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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되어야 할 성구>
1)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8)
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3)
3)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6:34)
4)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19:30)
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0:28)
<본문 설교>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오늘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올수 있는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기쁨이신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부터 우리는 구약을 지나 신약을 시작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주실 은혜에 가슴 설레임으로 마태복음을 시작합니다. 마태복음은 헬라어 원전의 ‘카타 마타이온(마태에 의한)’ 이라는 원래의 제목에 ‘기쁜 소식’ 을 뜻하는 단어가 덧붙여져서, 영어 성경은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한글 개역 성경은 ‘마태복음’으로 명명되었으며,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선교적, 변증적 차원에서 증거하는 복음서 입니다
사복음서 (Four Gospels)는 하나의 예수 사건, 즉 예수의 성육신과 생애와 수난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 수난 사건을 네 가지 다양한 관점에서 거듭 제시함으로써 이를 보다 입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실로 예수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책인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요 그 절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 오묘하고 심오한 예수 사건의 실체를 우리 인간이 보다 더 포괄적으로, 그리고 보다 더 생생하게 체감하도록 하기 위해, 이를 사중(四重)으로 거듭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각의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 사건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저자에 따라 관점의 차이나 강조하는 바가 다를 수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들을 대할 때, 이들 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하나의 예수 사건 자체를 포괄적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동시에 네 복음서 각각의 독특한 관점과 강조점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복음서 가운데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왕이시라는 것과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성경의 각 권은 모든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궁극적 독자층으로 염두에 두고 있지만, 동시에 구체적으로 특정 시기의 특정 사랍들을 1차적인 독자층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태복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1차적으로는 기록 당시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한 시기인 A.D.60년대 후반 무렵, 소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였으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이미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마저, 구약과 관련하여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직후 얼마 동안은, 유대파 기독교인들은 유대교 회당이나 예루살렘 성전에도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내재적인 차이점들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유대의 전통과 율법 준수를 주장하는 유대교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파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그들의 신앙과 전통적인 유대교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태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유대인과 비기독교 유대인들 모두를 향하여 선교적(Evangel ical)이고도, 변증적(Apologetic)인 차원에서 마태복음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먼저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의 첫머리에서부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다루고 있고(1:1), 또한 53회의 직접적 인용(Quations)과 76회의 간접적 인용(Allusions)을 합쳐서, 총129회의 구약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신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구약 인용 횟수입니다. 특히 마태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는 표현을 13회 사용하고 있는데, 이표현은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이처럼 마태는 메시야와 관련한 구약의 예언들과 예수의 행적을 밀접히 연관시킴으로써, 그의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구약과 연결시켜 줍니다. 129회에 달하는 구약의 인용과 함께 예수의 출생과 사역들,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행적들 하나 하나에서, 구약적 이해가 있는 자라면,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 (Jesus is the Promised Messiah)’ 시라는 것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구약적 증거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밝히면서, 메시야와 관련한 유대주의의 오류(The Fallacy of J udaism on Messiah)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리면서도 메시야를 정치적이고도 현실적인 메시야로 이해했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이방(異郭)에 대한 심판을 수행하고, 잃어버린 다윗의 왕권과 이스라엘의 옛 영화를 회복할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이유는 예수의 행적이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여전히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와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는것은, 역설적으로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변증하는 강력한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주의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 라는 용어는 단 4회 사용하고 있으며, ‘천국 (Kingdom of Heaven)’ 이라는 용어는 31회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두 용어는 개념에 있어서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 이라는 용어는 마태복음을 제외하고는 다른 복음서들, 나아가 신약 전체를 통해서도 약간 다른 형태의 표현인 딤후 4:18절을 제외하고는, 단 한 차례도 발견되지 않는 용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꺼리는 유대인들의 경건한 전통을 존중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점을 교정(橋正)하고자 하는, 마태의 신학적 의도가 분명히 배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마태는 천국(天國)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지상의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을 꿈꾸는 당시의 왜곡된 메시야 사상의 오류를 수정하고자 시도하는 것입니다. 곧 천국은 현세적(現世的)이고 영토적(領土的)인 개념의 나라가 아니라, 내재적(內在的)이고도 초월적(超越的)인 성격을 지닌 나라라는 것을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마태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고전1:23)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라는 사실과 함께, 그 메시야는 유대인들을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세상 만민에 대한 구속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신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의 왕국인 천국은 예수의 초림으로 이미 임하였으며(12:28), 예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26:64)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배열상 마태복음의 위치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마태복음이 신약 성경의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이는 단지 마태복음이 많은 구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거나 유대적 풍습을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연에 의한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마태복음이 구약 예언의 성취의 연장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의 초점은 오실 메시야에게 맞추어져 있는 바, 선지자들의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Person) 과 사역 (Work) 에서 모두 성취되고 있음을 마태복음은 너무나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섭리하에 형성된 정경(正經)의 위치상,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위치에 마태복음이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수있습니다.
그럼 먼저 마태복음의 메시지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1. 예수,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
마태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 (the Promised Messiah)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를 위해 직접 인용 53개, 간접 인용 76개, 총129개의 구약 구절을 예수님의 위격 (Person) 과 사역 (Work) 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을 13회 반복하고 있기도 합니다. 즉 마태는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는 것을 보임으로써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성경 예언의 성취 및 역사에 대한 신적 개입의 증거
만일 수백 년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 세월이 흐른 후 그대로 성취되었다면, 이는 첫째로 그 예언에 신빙성 (Credibility)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둘째로 그 예언 성취의 과정에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가 개입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한두 개도 아닌 수많은 구약의 예언들이 수백 년이 지난 후, 예수라는 한 인물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은, 신적 섭리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전(全)생애를 통해 나타난 예언의 성취는 작게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크게는 세계의 모든 역사가 인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진행되는 구속사(Redemptive History)인 것을 증거한다는 사실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시험의 승리
예수께서는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개시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시험받으신 사건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아담의 타락 이후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최초의 선례를 남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시험에 넘어간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셨으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모범을 따를 때, 누구든지 마귀의 시험에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신 것입니다. 시험받을 때, 시험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또 그 분의 승리를 묵상하십시오. 그 분의 모범을 따르는 자를 마귀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4. 천국 시민의 정체성과 삶의 연관성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성도는 ‘세상의 빛 (Light) 이요 소금(Salt)'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13.14). 빛은 비추게 되어 있으며, 소금은 짜게 하게 마련입니다. 빛이면서 어둠을 밝히지 않고, 소금이면서 짠맛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모순(牙眉)입니다. 또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거나, 역으로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역시 불가능합니다(7:17.18).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존재(Being)와 행위(Doing)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으십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당신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5:16)를 확인해 보십시오.
5. 진정한 의(義)란 무엇인가?
산상 수훈 전체의 주제는 ‘진정한 의란 무엇인가?’ 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주로 인간의 외적(外的) 행위에 대해 규정하고 있으나, 예수님이 제시 하시는 의의 새 기준은 인간의 내적(內的) 영역까지를 규정하십니다. 즉 구약의 율법은 살인이나 간음 행위에 대해 규정하고 있지만, 그 내면의 동기가 되는 타인에 대한 미움이나 음욕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규정에 따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자들은 타인을 미워하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서도 살인이나 간음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기 때문에 정죄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기준에 의하면 그들은 심판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천국의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의의 수준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5:20) 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내면화(內面化)하셨다는 점에서 율법의 완성자이시며, 천국의 시민된 자들은 내면의 영역에 있어서까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수준의 의(義)는 인간 스스로에게서 발견되는 것도 아니며, 도덕적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 결핍을 깨닫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믿음의 의 (the Righteousness by Faith)’ 인 것입니다.
6. 균형 잡힌 목회 사역을 위한 본질적 요소들
십자가 수난을 제외하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기본 요소들을 꼽자면 선포 (Proclamation), 제자 양육(Disciplining), 그리고 돌봄과 치유(Curing and Healing)등의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오늘날 일반적인 목회 사역의 구성 원리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선포가 없는 돌봄과 치유 등의 봉사는 인본주의적 박애사상으로 흐를 위험이 있고, 반대로 돌봄의 봉사가 없는 선포는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우려가 있습니다. 또한 제자 양육이 없는 사역은 복음 사역의 연속성과 확장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목회 사역자들은 위의 세 가지 요소들 모두에 힘을 씀과 동시에, 어느 한 요소에만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7. 천국 바밀의 계시와 은닉
13장에서, 자신에 대한 배척이 점증하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은 천국에 관한 일곱 가지 비유의 말씀을 베푸셨습니다. 비유의 목적은 천국에 관한 비밀을 ‘드러 내기 (to reveal)’ 위한 것과 ‘감추기 (to conceal)’ 위한, 이중의 목적이었습니다(13:11-15.35). 즉 겸손한 자에게는 비유가 천국의 비밀을 드러내주지만, 완악한 자에게 비유는 깨달을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천국 비유의 핵심은 ‘천국은 겸손한 자에게 계시된다’ 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천국의 비밀을 깨닫고, 그 실재(實在)를 누리는 축복은 오직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에게만 허락될 것입니다(11:25).
8. 믿음에 따른 주님의 역사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이적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갈릴리 해변의 고을들에 대해 심판을 경고하셨으며(11:20-24), 불신 가운데 표적만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 이외에 더 이상의 표적을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12:38-45). 심지어 ‘믿지 않음을 인하여’ 고향 나사렛에서 조차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셨습니다(13: 53-58). 그러나 예수님은 백부장과 가나안 여인등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반응하시고,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더욱이 유명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이적들도 모두 이방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결국 주님은 불신하는 자들에게는 능력을 베풀지 않으심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무한하시지만, 오직 믿음있는 자만이 그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 따른 주님의 역사는 단순하지만, 성경에서는 그토록 강조하는 교훈인 것입니다.
9. 신앙 고백의 중요성
16:13-20절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Faith Confession)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새로운 신약 공동체인 교회의 셜립의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은 각 개인의 구원의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즉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는 예수님의 질문에 개인적으로 어떤 고백을 드리는가 하는 것이 구원과 심판을 영원히 가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0. 겸손, 인간 존중, 용서-천국 공동체의 구성 원리
18장은 제자들 상호간 혹은 성도상호간의 관계성에 관한 교훈으로서, 겸손과 인간 존중, 그리고 중심(中心)으로부터의 용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훈의 내용은 단지 인간 상호간에 권장할 만한 덕목 정도가 아니라, 천국의 공동체를 이루고 지속하는 중요한 원리로서 필수적인 덕목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능하면 겸손하고, 남을 존중하도록 노력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라’가 아니라, ‘오직 겸손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남을 실족게 하면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며, 중심으로 용서치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같은 방식으로 그를 대 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위의 교훈들을 적당한 수준에서 상대화시킬 것이 아니라, 절대적 차원에서 순종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11. 재림을 기다리는 생도의 바른 자세
예수님은 24. 25장의 감람산 강화(Discourse on the Mount of Olives)에서, 자신의 재림의 징조들에 대해 성도들이 분별하여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재림의 날과 때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시며, 오히려 재림의 정확한 시기에 대한 불예측성 (Unpredictabili ty) 을 성도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와 직결시키십니다(24:42). 그러므로 지나치게 재림의 시기에 집착하여 아무것도 하지않고, 집단 은둔식의 생활을 하는 것은 성경의 의도를 완전히 곡해한 것입니다. 시대의 징조들로 볼 때 주님의 재립은 임박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때’ 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을 진정으로 소망하는 성도들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심정으로 늘 영적으로 깨어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召命)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2. 기도의 핵심은 순종
체포되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둔 고뇌와 슬픔을 하나님 앞에 모두 토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고통의 토로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기까지, 기도의 싸움을 싸우셨던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핵심(the heart of J esus' prayer in Gethsemane)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순종(Complete Submission)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많은 말과 많은 제목을 가지고 기도할지라도 순종의 마음이 우리의 기도에 결핍되어 있다면, 우리는 기도의 핵심 요소를 빠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13. 거기 너 있었는가(Were You There)?
예수님의 수난의 과정에는 예수라고 하는 한 인물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반응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목숨을 걸고 충성을 맹세하였다가 하루 만에 이를 번복하고, 어떤 이는 은 30에 스승을 팔아버립니다. 또 어떤 이들은 시기심 때문에 무죄한 자를 고소하고, 또 어떤 이들은 불과 며칠 전에 자신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하던 인물을 죽여달라고 광분하여 소리쳐댑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양심의 가책을 교묘히 회피하며 무죄한 자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어떤 이는 무력한 죄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또 어떤 이는 길을 지나다가 죽어 가는 한 청년을 향해 머리를 흔들며 회롱합니다. 심지어 자신 역시 죽음의 형틀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같이 죽어 가는 옆 동료에게 조소를 보내는 자도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이, 혹은 풍경화의 한 장면을 감상하듯이, 멀찌감치 떨어져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을 감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2000년이란 역사의 간격을 뛰어넘어, 우리가 그 수난의 현장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나타내었을까요? 수난 장면의 여러 인물들은 바로 다양한 인간 군상(群像)의 본성을 대변하는 인물들일 뿐 입니다.
14. 지상 최고의 명령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선교 명령을 남기십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적(遺言的) 명령이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King of kings)의 절대 명령입니다. 이 명령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를 부여할 만한 일로서,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성취하셨던, 바로 그일을 계승하고 확장하는 일입니다. ‘세상 끝날’ 이 올 때까지, 여전히 이 명령은 그의 제자들이 순종해야 할 명령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종말(終末)의 시점이 바로,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는 그 때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고려하면(24:14; 막13:10), 이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의 완성을 앞당기는 역사의 주역들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사도 마태의 설득력 있는 증언으로 기록된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한 오랫동안 고대해 온 메시아이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참된 평화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예언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왜(Why)? 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까? 나를 위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현저한 박해 가운데서 메시아 예수에 대한 헌신과 순종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모든 미래의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여러분, 우리 곁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이 우리 행동의 표준이요, 동기요, 목적입니다. 주가 나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주의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주가 나와 함께하시기에 어떤 일을 당해도 낙심치 않고 본분을 행할 수 있습니다. 주가 지켜 보신다고 믿기에 악을 행치 않고 선을 택하게 됩니다. 주가 나를 돌보시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행해도 두려워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가 내 안에, 내 곁에 계신다고 믿고 행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나로 하여금 의와 진리의 길로 또 믿음의 길로 천성길로 가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또한 복음을 담대하게 전파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사단의 사망과 죄의 권세를 쳐부수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지금도 만왕의 왕으로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인간 역사를 주장하시며, 인생의 생사 화복을 결정하는 주권자로 군림하십니다. 이런 주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주가 맡기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함으로, 장차 주님 앞에 서는 날, 진정 자랑거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 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 두란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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