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포로로 잡힌 펠리체… 철조망 사이로 본 케냐산 반해 탈주한 뒤 스스로 자유 포기
유머로 돌파한 유별난 모험… 70년 만에 국내 첫 번역
☜ 미친 포로원정대 | 펠리체 베누치 지음 | 윤석영 옮김 | 박하 | 424쪽 | 1만2500원
3박4일을 내리 걸어 페루의 공중 도시 마추픽추에 오른 적이 있다. 변덕스러운 남반구의 여름은 툭하면 젖은 안개와 빗방울을 흩뿌렸는데, 특히 후반 12시간은 잠시도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속옷과 신발까지 흠뻑 젖은 등반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마지막 날 새벽. 지구를 반 바퀴 날아오고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런 악전고투였으니 탄성이 커질 수밖에. 최후의 고개 '태양의 문'을 넘었을 때, 잠시 구름을 벗고 자신의 팽창한 핏줄과 힘줄을 허락해준 해발 2400m의 수수께끼 하늘 도시.
'미친 포로원정대'를 고른 이유가 단지 자연의 매혹에 대한 개인적 공감 때문만은 물론 아니다. 산악인의 도전과 성취라는 모험 논픽션의 매력을 넘어, 고난과 억압을 유머와 도전 정신으로 돌파하는 이탈리아 전쟁 포로의 저돌적 세계관이 지금 우리의 필요 조건 중 하나라고 믿기 때문이다.
2차대전 막바지인 1943년. 아프리카를 욕심냈던 제국주의 이탈리아의 젊은 공무원 펠리체 베누치<사진>는 에티오피아로 파견됐다가 포로 신세가 된다. 영국을 필두로 한 연합군이 조국의 야심을 허무하게 격퇴했던 것. 5년간 탈출 성공 횟수가 단 한 건에 불과한 악명높은 케냐 354 포로수용소에 그는 갇힌다. '생리학적 의미'에서만 산다고 할 수 있던 자포자기한 베누치에게 새 희망이 생긴다. 수용소 철조망 사이로 잠시 모습을 드러낸 설산(雪山). 베누치의 표현에 따르면 일렁이는 운해를 뚫고 지평선 위로 두둥실 떠오른, 푸른 빛 빙하를 몸에 두른 해발 5200m의 영산(靈山) 케냐산이었다.
죽음을 불사했던 탈출의 이유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도 아니고,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면, 당신은 어처구니없는 헛웃음을 날릴 것인가. 그것도 영원한 탈주가 아니라 다시 감옥으로 돌아오겠다고까지 다짐했다면. 펠리체와 의기투합한 두 명의 정신 나간 사내는 이제 고철을 주워 만든 피켈, 모기장 매듭을 풀어 만든 로프, 피 같은 담배를 바꿔 비축한 열흘간의 식량과 함께 '담'을 넘는다. '인간 위험지대'를 돌파했다고 희희낙락하는 이 세 명 포로를 맞이한 다음 무대는 '동물 위험지대'. 사자보다 더 난폭한 코뿔소와 들소, 치타 같은 맹수들이다. 잊으셨는가. 여기는 아프리카다. 키니네(말라리아 예방약)를 너무 많이 먹어서 기차 역장 1000명이 동시에 호각을 불어대는 심신 미약 환청, 해발 5000m의 고산병이 일으킨 심신 상실 환각 상태에서도 이들은 '깨알 같은 유머'를 쉬지 않는다.
가령 아프리카의 숲과 계곡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이들의 대화.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즐거움의 대가가 (복귀한 뒤의) 28일 감방 생활에 불과하다니 믿어지지 않아." "나는 56일 동안이라도 기꺼이…." "난 120일." "최고가입니다. 낙찰!"
"난 말이야, 요 며칠 새 최소 10년은 젊어진 것 같아." "겨우 10년? 난 30년!" "그러면 우리가 널 배낭에 집어넣고 다녀야겠구나. 기저귀도 안 가져왔는데 어쩌나."
먹구름이 걷히고 마침내 위용을 드러낸 케냐산. 포로수용소 철조망 사이로 자신을 드러낸 이 설산에,
펠리체 베누치는 영혼을 빼앗기고 말았다.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이다. /박하 제공
세 명의 전쟁 포로는 마침내 안개가 깨끗하게 걷힌 매킨더 계곡을 넘어 정상을 밟는다. 하지만 70년 전의 모험담을 지금 다시 읽어야 할 이유가 그때의 감격 때문만은 아니다. '미친 포로수용소'의 교훈은 기껏 얻은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다시 수용소로 돌아오는 펠리체의 삶과 영혼의 성장에 있다. 아 사내의 비유법을 빌리자면, 어떤 까다로운 압수수색을 하더라도 절대 '압수'당하지 않을 자신에 대한 신뢰와 균형 감각. 펠리체는 1946년 7월 포로수용소에서 이 글을 썼고, 2년 뒤 조국으로 송환되어 바로 책을 펴냈다. 이후에는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이탈리아 대사로 세계를 누볐다. 원제는 'No Picnic on Mount Kenya'. 유머 가득한 그의 구어체 스타일로는 "케냐산 등반, 소풍(장난)이 아니었네" 정도가 될 것 같다. 국내 초역. 소설가 김훈은 "고철을 주워서 등산 장비를 만들 때 우리는 이미 케냐산에 들어와 있는 셈"이라며 "산은 늘 당신들 가까이에 있다. 창문 밖이 산이다"라고 추천사를 썼다. 결국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어수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