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문(石門)
조지훈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다인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시집 『풀잎 단장』, 1952)
[어휘풀이]
-도포 : 예전에, 통상 예복으로 입던 남자의 겉옷.
[작품해설]
이 시는 조지훈의 고향인 경북 영양 일월산 황씨 부인 사당에 전해지는 전설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 내용은 서정주의 「신부」와 매우 흡사하며 다음과 같다.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처녀는 그녀를 좋아하던 두 총각 중 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신혼 첫날밤 잠들기 전 화장실을 다녀오던 신랑은 신방 문에 비친 칼 그림자를 보고 놀라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 칼 그림자는 다름 아닌 마당의 대나무 그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신랑은 그것을 연적(戀敵)이 복수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고 숨어든 것이라고 오해한 것이었다. 신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족두리도 벗지 못한 채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깊은 원한을 안고 죽었고, 그녀의 시신은 첫날밤 그대로 놓여 있었다. 오랜 후에 이 사실을 안 신랑은 잘못을 뉘우치고 신부의 시신을 일월산 부인당에 모신 후 사당을 지어 그녀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이 시는 5연으로 이루어진 산문시로서 의미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1~3연으로 풍상에 시달려온 돌문의 모습을 통해 천년의 한을 간직한 신부의 서러움을 노래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4~5연으로 미래에 있을지 모를 ‘당신’과의 해후(邂逅)를 그리고 있다.
1연에서는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인 ‘돌문’아 제시되고 있다. 검푸른 이끼가 내려앉도록 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오로지 ‘당신’의 따스한 손끝만을 기다리고 있는 돌문에게서 신부인 화자의 지극한 사랑과 간절한 기다림을 엿볼 수 있다. 2연에서는 ‘꺼지지 않을 촛불’을 통해 ‘천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신부의 슬픈 영혼을 보여 준다.
3연에서는 ‘눈물과 한숨’으로 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돌문의 애틋한 모습을 ‘어찌합니까?’라는 체념섞인 어조로 나타내고 있다. 4연에서는 지금까지의 격앙된 분위기를 일신하고 강한 어조로 절대의 의지를 드러낸다. ‘당신’의 손길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순간에야 한 줌 티끌로 사라질 것이라는 서러운 비원을 말하는 한편, 그렇게 사라질 자신의 존재를 눈물 없이는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라며 ‘당신’에 대한 원망을 감추지 않는다.
5연에서는 또다시 천 년을 비바람에 낡아가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돌문을 통해 원한이 사무친 신부의 기다림을 노래한다. 그러므로 1연에서의 돌문이 ‘기다림의 문’이라면, 5연에서의 돌문은 ‘원한의 문’으로 신부의 간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열리지 않는 돌문으로 비유하고 있다.
[작가소개]
조지훈(趙芝薰)
본명 : 조동탁
1920년 경상북도 영양 출생
1939년 『문장』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 오대산 월정사 불교 전문 강원 강사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 협회 조직
1947년 고려대학교 교수
1950년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
1968년 한국시인협회장
1968년 사망
시집 : 『청록집』(공동시집 1946), 『풀잎 단장(斷章)』(1952), 『조지훈 시선』(1956), 『역사 앞에서』(1959), 『여운(餘韻)』(1964), 『조지훈 전집』(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