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조선, 국익 위협땐 명나라에도 단호했다”
‘중화 성쇠와 한반도… ’ 학술회의
몽골 붕괴에 군비 강화한 공민왕… 조선초엔 여진 정벌 등 적극 정책
이후 국제감각 잃고 왜란-호란 겪어… “현상 변경에 대한 논의 집중해야”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 중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 조선 세조 때 신숙주가 함길도에서 여진족을 정벌하는 장면을 그렸다. 동아일보DB
미중 대립이 심화하는 가운데 세간에서는 중국 명청교체기인 17세기 조선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얘기가 적지 않다. 패권을 쥘 쪽에 ‘줄을 잘 서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신흥 제국 명나라와의 갈등을 피하지 않고 여진족을 정벌하는 등 적극적 대외정책을 펼쳤던 15세기의 조선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 몽골제국 붕괴 조짐에 요동 정벌
서울대 국제학연구소 소천한국학센터와 한국역사연구회 중세국제관계사반, 중국 푸단대 한국학연구중심은 9일 오후 2시 서울 관악구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중화제국의 성쇠와 한반도의 대응’ 학술회의를 연다.
고려 공민왕
조선 초 대외정책의 뿌리는 고려 공민왕에서 찾을 수 있다. 정동훈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발표문 ‘몽골제국의 붕괴와 한반도의 군사화, 그리고 왕조 교체’를 통해 고려 말 급속한 군사화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따르면 ‘팍스 몽골리카’(몽골제국이 가져온 유라시아의 안정)로 인한 오랜 평화가 공민왕(재위 1351∼1374년) 즉위 전까지 고려를 비무장 상태로 만들었다. 제국의 붕괴가 가시화되자 공민왕은 빠르게 군비를 강화했다. 안보와 직결된 요동의 동녕부(東寧府)를 1370년, 1371년 공격해 점령하고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몽골 잔당이 일으킨 난을 평정했다.
● 국익 지키는 선에서 사대(事大)
조선 태조 이성계
이 같은 기조는 정벌에 참여했던 이성계와 정도전 등을 통해 조선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여진 문제다. 노영구 국방대 교수의 발표문 ‘중국 위협론의 역사적 실체와 한국의 역할’에 따르면 명은 몽골과 고려, 여진의 연결을 끊기 위해 요동 서부의 통제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 태조 이성계는 요동 및 두만강 유역의 여진을 적극 위무해 조선화 정책을 추진했다. 세종 대에는 여러 차례의 여진 정벌로 영토를 확장했을 뿐 아니라 만주 남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까지 확보했다. 이는 명목상 이 지역을 지배했던 명과의 충돌을 감수하는 결정이었다. 이규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조선은 국익을 위협할 경우 사대의 대상이었던 명일지라도 단호하게 대처했다”고 설명했다.(발표문 ‘15∼16세기의 조선은 부국강병을 꿈꾸었는가?’)
● 영향력 행사로 지역 안정 도모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외 전략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하기도 했다. 노 교수에 따르면 1449년 명 정통제가 몽골의 일파인 오이라트의 포로가 되고, 수도 북경은 1년 동안 포위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이 만주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기에 명은 방어에 힘을 집중할 수 있었고, 몽골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추후 조선은 국제 정세에 대한 감각을 잃고 왜란과 호란을 겪었다. 15세기 말부터 정벌보다 국경 방어만 강화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명 이외의 세력을 무시하고 명과의 관계만을 의식한 탓이다. 노 교수는 “강대국과 중견국들이 함께 만들어온 것이 동아시아 역사의 보편적 모습”이라며 “오늘날에도 ‘어느 세력과 손잡느냐’ 대신 ‘어떻게 현상을 변경시킬 것인가’에 논의가 집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술회의에서는 이 밖에도 ‘전근대 한중관계의 해석이 갖는 현재적 의미’(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16세기 조선의 예의지국 위상과 중화’(구도영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군신의 청 정세 인식’(김창수 전남대 교수), ‘청제국의 주변 상실과 조선의 부상’(손성욱 창원대 교수) 등의 발표가 진행된다.
조종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