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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묵상글 (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 착각적 만족.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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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1.12 04:32
- 착각적 만족
우리가 인생무상이라고 하듯 권력도 무상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오늘 지혜서가 말하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권력이 있을 때는 권력이 항상 있으리라고 착각합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권력에 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술을 좋아하는 것은 술에 취하게 되면 그때만은
세상이 다 내 것 같고 안 되는 일 없이 다 될 것 같듯
권력에 취해도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저는 ‘착각적 만족’이라고 명명하겠습니다.
권력에 취하면 이 착각적 만족으로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상하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새 정권이 그러지 않는지 염려합니다.
지난 정권이 그러다 망한 것을 보고도 권력에 취해가는 조짐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힘의 속성과 권력의 속성 때문입니다.
힘이 없으면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데
힘이 있으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힘이 있는데도 자기 뜻대로 하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난과 겸손이 없으면 자기 뜻대로 하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난과 겸손이란 돈 또는 재력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힘과 권력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고
어쩌면 힘과 권력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가난이고 겸손입니다.
그런데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 것이 아니라고 하기 쉽지 않듯이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 것이 아니라고 하기 쉽지 않지요.
하느님 앞에서의 가난과 겸손이 아니라면 그렇습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하고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진정한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 있는 겸손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느님 앞에 있을 때 겸손하기가 쉽지
사람들 앞에 있을 때 겸손하기가 쉽습니까?
나보다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할 것이며,
그런 뜻에서 지혜서는 오늘 권력자들에게 이렇게 경고를 날립니다.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
그분께서 너희가 하는 일들을 점검하시고 너희의 계획들을 검열하신다.”
평범한 우리는 이런 권력자의 착각적 만족은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인생무상이란 것을 생각지 않는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인생무상입니다.
주먹 속의 모래처럼 힘이 점점 빠져나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셨던 건강도 하느님께서 도로 가져가실 겁니다.
이것을 머리로 알뿐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노년의 지혜요 신앙인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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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믿음
<찬양과 감사>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일어나소서, 하느님,
세상을 심판하소서."(시편82,8ㄱ)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입니다. 오늘은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1580년 우크라이나의 동방교회 가문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통해 가톨릭교육을 받습니다. 훌륭한 상인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성인은 바실리오회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품을 받고 수도원장이 되었고 수도회 개혁을 주도합니다.
성인은 러시아의 비탭스크 주교로 착좌한후 리투아니아에 있는 희랍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다가 1623년 라틴화되어가고 있다는 까닭에 이교도들 손에 목숨을 잃습니다. 도끼와 총탄에 순교의 죽임을 당한후 드비나강에 던저진 유해는 비알라에 안장됩니다. 이어 1867년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니, 동방교회에서 최초로 성인품에 오른분이 됩니다. 주교관으로 쳐들어온 군중들 앞에서 임종어와 같은 마지막 감동적 유언이 그의 믿음의 깊이를 말해 줍니다.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성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의 수위권을 위하여 또한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대로 평소 삶의 요약과 같은 유언입니다. 참으로 순교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믿고 교회를 사랑했던 성인으로, 교회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 성 요사팟 주교입니다. 성인들의 삶은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어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고 배우게 함으로 우리 삶의 좌표가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지혜를 추구하라”는 주제하에 특히 지도자들이 지혜를 추구할 것을 간곡히 권합니다. 맹신이나 광신이 되지 않기 위해 <지혜의 눈>은 필수입니다. 비단 지도자들뿐 아니라 우리의 온전한 믿음 생활을 위해 지혜의 사랑과 추구는 절대적입니다.
지혜서 저자는 세상의 임금들에게 “들어라”, “깨달아라”, “배워라”, “귀를 기울여라” 촉구하며, 지혜를 찾는 자의 자세에 대해 말합니다. 역시 <공부하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의 치유받은 나병환자들의 믿음에서 부족했던 부분이 바로 이런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비송의 청원은 바로 믿음의 갈망을 표현합니다. 아마 이런 간청의 기도가 없었다면 주님의 치유의 응답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로 동방교회의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 즉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말마디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여라”하고 이르셨고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집니다. 그대로 믿음의 응답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에 있습니다. 치유받은 열사람중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치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아홉과 하나중 어느쪽에 속합니까? 지혜로운 온전한 믿음에, 하느님 찬양과 감사는 필수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화두처럼 우리 모두의 믿음을 돌아보며 분발케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하느님께 영광은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림으로 표현됩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은 영광받으소서”(성규57,9), 베네딕도회의 모토이자 수도원 정문 바위판에 새겨져 있는 성규 구절입니다.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지혜로운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 진짜 영육의 온전한 치유를 받은 이는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이였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치유 반쪽의 치유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비송에 이어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온전한 치유와 구원의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선언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고 파견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오늘의 말씀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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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단 한 명만이 돌아와 감사를 드렸고, 그것도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7)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머지 아홉은 돌아와 감사드리지 않았을까? 또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열 명의 나병환자와의 인터뷰”라는 존슨 그나나바라남의 꽁트에서 한 기자는 ‘시간의 기차’를 타고 그 당시로 돌아가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이들 중에 한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치유된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그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소. 혹시 재발할지 모르지 않소. 그래서 나는 되돌아가지 않았소.”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시는 선행에 대해 사람들에게 감사를 기대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나는 감사드리는 일을 그만두었소.”
또 다른 사람은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감사하는 일을 까맣게 잊었소.”
또 다른 사람은 “나는 감사를 드리고 싶었소. 그런데 대부분이 돌아가지 않았소. 나는 언제나 다수를 따르오. 그래서 나도 돌아가지 않았소.”
그런데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치유되어 건강을 회복한 사실에 대한 기쁨에 머물며, ‘치유를 주신 분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은 건강을 회복하게 된 것보다, 오히려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었고, 그것은 ‘치유를 주신 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들의 차이는 ‘돌아옴’과 ‘새로운 출발’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베풀어진 자비를 입고, 그에 합당한 ‘응답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그를 새로운 구원의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에 합당한 삶으로의 변화된 삶이 바로 믿음의 삶이요 기적이요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의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은 ‘감사’를 불러오고 감사에 합당한 삶으로의 전환을 가져옵니다.
이처럼, 감사하는 일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의식하면서, 모든 삶을 지속시켜주고 있는 많은 기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그분을 볼 줄 아는 눈이야말로, 바로 감사의 눈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주님!
감사하게 하소서!
청하기도 전에 듣고 계시는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베풀어지기도 전에 이미 품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치유보다 치유시키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 깃든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무감각하지 않게 하시고
치유를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은 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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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피정 중에 영적인 여정을 방해하는 4가지 요인을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미래에 대한 걱정,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 등으로 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제자에게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움으로 물에 빠지는 베드로를 향해 ‘왜 두려워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도 ‘왜 두려워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담대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분명히 명령한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마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있어 주겠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담대함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욕망’입니다. 욕망에는 ‘재물욕, 명예욕, 권력욕’이 있습니다. 경건했던 다윗이 충실했던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은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포도원을 가졌음에도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서 죽였던 것도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자 부자 청년은 슬퍼하면서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는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라는 전차에서 내려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많이 배웠어도, 능력이 있어도, 성직자라 할지라도 욕망의 덫에 걸리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가 쉽다.” 욕망이라는 전차에서 내려오는 길은 ‘초연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초연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복음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은 하느님의 자리까지 넘보려는 마음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들의 꽃이 저마다 향기를 내며 하느님을 찬양하듯이, 하느님의 작품인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받으실 때도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 이외에 다른 것을 섬겨서는 안 된다.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교만함’입니다. 아담의 죄는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교만함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제자들에게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 오신 것도 겸손함의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되어라. 잔치에 초대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고 끝자리에 앉아라.”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겸손함은 악의 유혹을 극복하는 가장 큰 힘입니다.
오늘 제1 독서인 지혜서는 우리가 영적인 여정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힘없는 이와 고아의 권리를 찾아 주고, 가난한 이, 불쌍한 이에게 정의를 베풀어라. 힘없는 이와 불쌍한 이를 도와주고,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어라.” 오늘 복음에서는 치유 받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나병 환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사의 감사송은 우리가 감사드려야 할 이유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 옵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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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오늘 CAC 매일 묵상은 쉬고 감사와 후원의 부탁을 드리는 글로 대신합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1월 11일 화요일- 마흔여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성사적 현실
최근 저는 평생의 사목 활동과 관상 기도, 그리고 내적 성찰을 통해 깨달은 한 가지 진리로 다시금 이끌려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와 CAC(행동과 관상 센터)의 ‘매일 묵상’ 팀, 마크 롱허스트(왼쪽)와 알리 커크패트릭(오른쪽).
사랑하는 독자님들, 최근 저는 평생의 사목 활동과 관상 기도, 그리고 내적 성찰을 통해 배운 한 가지 진리로 다시금 이끌려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단순한 사고(思考)만으로는 참된 변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변혁은 삶 속에서 몸소 살아내야 하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삶의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며 때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내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그 분노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눈물이 더 깊은 내적 변혁의 열쇠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눈물
은 영혼이 사랑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기기 시작하는 표징입니다.
저는 수많은 삶 속에서 이러한 변화를 목격해 왔습니다. 세상을 붙들고 살아가느라 지쳐 마침내 스스로에게 눈물 흘릴 자유를 허락하는 여성들, 피정 중에 분노 아래 깊이 자리한 슬픔을 발견하는 남성들, 그리고 슬픔을 통해 소진이 아니라 돌봄으로 나아가는 치유자들. 또한 ‘매일 묵상’을 읽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 준 독자 케시아와 같은 이들 안에서도 그러한 은총의 변화를 보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매일의 묵상을 통해 날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함께, 우리의 눈물을 품어낼 만큼 넓고 깊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변혁의 지혜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CAC)’는 기꺼이, 그리고 기쁨으로 후원해 주시는 여러분과 같은 분들의 도움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저희는 한 분 한 분의 소중한 동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해마다 두 차례, 여러분께 재정적 후원을 부탁드리며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그 서신은 여러분이 어떻게 변혁의 길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후원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내일 ‘매일 묵상’은 ‘성사적 실재(Sacramental Reality)’라는 주제를 계속 탐구할 것입니다.
이 여정을 저희와 함께 걸어주시고, 저희가 여러분의 삶과 아침, 눈물, 그리고 변혁의 길에 동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평화와 모든 선을 기원하며,
리처드 로어 신부
활동과 관상 센터(CAC) 창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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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감사드린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인 나병 환자 아홉은 감사한 마음을 잊어버리고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 주십니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아시리아에서 옮겨 온 타민족이었지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에서 그 일이 일어난 데는 뜻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라는 구절은,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여기서 엑카르트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 사이에 익히 알려진 현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따금 자신의 청중을 당혹케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청중을 당황케 하는 예수의 능력이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뛰어나며 예수의 능력이 진리라고 넌지시 말한다. 그는 마리아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단지 복음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무엇이 우리가 듣고 따라야 할 말씀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다. 우리는 그리스도 … 참 하느님이자 참사람인 한 그리스도를 알아듣는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지키는 자가 알아듣는 말씀이다. 우리가 알아듣는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역사적인 그리스도이지만, 우리 안에서 태어난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났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우리 역시 남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하느님 말씀이다. 이 말씀 속에서 아버지는 나의 영, 여러분의 영, 그 말씀을 닮은 각 사람의 영에게 발설한다. 아버지가 이렇게 발설함으로써 여러분과 나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된다. 마치 말씀이 몸소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듯이. 아버지 하느님은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면서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신성을 우리에게 온전히 준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신성, 곧 우리의 돌파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신화(神化)된다.(502)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 3절: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가로의 발전
이 탑의 체험이 일어난 것을 언제로 보고, 또 그에게 내용적으로 새로웠던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매우 이르게 잡으려는 경향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종교개혁의 시작을 가능한 한 멀리 소급시키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렇다면 자비롭고 인자한 하느님의 발견 그 자체에서 과연 무엇이 전형적으로 종교개혁적이었는가를 묻게 되었는데, 그것은 루터가 그때까지 시달려 오던 자의적인 하느님의 유명론적인 관념을 스스로 극복한 데 불과하다. 그러나 새로 얻은 신상은 가톨릭적인 것으로서, 그것을 재발견하고 그리로 돌아온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합의 체험” 전체는 가톨릭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경향의 시기는 조기가 적합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때의 루터는 그의 사상과 감정에서 확실히 아직 가톨릭적이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역사가로서는 그리사르만이 탑의 체험을 그후 시기, 즉 1518/1519년으로 잡았다. 그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루터의 소위 1545년의 “큰 자기 증언”에서, 루터가 두번째의 시편 강의를 하기 전에 이 인식이 그에게 왔다는 루터 자신의 진술에 두었다. 루터는 두번째 시편 강의를 1518∼ 1519년에 하였다. 최근에 와서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인 비처가 이러한 계산법에 동의함과 동시에, 루터가 실제로 이 무렵에 내적인 변화를 체험했다고 확인하였다. 이미 이보다 먼저 있은 히브리서 강의에서, 1517년 여름에 분명히 인식될 수 있는 것처럼, 가톨릭적 • 전통적인 성사와 교회 개념에 의심을 품게 되고, 신앙만으로의 의화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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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많은 사람들이 이곳 성지에 방문하십니다.
그리고 방문한 모든 분들이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합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소망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10명의 나병 환자들의 소망은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들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품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나병은 전염되는 병이었고 죄로 인해 하느님께 벌을 받았다고 그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10명의 환자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들의 소망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입니다.
다른 9명은 병만 나았을 뿐이고, 돌아와 감사의 인사를 한 사람은 구원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청을 늘 들어주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가 우리를 구원하고 천상 낙원으로 인도하는 하늘이 열쇠라는 것을 말입니다.
⭐어른이란....
어느 책에서 읽었습니다.
어른이라는 뜻은
자기 일에 책임을 진다는 뜻이랍니다.
어른이라는 뜻은
현명하게 거절할 줄 안다는 뜻이랍니다.
어른이라는 뜻은
고통을 행복의 바탕으로 쓸 줄 안다는 뜻이랍니다.
어른이라는 뜻은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는 뜻이랍니다.
우리는 어른일까요?
아니면 아직 아이에 머물러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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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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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방송인 최화정 씨는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입꼬리를 올리면 세상에 못할 일은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자세 하나 바꾸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달라지고, 마음이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변한다는 것입니다. 크게 공감되는 말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너무 추웠습니다. 그래서 이불에 들어가 누워서 책을 읽기도 했고 또 공부했습니다. 책상은 그저 책, 공책 등을 쌓아두는 곳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무조건 책상에 앉아 공부해야 했습니다. 1, 2학년 때는 공동 침실(한 방에 16명이 잤습니다)을 사용해야 했고, 그래서 잠자는 시간 외에는 무조건 공동 연학실에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추우면 두꺼운 잠바를 입고, 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물을 채운 대야에 발을 담그고 책상에 앉아 공부했습니다.
이 습관 때문일까요? 이제 누워서는 책을 읽지 못합니다. 무조건 책상에 앉아 있어야 했고, 그래야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자세가 중요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자세가 중요합니다. 미사 때,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분을 봅니다. 이분들은 대체로 계속 무엇인가를 합니다. 스마트폰을 보고, 주보를 보고, 또 두리번거리기도 합니다. 주님께 집중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손을 모으고 집중하시는 분을 보면, 온전히 주님 앞에 나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외적인 자세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자세도 중요합니다. 그 자세를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치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병 환자들이 율법에 따라 ‘멀찍이 서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혀서 건강한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라고 말씀하시면서, 치유 자체보다 공동체에서의 회복을 위해 사제에게 보내십니다.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진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방인, 이단자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신앙의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선물을 받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자기의 은혜받은 것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드리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구원이라는 더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아이리스 머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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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도움이 되나이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과 베치 텐 붐(Betsie ten Boom)은 네덜란드의 그리스도인 자매들이었는데, 나치의 유대인 박해 시기에 유대인을 숨겨주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집은 '은신처(The Hiding Place)'로 불리며,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목숨을 구했습니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숨기거나 돕는 행위를 중대한 범죄로 취급했습니다. 텐 붐 자매는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유대인을 보호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독일에 있는 라벤스브뤼크 수용소(Ravensbrück)라는 극도로 열악한 환경과 잔혹한 조건으로 악명 높은 여성 전용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은 벼룩이 들끓고 악취가 가득했으며, 기본적인 위생조차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굶주림, 질병, 강제노동, 폭력 등으로 인해 수용자들은 끊임없는 고통을 겪었던 곳입니다.
코리는 절망하며 "이렇게 어떻게 살 수 있냐...."고 울부짖었지만, 베치는 믿음의 눈으로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자. 심지어 이 벼룩들까지도..."라고 속삭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이 감사가, 나중에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벼룩 때문에 경비병들이 막사에 들어오기를 꺼려했고, 그 덕분에 자매와 다른 수감자들은 자유롭게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신앙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불평거리로 보였던 것이 오히려 찬양의 이유가 되었고, 벌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은 보호의 수단이었던 것이지요.... "불평하는 마음"은 기적을 놓치게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기적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었던 겁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10명의 나환우 치유 이야기는 감사가 지니는 의미를 잘 드러내 줍니다. 그 시대에 나병은 가장 두려운 질병 중 하나였고, 사회적으로 격리되고,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살아야 했던 질병으로서 죄의 파괴적인 힘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되기까지 했습니다. 나병이 몸을 서서히 파괴하듯, 죄도 인간의 영혼과 공동체를 무너뜨린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치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죄의 문제 역시 오직 하느님의 은총과 그 은총에 의한 구원으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열 명 모두가 치유를 받았지만, 감사한 마음을 가진 단 한 명만이 예수님께 더 큰 은총(구원)을 받았습니다. 나병 치유 사건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죄에서의 구원과 감사의 삶을 상징합니다.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 삶에 희망을 가져다줄까요?....
적어도 우리 삶의 경험은 이 질문에 "그렇습니다!"라는 답을 준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종종 "고난의 감옥" 속에서 불평하기 쉽지만, 믿음은 우리에게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1테살 5,18)고 초대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단순히 긍정적인 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길인 것이지요.
달리 말해, 감사하는 마음의 비결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자비를 잊지 않으려는 의식적 선택입니다. 그러니 이 감사는 말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태도와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우리에게 희망의 길을 열어줍니다!
이 감사의 삶이 바로 성체성사적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성사를 Eucharistia(감사제)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단순히 성체를 받아모시는 것이 대수가 아니라, 성체성사를 통해 감사와 긍정의 삶의 방향을 잡는 것이 관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감사와 찬미의 선택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선제적으로 주시는 은총과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고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 명의 나환우 중 사마리아인 나환우 한 명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평일 미사 네 번째 감사송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도움이 되나이다!"
이 희망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이 감사의 마음이 하느님 은총의 빛이 스며들게 하는 틈새를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특별한 마음으로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틈새가 구원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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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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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나병 환자들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병 환자는 공동체에서 분리되었는데
나병이 다 낫고 나서 공동체로 돌아오기 위해서
사제들의 판단이 필요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라는 말씀은
사제들에게 치유를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치유되었다는 확인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치유는 사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이루어졌습니다.
병이 나은 것을 보고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이 사람만 들은 것으로 보아
치유가 곧 구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병의 치유는
공동체로의 회복을 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병을 치유하시면서 주시고자 한 구원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병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했기에
병자들은 하느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병이 나았고
그래서 다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결국 하느님과 함께함입니다.
구원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병으로 고통받고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힘들어 합니다.
이러한 고통들 때문에 지금의 삶은
구원과 거리가 먼 삶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나 스스로 해결하기보다는
그 고통을 안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은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이끄는 초대장이 될 것입니다.
그 어려움에 함께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고
그 안에서 기쁨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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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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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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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 반석위의 일치된 교회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
오늘은 ‘일치의 사도’라 칭하는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이다.
성 요사팟 쿤체빅은 1580년경 당시 폴란드 관구였던 현 우크라이나의 볼린(Volyn) 관구에 속한
볼로디미르(Volodymyr)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가톨릭교회에 분열이 일어나던 때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대립한 상황이었다.
귀족 가문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상업에 종사했고,
자녀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심어 주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성인은 수도생활에 더 큰 관심을 가졌기에,
그는 부자 딸과 결혼하면 사업을 주겠다는 아버지 제의를 거부하고,
1604년 바실리오회의 삼위일체 수도원에 입회해 요사팟의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1609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동방과 서방간의 일치를 위해 지도력을 발휘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함께 입회했던 친구 루트스키는 삼위일체 수도원 원장이 되었고,
그는 폴란드에 새 수도원을 세우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1617년 주교로 임명된 그는 혼란하던 교구를 바로잡고 교회일치를 위해 더욱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와의 반목, 기혼 사제 문제, 느슨한 규칙, 폐허화된 성당 등을 고치기 위해
시노드를 소집하고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와 뜻을 달리하던 일단의 분리파 주교들이 성인이 실제로 라틴 전례의 사제이며,
로마 가톨릭은 동방 교회와 맞지 않는다면서 대립주교를 내세웠다.
그래서 극도의 혼란상에 빠졌지만 그는 온갖 위험을 극복하며
비테프스크로 사목방문을 가던 중 새로운 정교회를 주장하는 분리파에 의해
1623년 11월 12일 도끼와 총탄으로 죽임을 당해 드비나(Dvina) 강에 던져졌다.
교회일치를 위한 열정으로 인해 ‘일치의 사도’로 불리며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 그의 사망 후에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그의 전구로 인해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1643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복자로,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은 물론 함께한 제자들,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저는 제자들뿐 아니라 이들의 말과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당신을 믿는 이들이 하나로 일치되게 기도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믿는 이들의 일치의 모범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교회 공동체가 실제로 나누어야 할 사명이다.
이것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가장 중요한 계명과 맥을 함께한다.
이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께 결속되어 있음으로 해서
세상에 그분을 알리는 증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은 복음화와 구원의 대상으로 드러난다.
세상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면 그들 또한 아들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오늘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일치의 사도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을 맞이해,
교회 공동체가 하나 되어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면서 선교 사명에 앞장서야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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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 지금도 은총을 받는 그 열에 아홉 격인 우리는 /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나병 환자 열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아예 멀리서 큰 소리로 외친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의 그 절박한 외침과 딱한 처지를 헤아리신 그분께서는 그들의 병을 낫게 하신다.
그래서 사제에게 가서 정결해진 것을 확인받도록 하셨다.
당시에 나병이 나았더라도 공인을 받아야 했기에 ‘사제들에게 가 보여라.’라고 하셨으리라.
하지만 그 진절머리 난 병이 낫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이는 몇 명이나?
겨우 한 명뿐, 그것도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다.
치유 내용은 여기까지가 다다.
그러나 여기에 더 중요한 게 있음을 느끼자.
은총에 대한 감사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사제의 선언을 들었을 때 그들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그들 모두 눈물 흘리며 무릎 꿇었을 거다.
그것은 그 치유를 내린 사제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사를 드릴만하니까.
‘이젠 병이 나았다.
이제 나는 나병 환자가 아니다.’라는 벅찬 생각에,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족을 떠올리면서 그들 가슴을 부풀게 했으리라.
그런데 은총을 드린 이는 열에 단 한 사람,
그토록 애원한 그들이었건만 아홉은 외면했다.
그들은 왜 예수님께 가지 못했을까?
아마 너무 기뻐 벅찬 감정에 순간 예수님을 잊어버렸기에.
아니면 병이 나은 것에 너무 놀란 나머지, 진작 판단력을 상실했기에.
어떻든 그들은 평생 간직하고픈 그 소중한 은혜를 잠시 망각하였다.
아마도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도.
사실 아무리 작은 은총이라도 감사 없이는,
더 큰 축복마저 스스로 막는 꼴이다.
열에 그 아홉은 여기까지가 어쩌면 한계였다.
지금의 우리 모습일 수 있는 그들이다.
우리 안에도 이런 요소가 있는지 살펴보아야만 하겠다.
급할 때면 “주님, 주님!”하다가도, 막상 문제가 해결되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걸 잊을 때가 종종 있지 않을까?
그래서 병이 나아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온 그 사마리아인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진작 구원을 간청한 이는 무려 열 명이었지만,
끝까지 믿음을 간직해 구원에 이른 이는 그 사마리아 사람 단 하나뿐이었다.
우리 삶에도 참으로 남의 도움이 많았다는 것을 간혹 깨닫곤 한다.
더구나 뜻하지 않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준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은 다 잊고는,
오히려 받은 서운했고 상처받은 것들만 기억할 때가 더 많은 듯하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기에 대단한 것을 깨닫고 감사를 드렸는지를 조용히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사실 우리란 도대체 누구인가?
‘저희는 쓸모없는 종,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우리 아닌가?
나병 환자의 치유와 사회적 지위의 회복은
치유의 기적보다도 더 큰 ‘감사’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이다.
감사의 삶은 우리를 전혀 새롭게 바꾸리라.
우리는 미사 때마다 감사송을 바친다.
이처럼 감사는 그분께 드려야 할 첫째 의무이자 마땅한 도리일 게다.
의당 구원은 지위 고하나 출신 성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보편된 정의를 갈망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서 올게다.
우리에게 거룩한 것, 곧 이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그분께 치유의 그 은총을 저버린
나병 환자 열에 아홉 격인 이가 우리인지를 묵상해봐야 하리라.
되돌아 와 예수님께 큰 감사를 올린 ‘그 하나’라도 되고자,
이 시각 스스로 다짐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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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김종업로마노님
|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지혜6,1-11)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 만물의 주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누가 위대하다고 하여 어려워하지도 않으신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그러나 세력가들은 엄정하게 심리하신다. 그러니 군주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6-9) 지혜서 6-9장은 전체 지혜서의 2부에 해당되며,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그리고 지혜서 6장 1-11절은 시작 권면으로서 세상 임금들에게 주는 말씀이다. 이 책이 세상의 임금들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지혜1,1-15참조) 제1부 '정의와 불멸성'(지혜1-5장)에 관한 가르침을 마무리하고, 이어지는 "지혜"에 관한 제2부 가르침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불법과 악행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주의를 기울일 것을 임금들에게 호소한 뒤에 (지혜6,1-2; 5,23참조), 저자는 그들에게 권력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엄격한 심판을 요구할 것임을 상기시킨다(지혜6,3-8). 통치자들은 자기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 통치자들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들을 엄정하게 심리하신다. 하느님께서 통치자들을 엄하게 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지혜서 6장 9-11절에서 그들이 지혜를 배우도록 초대하신다. 항상 그렇듯이 지혜서에서 가르치는 지혜는 올바른 삶과 거룩함과 연결되어 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지혜6,10).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지혜의 본성에 관한 본격적인 가르침이다.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7,11-1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5~16) 여기서 '병이 나은'에 해당하는 '이아테'(iathe; he was healed)의 원형 '이아오마이'(iaomai)는 '치료하다', '회복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이아오마이'(iaomai)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한 치유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특히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이루어질 치유의 역사를 보여 주는 단어로서, 구약 예언의 성취를 보여 주는 동사이다(이사35,3~6; 61,1).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든 치유의 본질이 기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세 있는 말씀으로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여신 치유자 예수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열사람의 나병 환자들은 눈으로 아무런 증거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제들에게 검증받기 위해(레위14,2) 가던 도중에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루카 복음 17장 15절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에게 나타난 변화를 보았다고 말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단순히 가시적으로 나타난 치유 기적을 이 한 사람만이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나병 환자만이 자신의 치유자가 바로 예수님임을 깨닫고 감사하려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나병 환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치유 기적의 배후에 하느님께서 계셨고, 그분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깨달았기에,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하며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왔던 것이다.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은 B.C.722년 북부 이스라엘의 아시리아에 의해 함락된 이후에 그들과 혼혈이 되어 혈통의 순수함이 변질되고, 아시리아의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야훼 유일신 신앙마저 변질시켜 혼합 종교를 섬기던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혈통의 순수함과 야훼 유일힌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같이 여겨져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꼐 은혜를 입고 돌아와 무한 감사를 표시한 반면에, 선민으로서 다른 민족에 비해 하느님의 살아과 축복을 더 많이 받았던 유대인으로 여겨지는 나머지 아홉은 오히려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사실에만 기뻐할 뿐, 최소한의 어떤 감사도 표시하지 않았다. 루카 복음사가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더 합당한 삶을 산다는 모습을 통해서, 선민이라는 특권 의식과 이름만을 소중히 여기며 교만하게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엎드려'에 해당하는 '에페센 에피 프로소폰'(episen epi prosopon; he threw himself; he fell down his face)은 직역하면 '그는 얼굴을 떨어뜨렸다'이다. 어떤 사람의 발 앞에 자신의 얼굴을 떨어뜨려 땅에 대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존경과 경배의 표시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을 치유한 예수님께 최고의 존경을 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감사를 드렸다'로 번역한 '유카리스톤'(euchariston; thanked; gave thanks)의 원형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는 성경에서 주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한 감사와 성찬례 축복 기도를 가리키는 용례로 쓰였다. 예수님께 대한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 행위에 이 용어가 쓰인 것은, 그가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치유에 대해 하느님께 돌리는 것과 같은 감사의 표현을 했음을 나타낸다. 다시말해서, 그는 자신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인식하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께 감사를 표시한 것이다.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몇 년 앞두고 위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수술 뒤에도 힘겹게 투병하시면서 퇴직 때까지 성실히 근무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못지않게 수고하신 분은 어머니셨습니다. 날마다 아버지의 점심 도시락과 간식을 준비하셨고, 가려움으로 잠 못 이루시는 아버지와 늦게까지 화투를 치시고는 하였지요. 그러다 졸음이 쏟아지면 가까스로 잠드셨습니다. 어느 날 새벽 어머니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뜨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당신을 내려다보고 계셨는데, 연신 눈물을 쏟으셨답니다. “왜 그래요?” 하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울먹이며 말씀하시더랍니다. “나 같은 사람하고 지금까지 살아 주어서 고마워!” 그날 이후 아버지는 전혀 다른 분이 되셨습니다. 아버지는 많은 이의 인정과 신뢰를 받으셨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참 좋은 분이셨지만, 가족들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시의 여느 아버지처럼 가부장적이셨고, 술기운을 빌려 자녀들에게 손찌검을 하시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그런 분이 하루아침에 바뀐 것입니다. 아버지는 퇴직 뒤에 어머니와 함께 날마다 미사를 다니시고, 두 분은 매리지 엔카운터(ME) 부부가 되어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셨지요.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루카 17,15-16). 아버지의 모든 변화는 어느 날 새벽, 이러한 ‘감사’가 아버지의 마음에 찾아들며 시작되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하고 지금까지 살아 주어서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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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공유
김건태 신부님_청원과 감사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 치유 이야기는 기도에 관한 두 시기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는 청원기도이며, 다른 하나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감사기도입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의 청원 과정은 단순합니다.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고, 주님께 호소하기만 하면 됩니다. 청원기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율법은 분명히 나병 환자들을 가까이하지 말도록 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은 율법을 초월하는 몸짓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직접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해, 사회로부터 축출된 이들,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이들을 치유하시나, 곧바로 치유 기적을 일으키시지는 않으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실 뿐입니다. 치유의 상태를 확인하고 공동체나 가족 합류를 명할 권한이 사제에게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도의 한 시기인 감사기도의 진정성을 확인해보시려는 의도로 이해됩니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그것도 유다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방인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의 예를 행합니다. 기도의 두 시기를 정성스럽게 완성한 이 이방인에게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치유를 넘어 구원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아마 이 사람은 이제 완치자 또는 정상인으로 살아가면서, 나병보다 더 고통스러운 문제가 닥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기도하며, 곧 청원하고 감사하며 믿음의 길, 구원의 길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터득했을 것입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한 시기를 채우지 못한 사람들, 나머지 아홉 사람은 분명 잠시나마 감사의 마음을 가졌을 것이고, 사제에게 보이고 난 후 전처럼 마을 사람들, 가족들과 함께 신나는 삶을 살아갔을 것이나, 나병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고통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고 불평과 원망의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변한 게 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육체적 치유뿐, 영적인 치유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감사의 몸짓이야말로 인생 여정을, 영적인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는 가르침 앞에 섭니다. 진심으로 감사할 때, 구원 선물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참 행복 앞에 설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하루,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이 감사의 마음을 이웃들을 위한 봉사와 사랑 실천으로 표현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신앙인으로서의 복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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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06
11월12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증 제3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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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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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박진형 비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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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현존하시고, 실패 속에서도 성공을 이끌어내십니다!>
젊은 수도자 시절, 삶 자체가 온통 회색빛이던 시절, 사방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쌓여 탈출구가 안보이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혼자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방이 다 적군으로 둘러쌓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마음 속은 분노와 불평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영적 지도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사려깊은 신부님께서는 꽤나 어려운 숙제를 하나 내주셨습니다.
우리 수도원의 장점, 경쟁력, 긍정적인 면을 한번 찾아보라고, 그리고 제 구체적인 삶속에 숨어있는 감사꺼리들을 한번 찾아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장점이나 긍정적인 측면, 감사꺼리는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도 신부님의 각별한 당부도 있고 해서, 기를 쓰고 노력했습니다. 두 달 가까이 애써 찾아보고 또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자세를 완전히 낮추고,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니, 전혀 없을 것 같았던 작은 감사꺼리들을 하나 둘 발견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감사꺼리들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사방이 온통 은총과 축복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간 제 눈이 어두워 지천으로 널려있던 선물과 장점, 기쁨과 감사꺼리들을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결론을 내릴수 있었습니다. 제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감사의 미덕의 결핍!' 이었다고.
그래서 지금은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속적인 영혼의 평화와 행복의 비결은 항상,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데 있다는 것을!
자신과 동료 이웃들, 공동체와 세상을 향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분들에게 꼭 권장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축복 노트, 감사 노트를 한권 장만하라고. 불평불만들은 자비하신 주님께 모두 맡겨드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과 축복, 주님께서 주신 선물과 감사꺼리들을 하나 하나 적어보시라고.
모든 감사꺼리들을 다 적었다고 생각이 들면, 가장 아랫쪽에 굵고 빨간 매직으로 이렇게 써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 모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 리스트를 적는 과정에 유의할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감사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감사 방식과는 철저히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사형통, 승승장구 앞에서는 누구나 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감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바오로 사도는 고통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옥중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병고와 박해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크게 감사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감사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참으로 신비스럽고 위대한 존재여서,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견딜 수 없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감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현존하시고, 실패 속에서도 성공을 이끌어내시고, 비극을 아름다운 결말로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 안에는 주님의 인호, 주님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기에,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인생의 폭풍우를 아름다운 무지개로 바꿀 수 있습니다.
끝까지 그분을 믿고 신뢰한다면 언젠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끔찍한 고통과 비극, 굴욕을 통해서 주님의 은총이 찾아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차 있다할지라도 지난 세월에 감사해야겠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 대해서도 감사해야겠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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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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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
찬미 예수님!
경기도 성남시 단대동에는 작은 개척교회인 '샬롬교회'가 있습니다. 이곳의 김정하 목사님은 루게릭병을 앓고 계십니다.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가고, 결국엔 숨 쉬는 근육마저 멈춰버리는 무서운 병입니다. 목사님은 이제 휠체어에 앉아 겨우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 컴퓨터 마우스로 세상과 소통하십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에게는 아주 특별한 다섯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필리핀 등지에 사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컴패션 후원 아동들입니다.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였던 그는 이 아이들을 도울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구두닦이’였습니다.
건강했던 시절, 그는 매일 새벽 기도를 마치면 구두 통을 메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 번 돈, 그 피 같은 돈을 모아 아이들에게 보냈습니다. 루게릭병이 찾아와 손이 굳어가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구두솔을 놓지 않았습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구두약이 온통 옷에 묻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몸도 성치 않으신데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목사님은 어눌해진 발음으로,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눈빛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 아이들은… 제 심장입니다. 심장이 멈추면 죽는 것처럼, 이 일을 멈추면 저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아이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목사님에게 무엇을 해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들을 위해 자신의 ‘피’와 ‘땀’을 쏟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아이들은 그에게 남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요?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줄 때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나의 ‘피’를 쏟을 때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이유는, 자녀 안에 자신의 피와 살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가르쳐 준 비밀도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 왕자가 지구의 수많은 장미꽃을 보고 실망했을 때, 여우는 말합니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바친 시간 때문이야.”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에 있는 장미를 위해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바람막이를 씌워주었습니다. 그 수고와 희생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 장미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과 ‘책임’이, 어린 왕자가 지구의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의 별로 돌아갈 수 있게 한 ‘구원’의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고, 모두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뛰어난 ‘치유자’, ‘문제 해결사’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왜 그만 돌아왔을까요? 나머지 아홉 명에게 예수님은 그저 ‘병을 고쳐준 고마운 분’ 정도였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치유’라는 선물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선물을 가지고 각자의 삶으로, 세상 속으로 바쁘게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더러운 몸을 깨끗하게 해주신 분,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을 그냥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는 ‘예배’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아홉 명은 ‘치유’를 받았지만, 이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치유는 육신의 문제 해결이지만, 구원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그분은 우리의 ‘문제 해결사’입니까, 아니면 ‘구원자’이십니까? 많은 신자가 성당에 와서 청합니다. “주님, 이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 이 사업이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자녀가 잘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치유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단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아홉 명의 나병 환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주님을 잊고 세상 속으로 떠나버릴 것입니다.
김정하 목사님의 후원 아동들이 목사님의 도움만 받고 끝난다면, 그들은 목사님을 ‘이용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목사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면, 그들도 목사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편지를 쓰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신부님의 사랑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 그들은 신부님의 뜻을 이어받아 의사가 되고, 약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부님을 위해 자신들의 ‘피’와 ‘땀’을 쏟았습니다. 그러자 그들 안에서 이태석 신부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전부’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내어드렸을 때, 비로소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관념적인 신’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살아계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피를 쏟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심장’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분께 응답하고 있습니까? 주일 미사 한 시간 참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사, 예배, 봉헌, 기도는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분께, 나의 ‘피’와 같은 소중한 것(시간, 재물, 마음)을 쏟아붓는 시간입니다. 이것 없이는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문제 해결사’로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도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구나. 내가 너에게 어떤 보상을 주면 좋겠느냐?” 세상의 부와 명예, 지혜, 무엇이든 청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Non nisi Te, Domine. (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문제 해결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부’였고, 그의 유일한 ‘구원’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당신이 베풀어 주신 치유와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선물보다, 선물을 주신 당신을 더 원합니다. 당신만이 저의 참된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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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몇 년 앞두고 위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수술 뒤에도 힘겹게 투병하시면서 퇴직 때까지 성실히 근무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못지않게 수고하신 분은 어머니셨습니다. 날마다 아버지의 점심 도시락과 간식을 준비하셨고, 가려움으로 잠 못 이루시는 아버지와 늦게까지 화투를 치시고는 하였지요. 그러다 졸음이 쏟아지면 가까스로 잠드셨습니다.
어느 날 새벽 어머니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뜨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당신을 내려다보고 계셨는데, 연신 눈물을 쏟으셨답니다. “왜 그래요?” 하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울먹이며 말씀하시더랍니다. “나 같은 사람하고 지금까지 살아 주어서 고마워!” 그날 이후 아버지는 전혀 다른 분이 되셨습니다.
아버지는 많은 이의 인정과 신뢰를 받으셨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참 좋은 분이셨지만, 가족들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시의 여느 아버지처럼 가부장적이셨고, 술기운을 빌려 자녀들에게 손찌검을 하시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그런 분이 하루아침에 바뀐 것입니다. 아버지는 퇴직 뒤에 어머니와 함께 날마다 미사를 다니시고, 두 분은 매리지 엔카운터(ME) 부부가 되어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셨지요.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루카 17,15-16). 아버지의 모든 변화는 어느 날 새벽, 이러한 ‘감사’가 아버지의 마음에 찾아들며 시작되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하고 지금까지 살아 주어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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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11-19: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만난 열 명의 한센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를 전한다. 한센병은 단순한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종교적 고립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치유는 단순히 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회복, 공동체와 화해, 하느님과의 친교 회복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들에게 곧바로 “깨끗하여져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하신다. 이는 율법의 절차를 따르게 하시면서 동시에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명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깨끗해졌다는 사실은, 치유가 순명의 여정 안에서 주어진 은총임을 보여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순명은 모든 기적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순간, 이미 기적은 시작된다.”(Hom. in Mt. 25,2)
열 명 모두 병은 나았지만, 오직 한 사람, 곧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무릎 꿇고 감사드렸다. 그는 단순히 은총의 결과에 머무르지 않고, 은총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나아갔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선언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치유와 구원의 차이를 봅니다. 아홉은 육체적 회복만을 받았지만, 사마리아인은 감사의 믿음을 통해 전인적 구원에 이른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강조한다. “감사하지 않는 자는 이미 받은 은혜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그러나 감사하는 이는 받은 은혜 위에 새로운 은혜를 더 받는다.”(Sermo 36,1) 감사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은총을 굳건히 하는 신앙의 행위다.
교리서는 “감사는 교회 기도의 본질적인 차원이다. 감사하는 기도는 교회의 모든 전례와 기도 안에 스며 있다.”(2637항) 가르친다. 사실 우리의 중심 전례인 성체성사(Eucharistia)라는 단어 자체가 “감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감사의 성사적 실현이어야 한다. 또한 전례 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성체성사는 모든 감사와 찬미의 원천이며, 교회의 생활과 사명의 정점이다.”(10항 참조). 즉, 감사하지 않는 신앙은 이미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이다.
아홉 사람은 치유되었지만, 기쁨을 자기 안에만 가두었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감사함으로써 공동체와 다시 연결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자리에 나아갔다. 감사하는 태도는 개인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다. 불평과 원망은 공동체를 무너뜨리지만, 감사는 공동체를 세운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은혜를 새롭게 하고, 불평하는 마음은 은혜를 죽인다.”(Hom. in Ps. 33,1) 따라서 감사의 영성은 단지 개인의 덕목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생명을 지탱하는 힘이다.
우리도 사마리아인처럼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며, 받은 은혜를 삶에서 증거하는 감사의 증인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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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지막은 감사이어야지요>
루카 17,11-19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지막은 감사이어야지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5-16)
처음엔
어떠했든
가는 길이야
어떠하든
마지막은
감사이어야지요
서툰
처음일망정
뒤에라도
곱게 영글도록
마지막은
감사이어야지요
희뿌연
처음 너머
믿음으로
희망을 이룬
마지막은
감사이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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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너는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1-19)
1)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씀은, 그 병자들이 ‘몸의 치유’에만 만족하고,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냥 가버린 것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씀에서, 하느님께서 아담을 찾으셨던 일이 연상됩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창세 3,9)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하느님께서 아담을 찾으신 것은 아닙니다. “너 어디 있느냐?”는,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깨달아라.”입니다.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본인이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잘못된 것들을 고쳐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씀도, 그 병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알고 계시지만, 그들 자신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라고 아담에게 물으셨는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 아홉 명의 병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것 자체를 모르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씀은,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너희는 그 아홉처럼 하지 마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넓게 생각하면, 오늘날의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2) 예수님께서 지금 “너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예, 주님. 저는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떳떳하게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3) 이야기에 등장하는 열 명의 병자들 모두,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믿었습니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는,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으니까 간청한 것인데, 그들이 그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많이 고쳐 주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문만 듣고서도 믿었다는 점만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아홉 명의 믿음은 그 단계에서 멈추었고, 한 명은 다음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다음 단계’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단계입니다. 그 차이가 생긴 이유, 또는 원인은 무엇인가? 아홉 명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한 명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태도를 근거로 한 해석이고, 진짜 이유는(원인은) ‘궁극적인 희망’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아홉 명은 현세만 생각했고, 현세의 일만 중요하게 여겼고, 인생의 목표와 희망이 현세에만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돌아온 한 사람은 현세보다 내세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인생의 목표와 희망이 내세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도 병이 나은 것을 알았을 때 하느님께 감사드렸을 것이고 하느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라는 것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하느님만 생각하고 예수님은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으니까......>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은 ‘몸의 치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 믿음을 갖게 되었으니까 메시아이신 분만이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되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일보다 예수님께 돌아온 일 자체가 더 중요한 일이 됩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그 믿음을 잃지 말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몸의 건강’은 현세에서만 유용한 ‘현세의 보물’입니다. ‘하늘의 보물’은 ‘영혼 구원, 영혼의 건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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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 시대에 유다 지역에 살던 이들과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이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 기준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다른 민족과 섞여 우상 숭배를 일삼는 불경한 이들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사상이 매우 강하였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 섞여 ‘혼혈’로 살며 이방인들의 종교를 받아들인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나병 환자 가운데 돌아와 하느님께 감사 인사를 드린 이는 사마리아인뿐입니다. 그래서 유다인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시듯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데는 출신이나 이해관계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마리아 사람’으로 단정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각자가 만들어 놓은 편협한 기준에 따라, 때때로 집단 이기주의에 눈이 멀어 혐오와 경멸과 증오의 대상으로 낙인을 찍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일상 속 작은 은총에도 감사드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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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일어나 가거라.”>
지혜서 저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권력을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하느님의 신하로서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며 법을 지키며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치자들이 올바로 다스리지 못하면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무서운 모습으로 너희에게 들이닥치실 것이다. 정녕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지혜 6,5)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한 마을을 들어가시는 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마주 오다가 멀찍이 서서 그분께 소리를 높여 청합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에 대해 전해 주는 이 사료는 루카만이 전해주고 이에 비해 마르코는 한 명의 나병환자를 예수님께서 치유해주시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마르 1,40-45) 여기서 나병 환자들은 당시의 법대로 사람들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멀리서 주님께 큰 소리로 간청했던 것입니다.
루카가 전해주는 이야기에서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보통은 예수님께서 환자의 소리를 들으시고 치유를 하신 다음 사제에게 보이라고 하시는데 여기서는 먼저 나병 환자들에게 먼저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이르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도중에 병이 치유됩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그 나병환자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손을 내밀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치유해주십니다. 그리고 누구에든지 아무 말을 하지 말고 비밀을 지키라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가 사제에게 가서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자신이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하게 하십니다.
루카의 관심은 병 치유와 사제에게 보이는 것도 있지만 병이 치유된 이후에 깨끗하게 된 이들의 행동에 대한 것입니다. 치유가 된 열 명 중에 아홉 명에 대한 관심보다는 다시 예수님께 와서 감사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돌아온 외국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마태 17.17-18)
그리고 주님께서 사제에게 가는 동안 이미 나병이 나았는데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라는 말씀으로 그의 성실함과 감사의 마음을 학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유대인들과의 원수지간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호의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승의 방문을 거부하는 사마리아 인들에게 요한과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불살라버리면 좋겠다는 과격한 표현을 씁니다.(루카 9,54) 물론 그렇게 표현한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야단을 맞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도 벗기고 초죽음이 되었는데 유대인의 대표적인 신앙인 사제도 레위도 쓰러진 이를 못 본척하며 길 반대쪽을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원수지간 같은 사마리아 인만이 쓰러진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됩니다.(루카 10,29-37)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의 사제와 레위가 이룹니다.
나병은 예나 지금이나 무서운 병이고 또한 전염병입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도 나병환자를 일반 사람들로부터 격리 시켰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주님을 만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관습에는 나병환자들은 드러내 놓고 길을 가거나 사람들을 가까이 할 수가 없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쉽게 만나지는 못해도 그분께 대한 믿음을 깊게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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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감사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들려 주십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루카 17,12)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실 때 한센병을 앓는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비를 청합니다. "멀찍이"라는 표현에 당시 사회가 그들에게 가졌던 편견과, 그들 스스로 느꼈던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져 참 마음이 아픕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예수님은 치유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그들을 존중해서 무작정 다가가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어쩌면 결과론적인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악성 피부병을 앓는 이들의 발병 여부나 회복에 대해 확인을 해 주는 이가 사제였으니까요.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4)
치유의 기적은 그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 걸어가는 동안에 일어납니다. 그저 믿고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나은 겁니다. 어떤 결정적 순간이 아니라 믿고 가는 동안...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많은 기적들도 이렇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몸에 정화의 치유가 일어난 걸 알고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를 드린 단 한 사람,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몸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 '사제에게 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고, 그 말씀이 이 모든 놀라운 기적의 열쇠라는 걸 직감했지요.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는 사제의 완치 판정이나 가족과의 재회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 이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다른 아홉은 육신의 치유를 받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적 치유에 영혼의 구원까지 얻습니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세상의 권력자와 통치자에게 지혜를 배우라고 촉구합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지혜 6,7)
통치자, 힘 없는 이들 할 것 없이 누구나 지혜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이들을 콕 짚어 더 엄중하게 지혜를 요구하시는 이유가 있겠지요. 사실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 한낱 작고 보잘것 없는 피조물이지만, 하느님은 일부에게 더 많은 재능과 재물과 권력을 허락하시고 그에 맞갖는 자질과 덕행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을수록 주제 파악이 필요합니다. 본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단지 하느님께서 뭔가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라고 잠시 힘을 맡기셨다는 것을 자각할 때 감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감사는 자신을 알고 타인을 알며 하느님을 아는 이의 덕행입니다. 그렇게 감사할 줄 아는 권력자는 세상을, 타인을, 가난한 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지혜 6,11)
권력자나 통치자가 끝내 얻어야 할 것은 힘이나 명성, 재물, 이권이 아니라 감사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분이 떠나시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는 인간 실존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가 기껏해야 짧게 지나가 버릴 이 풍진 지상 삶에서 도토리 키재기가 목표여서는 안 되니까요.
지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이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지혜를 갈망하고 갈구하는 이는 지혜를 찾아 얻고 지상의 삶과 영원한 생명을 관통하는 가르침을 받아 얻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복음 환호송)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지혜를 구합니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희로애락의 파도에 출렁이고 생로병사의 풍랑에 뒤집어지면서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드리고 있다면 지혜의 길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몸과 마음이 힘들고 처한 상황이 어렵다 해도,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감사할 일들을 꼽아내어 주님 앞에 엎드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비를 청하고 감사를 되돌려 드리는 이들을 결코 그냥 보내지 않으시니, 벗님에게도 치유와 구원이 반드시 함께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은총과 자비의 주님께서 벗님과 함께 하시길 두손모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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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17,18)
<얼마나 감사를 드리며 사는가?>
오늘 복음(루카 17,11-19)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와 소리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하고 이르십니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나병이 나은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 한 사람은 외국인(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그리고 외국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이런 하느님께 나는 얼마나 감사를 드리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루에도 많은 것들을 하느님께 청하면서 사는 우리들입니다. 나병 환자들처럼,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청하면서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아니 매순간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다시 부활하는 우리들입니다.
배은망덕한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받은 은총에 감사드리며 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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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8)
모든 것에
영광을 돌리며
감사로이
내려앉는
낙엽입니다.
열 명 모두
치유되었지만,
단 한 사람만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치유는
우리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치유는 욕망으로
마무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돌아감을 잃어버린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되돌아가야 할
감사의 삶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완성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방식이
감사의 삶입니다.
감사는
교만을 녹이고,
공동체를 살립니다.
감사 없는 신앙은
죽어있는 신앙입니다.
감사는 신앙의
부활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감사가 진정한
믿음입니다.
감사는 존재의
회복입니다.
감사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렇듯
은총 안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감사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진정한 감사는
오늘 이 순간에
깨어있는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가장 좋은 은총인
감사를 놓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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