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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4 장 본 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본 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자.
우리는 세상의 어둡고 불완전한 현실만 보지 말고 천상의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며 또 천국의 영광을 묵상하며 그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
온 우주의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엄위하시고 아름다우시며 천국의 영광도 그러하다.
* 고후 4: 18 -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 골 3: 2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둘째,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하자.
우리는 장차 의의 흰옷, 즉 죄성이 전혀 없는 영광스런 몸과 금면류관을 쓸 것을 감히 소망한다.
이것이 성도가 천국에서 누릴 복된 영광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단장할 모습이다.
* 빌 3: 20-21 –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 롬 8: 18 -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셋째, 우리는 네 생물들의 덕을 소유하자.
사자 같은 용맹, 송아지 같은 온순함과 충성, 사람의 지혜, 독수리 같은 쇠하지 않는 생명력과 민첩함을 배우기를 원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종들과 교회 직분자들과 성도들에게 오늘날에도 필요한 덕이다.
묵상 :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종이 되자.
하나님의 보좌( 박 조준 목사) 저자와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일곱 시간에 걸쳐 부활하신 주님께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사도 요한이 신령한 눈으로 하늘의 광경을 본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세 가지 하늘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점령하고 있는, 대기권 안의 하늘이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sky’라고 합니다. 둘째 하늘은 대기권 밖의 별들이 빛나고 있는 하늘로 우리가 흔히 우주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space’라고 합니다. 셋째 하늘은 본문 1절에서 사도 요한이 본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이것은 욥기 26장 7절에서 “비어 있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하늘은 별들로 가득 차 있지만 북극성이 있는 저 너머는 빈 곳으로 생각됩니다. 요사이 우주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많은 연구를 해서 우주 정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과학으로 우주를 정복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셋째 하늘은 우주 과학으로 정복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셋째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영어로 이것을 ‘heaven’이라고 합니다.
본문 1절 하반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환난 이전에 하나님의 교회가 들림받을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고 다른 여러 곳에 이것을 뒷받침해 줄 증거가 있습니다. 그 동안 생각한 2장과 3장은 교회 역사의 일곱 단계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4장과 5장은 하늘에서 본 환상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6장은 환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일원이었던 사도 요한은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이 세상 밖으로 들림받는 교회의 상징으로 적합한 분이고, 이것은 주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대로입니다.
계시록 3장 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여기는 교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서 대환난의 때에 교회는 이미 이 땅에 있지 않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계시록 3장까지는 교회에 대한 말씀이 열여섯 번이나 나오는데, 환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6장부터 18장까지는 교회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4장부터 18장까지 사용되고 있는 구약성경의 인용과 상징들은 모두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 1~2절의 사건들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4절과 같은 다른 성경 구절이 가르치고 있는 들림받는 사건과 비슷합니다. 이 네 가지를 종합해서 볼 때 이 구절들이 가리키고 있는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 4장의 말씀이 교회가 들림받는 사실에 대해서 밝히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여기 시간적 순서로 보아서 교회 시대가 끝난 후에 환난이 오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들림받는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성경 중에 중심이 되는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입니다. 특별히 1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라고 했습니다. 여기 “끌어올린다”는 말은 헬라어를 번역한 것으로 말뜻 그대로 하면 도적이 상을 잡아채 가는 것처럼 잡는 것을 말합니다. “끌어올린다”는 말은 영어로 ‘rapture’라고 하는데 라틴어의 ‘raptus’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그 뜻은 “강제로 잡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언젠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그의 피로 값을 치르시고 사신 보물들인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가시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들림을 받을 때 믿는 사람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속해 있는 교파나 종교단체와 상관없이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삶 속에 영접해 들인 사람만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한 가지 기본 원리가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 인간에게 하늘 나라의 모습을 묘사하게 할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원시림 속에 사는 사람을 문명한 세계에 데려다 놓고 모든 것을 보여준 후 그의 동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게 할 때 생기는 문제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텔레비전이나 자동차나 비행기, 냉장고나 컴퓨터 같은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 하늘의 놀라운 일들을 설명해 주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많은 일들을 상징으로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이 상징들은 글을 쓴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배경을 알고 있을 때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나온 하늘 나라를 상징하는 말들은 구약에 나온 것들의 사본에 해당합니다.
계시록 4장은 “하나님의 보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본문 4장 처음 여섯 절 속에만도 여덟 번이나 나오고 있고, 4장과 5장에 걸쳐서 열여덟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고정된 곳으로 다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하늘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보좌 주위로,” “보좌 밖으로,” “보좌 앞에,” “보좌 한가운데”란 표현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온 우주 안에 중심이 되는 고정된 장소로 절대 변하지 않는 위치에 놓여져 있습니다. 별 가운데 북극성이 늘 같은 자리에서 빛나기 때문에 옛날 항해사들의 지표가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보좌도 모든 하늘의 움직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하심을 상징하는 곳이 됩니다.
우리는 4장 뒷부분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일곱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에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했습니다. 요한은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좌에 성부 되신 하나님이 앉아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성자이신 하나님도 거기에 계신데, 그것은 다른 부분의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했습니다. 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앉으신 이의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을 통해서 성부이신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 1: 18; 6: 46; 딤전 6: 16).
요한이 본 그분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삼위 중의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사장이십니다. 요한이 본 그분은 “벽옥과 홍보석 같고” 했는데 해리 아이언사이드 박사는 요한계시록 연구를 통하여 요한의 표현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벽옥은 금강석같이 맑은 것이고, 홍보석은 핏빛의 보석으로 아마 루비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홍보석은 희생을 의미하고 벽옥은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계시록을 처음으로 읽는 사람들이 회개한 유대인들임을 생각할 때 이런 보석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을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자란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 보석은 대제사장의 가슴에 붙이는 보석 중 맨 처음 것과 마지막 것을 상징합니다. 이 돌 위에는 각각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출생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입니다. 능력으로 다스리시는 아들을 요한이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그리스도의 모습은 “보좌 위에 무지개가 둘렸고 그 모습이 녹보석 같더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반원형의 무지개만 보지만 하늘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원하심을 상징하는 녹보석 같은 완전한 원형의 무지개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분이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충성된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셔서 천국에 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영원성을 그대로 나누어 주셔서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할 때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제사장의 사명 중의 하나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1절에도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과 믿지 않는 이를 위해서 기꺼이 기도의 짐을 져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 믿는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기울여 힘썼다면 역사는 좀더 달라졌을 것입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들의 하는 임무는 제사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믿는 사람들이 드려야 할 네 가지 제사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에는 우리의 몸을 제사로 드리라고, 히브리서 13장 15절에는 찬양의 제사를 드리라고, 히브리서 13장 16절에는 선행의 제사를 드리라고, 같은 절에 나눠주는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이십사 장로의 모습을 봅니다.
본문 4절에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했습니다. 24라는 숫자는 12의 두 배가 되는 수입니다. 이것은 열두 지파의 족장들과 열두 사도를 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가운데 보좌를 둘러싼 이십사 보좌들의 위에 머리에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흰 제사장의 옷을 입은 이십사 장로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 영광스런 보좌를 둘러싸고 앉은 이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성경을 살펴보면 이들은 천사가 아닙니다. 그들은 사단과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구속받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마에는 이긴 자의 표적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십사 장로는 천국의 시민들을 말합니다.
셋째로, 심판의 징조를 봅니다.
본문 5절에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번개,” “음성,” “뇌성”의 세 가지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번개와 뇌성은 심판의 상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왔다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6장에서부터 19장에 기록된, 이 땅 위에 임하게 될 심판의 전주곡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환난 때의 심판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일곱 영을 봅니다.
5절 하반절에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했습니다. 보좌 앞에서 타고 있는 일곱 등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하였습니다. 주의 신, 지혜의 신, 총명의 신, 모략의 신, 재능의 신, 지식의 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 이 일곱 영은 별개의 신이 아니라 성령 한 분의 일곱 가지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환난 때 담당하실 역할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 성령의 영원하신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하심을 힘입게 되면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뿐 아니라 여기에 기록된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힘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는, 유리 바다를 봅니다.
본문 6절에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라고 했습니다. 유리 바다라는 것을 교리적으로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은 견고성을 가리킨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유리 바다라는 것은 바람이나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데, 솔로몬의 성전 안에 있는 유리 바다에서 인용한 것으로 인간을 성결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5장 26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한 대로입니다. 유리 바다라는 것은 굳은 확신, 다시 말하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 견고성은 믿는 자들의 성결과 안전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확신을 흔들리게 하거나 안전함을 의심하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성화되어 더 이상 이생의 풍파에 시달리지 않게 된 그 순간까지 옛사람과 새사람 사이에서 믿는 자를 단련시키는 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여섯째는, 살아있는 네 생물을 봅니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변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6절 하반절입니다. 이 네 생물은 스랍들로 이사야서 6장 1~3절에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환상 속에 나옵니다. 그들은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하고 소리쳤습니다. 장로들을 우두머리로 하는 천사의 무리에는 여러 계급이 있지만 장로 이외도 스랍이 있고 그들은 모두 넷뿐입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참석하는 것같이 보여지는데 그들의 형상으로 보아 그들에게는 또다른 임무가 주어졌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의 특징으로 보아 그들은 각각 자신들이 상징하는 구역의 우두머리인 것 같습니다. 7~8절에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했습니다. 사자는 맹수 중의 우두머리요, 송아지는 가축 중의 우두머리요, 사람은 인간을 지키는 천사들의 우두머리요, 날아가는 독수리는 공중을 나는 새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일곱째로,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찬양하는 모습을 봅니다.
8~9절에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드리는 모든 찬양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보좌에 앉으사 그들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신 분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사 인간의 몸을 입어 인간과 같이 되시고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갈보리산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아무리 능력이 크다 해도 인간을 죄로부터 대속해줄 능력은 없습니다. 천국에 있는 그 어떤 이의 피라고 하더라도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의 보혈만이 그렇게 하실 수가 있으며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천사들이 인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사단이 그를 대적하고 이 땅에 죄를 가져와서 하나님의 계획을 망쳐버리려고 했을 때 그들은 분명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자손들이 거듭 죄에 빠져 들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했을 때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보고만 있었습니다. 이런 찬양의 행위는 그들이 구속하지 못할 이 세상을 구속하신 주 예수님께 드리는 찬양과 헌신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스랍들만이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10~11절을 보십시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하늘 나라 시민이 부르는 찬송은 주님이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에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노래였습니다.
물론 요한복음 1장 3절을 토대로 한 이 노래는 주님께서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신 것을 인하여 천국에 있는 네 생물과 백성들이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그 모습은 우리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찬양하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기쁩니까?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 나라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살면서도 가장 귀한 것은 찬송입니다. 찬송할 때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불평이 감사로, 두려움이 담대함으로, 괴로움이 평안으로 변합니다. 우리 모두 찬송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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