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보며
윤 영 애
잠이 오지 않아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1950년 후반에 충청도 시골마을 남일면 고은리 쌍암동에서 태어나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를..... 4남매의 둘째로 태어나서 언제부터인지 맏딸 노릇을 하게 되었다. 언니와 남동생이 어린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났기 때문에 4살 터울의 여동생과 둘만 남았다. 우린 아버지께서 사업에 실패하시고 농사를 짓고 살았다. 농한기엔 우리집에 사람들이 모여서 밤참 내기도 하시고 바둑도 두셨다. 8살 되던해는 바둑판을 사오셔서 동생과 교대로 두라고 했는데, 그때부터 동생이 재능이 있었는지 청주에 있는 기원에 마이크로 미니버스를 타고 가서 정석 포석을 가르치셨다. 덕분에 7살에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그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서 안 된다던 교장선생님이 아버지의 제안으로 바둑 잘 두시는 선생님과 대작해서 이기면 입학을 허용 하기로 했다. 숙직실에서 바둑을 뒀는데 내동생이 이겼다. 그래서 나보다 3년 후배가 되었다. 딸 둘이 아들보다 났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지만, 아들이 없던 우리집은 동네 사람들이 모르는 아줌마를 보내서 아들 낳으라고 했다. 난 아줌마를 아버지 몰래 내 쫓았다. 그래서 다행이 배다른 형제는 없었다.
청주여중 가려고 등잔불을 두 개 켜놓고 공부했는데, 우리 때부터 무시험 추첨으로 청주여중에 입학했다. 1학년 5월에 갑자기 급체해서 결석을 밥 먹듯이 했다. 담임선생님께서 한 학년을 쉬었다 다시 다니라고 하셨다. 난 눈앞이 캄캄했다. 난 무조건 안된다고 해서 간신히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에 우수반에 들어갔다.
열심히 공부해서 청주여고 시험을 봤지만 낙방했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원치않는 여고(미션스쿨)에 진학하면서 공부는 뒷전이고 기타 배우면서 포크송도 신나게 부르고 송년의 밤엔 교회가서 노래도 불렀다. 초청해서 어쩔 수없이.... 개방적이신 아버지 덕분에 멀리 있는 친구와 펜팔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여고 졸업하고 인천 작은집으로 가서 취직을 했다. 글씨 잘 쓴 덕에 카톨릭 의대에서 회사대표로 의무교육도 받았다. 덕분에 회사 기숙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사원들이 많아서 몇 백명이 기숙사 생활을 했다. 휴일이면 천호동에 있는 사감님댁에도 놀러 가기도 했다. 주말부부 시라서 가끔 우리들도 함께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호선 전철을 타고 청량리에서 내려 청평유원지로 놀러 갔다 오는데, 돌아오는 전철안에서 여고시절 음악선생님을 만났다.
어찌나 반가웠는지 몰랐다. 여고1학년 때 클래식 기타 개인지도 받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영애야! 넌 음악성이 뛰어나니까 연대 작곡과를 가라.” 고 하셨다. 어이가 없었다. 그때 난 여고도 간신히 다녔다. 아버지 사업 빚 때문에 등록금도 빌려다 낼 정도였다. 그 다음 레슨때는 “전 클래식 안 배울래요. 그냥 고고 슬로우록 그런거나 배우면서 포크송이나 부를래요.”했다. 깜짝 놀라시더니 제 고집이 워낙 세니까 난 포크송을 가르쳐 주셨다. 워낙 멋지고 잘 생기신데다 하숙을 하고 계셨는데, 선배님들이 힘들게 하셔서 할 수 없이 인천고향으로 전근 가셨던 거였다. 부평역 레스토랑에서 제일 비싼음식 특A정식을 사 주셨다. 그런 음식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식사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 당시(여고1) 넌 인생을 달관한 것 같았다. 키는 작았지만....” 하시길래 속으로 예술인이시라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셨구나 생각했다.
참으로 신기한 만남의 여운이 오래 갔다. 지금은 휴대폰이 있어서 전화번호를 물어 봤겠지만, 어느 학교 근무하신다고 했는데 한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지금은 멋진 노신사가 되셨으시라 생각한다. 회자정리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새겨봤던 날이었다.
스물아홉에 결혼해야 두 번 안 한다고 해서 버티다가 지금의 남편과 선을 보고 스물아홉 가을에 결혼을 해 이듬해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 친정 아버지께서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외손주를 그리 이뻐 하셨다. 딸만 있던 집이라서 더 기쁘셨나 보다. 고향 친구가 어느날 이런 얘기를 했다. “너 할머니한테 잘해서 아들 낳았다고 친정동네 소문 났더라.” 해서 웃으면서 “난 잘한게 없고 있는 그대로 한것뿐인데” 라고 했다.
삶의 현장에서 바쁘게 살다보니 감성은 점점 메말라 갔다. 그러던 중 집 앞 옛 법원자리에 충대 평생교육원이 생겼다. 2015년 1학기에 팝송반에 등록했는데, 강사님 건강이 안 좋아서 취소됐다. 환불 대신 그 가격으로 다른 강좌 등록을 했다.
몇 주째 강의를 듣던 어느날 강사님이 갑자기 “윤영애님은 신기가 없네요.”하셨다. 왜 하필 나였을까? 기가 막혔다. 난 손을 번쩍 들고서 “전 무속인입니다. 바로 요앞에 살고 있는데요.” 라고 외쳤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무 말씀을 못하셨다.
강의가 끝나자 회원분이 밤에도 상담하냐고 하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상담받고 싶다고 해서 함께 집에 와 상담받고 갔다. 그렇게 무의미한 1학기가 끝나고 2학기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팝송반 개강을 해서 몇 년 동안 즐겁게 다녔다.
2019년 코로나로 인해 취소되고 마땅한 강좌가 없어 고민하던 중에 수필반 저녁 프로그램이 있어서 수강 신청을 했다. 펜을 놓은 지가 40여년이 되어서 자신이 없었지만 도전해 보리라 마음 먹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수업을 듣다보니 재미있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벌써 1학기가 끝나고 2학기 수강을 하고 있다.
김효동 은사님(55년전 청주여중)이 주시는 효동문학상을 받아서 감개무량 했다. 은사님께서 구순이신데도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그저 마음이 흐뭇했다. 김홍은 교수님과의 인연을 오래오래 이어가면서 훌륭하신 문우님들을 닮고 싶다. 앞으로 행복한 날을 그려보면서 못 쓰는 글이라도 열심히 써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