발가벗깁니다.
그런 후 주홍색 걸침 옷을 걸치게 하고,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한 후, 이렇게 희롱하지요.
마27: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7: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27: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다섯 번째 구레네 사람 시몬의 시선은 누군가를 대신하는 희생이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 그는 유월절을 좀 더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이 지어야할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그 희생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엄청난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자신과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아들에게까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택하심을 입은 축복의 가정, 구레네 가정을 잊지 않고, 그 가정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로마서를 마무리 했던 것입니다.
롬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여섯 번째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행인들의 시선은 불신앙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도, 그들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합니다.
마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27: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곱 번째 시선, 누가 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의 시선입니다.
그들의 시선 역시 하나님 아들에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복음서마다 기록된 내용이 좀 다르지만 누가복음과 달리 마태는 그 날 강도의 시선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27: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27: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27: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여덟 번째 예수님을 끝까지 바라 본 시선은 여자들의 연민이었습니다.
낮 열두 시가 되자 예수님은 고통 속에서 부르짖습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때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킨 사람들이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였습니다. 결국 끝까지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놓지 않았던 여인들에게 우리 주님은 부활의 첫 목격자라는 선물을 안겨 주십니다.
아홉 번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본 유일한 시선이 있습니다.
사형 집행관이었던 백부장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자 감추어진 진실을 선포하듯 이렇게 말합니다.
마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지막 열 번째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이 보여준 시선은 경의, 존경이었습니다.
마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27: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27: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희생의 현장에 함께 할 수 없었던 바울은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련해서 이런 언급을 합니다.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고) 싶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품게 됩니다.
왜 하필 바울은 예수님을 바라 볼 때 ‘그의 죽으심’이었을까?
성령으로 말미암은 탄생도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들도 있었는데, 왜 하필 ‘예수님의 죽으심’에 시선을 고정했던 것일까요?
세 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보여준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셋째 11절입니다.
3:11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바울처럼 십자가 곧 예수님의 죽으심을 부활절 7주 동안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첫째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보여준 부활의 능력이 오늘 우리의 능력이 됩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될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