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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여행]몽골의 마지막 국왕 복드-칸의 어의 이태준 기념공원👍.............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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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여행]몽골의 마지막 국왕 복드-칸의 어의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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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2000㎞ 떨어진 이역만리 사는 몽골 제국 사람들이 우리 한국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K팝의 영향도 있지
만 오늘 방문한 이 공원의 주인공인 이 사람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울란바토르 중심 몽골의 성
산이라 불리는 복그드칸산 기슭 자이산 언덕에 위치한 곳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자이승 전망대와 승전탑
이 있고, 바로 아래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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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몽골 정부가 제공한 6천600㎡[2.000평]의 남짓 터에 이 지사의 모교 격인 연세의료원이 2001년 7월 기념
공원이 조성 되면서 추모비, 가묘,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2010년에는 [주]몽골 한국대사관 주도로 기념 공원 내
목조로 된 기념관을 세웠다. 하지만 목조로 지은 기념관이 약 20㎡(6평) 규모로 협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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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열사 기념공원 가지전 시내에 있는 칭기즈칸의 실크로드 무역 상인 형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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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가 방문한 시기에 한창 공사 중이었다. 기존의 낡고 비좁았던 기념관인 목조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큰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과 현대식 화장실이 들어 선 것이다. 우리나라 국가보훈 부는 총사업비 19억6000만원을 들
여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이태준기념관을 24년 올해 말 완공을 목표로 한창 마무리 공사에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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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는 공원 한쪽에 작은 게르를 지어놓고 그곳에 선생에 관련된 유물과 자료들을 임시 전시를 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현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랑자는 공원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유난히도 노랗게 핀 민들레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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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병원 의학교 2회 졸업생인 이태준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 항일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며, 31살 때 몽골
로 가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열어 독립투사들의 비밀 연락처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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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공원을 돌아보는 내내 무거운 마음이었다.
사실 유랑자는 이 공원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이태준이라는 사람을 몰랐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몽골인 들은 자
기 민족을 絶滅[절멸]의 문턱에서 구해주었던 大岩[대암] 李泰俊,[이태준, 1883~1921]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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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존경 스러웠으면, 몽골 왕들의 무덤이 있는 산 자락!. 몽골인 들이 민족의 聖山[성산]이라 부르며 섬기는
“보그드칸”산 언덕 양지바른 곳에 그를 묻어 주었을까. 그를 생각하면 가슴 뭉클해지며 숙연해진다. 머나먼 몽골
에서도 그 옛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분이 계셨다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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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 이태준 열사 기념비는 대암 이태준 열사가 몽골의 마지막 황제 복드(Bogd)칸 8세의 주치의로서 울란바토
르에 同義醫局[동의의국]이란 병원을 개업하고 당시 몽골 전체 국민의 70~80%가 감염되어 있던 성병[매독]을 현
대적인 의술로 치료하면서 헌신적인 봉사를 했던 한국인이다. 이태준 열사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자그마한 공
원에서 열심히 살다간 그를 기리며 난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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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엔 몰랐었지만 나이 들어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뒤늦게 우리의 역사공부는 역사와 근대사와 항일역사가
너무 부족했다고 느껴진다. 참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일이다. 중국의 압록 강변 광개토왕비를 보면서도 그랬고 고
구려 역사가 그렇고, 상해의 임시 정부 건물터가 그렇고, 일제 36년의 만행이 그렇고 등등…….
그동안의 해외 여행기들을 쓰면서 힘없는 민족의 서러움과 역사에 대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
서 많이 반성하고 공부하게 된 유랑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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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담 오늘의 주인공 대암 이태준 열사 과연 그는 누구일까,
이태준 선생은 경남 함안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후 김규식의 사촌여동생 김 은식을 만나 결혼하여 두 딸
을 낳았다. 이태준의 부인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사망하여 두 딸은 그의 동생[이태식]이 맡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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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몽골의 마지막 왕인 복드-칸 8세의 어의가 된 그는 1919년 7월 ‘에르데닌 오치르’라는 높은 등급의 훈
장도 받았다. 몽골 사회에서 두터운 신뢰를 쌓은 이태준은 한인사회당 지하당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자금 운송과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는 김규식에게 활동비를 대기도 했다. 또한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
해 우수한 폭탄 제조자인 마자르를 소개함으로써 의열단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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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는 의대를 졸업 한 후 고륜[울란바토르]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몽골에서는 의사로서 역할을 해 낸 사람
이었다. 요즘 지네들 밥그릇 챙기자고[자칭 지성인이라 일컬어지는 대학 교수들 까지] 죽어가는 환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똥개들보다도 더 못한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들처럼 우르릉대는 의새들과는 다른 새 세상의
사람 오리지널[original] 의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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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醫學[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그런 의사 선생님 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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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의료기관인 세브란스병원 의학교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의사가 된 6명중 한명이었던
김필순의 권유로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해 1911년 2회[28세]로 졸업한다. 이때 찍은 6인의 졸업사진이 이태준의
남아있는 유일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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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 대다수가 감염된 花柳病·[화류병,성병)을 치료하면서 몽골인 들에게 ‘까우리(고려) 의사’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이라고 불렸다. 몽골 마지막 황제였던 복드-칸의 주치의가 됐다. 1919년 몽골로부터 귀중한 금강
석이라는 뜻을 가진 ‘에르데니 인 오치르’라는 명칭의 최고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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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에게 큰 영향을 준 다른 한 사람은 김필순의 의형제인 島山[도산] 안창호다. 안창호의 권유로 항일비밀결사
신민회의 자매단체로 최남선이 조직한 청년학우회에 가입하면서 이태준은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1914년 이태준은 김규식의 권유로 아시아대륙 내부에 위치해 일본의 영향력에서 떨어져 있는 몽골의 고륜[울란
바토르]으로 떠난다. 그때나이 31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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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서 안정된 삶[요즘 한국은 기본 3~4억]을 다시 멀리하고 새로운 독립운동거점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된 것
이다. 몽골로 간 그는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열어 독립투사들의 비밀 연락처 역할을 담당했다. 이태준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머나먼 몽골 땅에 정착해 의사로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두 가지 크나 큰 업적의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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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는 게르의 벽면을 따라서 이태준 선생의 업적에 대한 사진 전시물이라 설명문이 있었고 중앙에 옷방의
아일랜드처럼 작은 전시대가 있어서 전시물 몇 점을 볼 수 있었다. 기념공원 내부에 있는 이태준 선생의 묘는 가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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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시 몽골 전체 국민의 70~80%가 감염되어 있던 성병을 현대적인 의술로 치료하면서 그의 헌신적인 봉사
는 몽골 국민들로부터 稱頌[칭송]을 받는다. 이를 본 몽골의 마지막 국왕[복드-칸 8세]은 자신의 주치의로 임명한다.
이로서 국왕의 어의 5인 중 유일한 외국인 의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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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중병을 앓던 국왕을 치료하면서 1917년 몽골로부터 귀중한 ‘금강석’이라는 뜻을 가진 ‘에르데니-인 오치르’
라는 외국인 최고훈장을 받게 됐는데 이 사실은 상해의 독립신문에도 보도된 바 있다. 이태준은 몽골사회에서 의
사로서 신뢰와 명성을 얻는 한편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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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 들은 우리나라를 ‘솔롱고스’라고 부른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이다. 이태
준은 가히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神人[신인]과도 같았을 것이다. 몽골의 칸이 그에게 내린 훈장의 이름처럼 ‘귀중
한 금강석’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의사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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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의 애국지사들과 연결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고, ‘동의의국’은 러시아와 북경·상해를 연결하는 몽골의
항일운동의 거점이자 연락사무소 역할을 하게 된다. 동시에 독립운동 인사들이 왕래하면서 숙식하고 치료받고
충전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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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태준은 몽골인 대다수가 감염된 화류병(花柳病·성병)을 치료하면서 몽골인 들에게 ‘까우리(고려)의사’ ‘극
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이라고 불릴 정도로 몽골 국민들은 국왕 다음으로 恭敬[공경]하며 우러러 讚歎[찬탄]하
게 된다. 알다시피 매독은 주로 성관계를 매개로 전파되는 성병으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에 기생한다는 점에서
매독은 참으로 근절하기 어려운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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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2000㎞ 떨어진 이역만리에서 대암 이태준은 독립자금 금괴 4만 루불 운송과정에서 러시아 백군에 체
포된 후 살해되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한다.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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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빈센트 반고흐, 악성 베토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철학자 니체까지. 헤아리기 힘든 많은 사람들이 매독으
로 고통 받다가 떠났다. 프랑스 작가 모파상도 그중 하나였는데 그는 매독의 고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 뇌
는 지금 점점 물렁물렁해지고 있습니다. -밤이면 뇌가 끈적끈적한 액체 상태로 변해서 제 입과 코를 통해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제 말은,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미쳐가고 있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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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독 균은 온몸을 망가뜨리고 종국에는 뇌까지 침투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무서운 병이다. 이렇게 무서운 매
독의 위세 앞에 당시 각국 정부는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데 매독 때문에 한 나라가 통째로 없어질 뻔한 사례가 있
었다. 바로 20세기 초반 몽골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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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2월 몽골에서 벌어진 홍백 전쟁 때 일본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러시아 백군 운게른 시테른베르
크[반공주의자]가 몽골을 점령했다. 이때 대암 이태준은 몽골에서 항일운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피하지
않고 남았다.
그에겐 남은 임무가 있었다. 이태준은 독립자금으로 금괴 4만 루블 운송과정에서 잡혔고 러시아 백군의 공산주의
자 숙청정책의 일환으로 잡혀 39세의 나이로 처형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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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거의 망할 즈음이 되어서야 몽골에는 독립의 기운이 돌았는데 청나라나 그 뒤를 이은 군벌들, 그리고 중
국의 권력자들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끼어 있던 몽골의 독립을 절대로 반기지 않았다. 왜? 칭기즈칸의 악몽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나아가 그들은 아예 몽골족의 소멸을 노렸다는 설도 있다. 그 수단으로 동원된 게 매독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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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에는 몽골족 마을 우물에 매독 균을 퍼뜨리기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중앙일보) 2015년 1월24일].”
또 초야권[결혼하기 전 여자와 첫날밤을 보낼 권리]를 지녔던 라마교 승려들이 매독에 걸리게끔 유도해서 매독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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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선생은 1921년 몽골에 진주한 러시아 세력에 피살되며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지사의 공적을 기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2017년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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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몽골 인구는 급격하게 줄었고 매독 환자가 인구의 7~8할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때 몽골에 나타난 구세주
가 있었는데. 바로 한국인 의사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 의인 이태준(1883~1921)이었다. 그는 마지막 꺼져
가는 몽골제국의 국민들에게 희망의 횃불을 들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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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1921년 2월 러시아에서 벌어진 홍, 백 전쟁 때 일본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러시아 백위파 대
장 운게른 시테른베르크[반공주의자]가 몽골을 점령했다. 이때 이태준은 몽골에서 항일운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피하지 않고 남았다. 그에겐 남은 임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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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은 몽골 정부가 제공한 6천600㎡[2.000평]의 터에 2001년 7월 조성됐으며 공원엔
기념관, 추모비, 가묘, 비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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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은 독립자금으로 금괴 4만 루블 운송과정에서 잡혔고 러시아 백군의 공산주의자 숙청정책의 일환으로 잡
혀 1921년 2월초 38세의 나이로 처형당하셨다. 이때 4만 루블은 이태준이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일당에게 잡혀
피살되면서 분실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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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이 피살된 지 9개월 후인 1921년 11월 이르쿠츠크로 가던 중 고륜[울란바토르]을 방문했던 여운형은 이태
준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말하며 감회에 젖는다.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 사람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라고 이태준을 애도했다. 여운형의
여행기는 이태준의 묘가 있었던 사실과 그 위치를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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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연년 이르쿠츠크로 가던 여운형은 몽골에 체류하면서 자이승전승탑 인근 구릉에 있었던 이태준의 묘소를
찾아 애도하고 기록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묘소의 행방을 알 수 없다. 현재 기념공원 내에 있는 묘소는
가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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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안타깝게도 묘지는 도시개발 와중에 파괴돼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그 이름은 몽골의 역사에 지금도 굵
직하게 남아 있다. 현재 기념공원 묘소는 가묘다. 이태준을 격동시켰던 신해혁명의 주역 쑨원[손문]은 이런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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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 의사는 사람을 고치며,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이 셋을 모두 해낸 이태준은 우리에게, 또 몽골 사람들에게 어떤 의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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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런 결과의 모~두가 오늘날 몽골인 들이 우리 한국 사람들을 형제국의 형제라 이야기 하면서 엄지 척을 하는
것도 다 이태준 선생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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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교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함께 몽골 울란바토르 시내의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에 이태준 선생에 대한
안내서 1만부를 한국어와 몽골어로 제작해 기증한다. "지난 13년간 송혜교와 함께 해외에 남아있는 대한민국 독
립운동 유적지에 한국어 안내서, 한글 간판, 부조작품 등을 지금까지 35곳에 기증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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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00여 년 전 낯선 이국땅에서 순국했지만 조국의 국권과 자유회복을 위해 젊음을 바쳐 헌신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그의 숨결은 우리 가운데 길이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문헌기록이나 자료는 거의 남
아있지 않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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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도 이태준의 이름은 몽골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고 한·몽골 친선의 상징이 되고 있으나 우리에게는 너
무 늦게 그 존재가 알려졌다. 정부는 1990년에 와서야 이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2017년 위패
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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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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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는 왜 의새들만 있고 의사는 없는 것일까? 요즘 지네들 밥그릇 챙기자고 죽어가는 환자들의 생명
을 담보로 강아지보다도 더 못한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의대 교수들)들처럼 우르릉대는 의새들과
는 다른 양심적인 세상의 오리지널[original] 의사는 없는걸까요?. 진정한 醫學[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의 정
신을 몸소 실천하는 그런 의사 선생님은 없는걸까요?
👍히포크라테스의 9가지 명언
1. 진정한 의사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
2. 지나친 모든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3.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건강이다.
4.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 된다.
5. 음식이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6. 우리 안에 있는 자연적인 힘이야말로 모든 병을 고치는 진정한 치료제이다.
7. 의술에 대한 사람이 있는 곳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
8. 누군가를 치료하기 전에 그를 병들게 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
9. 자유는 시간의 문제이다. 그러나 때로는 기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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