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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심(2)
다시 사명의 자리로
요 21:1-14 / 서명성 목사
무엇인가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고, 일이 손이 잡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보통 어떻게 하십니까? 어디론가 훌쩍 떠납니까, 집에 콕 박혀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습니까, 영화를 봅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음식을 실컷 먹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난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분의 사역을 지켜보고 사역의 현장에 나가 실습도 하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현재 코로나 pandemic 사태로 인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언제나 함께 계시던 주님이 곁에 계시지 않으니 허전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이미 두 번이나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20장으로 끝이 나도 스토리 전개상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21장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장면을 추가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을 사명자로 분명히 세우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원하신 것은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였습니다. 특히 제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베드로가 21장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그가 과연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주님을 인하여 회복을 경험하며 사명자로 우뚝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3절)
본문은 “그 후에”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미 두 번 나타나셨는데, 그때로부터 얼마 지난 후입니다. 장소가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옮겨졌습니다. 복음서 저자들 중 요한만이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호수라고 부릅니다. 디베랴 호수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는 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에 온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그들을 보자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8:10). 제자들은 그들이 태어나서 자랐고 삶의 터전을 삼았던 갈릴리, 처음 주님을 만났고 주님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추억을 가진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본문에 누가 등장합니까? 시몬 베드로,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 둘 전부 일곱 명입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 회복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친 아픈 기억을 갖고 있었고, 이는 그들이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며 일어서니, 다른 제자들도 그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이 왜 고기를 잡으러 나갔을까요? 주님께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간 것입니까? 문맥으로 볼 때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난 제자들이 며칠도 안 되었는데 주신 사명을 뒤로 한 채 옛날의 삶으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고기를 잡아 생활비를 마련해보겠다는 것이라기보다 마음이 허탈한 상태에서 무엇이라고 해야 될 것 같기에 호숫가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3년 동안 쉬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은 고기 잡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는 그들이 평생 고기를 잡아 왔던 곳입니다. 그날 밤에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은 제자들의 내적인 방황과 영적인 빈곤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도 혹시 삶에 의욕이 없거나 열매가 없고 영적 답답함을 느낀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주신 사명을 잊고 살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그분이 주신 사명을 기억하며 삶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끊임없이 재조정해야 합니다.
“배 오른편에 던지라”(6절)
어느 새 날이 밝아옵니다. 어떤 사람이 호숫가에 서서 제자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로 인해 의욕을 상실한 자기 자녀들을 기억하시며, 언제나 그들 곁에 ‘서’계십니다.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새벽녘의 호숫가에는 안개도 있을 수 있고, 해가 뜨지 않아 어슴푸레한 상황에서 거리도 떨어져 있으니 사람을 식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온 밤을 지새운 곤고함과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공허함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예수님이 제자들을 ‘얘들아’로 부르신 것은 여기뿐입니다. 16:21에서는 같은 단어가 ‘아기’로 번역되었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후에 제자들이 느끼게 될 슬픔과 자신의 부활로 인한 제자들의 기쁨을 여인의 해산에 비유하십니다. 여인이 해산할 때는 고통스럽지만, 아기를 낳으면 그 기쁨으로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근심에 빠지겠지만,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시면 모든 근심을 잊고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16:21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모든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로 제자들을 직접 낳으셨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문법적으로 no를 전제로 던지는 부정의문문으로, 직역하면 ‘너희들은 고기를 못 잡았지?’하는 뜻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실패를 보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의도였습니다.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우리의 생각과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얻었느냐”라고 물으심으로 우리의 부족함과 실패를 깨닫게 하셔서 다시금 주님을 의지하게 만드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많이 잡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들 수 없다’가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으니 제자들이 한동안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었던 상황을 말해줍니다. 주님의 말씀은 고기를 잡는데 있어서 장소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고기를 잡지 못한 이유는 고기가 없는 곳에 그물을 던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없이 고기를 잡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고기를 많이 잡게 된 것은 그물을 던진 장소가 배 오른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시라”(7절)
이때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인 요한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는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그분의 뜻을 잘 알아차리는 인물로 나옵니다(13:23; 19:35). 요한은 그물을 당기다가 문득 3년 전에 있던 사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의하면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들은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일할 기분도 나지 않고, 밤새 그물을 던지느라 육신이 피곤하여 잠시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 아침에 그물을 씻으며 다음번 출항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오셔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5:4)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배를 몰고 나가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순종하여 배를 깊은 데로 몰고 가서 그물을 내리는데 갑자기 그물이 팽팽해졌습니다. 잡힌 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다급해진 베드로가 요한과 야고보에게 손짓을 하자 그들이 급히 노를 저어 왔습니다. 두 배에 탄 어부들이 그물을 함께 잡아당기니 두 배가 물에 거의 잠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에 압도된 베드로가 예수님 무릎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가기를 주저했던 자신의 불신앙적인 태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하시면서 베드로가 장차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배와 잡은 고기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자기들에게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임을 직감한 요한이 “주시라”라고 외치자 다른 제자들도 일제히 호숫가에 서계신 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벗었던 겉옷을 걸치고 물에 뛰어듭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을 당하여 열심히 달려가던 베드로가 이날도 새벽에 갈릴리 호수에 뛰어들어 주님을 향하여 열심히 헤엄을 칩니다. 배와 육지 사이의 거리가 오십 칸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하는데 원어에는 200규빗으로 나와 있습니다. 한 규빗이 45cm 이므로 200규빗은 90m입니다. 예수님께 헤엄쳐 가는 것은 속죄의 몸부림이요 예수님을 향한 영혼의 갈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종을 비롯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끔찍한 실패의 기억은 베드로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마음의 짐을 벗어 던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믿음은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향하여 헤엄을 쳐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주님은 물끄러미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일곱 명이 달려들어도 그물을 끌어당기기 힘든 상황에서 베드로가 빠지니 더 이상 그물을 당길 수 없어 제자들은 고기가 가득한 그물을 매단 채 노를 저어 호숫가로 나아옵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10절)
육지에 올라보니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제자들을 기다리십니다. 밤새 그물을 던지느라 허기진 제자들을 위하여 친히 아침 식탁을 마련하셨습니다. 불 위에 생선이 익고 있고 그 옆에는 빵이 놓여 있습니다. 불 위에 있던 ‘생선’은 헬라어로 ‘옵사리온’인데 일반적으로 ‘말리거나 절인 물고기’를 의미합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큰 물고기가 153 마리입니다. 그때 사용한 단어는 일반 물고기를 가리키는 ‘익쑤스’입니다. 요한이 그저 많은 물고기라고 하거나 대략 백여 마리나 된다고 해도 될 것을 굳이 153마리라고 했을까요? 숫자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며 요한이 요한복음을 쓸 당시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사역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둘 수 있는 비결입니다. 순종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거둔 사역의 열매를 인하여 주님 앞에서 함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12절)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는 초청은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온 자녀들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부르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것과 제자들이 방금 잡은 물고기를 모아 함께 먹습니다. 이것도 동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식탁을 예비하신 분이 누구인지 ‘알기’위해 물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말이나 얼굴로서 자신을 나타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눠 주시는 모습 속에서 예전과 다름없이 신실한 사랑과 자비로 섬기시는 주님을 느꼈습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안타까움과 낙심 속에 있던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주님은 평안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없는 삶과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의 차이입니다. 성도들은 곤고한 자신들 곁에 다가오셔서 영원한 사랑의 식탁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변치 않는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 광야에 있던 무리들을 위하여 오병이어 표적을 행하실 때에는 배불리 먹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갈릴리 호숫가에서 나누는 식사 자리는 조용합니다. 아니 말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뜨거운 사랑이 아직도 싸늘한 아침공기를 훈훈하게 데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모든 사역자들과 신자들의 영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육적인 필요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조반을 먹으라고 하시는 것은 단순한 물질적인 공급뿐만 아니라 교제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함께 하는 식사가 가진 의미 중의 하나는 교제에 있습니다. 주님은 아침식사를 통해서 제자들과 영적인 교제도 함께 나누셨습니다.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첫 번째 나타나심은 제자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심어 주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 나타나심은 도마에게 부활의 확신과 함께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제자들, 특히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님의 사역자로 삼기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명자가 되어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제의 실패에 민감하지만 주님은 오늘의 회복에 더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우리들은 남의 과거를 들추거나 가십으로 만들기를 좋아하지만, 주님은 오늘의 새 출발을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초라한 모습 속에서도 신실했던 어제의 모습을 기억하십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가 범한 죄를 모른척하거나 죄를 미화하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최선의 순간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배신의 고통에서 몸부림치는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은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택한 사람들의 회복을 위하여 세 번 아니 열 번이라도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실패한 우리, 어리석은 우리, 주님을 섭섭하게 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우리 인생의 갈릴리 호숫가에 오늘도 서계십니다. 그곳에서 못 박혔던 손으로 우리에게 사랑의 아침상을 차려주십니다. 삶 속에 풀리지 않은 문제나 혼자서 고민하는 문제들이 있습니까? 과거에 일어난 일로 인한 상처 때문에, 혹은 현재 겪는 어려움을 인하여 아파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신앙생활 할지라도 고난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 분, 언제나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 언제나 우리를 위기에서 건지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 부족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끈질긴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치고, 피곤하고 영적 어둠을 느낄 때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2) 회복을 경험해야 합니다
제자들마다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것을 인하여 심한 죄책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이 실수를 범한 것을 인하여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따뜻한 아침식사를 준비하시고 밤새 고기를 잡느라 지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실패란 예수님의 사랑과 회복을 경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도 때로 넘어지지만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다 아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와 감당할 능력을 주시고 격려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회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가정과 교회와 삶의 현장에서 표현하기 원하십니다. 성경 속에서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을 경험한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3)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밤새 그물을 열심히 던졌으나 허탕을 친 것은 지난 삼년 동안 그물을 던지지 않아 고기 잡는 요령을 잊어버렸거나 갈릴리 바다에 고기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실패와 좌절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가장 복된 것임을 깨우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건지지 못한 그물에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나 잡힌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그 제자들이요, 여전히 그 그물이요, 여전히 그 장소였습니다. 달라진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그물을 던졌느냐 아니면 들은 후에 던졌느냐 하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같은 환경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와 순종하지 않을 때 열매가 다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할 때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고 좌절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세상의 소리가 아닌 주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소리에 담겨진 우리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하여 살기로 다시 한 번 결단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말씀을 통하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요즈음 대부분의 교우들이 전보다 시간의 여유가 많아졌을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말씀을 가까이 할 때입니다. 말씀에 담긴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고 말씀대로 순종할 때 기적을 경험하며 풍성한 감사의 열매들이 맺힙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능력의 원천이신 주님 안에 견고히 서면 사명을 감당해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실패에서 성공으로 바꾸어 주셔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서 고백으로 그리고 고백에서 사명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원하는 인생이 아닌 주님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요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삶입니다. 각자를 향한 사명을 회복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함으로 주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연합 속에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지금은 온라인 예배를 드리지만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고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 함께 사역에 참여하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합니다. 주님 안에 굳건히 서서 주님만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이 채워 주시는, 찢어지지 않는 풍성한 복을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실패한 사람들에게도(1)
요 21:1-11 / 이재철 목사
▶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십니까? 어떻게 믿어지게 되었습니까?
☞ 빈 무덤을 보면 믿을 수 있습니다.
무장한 로마운인이 무덤 앞을 지키고 있었으나 사흘 만에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 예수님의 인격을 믿기 때문에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 성경에서 예언한 것이 성취됨을 보면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루 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1600년에 걸쳐 이루어진 책입니다.
썩지 않게 살리실 것이다 라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부활에 대한 예언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많은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부활을 믿으면서 변화된 모습은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고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이 생기고 인생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마귀와 죄의 유혹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 인생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실패해버린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 베드로가 어떤 것에 실패했는지 살펴봅시다.
☞ 베드로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죽는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말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단아 뒤로 물러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베드로는 기도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겟세마네 동안에 기도하려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자고 있었습니다. 꼭 기도해야 할 사람들인데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며 “시험 든다. 깨어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기도에 실패했습니다.
☞ 베드로는 자신의 혈기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 할 때 혈기가 나서 칼로 병사의 귀를 잘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칼 쓰는 자 칼로 망한다”
☞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 베드로는 자신의 하는 일에도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3절 말씀에 보면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 베드로는 믿음 생활도 실패했습니다.
4절에 보면 예수님이 오셨을 때도 모르고, 주님의 음성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일, 하는 일, 신앙생활 모두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부활주일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실패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물어보십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베드로는 실패한 것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빈 그물을 누가 볼까봐 두려웠습니다.
◈ 우리가 하는 일, 결혼생활, 신앙생활에 실패했다고 인정할 때 그때부터 주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어떻게 역사하시나요?
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9-10절)
예수님은 배고픔을 먼저 채워주셨습니다.
목장식구들의 필요를 채워주십시오. 목장 식구들을 사랑할 때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② 잃어버린 사명을 회복시켜주십니다. (15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시며 사명을 주셨습니다.
③ 잘못을 책망하는 것으로 끝내지 아니하고 회복시켜주십니다.
베드로는 후에 오천명을 회복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사람을 제자라 합니다.
내 사랑하는 양들을 먹이고 세워내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후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베드로를 신뢰하고 많은 생명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축복딘 삶을 살려면(2)
이재철 목사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처지가 오늘 본문에서는 그야말로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거듭된 실패자였습니다.
첫째, 신앙에 실패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가
생명을 위협하는 두려움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함으로 실패했습니다.
둘째, 하는 일에도 실패했습니다. 고기 하나는 눈감고도 잡아내는 어부였지만, 베드로는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3절)
우리 가운데도 신앙과 하는 일, 모두에 실패해 빈 그물질만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바로 이런 실패자들을 찾아가십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하며 떠나갔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들을 떠난 적이 없으시며,
우리가 거듭 실패했을 때도 주님은 친절하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순종한 제자들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린 어땠습니까?
헛 그물질, 빈 그물질만 하지는 않았습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치고, 상처받고, 기대감을 잃어 절망의 끝에 서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런데 바로 그 때, 그 실패자에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사람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한 사람도 다시 일어설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다시 잡은 것처럼...
어떻게 하면 실패자가 복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 축복된 삶을 살려면
① 주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6절에 베드로는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즉시 순종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은 왼편을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내 생각, 고집, 아집...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목수출신인 예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전문가가 비전문가의 말에 순종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순종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걸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 실제 기적의 주인공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모나미볼펜 사장의 이야깁니다.
도산 위기에 몰린 모나미 사장이 하나님께 매달리는데, 계속 회개기도만 나왔다고 합니다.
회개의 내용은 첫째 주일을 빼 먹은 죄, 둘째 십일조를 떼먹은 죄, 셋째 새벽기도를 못한 것까지...
죄들을 회개한 후 성경을 보는데,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사업과 신앙에 실패한 모나미 사장은 실패자 베드로의 재기를 보고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물질만 하던 베드로가 즉시 순종하자 153마리의 고기를 건졌듯 자신도 주님께
즉시 순종하면 복 받을 수 있다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물고기 153마리의 축복을 기대한다는 의미인 <모나미 153> 볼펜이 탄생했고,
지구 50억 인구에게 들려지기를 원하는 기도처럼 <모나미 153> 볼펜은 실제로 50억 개가 팔렸다고 합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첫째, 주일 예배의 중요성입니다. 최소한 주일예배를 드리는 자는 크게 잘못되지 않습니다.
둘째, 십일조는 심고거두는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물질을 심어야 물질을 거둘 수 있습니다
셋째, 새벽기도를 하면 건강을 주십니다. 하루의 시작을 주님께 맡기는 사람에겐
지혜와 분별력 그리고 건강함을 주십니다.
② 주신 축복을 또 다른 사명으로 받아야 합니다. (11절)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듯 넘치는 축복을 받았지만 그물이 찢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물이 찢어진다는 건, 딴 데로 새나가는 것이고, 그것은 곧 헛수고가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그물이 넘치게는 하시되, 찢어지지는 않게 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또 다른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고,
훗날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베드로는 새 사람이 됐고,
실패자의 오명에서 벗어나 또다른 사명인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됐습니다.
그 결과 그가 가는 곳에선 3천명, 또 5천명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했기 때문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물 가득 채운 물고기 153마리는 베드로 자신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진리를 모르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 살면 결코 그물이 찢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가난과 무지에 허덕이라고 부르신게 결코 아닙니다.
축복의 통로로 만들어 사용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정말 복된 사람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새해, 우리 모두 이런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어지길 소망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알게 하는 것
요 21:1-4 / 이수영 목사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알게 해줍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주님의 말씀은 참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한 이후부터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마16:21)을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죽임을 당하시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부활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은 비록 그 내용이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참되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또한 하나님께는 죽은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일을 비롯해서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고 공개적인 처형이었으며 숱한 목격자들이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더욱 의심의 여지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 사람들과 이 세상과 그 뒤에 있는 사탄이 제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온갖 힘과 수단을 동원하고 간계를 부려도 다 헛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들이 꾸미는 모든 일은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것같이 보여도 결국은 허사로 돌아가고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게 지는 것같이 보여도 그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최후의 승리가 주어짐을 증명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 어떤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절대적이어야 함을 가르치는 사건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죽은 자까지 살리시는 부활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는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조차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해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바리새인들은 경비병들과 함께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서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인봉하고 굳게 지켰습니다(마2:66).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예수님의 이름과 존재와 그의 삶과 사역을 십자가로 못 박고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잊어지게 하려는 수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을 때 그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마28:1-4). 죽은 이는 살아나고 산 자들은 죽은 것같이 되는 반전의 역사, 그것이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 무덤의 돌을 굴려낸 천사가 거기 와있던 여자들(마28:1)에게 한 첫 말이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마28:5)는 것이었으며,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떠나 빨리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해 갈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평안하냐?” 물으시며 일러주신 말씀도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마28:8-10).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과 무서움이 기쁨과 평안으로 바뀌는 반전의 역사, 그것이 또한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도마는 처음 예수님께서 문이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봤다고 말할 때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했습니다(요20:25).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하시며 하신 말씀이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요20:26-27). 사도 요한은 이 기록 후에 쓰기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얻게 될 것임을 확신하게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디베랴 호수라고도 하는 갈릴리호수가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갔으나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 일행을 찾아오셨을 때와 꼭 같은 장소, 꼭 같은 시간, 꼭 같은 상황입니다. 이때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던질 곳을 일러주시고 엄청난 수의 물고기를 잡게 해주셨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던 제자들이었지만(요21:4) 비로소 요한이 먼저 알아보고 “주님이시라” 말하게 되었습니다(요21:7). 이렇게 제자들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차례 물으시고 또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도 반복하셨습니다(요21:15-17).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들에 대한 그 어떤 질책도 유감의 표시도 없으신 주님을 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오직 이들을 처음 만나셔서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신 말씀과 사실상 같은 뜻의 말씀인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만을 듣습니다. 변심한 제자들에게 한결같은 사랑과 신뢰를 보이시는 주님을 발견합니다. 연약하고 비겁한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며 귀한 사명을 맡기시는 주님을 대하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렇게 먼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의 화해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알게 해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입니다.
부활 후 사십일 동안(행1: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려지시기(막16:19) 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에게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의 제자를 삼는 선교의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 그것이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선교의 지상명령에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하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그것이 또한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던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을 때 그들에게 나타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눅24:13-16). 그들은 예수님이 당신에 관하여 성경에 씌어진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는 말씀에 취하여 그의 말씀을 계속 듣고자 함께 하루를 묵으시도록 예수님을 강권하고 집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주님을 알아보았지만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보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눅24:27-31). 또 두 차례나 제자들이 집에 모여 있을 때 문을 닫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기도 하셨습니다(요20:19, 26). 그리고는 그것이 유령의 출현이나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님을 믿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못 자국 난 손과 발과 창에 찔리신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며 손을 넣어보라고 하셨습니다(눅24:40, 요20:20, 27).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눅24:41) 물으시고는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자 받으시고 그 앞에서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눅24:42-43). 오늘 본문 12-13절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갈릴리에서 다시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에도 말씀하시기를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고는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 이 사실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게 합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과 비연속성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처럼 행동하시며 그때의 제자들과의 관계도 그대로 유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모습도 보여주셨습니다.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시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셨습니다. 문이 닫혔는데도 자유롭게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은 부활 후의 우리들도 그러할 것임을 예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활 후에도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과는 일정한 연속성이 유지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가졌던 부모자식관계 등이 하늘나라에서는 다 소멸되고 모두가 남남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족관계는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제 식구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다 형제자매처럼 사랑하게 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연속성과 함께 부활 후의 우리 앞에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갖는 온갖 제약이 사라진 놀라운 삶이 또한 전개될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부활입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 앞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의 참됨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확고히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이성의 능력으로 이해하거나 증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갖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까지도 살리시며 능치 못할 것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맞서며 주의 몸 된 교회를 적대시하는 이 세상과 그 뒤에 있는 사탄의 온갖 간계와 장난과 위협에 굴하지 않는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는 항상 하나님과 그 백성에게 있음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 어떤 난관과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믿음과 의로운 삶을 포기하거나 악한 세력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진리와 정의가 거짓과 불의를 이기는 반전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남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죽는 이가 살고 거짓과 불의로 사는 자는 망할 수밖에 없음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이 결국에는 주님에 의해 기쁨과 평안으로 바뀌게 됨을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얻게 될 것임을 확신하는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변심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의 화해를 이루시며 우리에게 하나님나라의 귀한 사명을 맡기시는 하나님에 대해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일생 순종과 충성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고 널리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주님의 부활이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앞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땅끝까지 나아가 모든 민족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의 제자를 삼는 선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앞에서 우리는 믿는 이에게 허락된 놀라운 세계와 성령께서 이끄시는 능력의 삶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힘껏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 21:1-14 / 이필재 목사
부활하신 주님은 여러 번 자신의 몸을 나타내 보여주셨는데 오늘 성경말씀 14절에는 세 번째 나타나심이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한 가지 이상한 느낌이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을 하셨다면 그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예루살렘 대 군중집회를 여셨으면 좋았을 것을….’ 이런 아쉬움이 있죠? 그럴 경우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더 많이 믿게 될 것 같은데, 부활의 주님 출현과 오늘 말씀의 내용은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일까봐서 몰래 숨어 다니시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복판에 나타나셔서 대제사장이나 빌라도에게 “보라! 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내가 말한 대로 이렇게 살아났느니라.” 그러면 얼마나 사람들이 겁을 먹고 벌벌 떨겠습니까? 또, 욕하고 비난하던 예루살렘의 수십만 군중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가 죽이라고 소리치던 내가 살아났으니 보라! 내가 그다.” 이렇게 하시면 제자들도 신이 나서 옆에서 큰 소리를 칠 수 있을 테니 천지개벽하게 뒤집어엎는 부활 출현을 하시면 좋았을 것을 왜 이렇게 숨어서 다니시는가? 오늘 말씀에 나타난 시간이 새벽이라고 했습니다. 밤새도록 갈릴리 호수를 몰래 찾아오시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주님의 부활 출현의 목적을 보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데, 주님은 이미 지난 3년 동안 그러한 군중집회 출현을 수없이 많이 하셨습니다. 10,000명이 모인 자리에서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로 다 배불리 먹이는 신비의 기적도 보여주셨고,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둔 적도 있고, 예수님이 보여주지 아니하신 기적이 없습니다. 아열대 기후에서 일어나는 광풍이 갈릴리 바다를 몰아칠 때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바다여 잔잔하라.” 잔잔케 하셔서 자연의 힘도 다스리셨고, 그 다음에도 오늘 말씀과 같은 내용이 얼마든지 나와 있습니다. 현대 과학문명으로도 고치지 못하는 불치의 환자들을 예수님이 현장에서 다 치유를 해주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혜택 받은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집회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에 꼭 필요한 자들만 골라서 부활 출현을 경험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열 두 제자 중에 일곱 제자가 함께 고기잡이하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과 야고보, 요한 그리고 다른 두 제자라고 했습니다. 장소는 갈릴리 바다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로 나타났는데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28장 10절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또 마태복음 28장 7절에 보면 천사들이 똑같은 말을 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천사들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의 일치성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오늘 말씀에 예수님이 갈릴리에 나타나셨습니다. 왜 갈릴리인가? 지금 제자들은 다 예루살렘에 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장소도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나라의 맨 끝 지방인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 본문에 나타난 상황을 자세히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상황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만났던 마태복음 4장의 상황과 똑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8절에 보면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첫 번 만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똑같은 장소에서 그때와 똑같이 고기 잡는 어부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3년 전과 똑같은 원점의 지점에서 만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의 제자들은 3년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훈련은 사도적 훈련입니다. 사도적 훈련이란 주님이 하늘나라로 가신 이후에 주님이 하셨던 일을 내가 대신해서 똑같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게 정반대로 3년 전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장소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큰 효과가 있는 방법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라는 글이 있는데, 첫 번째로 에베소 교회에게 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런 말이 나오는데 되찾는 방법을 말해줍니다. 2장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첫 번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역사 유적지는 보존합니다. 어떤 곳에 가보면 다 헐어진 폐허 같은 곳도 있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터를 모두 가보았는데 폐허가 아닌 곳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다 무너진 폐허를 보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폐허를 보존합니다. 왜? 무엇에 쓰려고? 그곳에 보면 그때의 역사를 알 수 있는 힘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처음 만났던 갈릴리로 제자들을 오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만났던 처음의 영적 유적지를 찾아서 거기서 다시 시작하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한 가지 영적으로 좋은 일이 있습니다. 제가 이 고장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고 불곡산에 산 기도를 하러 다니다가 소명을 받았고 그토록 열심히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주님 앞에 청소년 시절 헌신을 하던 그런 장소인데 그 장소들이 다 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나의 목회활동이나 영적인 일에 너무나도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태재 고개가 저렇게 아스팔트가 깔린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버스 한 대가 겨우겨우 전복되지 않고 건너가면 다행인 길에서 자동차가 수없이 많이 전복되었습니다. 그토록 길이 나쁜 고개 길이 겨울이면 눈이 하얗게 쌓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 오포에 있는 교우들을 목사님이 심방 가셨는데 낮엔 교우들이 일을 하니까 밤에 심방을 가셨단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목사님을 따라서 심방 가방을 늘 제가 들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폐병 3기로 건강이 나쁘셨기 때문에 찬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기침을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제가 옆에서 목사님 손을 붙잡고 그 고개를 수없이 눈길을 헤치고 오르내리며 심방을 따라다녔던 일이 다 생각난단 말입니다. 시골 교회에 인재가 없으니까 목사님이 저를 보시고 기특하게 생각하셔서 열여덟 살에 집사를 시키셨던 말입니다. 그러니까 또 신이 나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나한테 속에 있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건강도 나쁘시고, 솔직히 말해서 설교도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고 길게 하시고 그러니까 교회도 잘 부흥이 안 되고 답답하시니까 속에 있는 말씀 많이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보다 내가 더 어렸는데, “이 집사, 우리 교인들이 나 싫어하지?” “에이, 왜 싫어합니까? 목사님 다 사랑하고 존경하는데요.” “나는 내가 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꼴지 목사다. 그런데도 우리 교인들이 나를 사랑하고 도와주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목회 할 수 있는 거야. 아무래도 나는 건강 때문에 일찍 죽을 것 같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나보다 더 훌륭한 목사님 모시고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거라.” 그런 이야기를 이 고개 넘나들면서 하셨는데 어떤 때는 목사님의 손을 붙잡고 갈 때 목사님 눈에서 눈물이 내 손등에 뚝 떨어져서 “아, 목사님 왜 그러세요? 울지 마세요.” 그러면 찬송가를 곡조 맞게 부르시는 게 하나도 없는 목사님이신데 복음성가 한 소절 잘 하시는 게 있었습니다. “♬ 재목 없어 집 못 짓고 살 곳 없어 여기 왔나 죽어 가는 저 영혼을 주의 종아 어이할꼬♪” 그 분이 그것 밖에 모르니까 나도 그것밖에 모릅니다. “내가 죽으면 좋은 목사님 모셔라!” 그러면서 막 우시는데, 어느 날 제가 자동차를 타지 아니하고 밤에 혼자 불곡산까지 태재 고개를 넘어가면서 달밤의 하늘을 쳐다보며 목사님의 이름을 부르며 한없이 울며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나한테 영적으로 너무 좋은 은혜를 끼친단 말입니다. 왜? 내 신앙의 역사 유적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은 제자들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너희들 이리 와! 갈릴리에서 만나자! 처음에 나를 만나서 어떻게 약속했지?” 이들을 역사의 영적 유적지로 데리고 와서 지금 재훈련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제자들은 3년 전에 하던 일을 지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상 적부터 그 일을 해온 사람들이라 고기 낚는 일에는 전문가들입니다. 지금 고기를 잡고 있는 시간이 밤입니다. 밤새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왜 밤에 고기를 잡고 있는가? 그것은 전문 지식입니다. 그곳 기후조건과 고기들의 움직임이 밤이래야 잘 잡힌다는 전문가들의 판단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상 적부터 익혀온 전문가의 노력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 밤에 하나도 잡지 못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밤새도록 그물을 던진 사람들이 계속 배 왼편으로만 던졌겠습니까? 오른편에도 수백 번 던졌을 것입니다. 고기 잡는 일은 예수님보다 제자들이 잘 압니다. 제자들이 말할 수 있습니다. “고기 잡는 일은 우리가 전문가요 당신은 누군데 전문가를 가르치십니까? 배 오른편에 우리가 밤새도록 수백 번 던져보았습니다.” 합리적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더라.” 자세한 기록이 나옵니다. “잡힌 고기가 큰 고기만 153마리라. 그러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같은 장소에서 밤새도록 전문가들이 한 마리도 못 잡았는가? 또 어떻게 한번에 153마리를 잡았는가? 여기에 하나님의 관계성이 나타납니다. 이 사건은 어부들이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것이 불쌍해서 고기 잡는 기술을 가르쳐주려고 한 것도 아니요, 고기는 언제나 배 오른쪽으로 몰리니까 거기서 그렇게 잡으라고 고기 잡는 기술을 가르쳐 주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이제 너희는 나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할 것이다. 나의 허락이 있을 때에만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이미 3년 전에 고기 잡는 일을 그만두고 사람 낚는 어부의 부르심을 받지 아니했느냐? 이제 고기 잡는 것도 나의 말대로 될 것인즉 나를 떠나서는 너희 말대로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인생의 헛수고자가 될 것이다.” 한번 그물을 던져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만큼의 고기가 잡혔다는 말이 다소 우리 마음에 믿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제가 목사님들을 위한 세미나 강사로 오라고 하셔서 대전에 갔는데 큰 수양관에 목사님들이 천명 정도는 모이신 것 같았습니다. 한국에서 활동을 안 했기 때문에 저를 모르실텐데 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2시간 동안 강의를 열심히 하고 모두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많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 강의가 끝난 다음에는 어떤 집사님이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제가 김성태입니다.”라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저도 들은 바가 있었는데 포항에서 고기 잡는 어부라고 간증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뭘 간증하러 오셨는가 들어봤더니 어부 간증하러 오셨다는 겁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아주 낡고 보잘 것 없는 곳이라서 늘 수리하고 싶었지만 수리비 몇 천만 원이 없어서 어떻게 융자를 받아서라도 수리해보자고 목사님과 얘기를 했는데, 그 집사님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해서 한번 시작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부 집사님은 수산업이 잘 안되어서 5억인가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빚지고 살아가야지 어떡합니까? 그런데 이 어부들은 지나다니는 고기가 잡히라고 바다에다 어망을 쳐놓는다고 합니다. 어부들마다 여기저기 어망을 쳐놓으면 고기가 잡혀서 수입이 되니까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성탄절 새벽에 그 어망을 쳐놓은 데서 전화가 와서 빨리 나와 보라고 했다는 겁니다. 나가보니까 사방에 어부들이 그물을 쳐놨는데 다른 사람의 그물에는 한 마리도 들어가지 않고 자기가 쳐놓은 그물에 ‘방어’라고 하는 아주 큰 고기가 5천 마리 가량이 잡혔다는 겁니다. 아니, 그 옆에 더 좋은 그물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거기에는 한 마리도 안 들어가고 5천 마리가 일렬로 나란히 자기 그물에만 들어왔다는 겁니다. 태평양의 방어가 다 그 그물로 들어와서 한꺼번에 잡아 5억 빚을 다 갚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이 간증하러 다니는 겁니다. 그 집사님의 간증이 베드로의 기적 체험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153마리가 들어갔다고 했는데 그렇게 좋은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는 한 마리도 안 들어오고 5천 마리가 한꺼번에 잡혔으니 기적 체험인 것입니다. 여기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더라”라고 했는데 이 집사는 5천 마리의 방어를 배에다 싣고 오는데 제일 걱정스러운 게 가라앉을까봐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적은 오늘날에도 있는 것이다.”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인데도 고기 잡으러 왔기 때문에 지금 주님에게는 큰 문제가 된 겁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수제자가 왜 갈릴리로 와서 이렇게 고기를 잡는가? 이미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두 번이나 목격하고 세 번째로 목격하게 되었는데. 오늘 말씀을 보시면 일곱 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무엇인가는 의논하고 있습니다. 그 의논은 뻔합니다. “야!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그러면 이제 우리 할 일은 무엇인가?” 저마다 의견을 내놓고 의논을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결정을 합니다. 3절에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이 말은 사도직 사표 선언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하여도 그의 제자로써의 생활이 싫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안 하겠다는 겁니다. 나름대로 계산했을 것입니다. “그래, 살아나셨다고 하자. 무엇을 할 것인가? 해봤자 과거 3년 동안 했던 그런 일이다. 그 마지막의 결과가 십자가였다. 또다시 한들 더 이상 무엇이 있겠느냐? 또다시 우리에게 그런 고난이 닥쳐올지 모른다. 나는 이제 그만두기로 하고 내 생계를 위해 어부생활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겠다.”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어떤 모임의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은 다소 힘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결정을 따라 움직이는 문화가 어느 사회에나 있습니다. 안 따라가면 왕따가 될 것 같습니다. 앞장섰던 베드로가 그런 결정을 내리니까 다른 6명의 제자들이 금방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도 가겠다 하고” 실제로 살펴보면 이 제자들은 네 명만 어부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따라갔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일종의 꼬마대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로 가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나섰다가 뜨거운 맛을 보았다. 다시는 안 하겠다. 그냥 조용히 고기나 잡아서 구차한 생활이지만 이것이 훨씬 낫겠다.’ 그런데 그들의 밤새도록 수고는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입니다. “이제 너희는 고기 잡는 일도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잡지 못한다. 내가 한번 증거를 보여주겠으니 그물을 한번 배 오른편으로 던져 보라.” 한번에 만선의 고기 수확이 이루어졌습니다. “보라! 너희의 전문 지식으로 밤새도록 수백 번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했다. 내 말에 의해서 들어올릴 수 없을 만큼 건졌으니 이 사건 속에 담겨진 영적 교훈은 네가 알겠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오늘 새벽 교황이 선종했다는 소식이 온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는 바티칸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나라의 통치자는 가장 영향력이 큽니다. 지난 30년 동안 세계는 절대적 변화를 겪었는데 그것이 공산권 사회의 변화입니다. 이 교황은 공산권 출신으로 공산권 개혁에 앞장섰던 지도자였습니다. 지금 온 세상은 자국의 모든 일반 방송을 중단하고 교황의 선종 특종 보도를 몇 시간씩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지구 안에서 어떤 사람의 죽음을 이토록 관심 있게 보도하는가? 없습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이렇게 온 세계가 난리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관심의 인간죽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만큼 그의 자리가 크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요한 바오로 2세 그가 누구인가? 베드로의 후계자입니다. 천주교회에서는 베드로가 1대 교황입니다. 그 후계자 하나가 죽었기 때문에 이렇게 세상이 난리를 치는 겁니다. 그 첫 번째 자리에 베드로가 서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베드로를 그렇게 만들려고 찾아오신 겁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명이란 것은 우리가 버릴 수 없습니다. 저는 필리핀 나환자촌에서 선교하는 선교사 부부를 많이 협조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현지에 가기도 했고 헌금도 많이 보내주고 자동차 없다고 해서 자동차도 사주고 오고 여러 가지를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의 간증이 있었는데 결혼해서 아직 아기도 없는 신혼부부였을 때 남편이 “나는 나환자 목회를 하겠다. 나환자 2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필리핀으로 가겠다.” 사모님이 반대했습니다. “아니,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런 일은 나중에 해도 되지, 나는 나환자촌은 정말 못 가겠다.” 합의가 안 이루어지는데 그러니 이럴 때는 어떡하죠? 목사가 이혼할 수도 없고 소명은 그쪽에 있는데 부인은 안 간다고 하고…. 사실 결혼하자마자 나환자촌에 가서 봉사한다는 게 보통 일입니까? 저는 수없이 다녔지만 가서 보고 오는 것만 해도 어렵습니다. 그 사람들하고 같이 밥도 먹어야 됩니다. 그 사람들과 같이 피부도 접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하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이 남편 목사가 딱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좋다. 내가 당신 의견을 따를 테니 내가 그렇게 마음 먹고 하고 싶었던 필리핀 나환자촌 선교를 한번 가서 구경만 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끝내자.” “좋아요.” 그래서 둘이 현장에 가서 보자마자 “그렇지. 내가 안 온다고 하길 잘했지. 내가 저 환자들이랑 어떻게 같이 살아요? 됐어요. 이제 와봤으니까 됐어요. 어서 가요!”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이별을 고하고 발길을 되돌려서 오려고 하는데 손이 다 없어진 나환자 한 명이 어디서 구했는지 그 손으로 새빨갛게 잘 핀 장미꽃 한 송이를 꺾어서는 떠나는 선교사들 앞으로 오는 겁니다. “떠나지 마세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장미꽃 한 송이를 사모님에게 건네주는 거예요. 필리핀 사람들은 영어가 공용어입니다. 그 사모님에게 장미꽃을 전달하면서 “I love you.” 그 사모가 그 꽃을 받아들고 그 자리에 팍 주저앉아 막 울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 이리로 와요.”라고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목사가 ‘이건 성령님이 역사했다.’ 가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지내고 게십니다. 사모님이 그들 밥을 다해주고 그 목욕 다 시켜주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도망간 베드로를 찾아오신 겁니다. “나는 너에게 준 사명이 있어. 그 사명을 위해서 네가 일해야 돼!” 오늘 교황의 선종 소식을 들으면서 그 첫 번째 자리에 베드로를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역을 잘 감당하는 사역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버리고 떠난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사명의 재훈련을 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이 나의 사역도 그렇게 함께 하실 것을 믿으며 오늘 이 역사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주님의 사역을 훌륭하게 잘 감당해 가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주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이일기 목사
인생은 만남과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더욱 많은 만남의 기회를 가지게 되는데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생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 만남 속에서 사는 동안 삶의 성공적인 요소를 말할 때 사람은 누구나 ①때를 잘 타고나야 하며 ②환경이 좋아야 하며 ③사람을 잘 만나야 된다고 말합니다.
에스더는 남편(왕)을 잘 만남으로 동족을 구원하였고,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은 하녀를 잘 만남으로 문둥병을 고쳤고, 목동 다윗은 친구를 잘 만남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며, 애굽 왕 바로는 요셉을 잘 만남으로 국난을 극복했고 사울은 예수님을 잘 만남으로 위대한 전도자 바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또 사람을 만난다고 다 기쁘고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때로는 잘못된 만남으로 화가 미치고 실패가 따르고 불행해지는 경우도 있는 만큼 만남과 선택에 대단한 신중을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예배당은 출입하면서도 오랜 세월을 지내 오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형식과 외식에 사로잡혀 신앙의 본질이 되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체 살아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생의 의미와 기쁨도 없이 근심과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혀 고달픈 생활을 하는 성도가 만일 있다면, 오늘 이 시간 내가 잃어버린 그 예수님을 만나서 생의 기쁨과 목적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 제자들의 현재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악을 해결하시고 택한 백성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코자 이 땅위에 생명의 주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공생애 사역 3년 동안 훈련을 시키시면서 천국 운동을 전개해 나가셨고 이에 제자들도 열성으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과는 달리 주님께서 어떤 신비한 이적과 권능을 행사하여 로마 식민지로부터 고통 받는 유대 나라를 해방시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지긋지긋한 세금을 내지 않음으로 나라가 경제적으로 안정이 될 것이고 제자들도 제각기 일등 공신이 되어 모두들 한 자리씩 잡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기대에 부풀어서 열과 성을 다해 전답과 가족들을 떨치고 따라 나섰던 제자들에게 이게 웬일입니까?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①내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 ②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③나는 이제 곧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터인데 그때는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떠나가리라고 하십니다.
마 26:31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 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자 제자들은 선생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선생님의 놀라운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선생님께서 베풀어주신 능력이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우리가 선생님을 끝까지 지켜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을 합니다(마 26~35).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허탈감에 빠져 부활에 대한 기대감도 잊어버린 체 실망만 안고 제각기 갈릴리의 옛 생활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독립운동도 허사야 모든 것이 실패야 우리는 우리의 분수대로 살아야지, 갈릴리에서 고기나 잡는 게 더 어울리는 거야, 공연히 헛된 꿈만 꾸었어 하면서 3년간이나 내어버렸던 낡은 배와 그물을 정리해 가지고 고기잡이를 나갔습니다.
0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과거의 경험과 실력을 되살려 그날 밤이 지나도록 깊은 데도 다니고 얕은 데도 다니면서 그물질을 해 보았지만 뜻대로 되어지지 않고 수고의 열매도 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0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지금 갈릴리 바다에 와 있는 자들은 흔히 말하는 불신자나 초신자가 아닙니다. 3년 동안 주님과 동고동락하며 신앙의 훈련을 받았던 자로서 한 때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걸어 놓고 복음전파에 앞장을 섰던 갈릴리 출신 어부들입니다.
이들이 깊은 회의와 실망 속에서 복음의 현장을 떠나 옛 사업장인 갈릴리 바다를 찾아와 그물질을 하였는데 잡지 못했다고 답을 합니다.
이들이 그래도 이곳에서 각기 나름대로 내로라하던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여지없는 실패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실패의 모습에서 사람의 방법을 따라 살면 잘 될 것 같으나 잘 되지 않는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 05절을 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2. 일곱 제자들이 왜 갈릴리 바다의 고기잡이에서 실패를 하였습니까?
베드로가 주동이 되어 이미 버린 것 되찾아서는 안 될 것을 찾아 행했기 때문입니다. 과거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본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으나 주님은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부르셨고 3년 동안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막 1: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다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이미 예고해 주셨지 않습니까?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그렇다면 이제 현실을 다시 한 번 믿음으로 돌아보고 믿음으로 자신들의 앞날을 설계해 보아야 할 시점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자신들의 진로를 믿음으로 생각지 않고 세상적인 관점, 불신적인 관점에서 돌아보았으니 당연히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갈릴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이내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할 때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섰다고 했습니다.
0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미 3년 전 떠났던 그곳으로 되돌아갔는데 여기서 문제는 베드로입니다. 그는 경륜이나 연배에 있어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점에 있어서 수장이었지 않습니까?
비록 늦긴 했지만 그때 만일 그가 믿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나는 지금 주님의 부활을 전하러 간다 하면서 나섰더라면 어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다른 제자들도 함께 따라 나섰을 겁니다.
그런데 그가 앞장서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하면서 나서는 바람에 다른 제자들도 바다로 따라 나서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미래적이며 전진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종교이지 뒤로 돌아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동이 된 실패는 옛 생활, 지난 과거로 회귀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그리워할 필요도 없는 것은 오늘이 중요하고 내일이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02,03절을 보면 그날 배타고 함께 나선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 둘 등 일곱 명입니다.
그러니까 열 한 제자 중에 무려 일곱 명이 작당하여 고기 잡으러 떠났는데 베드로의 말 한 마디에 여섯 명이 줄에 묶인 것처럼 따라 나섰다면 그 당시 그들의 정신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하느냐? 누구와 작당하느냐? 누구와 친하느냐? 누구와 자주 만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과 신앙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킹슬리(Kingsley 1819~1875.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대학의 근대사 교수)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아름다운 인생을 살면서 명문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의 대답은 나에게는 진정한 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한 그 친구는 곧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3. 제자들이 주님을 만난 장소는 어느 곳입니까?
0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디베랴 바다: 남북 20.8km, 폭 12.8km, 수심 60m, 해발 200m 로서 디베랴 바다라고 불려진 이유는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 황제 디베료를 기념하기 위해 서편에 그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 한데서 유래되었습니다.
다른 명칭으로는 갈릴리 바다(마 04:18), 긴네렛 못(민 34:11), 게네사렛 호수(눅 05:11) 라고도 불려 지며 이스라엘의 유일한 수원지로서 종교 문화 산업의 발상지입니다.
바로 이곳에 주님은 신앙의 자리에서 실패한 제자들, 예루살렘을 떠난 제자들, 고기잡이에 실패한 제자들에게 찾아주셨습니다.
다시금 신앙의 회복과 장차 교회를 이끌어 갈 일꾼으로 삼으시기 위해 이 디베랴 바닷가를 찾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주님을 다시 만나는 디베랴 바다의 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만나면 해결이 됩니다.
아직까지 신앙의 체험이 없고, 가슴에 뜨거움이 없고, 구원의 확신이 없고, 미온적 상태에 있는 자신의 모습입니까?
신앙의 부흥이 없고, 주의 일에 관심이 없는 분은 제자들처럼 주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골방에서, 제단에서, 산상에서, 깊이 기도하다가 주님을 만나기도 했는데 우리에게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야곱은 얍복강변에서(창 32장), 모세는 호렙산에서(출 03장), 기드온은 타작마당에서(삿 06),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행 09장), 요한은 밧모섬에서(계 01장), 삭개오는 뽕나무에서(눅 19장) 각기 전능자를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전능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신앙의 사람, 큰 일꾼이 되었다면 우리 성도들도 제각기 환경과 여건은 달라도 주님을 만나도록 합시다. 그리고 큰 축복을 받읍시다.
4. 주님과의 다시 만남 이후의 생활을 살펴보십시다.
모든 일에는 출발보다 결과가 더 중요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신앙의 과정들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시간들과 그 결과는 더욱 더 중요합니다.
사람은 일의 결과에 큰 관심이 가게 마련인데 오늘의 말씀은 주님을 만나게 되면 신앙생활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축복도 따르게 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0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제 제자들은 전능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주님을 다시 만난 그 감격으로 인하여 일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신앙의 회복과 부흥이 일어나게 됨으로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나라에 크게 쓰임 받는 인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 좀 흔들리지 맙시다. 굳건하게 서시고 은혜 받은 제자들처럼 든든하게 서 봅시다.
①신앙의 새 출발과 사명을 확신케 되어졌습니다(15~20).
베드로가 비자 앞에서 변절되었던 신앙이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됨으로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모든 제자들이 순교의 길을 가게 되었음을 역사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네로 황제의 신앙의 박해 때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를 하였으며,
안드레: 헬라에 있는 파트레에서 우상에 대한 배격의 메시지를 전하다 지방 총독에 의해 순교 당하였으며,
야고보: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최초로 순교를 당하였으며,
빌립: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도마: 인도에서 복음 전하다 이방 제사장들에 의해 순교 당하였으며,
나다나엘:(바돌로매) 우상 숭배자들의 칼에 순교를 당하였으며,
요한: 밧모섬에서 유배되어 하나님의 감동으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였고 제자들 중 가장 오래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비겁자요, 배반자며, 회의론 자들이었지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 믿음의 담대함을 얻어서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②신앙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으며 기도의 사람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온 성도들이 합심 기도하는 가운데서 오순절날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의 충만함을 입음으로 인하여 새로운 인생관을 가지게 되었고 물질관도 달라졌습니다.
행 03:0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하고.
이후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 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01:04)는 말씀을 따라서 반드시 있어야 할 곳에서 묵묵히 그리고 뜨겁게 주님의 일을 잘 행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혹 우리 중에도 일곱 제자들과 같은 실패의 처지에 놓인 분이 계십니까?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실상은 주님을 잊어버린 체 실패의 자리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필코 주님과의 다시 만남의 현장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나를 사랑하는 주님을 내가 다시 만나게 되어질 때 근심과 걱정과 회의가 사라질 것입니다. 믿음의 확신이 오고 영육간에 성공이 올 것입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성공의 자리로, 빈손이 가득 차고 넘치는 축복으로 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하시는 오른 편에 던지라. 이 명령에 순종할 때 축복은 나의 것이고 분명히 놀라운 변화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 하나는 아십시오. 내가 결정한 오른편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 주님께서 결정한 오른편이어야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지 못했다면, 사업가가 사업에 실패한다면, 장사꾼이 돈을 벌지 못한다면, 교육자가 교육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이며 사건입니다.
허탈감에 빠졌던 갈릴리 어부들, 실패한 어부들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성공 비결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오신 주님을 ①먼저 만났고 ②다음에는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나를 믿고, 경험을 믿고, 배경을 믿다가 실패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철석같이 믿었던 조건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바람에 주저앉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있고 방법이 있습니다. 실패와 허탈과 절망의 바닷가에 찾아오신 그 주님을 내가 만나서 상담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내 경험과 내 생각과 내 상식에 안 맞더라도 즉시 지금 순종하십시오.
주님의 방법대로 다시 시작하시라는 말입니다. 반드시 축복을 안을 수 있는 성공이 올 것입니다
그날 아침 갈릴리 바닷가가 예수님을 모신 축제의 자리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네 실패와 고통의 자리도 축제와 성공의 잔치 자리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
요 21:1-14 / 서명성 목사
살다보면 열심히 달려온 것 같은데 결과가 별로 신통찮은 경우가 있습니다. 밤새도록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하였는데 전혀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문제가 나오면 얼마나 당황합니까? 새로운 사업을 하면서 온갖 정성을 기울였는데 기대한 만큼 매상이 오르기는커녕 적자가 쌓일 때 얼마나 답답합니까? 아무리 수적인 성장보다 성숙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교인들의 숫자가 늘지 않을 때 목회자가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제자들은 지난 3년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사역을 지켜보고 자기들도 전도 현장에 직접 나가 실습도 하며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늘 함께 계시던 주님이 계시지 않으니 그들은 지난 몇 주 동안 낙심, 좌절, 불안함 속에서 보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갈릴리에 오기는 왔으나 여전히 마음이 허전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나와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승천하시면 예수님을 대신하여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데 제자들은 아직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오시며 그들을 회복시키셔서 사역을 감당할 준비를 시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 나타나셨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이 부활하신 첫날 저녁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 의심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평강을 선포하십니다. 그러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낸다고 하시며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어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며 자신의 생기를 제자들에게 불어넣는 상징적인 행동을 하십니다. 주님이 처음 오셨을 때 마침 도마가 없었기에 팔일 째 되는 날 두 번째로 오십니다.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평안을 선포하시면서 도마에게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0:27)고 하십니다. 도마가 가졌던 의심이 일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때 도마는 어느 누구도 해보지 않은, 요한복음의 절정을 이루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주님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하시면서 제자들보다 지금 우리가 더 복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20장으로 끝이 나도 스토리 전개상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21장에서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장면을 추가합니다. 제자들은 깨어서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었기에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두려워 도망을 가고 예수님을 배신하면서 부끄러운 행동을 하였습니다. 실패와 도주와 상심으로 무너진 제자들, 특히 대제사장 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격렬하게 부정했던 베드로는 주님을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제자들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행동을 하였든지 자기가 뜻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 낙심한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회복시킬 뿐 아니라 제자들처럼 처음 부르셨던 때의 감격을 되새기며 사명감을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네 오른 편에 던지라”
본문은 “그 후에”로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셨던 그 후에. 장소는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옮겨집니다. 티베리아 호수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갈릴리 호수에 붙인 이름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는 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 지방에 온 이유는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라’(마 28:16)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처음 주님을 만났고 주님과 더불어 많이 사역하던 갈릴리로 돌아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사실도 믿어지고 예수님이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도 알고 있으나 삼 년이나 항상 같이 계시던 예수님이 안 계시니 허전합니다. 지금 갈릴리 호수에 누가 나와 있습니까? 시몬 베드로,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 둘 전부 일곱 명입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섭니다. 왜 고기를 잡으러 나갑니까? 예수님을 따라 다녀보았자 별 볼일 없으니 다시 고기 잡기를 원함입니까? 베드로가 주님께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옛 직업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체적인 문맥으로 볼 때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난 베드로가 불과 며칠도 안 되었는데 예수님께 주신 사명을 마다하고 옛 직업으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고기를 잡아 생활비를 마련해보겠다는 생각보다 그저 무엇인가 해야 될 것 같기에 호숫가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는 보통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3년 동안 쉬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제자들은 이 호수의 사정을 잘 알았고 고기 잡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니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느 새 날이 밝아옵니다. 어떤 사람이 해변에 서서 제자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사람이 주님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예수님은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것처럼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문법적으로 No를 전제로 던지는 부정의문문으로, 직역하면 ‘너희들은 고기를 못 잡았지?’ 제자들은 No 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그때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그물을 던졌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고기가 어찌 많이 잡혔는지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제자들의 빈 그물은 가득히 채워졌습니다.
그물을 당기다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인 요한은 문득 전에 있던 사건을 기억합니다. 누가복음 5장 1~11절에 의하면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들은 밤새 그물을 던져 보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일할 기분도 나지 않고, 밤새 그물을 던지느라 육신이 피곤하여 잠시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 아침에 그물을 씻으며 다음번 출항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자기 경험으로 볼 때는 분명히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선생님의 말이니 한번 던져보겠다는 시큰둥한 자세를 보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배를 깊은 데로 몰고 가서 그물을 내리는데 갑자기 그물이 팽팽해집니다. 그물에 걸린 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합니다. 다급해진 베드로가 요한과 야고보가 타고 있던 배에 손짓을 하자 그들이 급히 노를 저어 왔습니다. 두 배에 탄 어부들이 그물을 함께 잡아당기니 두 배가 물에 거의 잠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에 압도된 베드로가 예수님 무릎 앞에 엎드립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조금 전까지 ‘선생님’ 하며 예수님을 부르던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자신의 불신앙적인 태도를 회개합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베드로가 지금까지는 고기를 낚는 어부였으나 장차 복음을 전하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배와 잡은 고기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요한이 해변을 다시 보니 정말 주님이 서계십니다. “주님이시다” 요한이 외치자 그물을 열심히 당기던 베드로도 주님임을 알아보고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듭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을 당하여 열심히 달려가던 베드로가 지금은 동트는 새벽에 갈릴리 바다에 뛰어들어 주님을 향하여 열심히 헤엄을 칩니다. 배와 육지 사이의 거리가 오십 칸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하는데 원어에는 200 규빗으로 나와 있습니다. 한 규빗 45cm 이므로 200 규빗은 90m. 100 야드는 바로 미식축구 경기장의 길이입니다. 당신을 향하여 헤엄을 쳐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주님은 물끄러미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식탁
일곱 명이 달려들어도 그물을 끌어당기기 힘든 상황에서 베드로가 빠지니 더 이상 그물을 당길 수 없어 제자들은 고기가 가득한 그물을 매단 채 노를 저어 해변으로 나아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제자들을 기다리셨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느라고 지친 제자들을 위하여 식탁을 마련하셨습니다. 불 위에 생선이 익고 있었고 그 옆에는 떡이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그물에 가득히 찬 큰 고기가 153 마리였습니다. 그런데 전과 달리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물고기의 숫자를 기록한 것은 이것이 분명히 일어난 사건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불에 구우신 생선은 헬라어로 ‘옵사리온’인데 ‘말린 물고기’ 혹은 ‘절인 물고기’를 뜻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생선을 가져오라 하실 때는 ‘익쑤스’ 하여 일반 물고기를 가리킵니다. 그 결과 그날 아침 주님이 준비하신 식탁에는 말린 생선과 싱싱한 생선 두 종류가 놓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앞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렇게 주십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저녁에 예수님이 광야에 있던 무리들을 위하여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배불리 먹이시던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때 광야에서 음식을 먹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갈릴리 호숫가에서 나누는 식사 자리는 조용합니다. 아니 말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뜨거운 사랑이 아직도 싸늘한 아침공기를 훈훈하게 데우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떡과 생선을 받으면서 그들은 주님의 손에 난 못 자국을 보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먹은 음식은 사실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붙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숯불 앞에서 예수님이 구워주시는 떡과 생선을 먹으며 또 하나의 숯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 18:18).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대제장의 뜰에 피웠던 숯불 앞에서 한 하녀의 도전을 받고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눅 22:57)고 우기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해변의 숯불 앞에서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라고 대답합니다. 그 아침에 주님이 주신 떡과 생선을 먹은 제자들은 그 사랑에 감격하며 그들의 여생을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바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도 원수들의 시선은 우리를 노려보고 우리의 허물어진 모습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문제점을 들추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그럴 줄 알았어’ 하며 떠벌이고 손가락질 합니다. 우리들은 남의 과거를 들추거나 가십으로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의 현재의 새 출발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들은 남의 실수를 잘도 기억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의 초라한 모습 속에서도 신실했던 어제의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낯 뜨거운 순간들을 다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범한 죄를 모른척하거나 죄를 미화시키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최선의 순간들도 잊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배신의 고통에서 몸부림치는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입니다. 이 사랑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온전치 못한 베드로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심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보여주신 끈질긴 사랑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낙심되는 분들이 있습니까? 방황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다시 힘을 내야 합니다.
2)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것을 인하여 심한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어떻게 나를 배반하고 도망갈 수 있느냐고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그들을 위하여 따뜻한 아침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 세상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헐레벌떡 달려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내 모습을 주님은 과연 어떻게 보실까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어느새 불평, 불만을 일삼고 있는 내 모습을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예수님은 무리를 향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셨지만 개인적으로 만날 때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도리어 사랑으로 감싸셨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조차 개인적으로 찾아올 때 그들을 사랑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잘못을 지적한다고 모두가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변화는 상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깨닫는 순간 일어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은 ‘어찌하여 죄를 지었으냐’ 책망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0-11). 돌을 치려하는 자들을 인하여 아무런 감동이 없던 여인이 주님의 사랑의 음성 앞에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삭개오에게 ‘어찌하여 다른 사람들의 것을 착복하였느냐’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내가 오늘 네 집에 가서 함께 식사하겠다 하시며 그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삭개오에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너는 잘못된 인생이야 너는 도둑놈이야. 민족의 배반자야’사람들이 비난을 할 때 꿈적도 않던 삭개오가 주님의 사랑의 말씀 한마디에 녹아져서 자기가 강제로 빼앗은 물건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고백합니다(눅 19:8). 우리에게 섭섭하게 한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잘못을 지적한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쌀 때 일어납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려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느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섣부른 지적은 비난이 되고 정죄가 됩니다. 사랑이 결여된 지적은 도리어 관계만 나쁘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대인 관계에서 흔히 범하는 실수입니다. 법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법조항을 엄격하게 만든다고 범죄가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다스려집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으면 삶의 현장에서 그 받은 사랑을 지혜롭게 표현해야 합니다.
3) 주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밤새 그물을 열심히 던졌으나 허탕을 친 것은 지난 삼년 동안 그물을 던지지 않아 고기 잡는 요령을 잊어버렸거나 갈릴리 호수에 고기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실패와 좌절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가장 복된 것임을 깨우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건지지 못한 그물에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가 걸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그 제자들이요, 여전히 그 그물이요,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그물을 던졌느냐 들은 후에 던졌느냐 하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였더니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순종하였더니 좌절에서 벗어나 풍성한 열매를 거두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순종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순종은 기적을 경험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똑같은 환경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 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해결하는 능력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안 되는 일이 더 많지 않았습니까? 이민자로서 열심히 달려왔는데 내 꿈과 상관없이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주님이 다 먹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육신의 삶만을 추구하는 자는 욕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짜 이기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을 인하여 아무리 즐거워해도 세상을 마감할 때 웃을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살았어도 주님 앞에 면목 없이 선다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주님께 순종할 때 실패가 성공으로 바뀝니다. 좌절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세상의 소리가 아닌 주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소리에 담겨진 우리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US Coast Guard의 Motto가 있습니다. “You should go, but you don’t need to come back.”이 모토를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그 사명을 감당하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주님이 주신 사명감에 불타는 인생은 이 세상의 것들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를 가집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미한 가운데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을 위하여 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삶을 사는 자입니다. 베드로 때와 달리 지금은 주님이 직접 나타나시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배우면서, 설교를 듣고 기도하면서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을 경험하며 풍성한 감사의 열매들이 맺힙니다. 그리고 모든 지체들이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순종할 때 그 교회와 가정은 든든히 섭니다.
갈릴리 해변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깊은 인연이 얽힌 곳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해변에서 여러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 해변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해변은 제자들에게 헌신의 첫 걸음을 기억하게 하는 곳입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찾아와 만나시면서 수치와 좌절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새롭게 확인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택한 사람들의 회복을 위하여 세 번 아니 열 번이라도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가치 없는 자들, 실패한 자들, 미련한 자들, 배반한 자들에게 다시 오십니다. 부활 생명의 주로서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주님은 부족한 우리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 인생의 갈릴리 해변에 서 계십니다. 그 해변에서 피 흘린 손으로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의 아침상을 차려주십니다. 끈질긴 사랑으로 붙드시는 예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믿고 섬기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가장과 교회와 삶의 현장에서 표현하기 원하십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서먹서먹한 부분이 있습니까? 교인들 간에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까? 삶 속에 풀리지 않은 문제, 혼자서 고민하는 문제들이 있습니까? 과거에 일어난 일로 인한 상처 때문에, 혹은 현재의 나의 상황은 누구 때문이라고 하며 아직까지 분노하거나 방황하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주님은 찾아오셔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 모두는 주님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이 주님이 함께 하는 삶이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요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삶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그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들과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기 원하십니다. 각자를 향한 사명을 회복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함으로 주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팀워크를 이루며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이 채워 주시는, 찢어지지 않는 풍성한 복을 가정과 사업과 사역에서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활의 주님! 계속 함께 하십니다
요 21:1-19 / 지태일 목사
간혹 책을 읽다 보면 맨 마지막에 에필로그라고 해서 저자의 편집후기가 부록처럼 적혀 있는 책이 있는데 어떤 책은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에필로그가 마음에 와 닿아서 긴 여운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도 줄거리로 따진다면 20장까지로 그 줄거리가 마감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여러번 나타나 그의 부활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나중에는 의심 많던 도마마저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 주를 향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사명을 받는 것으로 요한복음의 모든 줄거리가 마감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더구나 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20:30,31절에 밝힘으로써 요한복음은 끝난 것 같습니다. 30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작게는 요한복음, 크게는 성경 66권 말씀 전체를)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 우리가 읽은 21장은 부록이나 저자 후기처럼 붙어 있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바로 이 에필로그가 대수롭지 않고 의미심장합니다. 이 요21장의 부록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4복음서에서 교회의 시작이 되는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는 성경의 흐름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부활의 주님을 만난 모든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 그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또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지에 대한 바른 방법과 원리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에필로그와 같은 요한복음 21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을 이어가는 중요한 장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누구를 중심으로 말씀이 전개됩니까? 우리는 여기서 요 21장에서 주님이 왜 베드로를 중심으로 해서 사건을 진행시키고 있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그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들을 바르게 감당할 것인가에 관한 한 가장 극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샘플적인 사람이 바로 베드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디든지 주님을 따라 가겠다고 장담을 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야 한다고 할 때 앞장 서서 말린 사람입니다. 닭이 울기전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주를 향한 열심과 진심과 뜨거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진심과 열심과 뜨거움을 가진 자신이 누구인지를 그 실패를 통해 뼈저리게 느낀 사람입니다.
요21장 초반에서도 제일 먼저 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나선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기다려야 할 사람인데 기다리지 못하고 고기를 잡으러 앞장서는 모습니다. 허물과 실패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왜 이런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요21장이 새롭게 이어져 가는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곳이 바로 갈릴리 바다라는 장소입니다. 본문 1절에도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갈릴리 바다를 의미함)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그랬습니다. 요한복음이 20장까지가 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그 내용이 전개되었다면 본문인 21장의 배경은 갈릴리 바다가 그 배경입니다. 이 갈릴리 바다에서 벌어졌던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다시 만나는 재회 장소를 갈릴리를 선택하셨을까요? 갈릴리는 좀 특별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난 장소였습니다. 주님께 처음 사랑을 고백하던 장소였습니다. 처음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하던 그런 장소였습니다. 처음 사랑이 싹튼 곳이었습니다. 고기 그물과 배를 부모를 버려두고 열심히 예수님을 쫓아다니기 시작하던 장소였습니다.
그런 갈릴리에서 우리 주님은 제자들의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의 처음 열심을 회복하기를 원하는 주님은 갈릴리를 재회 장소를 택하셨던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어떻게 베드로의 처음 사랑, 잃어버린 첫 사랑의 기억을 주님은 회복시킬 수 있었습니까? 주님은 첫 사랑의 장소에서 그의 처음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련의 몇 가지 사건들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요21장에 나오는 몇가지 사건들 가운데 베드로를 중심해서, 갈릴리 바다를 중심해서 4복음서를 마치고 이제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려는 주님의 사랑과 마음과 의도를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베드로의 스타일로서는 사도행전을 더 이상 쓸수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음서의 마지막인 요한복음 마지막 21장의 에필로그를 베드로를 샘플로 해서, 걸릴리 바다를 중심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필로그의 형식으로 기록된 요21장의 중요한 세 장면이 무엇입니까?
1. 첫 장면은 실패한 베드로와 제자들에 찾아오시는 주님이심니다.(1-8절)
먼저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렇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5,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수 없더라." 첫 사랑의 장소 갈릴리에 돌아온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이상합니다.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이럴 리가 없습니다.
옛날 베드로가 처음 만나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눅 5장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만났을 때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지고 수고했지만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대로 던졌더니 고기를 많이 잡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슷한 사건이 지금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눅5장에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는데 지금은 하시는 말씀이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져라." 베드로는 바로 3년전의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질 때 많은 고기를 잡았고 옆에 있는 다른 배를 불러 실고 나오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 많은 고기, 성공앞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 때 주님은 네가 지금까지는 고기낚는 어부였지만 이제는 나를 따르라 네가 사람낚는 어부가 되리라 이 말씀이 사건이 생각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3년 전에 사건을 기억하며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6절 하반절을 보면 그물을 들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는데 육지에 올라와 세어보니 무려 153마리나 되는 많은 고기가 잡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15:5절 포도나무비유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또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나를 떠나서 네가 잘 되는 일이 있더냐?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떠난 인생은 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너의 모든 재주를 다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니라는 음성입니다.
주님을 떠나면 모두 빈 그물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의 능력과 경험과 진심과 열심도 다 빈 그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없이 나 혼자 하는 계획은 헛될 것입니다. 주님없이 내 힘만 믿고 달리는 인생은 아무 것도 못 잡는 빈 그물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필연적인 실패의 삶의 갈릴리 바다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 누구보다도 주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함께 하셔야 합니다. 주님 없이 아무리 애를 써도 주님이 떠나시면 함께 안계시면 아무런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찬송 ♬ 주 떠나 가시면 내 생명 헛데네...)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주님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함은 그 어떤 일이든지 쓸모 없는 것입니다. 지칠 대로 지친 인생이지만 우리 곁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이제까지 잡은 고기가 없을지라도 주님이 곁에 함께 하시고 곁에 오신 주님이 우리의 잃어버린 신앙, 잃어버린 기쁨, 잃어버린 열정, 잃어버린 행복, 물질, 재능, 시간, 생명까지도 다 다시 찾게 해주심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삶에도 주님의 명령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또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밤이 새도록 헛수고한 행위를 다시 한번 반복해 보게 하는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그 명령에 순종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지시하는 대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무려 153마리,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질 때 한 마리도 못 잡던 그 곳에서, 그 자리에서 153마리라는 고기를 잡습니다.
6절에 보니까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랬습니다. 순종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묻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묻습니다. 사업은 잘 되가느냐? 가정은 평안한가? 자녀들은 어떤가? 묻습니다. 우리의 대답은 역시 베드로와 같이 없나이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지식을 다 압니까? 가진 것이 부족함 없을 정도록 만족할 정도 많습니까? 자식들에게 부족함 어려움 하나도 없습니까? 다 건강합니까? 아님니다. 할 수밖에 없는 우리 아님니까?
여기서 베드로가 '없나이다'라는 부정의 대답은 제자들이 철저한 실패의 상황에 직면하였음을 말해 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은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는 것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그의 동료 제자들이 주님과 관계없이 일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완전한 실패에 부딛힐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줍니다. 6절에 예수님께서 직접 관여 하여 주심으로 성공을 거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는 온전히 주님의 지시를 따를 때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은 앞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주어질 사역이 주님 없이 아무리 애를 쓴다 할지라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그저 열심히 사는 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나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이 아무리 열심히 산다 해도 주님이 그 인생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밤새도록 수고해도 정작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입니다. 내 기질대로 내 생각대로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고 살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생각은 불신자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예수님이 지시하시는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진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를 비교해 보면 베드로가 바닷가의 전문가,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헛수고만 하였습니다.
여러분 언제가 우리 인생의 아픈 순간들,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들, 허탈했던 순간들, 어떤 순간에 우리의 그물이 빈 그물이었던가요? 주님께 물어 보지 않고 나 혼자 했던 시도들, 주님은 원하지 않았는데 내 고집을 피우며 주님 앞에 그릇 행했던 순간들 그때가 바로 우리가 빈 그물을 건지는 순간입니다. 내 고집을 피우던 순간들, 주님 없이 나 혼자 노력했던 순간들, 그리하여 빈 그물을 들어 올렸던 순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빈 그물 사건이 재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일에 주님은 가득찬 그물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당기는 모든 그물마다 가득찬 그물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이성과 경험을 의지하지 맙시다. 말씀보다 기도보다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앞서가지 맙시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셔서 던지는 그물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축복의 갈릴리가 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번째 장면은 떡과 생선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사랑의 주님이심니다(9-14절).
제자들이 배를 뭍에 대고 예수님께로 왔을 때 거기에는 제자들의 예상을 초월하는 장면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9절에 보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을 위하여 식사를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빈 그물만을 만지느라고 배고픈 제자들, 피곤하고 물에 젖어 춥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세심한 배려를 보여 주심니다. 지치고 배고픈 그들을 위해 생선과 떡을 준비해 놓으셨고, 물에 젖어 추운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워 놓으셨습니다.
12절을 보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시고 "밥 먹자"고 하셨습니다. "Come and have breakfast."(NIV)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같이 밥을 먹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모든 것을 다 덮어 준다는 것이며 관계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속썩이면 엄마가 하는 말이 "아이구 저걸~, 내가 미쳤지~"라고 하다가도 밥을 해 놓고 "밥 먹어!"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 말은 자식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밥 먹으라고 하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싸워서 "아유, 내가 눈이 잘못됐지. 저 인간하고 사니... 속았지, 속았지" 하다가도 밥 먹을 때가 되어 밥 해놓고 "밥 잡수세요"라고 한다면 그 말로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밥은 꼭 드시기 바랍니다. 자식이나 남편이 미워도 밥은 먹여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됩니다. 만약에 "밥 먹자'는 소리가 없으면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밥도 안하고 돌아다니면 이제 문제가 심각해지잖습니까?
우리도 누가 밥먹자고 하면 좋잖습니까? 밥 먹자고 하는 사이는 괜찮은 사이입니다. 또 밥을 대접하는 손길은 귀한 손길입니다. 사랑의 손길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 식사를 준비해 놓고 제자들에게 밥먹자 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밥 먹자"고 할 수 있는 때입니까?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도망갔고, 예수님 가까이에 따라 다녔던 베드로 조차도 예수님을 3번씩이나 모른다고 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고도 갈릴리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고기 잡으러 나갔으니 말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예수님의 입장이었다면 나를 배신한 제자를 만났을 때 무슨 얘기를 할 것 같습니까?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그렇지 않다면 "야! 너 무슨 연유로 나를 배신했니?" 이렇게 한 마디는 따져 볼 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베드로를 향한 첫 음성은 다른 소리는 없었어요. "조반 먹어라" 성경에 보면은 "조반 먹어라" 춥지? 배고프지? 모든 것을 덮어 주시고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밥 먹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말씀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조반 후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대화가 시작됩니다. 식사가 끝나기 전에 '너 좀 얘기하자!' 이랬으면 소화불량 걸렸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조반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를 아직도 사랑하느냐?" 나를 아직도 사랑하니?" 물으시면서 사명을 회복시켜 주심니다. 일하기 전에 밥먹어야지 일하고 밥 준다면 잘 안합니다. 먹으면서 힘도 얻고 일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격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해 피곤해 있던 베드로, 그를 위하여 지금 귀한 식탁을 준비해 놓으셨는데 그 중에 숯불이라는 것은 주님의 계산된 소도구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날 밤 새벽에 대제사장의 뜰에서 베드로는 불앞에 서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숯불을 보는 순간, 얼마 전에 그 불을 보는 순간 불 앞에서 부인했던 기억, 배반의 기억이 회상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구운 떡과 생선을 제자들, 베드로에게 먹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 주님의 놀라운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네가 나를 부인했었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의 제자니라. 너는 나의 사랑이니라. 너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여기 와서 먹어라. 나는 너를 먹이는 생명의 떡이니라. 나는 너를 심판하는 존재가 아니니라. 너를 먹이며 새롭게 하고 너를 회복시키는 존재이니 와서 먹고 기운을 차리거라." 이런 마음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심니다. 여전히 우리와 관계를 맺으심니다. 우리를 먹여 주심니다. 새 힘을 주심니다.
구약의 엘리야 선지가 그렇잖습니까? 그렇게 갈멜산에서 승리를 멋지게 하고도 너무 지치고 힘드니까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이제 거두어 가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무엇을 먼저 하셨습니까? 까메귀를 통해 떡을 먹이셨습니다. 물을 먹여 주셨습니다. 회복시킨 다음에야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을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나를 위해 은혜의 조반을 준비해 놓으신 주님의 사랑의 식탁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식탁을 준비하시고 떡을 먹이시고 고기를 먹이시는 주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식탁앞에서 '아! 주님은 나를 아직도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이것이 베드로가 실패에서 일어날 수 있었든, 제기 할 수 있었든 힘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부족하고 아무리 연약한 상태에 있어도 우리는 우리가 먹을 음식을 주님이 준비해 놓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나를 위해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했던 아버지의 마음, 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어느 때든지, 은혜와 사랑의 식탁, 긍휼의 조반을 준비해 놓으신 갈릴리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세 번째 장면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주님이심니다.(15-19절)
15절을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15절 말씀, 사명을 회복하시기 전에 주님의 사랑하시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조반을 먹은 후에" 친히 떡과 고기를 숯불을 다 준비해 놓고 식사 후에 대화가 시작됩니다. 식사가 끝나기 전에 '너 좀 얘기하자!' 이랬으면 진수성찬이라할지라도 소화불량 걸렸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 먹은 다음에 힘을 얻은 다음에, 사랑의 식사의 교제가 이루어진 다음에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아직도 사랑하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 물으시면서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세 번씩 고백할 때 내양을 먹이는 목양의 사명을 회복시켜 주심니다.
여러분 누가 세 번씩이나 실패한 자에게 또 일을 맡겨 주시고 사명을 맡겨 주시겠습니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한번 두 번 정도 실수하고 실패하면 직장에서는 직장 상사가 자기에게 한 마디 밖에 하고 싶은 말이 없을 것입니다. "책상 빼!" 이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다시금 시작할 수 있도록 재출발의 특권을 주셨던 것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타오르는 숯불 앞에서 한번도 아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면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집요하고도 의도적인 3번의 질문 앞에서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맡기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주님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는가라는 것을 베드로는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을 먹이는 일, 주의 맡기신 양을 치는 일, 다른 모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 위해서는 예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아니라, 나의 뭇으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아무 것도 아닌 나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임을 이제는 내가 조금이나마 알겠습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가진 그 무엇을 꺼내놓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며, 그 나라는 내 생각과 내 능력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나라의 것으로만 증명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베드로에게 바로 그런 마음 깊은 곳에서의 고백을 받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런 심정에서만 내 양을 먹이고 그런 마음으로만 내 양을 치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베드로가 나중에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쓰셨습니다. 놀랍게 쓰셨습니다. 잠시 후 오순절에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이 부흥운동의 한복판에 서있었든 주역이 하나님이 쓰신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이방선교를 위해서는 한 사람 바울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복음,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베드로를 귀하게 쓰셨습니다.
베드로는 피상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베드로가 일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연약을 알았기에 엎드려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도로서 살아갈 수가 있었든 것입니다.
그래서 행3장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향하여 외침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말하자면 은과 금, 그러니까 내 손에 잡았던 칼, 내가 가졌던 정열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의 원리이고 방법이고 성품인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이야기하는 신자론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과거의 잘못과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패에 주님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베드로와 같이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다윗과 같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고백합니다. 다시 출발하기를 원합니다.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떠났던 부분은 어느 곳입니까? 주님과 함께 주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며 다시 갈릴리에서 출발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람니다. 우리 인생의 빈 그물을 다시 채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람니다. 주님의 한없는 사랑의 식탁을 통하여 새힘 얻으시기를 바람니다. 주님만을 사랑하는 그 믿음으로 양떼들을 먹이고 살리고 일으키는 사도행전의 역사로 넘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