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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 김옥수 옮김
비꽃
2017년 10월 17일 출간
국내 명문대학 필독서
미국 대학위원회 SAT 추천도서
[뉴스위크]지 선정 세계 최고의 책 100선
[옵서버]지 선정 가장 위대한 소설 100선
영국 [로고스]지 선정 20세기를 만든 책 100선
[랜덤하우스]지 선정 20세기 영문소설 100선
영국 BBC조사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 100선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
현대 사회는 인간소외를 상징한다. 과학기술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수준을 뛰어넘다 못해, 과학자 자신도 새롭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밀리며 도구로 전락하고 도태당한다. 게다가 과학기술이 개발한 원자탄은 지구촌 전역에 깔려, 지구를 수십 번 파괴하고도 남는다.
과학기술은 물질문명을 상징한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으로 살아가지만, 영혼을 탐구하는 인문학은 과학에 밀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목표는 물질로 전락한다. 인간은 살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사회가 된 것이다.
사실, 영국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인간과 과학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했다. 눈부신 과학발전과 대량생산에 인류는 환호했다. 유토피아가 도래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하지만 물질에 대한 탐욕은 1차 세계대전으로 나타나고, 인류 지성은 좌절한다.
과연, 과학기술 발전은 인류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인간이 사는 목표는 무얼까?
먹으려고 사는 걸까, 살려고 먹는 걸까?
이에 대한 고민이 유토피아 반대 개념으로 나온 디스토피아 문학 장르다. 유토피아 문학에선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걸 중시한다면, 디스토피아 문학에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걸 중시한다. ‘멋진 신세계’, ‘1984’, ‘우리들’이 디스토피아 3대 명작으로 꼽힌다.
‘1984’가 인간의 머리와 역사까지 조작하는 독재국가를 암울하게 그려내고, ‘우리들’은 독재자가 정보부를 통해 개인이란 존재를 말살하는 끔찍한 사회를 풍자한다면, ‘멋진 신세계’는 탁월한 인물이 세계를 통제하며 모든 걸 조작하고 사회구성원 전체는 행복을 지상과제로 여기며 쾌락을 만끽하는 사회를 묘사한다. 재미있는 건 ‘1984’를 쓴 조지 오웰이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의 제자라는 사실인데, 나중에 조지 오웰은 스승이 풍부하게 구사하는 어휘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멋진 신세계’는 책장을 처음 펼치는 순간에 인간이 인간을 만들어내는 시설부터 설명한다. 난소를 인체에서 잘라내 인공으로 유지하면서 난자를 전문으로 생산하고, 난자는 특수 처리 과정을 거치고 시험관에서 수정해, 똑같이 생긴 인간을 사회가 필요한 만큼 만들어낸다.
사회에서 필요한 인간을 공장에서 대량생산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계급도 미리 규정해 공장에서 영양과 산소 공급을 조절하는 식으로 우열을 나눈다. 이 사회에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딱 하나, 자신이 맡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며, 정부는 이걸 목표로 태아 때부터 모든 인간에게 모든 조건을 주입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과 운명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첨단 과학이 왜곡한 인간성은 상류층이라고 예외가 아니니, 작가는 첨단 과학을 상징하는 새빨간 불빛에 비친 모습을 통해, 상류층 연구원을 이렇게 묘사한다.
두 눈은 보라색에다 피부는 결핵성 피부병에 걸린 것 같아도 보기 드물게 예쁜 얼굴이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공장에서 병에다 수정란을 넣어서 양육하는 식으로 대량생산하니, 가족은 존재할 수 없고, 인간과 인간은 정을 나누며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섹스로 쾌락을 추구할 대상으로, 수단과 방법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사회도 약점은 있다. 주인공 ‘버나드 마르크스’는 상류층으로 머리도 좋으나, 배양과정에 약물을 잘못 투입해서 신체조건이 하류층처럼 떨어진다. 주변 동료는 상류층답게 근사한 외모와 체격을 자랑하며 쾌락을 맘껏 추구하는데, 마르크스는 외모와 체격이 하류층처럼 초라해, 모든 여성에게 퇴짜맞는다. 능력과 외모를 통일시킨 사회에서 능력과 외모가 동떨어진 이방인이 생겨난 거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사색’에 빠져드니, 다른 사람 눈에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요 이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은 또 있다. 헬름홀츠 왓슨이다. 마르크스와 정반대다. 능력과 외모와 체격이 너무 탁월한 나머지, 숱한 여인과 숱한 쾌락에 빠져들다, 어느 날 갑자기 회의가 몰려들기 시작한 거다.
이런 분위기에 색다른 이질 요소가 다시 등장한다. 인간의 정서와 감정을 그대로 유지한 ‘인디언 보호구역’을 문명인 여성이 여행하다 낙오하는 바람에 피임도 중절 수술도 할 수 없어서 낳은 아들 ‘존’이다. 초반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버나드 마르크스’라면, 중반 이후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존’으로 작가의 고민을 대변한다.
주인공 ‘존’은 인디언 원주민 사회에서 성장하나, 백인 피부와 금발 때문에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를 통해 듣는 문명사회는 더없이 부러운 유토피아다. 그러다, ‘마르크스’를 통해 꿈에 그리던 문명사회로 들어온다. 하지만 영혼을 잃고 물질에 빠져들어 ‘바보만 가득한 천국’은 야만인 존에게 천국일 수 없었다. 사모하는 여인은 영혼을 외면한 채 육체적인 쾌락만 추구하니, 원주민 사회에서 말하는 ‘화냥년’이 아닐 수 없다. 야만인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사회를 추구하나, 문명사회는 인간을 말살하고 물질과 쾌락만 추구하는 지옥이었다. 원주민 사회에서는 피부색 때문에 이방인이었다면, 문명사회에서는 영혼이 있는 인간이라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거다.
결국, 마르크스와 헬름홀츠는 섬으로 추방당하고, 야만인 존은 사람이 없는 외딴 등대로 가서 자연과 벗하며 사는 길을 선택한다. 하지만 문명의 흔적은 사모하던 여인의 나신으로 나타나며 끊임없이 괴롭히니, 야만인은 그런 자신을 채찍으로 때려서 징계하며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몸부림친다. 문명사회는 야만인이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우연히 발견해, ‘서리 야만인’이란 별칭을 붙이고 신기하게 구경한다. (‘서리’는 작가가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이다.) 야만인은 문명에 쫓기다 결국엔 자살한다.
과학기술 발전에 인간성은 결국 파멸 당할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결론이다. 하지만 작가는 2차대전이 끝난 1946년에 작품 서문을 다시 써서 새로운 생각을 드러낸다. 작품을 다시 쓴다면, ‘문명 세계’와 ‘인디언 보호구역’ 말고도 망명자, 도망자, 이방인들이 모여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식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인간은 기존 사회에 빠져드는 유형과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유형으로 크게 나뉜다. 기존 사회는 우리가 경험했다면 새로운 사회는 희망과 상상 속에 존재하니, 우리는 두 사회를 변증법적으로 사유해, 현실사회가 바람직하게 발전하도록 노력해야 타당할 것이다.
‘멋진 신세계’는 1984, '우리'와 함께 세계 3대 디스토피아 명작이다. 금번에 디스토피아 3대 세계명작을 출간해, 현재를 바로 읽고자 노력했다. 디스토피아 문학은 먼 미래를 묘사하는 식으로 현재에 경고하는 장르다. 따라서 미래를 소재로 할 수밖에 없으니, 다양한 철학사상은 물론 현재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많이 나온다. 각 개념을 한글로 제대로 설정하지 않으면 난수표 번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번역은 원문에 담긴 내용과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우리글로 옮기는 과정이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언어 사대주의를 극복하는 번역 역시 중요하다. 주체성을 포기한 번역은 독자에게 패배주의를 주는 건 물론, 한글 어법에 안 맞아서 어렵기만 하기 때문이다.
고전문학은 다양한 경쟁과 도전 속에서 독자에게 다양한 즐거움과 감동을 주며 백 년 이상 살아남은 작품이니, ‘재미와 감동’은 물론 ‘술술 읽히는 느낌’ 역시 어느 작품보다 탁월할 수밖에 없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는 기능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엉터리로 번역해서 독자를 괴롭히며 쫓아낸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인문학은 독서가 시작이다. 고전문학을 제대로 해석해서 한글 어법에 정확히 담아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내면세계를 풍요롭게 가꿀 원형을 제시해야 한다. 광복 35년이 지난 다음에 비로소 우리는 ‘일본어 중역 몰아내기 운동’을 했다. 35년이 또 지났다. 이제는 ‘우리말 살리는 번역운동’을 할 때가 왔다.
‘도서출판 비꽃’은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한국어 어법에 합당한 번역을 추구하며, ‘찰스 디킨스 선집’을 필두로 고전문학을 새롭게 담아내, 독자에게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면서 공동체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책 속으로 추가]
근처 숲에서 보모가 나오며 조그만 손을 잡아끌고, 사내아이는 열심히 울어대며 끌려 나온다. 여자애 한 명도 바로 뒤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쫓아온다.
“무슨 일인가?”
소장이 묻자, 보모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다.
“별거 아닙니다. 꼬맹이가 흔한 섹스 놀이에 끼지 않으려는 것 같아서요. 전에도 그러는 걸 한두 번 봤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또 그러네요. 조금 전에는 소리까지 지르면서……”
“정말이에요. 저는 저 애를 해치려 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여자애가 불안한 표정으로 재빨리 끼어들자, 보모가 달래는 어투로 “그럼, 그럼, 너는 잘못한 게 없어”라고 대답하더니, 소장을 다시 쳐다보며 말한다.
“그래서 저 애를 심리상담 선생님께 데려가려고요. 비정상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어요.”
“잘하는군. 어서 데려가게.”
소장이 말하더니, 보모가 울부짖는 아이를 데려가자, 이렇게 덧붙인다.
“너는 남고, 꼬마야. 이름이 뭐지?”
“폴리 트로츠키요.”
“이름이 예쁘구나. 어서 가서 다른 사내아이를 찾아보려무나.”
여자애가 수풀로 뛰어가며 순식간에 사라지자, 소장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말 멋있는 꼬맹이야!” 하고 감탄하더니, 수습생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굴뚝마다 난간 같은 거로 동그랗게 에워싼 이유는 뭐지?”
레니나가 묻자, 포스터가 간결하게 설명한다.
“인 회수장치. 연기가 굴뚝을 타고 올라가는 동안 네 단계로 회수하는 거야. 예전에는 시신을 화장하면서 P2O5를 대기에 그대로 배출했어. 그런데 지금은 98%를 회수해. 성인 시신 한 구당 1.5kg이 넘어. 영국 한 곳에서만 연간 400톤이 넘는 인을 생산하는 거야.”
마치 자신이 올린 업적이라도 되는 듯 포스터가 자랑스럽게 얘기하다 덧붙인다.
“우리가 죽어서도 사회를 돕는다는 사실이 정말 기뻐. 식물을 자라게 해서.”
그러는 동안 레니나는 시선을 돌려서 모노레일 역전을 수직으로 내려다보며 공감한다.
“맞아. 하지만 알파나 베타가 저 밑에서 꿈지럭대는 감마나 델타나 엡실론처럼 역겹고 보잘것없는 존재보다 식물을 많이 자라게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해.”
“인간은 물리적 화학적으로 누구나 똑같으니까. 게다가 엡실론도 사회에 꼭 필요한 역할을 하고.”
“엡실론도……”
어려서 공부하던 시절, 레니나는 한밤중에 깨어나 자신이 잠자던 내내 속삭이던 소리를 처음으로 또렷하게 들은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다. 환한 달빛에 조그만 침대는 하얗게 늘어서고, “모두는 모두를 위해 일한다. 우리는 모두가 필요하다. 엡실론도 필요하다. 엡실론도 꼭 있어야 한다. 모두는 모두를 위해 일한다. 우리는 모두가 필요하다……”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수많은 밤이 지나도록 결코 잊을 수 없고 잊히지도 않는 말이, 다시 들린다. 깜짝 놀라며 무서워하던 기억도, 삼십 분 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기억도, 끝없이 되풀이하는 구절에 빠져들어 마음을 달래고 또 달래고 또 달래다 잠으로 스르륵 빠져들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래서 커다랗게 말한다.
“엡실론은 엡실론으로 살아도 신경 안 쓰겠지.”
“당연하지. 어떻게 신경 쓰겠어? 다른 식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지도 모르는데. 물론 우리는 신경 쓰겠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다른 조건을 부여받았기 때문이야. 애초에 유전자부터 다르다고.”
“나는 엡실론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레니나가 말하는데, 확신이 가득하다.
“네가 엡실론이라면 자신이 베타나 알파가 아닌 걸 좋아하겠지. 그런 조건을 부여받았으니까.”
“위대한 존재께서 강림하시는 발소리. 위대한 존재께서 강림하시는 발소리.”
똑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더니, “위대한 존재께서 강림하시는 발소리가 계단에서 일어난다”는 말과 함께 속삭임이 사라진다. 침묵이 다시 감돈다. 잠시 풀리던 기대감이 다시 깃들며 팽팽하게 뭉치고 또 뭉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위대한 존재께서 강림하시는 발소리가…… 아, 들린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눈에 안 보이는 계단을 내려오며 다가오고 또 다가오는 소리가 조금씩 들린다. 위대한 존재께서 강림하시는 발소리. 모르가나 로스차일드가 갑자기 임계점에 도달한다. 두 눈은 멍하니 쳐다보고 입술은 벌어진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친다.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들린다.”
사로지니 엥겔스도 소리친다.
“그분이 강림하신다.”
피피 브래드래프와 톰 카와구치가 동시에 일어나며 소리친다.
“그래, 그분이 강림하신다. 소리가 들린다.”
조안나가 황홀경에 빠져든다.
“아, 아, 아!”
짐 보카노프스키가 소리친다.
“그분이 강림하신다!”
회장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손가락을 움직이니, 심벌즈와 금관악기 선율이 열정적인 북소리와 함께 황홀하게 흘러나온다.
“아, 그분이 강림하신다! 아이에!”
클라라 디터링이 소리치는데, 목이 잘려나간 것 같다.
마르크스도 반응을 보여야 한다 생각하고 똑같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다.
“그분 소리가 들린다. 그분이 강림하신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도 안 다가온다. 아무도…… 음악 소리, 그리고 모두 흥분해서 날뛰는 게 전부다. 하지만 마르크스 역시 두 팔을 마구 흔들며 최대한 커다랗게 소리친다. 다른 사람들이 몸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춤추자, 똑같이 몸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춤춘다.
이윽고 모두가 동그라미를 그리며 춤추다 두 손을 앞사람 엉덩이에 대고 동그라미를 돌면서 음악에 맞춰 발을 구르고 소리치고 앞사람 엉덩이를 때린다. 손 열두 쌍이 하나처럼 때리고, 엉덩이 열두 개는 맞는 소리가 착착 울린다. 열둘이 하나처럼, 열둘이 하나처럼.
“그분 소리가 들린다, 그분이 강림하시는 소리가 들린다.”
음악이 빨라진다. 발을 구르는 소리도 빨라지고 엉덩이 때리는 박자도 빨라진다. 갑자기 커다란 금관악기 합성음과 함께 ‘이제 회개하고 속죄할 때가, 열둘이 하나로 될 때가, 위대한 존재로 현신할 때가 왔노라’고 선언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는 동안에도 북소리는 끊임없이 일며 열정을 북돋우고, 마침내 ‘흥청망청 난교’ 노래까지 흘러나온다.
노인이 손뼉 친다. 열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벌거벗은 몸으로 허리에 하얀 천 하나만 두른 채 군중 사이에서 나와 두 손을 가슴에 겹치고 노인에게 머리를 숙인다. 노인은 소년에게 십자가 표식을 하고 물러난다.
소년은 뱀이 잔뜩 모여서 꿈틀거리는 주변을 천천히 돈다. 한 바퀴 반을 돌 즈음에, 춤꾼 사이에서 커다란 사내가 코요테 가면을 쓰고 가죽 채찍을 들고나와, 소년에게 다가간다. 소년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계속 걷는다. 코요테 가면이 채찍을 들고, 기대감이 가득한 가운데, 팔을 재빨리 휘두르자, 채찍이 찰싹! 소리와 함께 맨살에 날카롭게 꽂힌다. 소년이 움찔한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안 낸 채 천천히 꾸준히 걷는다. 코요테가 다시 때리고 또 때리고, 군중 사이에서 헉! 하는 소리와 묵직하게 신음하는 소리가 잇따라 흘러나온다.
소년은 계속 걷는다. 두 바퀴, 세 바퀴, 네 바퀴. 피가 흐른다. 다섯 바퀴, 여섯 바퀴. 레니나가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낀다. “아, 그만하라고 하세요, 그만하라고 하세요!” 하고 애원한다. 하지만 채찍은 무정하게 꽂히고 또 꽂힌다.
일곱 바퀴. 소년이 비틀거리더니, 여전히 아무 소리도 안 내고, 앞으로 꼬꾸라진다. 노인이 허리를 숙여서 하얗고 기다란 깃털로 소년 등을 훑더니, 핏빛이 가득한 깃털을 들어 올려, 꿈틀거리는 뱀 무더기에 대고 세 차례 흔든다. 핏방울은 서너 차례 떨어지고 북소리는 갑자기 급하게 일어나고 함성은 거대하게 치솟는다.
춤꾼들이 달려 나와 뱀을 집어 들고 광장을 빠져나간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그 뒤를 따라간다. 잠시 후에 광장은 텅 비고 소년만 쓰러진 자리에 그대로 엎드린 채 꼼짝을 않는다. 원주민 오두막 한 곳에서 늙은 여인 셋이 나와 소년을 어렵사리 일으켜서 안으로 데려간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내 그림과 독수리 그림이 텅 빈 촌락을 한동안 바라보다, 이제 충분하다는 듯, 구멍으로 천천히 내려가 지하세계로 빠져들며 사라진다.
레니나는 여전히 흐느낀다. “너무 끔찍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 마르크스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다.
“너무 끔찍해요! 저 피 좀 보세요!”
레니나가 소리치더니, 부르르 떨며 덧붙인다.
“아, 소마가 있으면 좋겠어요.”
건물 안쪽에서 발소리가 일어난다. 레니나는 꼼짝을 않고 가만히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릴 뿐, 쳐다보지도 않는다. 마르크스만 돌아본다.
이번에 나타나서 테라스로 올라선 젊은이는 원주민 옷차림인데 뒤로 땋아 내린 머리칼은 노란색이고 두 눈은 연한 파란색이며 살갗은 햇볕에 그을렸지만 하얀색이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문명인이군요, 그죠? ‘다른 세계’에서 왔나요, 보호구역 밖에서?”
이상한 젊은이가 말하는데 영어가 완벽하면서도 독특하다.
“도대체 어떻게……?”
마르크스가 깜짝 놀라자, 젊은이는 광장 한가운데 얼룩진 핏자국을 가리키고 “정말 불쌍한 친구예요”라며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감정이 격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야만인은 천박한 쾌락만 가득한 꿈에서 끌어내려는 듯, 비열하고 가증스러운 기억에서 현재로, 현실로, 섬뜩한 현재로, 끔찍한 현실로 끌어내려는 듯, 두려울 정도로 절박한 만큼 숭고하고 고귀하고 중요한 현실로 끌어내려는 듯, 축 늘어진 엄마 손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묻는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엄마 손이 약하게 누르며 대답하는 느낌이 든다. 야만인은 눈물이 솟구친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서 엄마에게 뽀뽀한다.
엄마 입술이 움직인다. “포페!” 하고 다시 속삭인다. 야만인은 얼굴에 오물을 한 통 얻어맞은 기분이다.
분노가 갑자기 끓어오른다. 두 번이나 좌절하니, 가슴에 가득한 슬픔이 다른 출구를 찾다가 고통스러운 분노로 변한다. 그래서 소리친다.
“나는 존이라고요! 당신 아들, 존!”
비참하고 씁쓸한 분노에 휩싸이며 엄마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든다.
엄마가 눈을 파르르 떨다가 뜨더니, 아들을 쳐다보고 알아본다.
“존!”
실제 얼굴을, 분노에 휘감긴 두 손을, 꿀풀 향기와 ‘슈퍼 음성 월리처 스피커’ 소리만큼이나 은밀한 내면세계로, 상상 세계로, 아름다운 추억과 이상하게 뒤틀린 감각 사이로 옮겨간다. 아들을, 자신이 낳은 아들을 알아보면서도 포페와 소마 휴일을 즐기던 말파이스 낙원에 침입한 방해꾼으로 여긴다.
야만인은 엄마가 포페 아저씨를 좋아해서 화나고, 지금 포페 아저씨가 침대에 있다고 착각해서 화난다. 그래서 엄마를 마구 흔든다,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듯, 문명인은 누구도 안 그런다는 듯.
“인간은 누구나 모두에게……”
엄마 목소리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숨이 막혀서 캑캑대는 소리로 줄어들다 사그라진다. 엄마가 입을 크게 벌려, 공기를 빨아들이려고 몸부림친다. 하지만 숨 쉬는 법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엄마가 소리치려고 아무리 애써도 소리는 안 나온다. 엄마가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에 깃든 공포 하나만 크나큰 고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엄마가 두 손을 목에 대더니, 공기를 할퀸다, 이제 더는 들이마실 수 없는 공기를, 엄마에겐 다가가길 거부하는 공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