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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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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시사 스크랩 [경복여행] 마구령을 넘어 浮石寺로 - 경북 영주(2007.2.24)
심메마니 추천 0 조회 48 10.09.12 12: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자동차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에서 포장도 안된 고개를 넘어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를 지났습니다. 다시 백두대간이 지나는 마구령을 넘어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으로 들어섰습니다. 지질적으로 보면 고생대의 변성퇴적암지대를 지나 화강암지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지역은 조선 초 순흥도호부에서 풍기군으로, 오늘날 榮州市가 되었습니다.

 

  수양대군(1417-1468)은 계유정난(1453)으로 단종의 보호세력인 안평대군, 김종서, 황보인을 제거하고 김종서의 세력인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마저 없앱니다. 1455년 조선의 7대 임금으로 등극하고 동생인 금성대군을 평안도 삭령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배시킵니다.

 

  1456년 새임금을 반대하는 사육신을 제거하고 금성대군을 경상도 순흥으로 옮깁니다. 1457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여 영월로 유배를 보냅니다(6월).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과 단종복위를 꾀하다 발각(9월)되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단종 복위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숙수사는 폐사되었고 가담했던 사람들은 숙수사 옆 청다리 아래서 처형당했습니다. 이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10리나 붉게 물들어 흘렀답니다. 그 후 사람들은 청다리 10리 아래에 있는 영주시 안정면 동촌리를 피끝마을이라 불렀습니다.

 

  순흥도호부는 풍기군으로 격하되었습니다. 숙수사는 폐사가 되어 85년동안 빈터로 있었습니다. 1542년 군수 주세붕이 순흥 출신으로 고려말에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1243-1306)을 기려 숙수사지 빈 터에 백운동서원을 세웁니다. 1548년 풍기군수가 된 퇴계는 백운동 서원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요청합니다. 1550년 국가는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사액하고 책과 노비를 하사합니다. 이로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영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륙에 위치하여 운송조건이 불리하고 배후지가 적어 산업발달에 불리한 조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국세청이 2005년 전국의 104개 세무서의 세수실적을 발표한 통계표에보면 영주 세무서는 104위로 전국 최하위입니다. 관할구역이 영주시, 예천군, 봉화군인데 세수는 345억원이었습니다. 농업 이외는 다른 산업이 거의 없다는 의미일겁니다.

 

  전통적인 농업이 경제의 바탕이 되다보니 지역사회 또한 보수적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유교사회의 전통이 아직 깊숙히 배어 삶의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퇴색한 宗家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후손들의 정성이 아직도 남아있고, 아직도 다른 지역에 비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와 관습이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산업화되고 개방적인 도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 지역을 변화시킨 것은 철도와 개성에서 와서 풍기에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일제시대에 중앙선 철도가 순흥은 통과하지 않고 영주를 지나면서 역이 만들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통이 편리한 영주역 가까이 옮겨 갔습니다. 광복 후 태백시 지역의 자원을 수송하기 위해 영암선(영주에서 철암까지, 현재는 강릉까지 연결되어 영동선이라 부름)이 개통되자 태백지역을 배후지로 도시가 성장했습니다.

 

  풍기는 풍수상의 명당자리입니다. 수 많은 전란을 겪은 사람들은 안정적인 도피처가 필요했습니다. 과거에도 사람이 조금씩 모였겠지만 광복과 한국전쟁 과정에서 많은 개성사람들이 풍기에 모였습니다. 개성사람들이 모이면 주 산업이 인삼과 관련됩니다. 그들은 인삼을 재배하고 가공하여 전국적인 판매를 하였습니다. 또 섬유기술자들이 모여 인조견을 생산해 영주지역의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사과재배는 비는 적게오고 연교차와 일교차가 큰 곳이 유리합니다. 큰 盆地를 이루고 있는 경상도의 내륙지역은 사과재배의 좋은 지역입니다. 문제는 소비지까지의 연결입니다. 도로교통이 불편했던 과거의 영주는 사과재배가 많지 않았습니다. 광복 후 '대구 사과'가 알려졌지만 도시화로 사과 과수원이 점점 도시에서 멀어졌습니다. 중앙고속도로가 지나는 현재 영주시가 전국 제1의 사과 재배지역이 되었습니다.

 

  마구령에서 영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영월에서 의풍을 거쳐 순흥으로 오는 길은 마구령과 고치령이 있습니다. 순흥에서 볼 때는 마구령이 영월과의 연결이 쉽습니다. 1457년 6월에서 9월 사이에 이 고개도 단종과 금성대군을 연결하는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을 겁니다.

 

  백두대간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구령 정상에서 영주방향으로 내려오다가 視界가 펼쳐진 곳에서 차를 세웠습니다. 저 아래 커다란 분지안에 야트막한 산과 골짜기가 펼쳐지고 그 속에 인간의 삶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극적인 시간적 공간이 1457년에 있었습니다.

  

  부석사로 향했습니다. 당에서 유학한 성골 출신의 의상이 화엄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창건한 절입니다. 절집을 빛날 화(華)자의 공간 배치를 했습니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일주문입니다. 봉황산 기슭에 있지만 '태백산 부석사'라고 쓰여있습니다. 主山보다는 宗山이 가지는 의미가 더 컸다는 의미일겁니다.

 

 부석사의 당간지주. 두 돌기둥 사이로 긴 나무를 세워 깃발을 달아 절의 여러 행사를 알렸을 겁니다. 깍은 솜씨로 보아 무량수전 앞 석등의 석공과 같은 사람일 것 같습니다.

 

  부처를 지키는 四天王이 부석사를 든든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천왕문을 지나면 도솔천이 펼쳐집니다.

 

  나무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 썩어 없어지지만 석축은 천년이 가도 그대로 남습니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돌들을 빈틈없이 튼튼하고 아름답게 쌓아 천여년의 세월을 견디고 있습니다.

 

  범종각. 1746년 불타버려 1747년(영조23년) 다시 지었습니다. 이 건물의 현판에는 '봉황산 부석사'라고 쓰여 있습니다. 전면은 팔짝지붕이지만 후면은 맞배지붕입니다.

 

 

 

  범종각을 지나면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펼쳐집니다. 불교에서 安養이란 극락을 의미합니다. 안양루 누각 밑에서 무량수전의 마당으로 올라서면 그곳은 극락이라는 의미입니다. 안양루에 걸려있는 '부석사' 현판은 이승만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1956년) 쓴 글씨를 새겨 걸었습니다. 

 

  국보 17호인 석등과 18호인 무량수전.

 

  안양루에 걸려있는 김삿갓 시의 현판입니다.

 

평생에 여가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발이 다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 있고

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오듯

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인간 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 보겠는가

세월이 무정하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유홍준 교수가 '국보 0호'라고 했던 무량수전에서 낙동정맥을 바라보는 경관입니다. 나도 마음이 답답할 때면 가끔씩 이곳에 와 이 경관을 보면서 눈의 사치(奢侈)를 즐기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이 大自然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족을 달자면 나는 종교적으로 불교와 관련이 없지만 큰아들 이름은 浩然이고, 작은아들은 自然이라 붙여주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왕은 12월에 안동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물론 수도인 개경(현재 개성)은 함락되었습니다. 1362년 봄 개경으로 환도하는 길에 공민왕은 이 곳 부석사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무량수전이라는 휘호를 남겼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를 좋아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 휘호를 그냥 둘 이유가 없습니다. 이 휘호를 새겨 무량수전의 현판으로 달았습니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가 머무는 곳인 무량수전입니다. 1043년(고려 정종 9년) 원융국사가 중창할 때 지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오래되었습니다. 이 무량수전 안에 '무량수불'로도 불리는 '아미타불'이 있습니다. 대개 절의 본존불은 남향을 하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은 서쪽에서 동쪽을 보도록 배치되었습니다. 이는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정토에서 극락을 다스리는 모습으로 형상화된 배치를 한 것 같습니다.

 

  안양루. 누각도 아름답지만 그 배경의 아름다움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중국 아가씨 선묘는 신라의 스님 의상을 사모했습니다. 의상은 종남산에서 지엄에게 화엄을 배웠습니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선묘는 의상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옷을 들고 부두로 갔습니다. 그러나 의상을 태운 배는 바다 저 멀리 떠나고 있었습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당연히 용이 되어 의상을 지켰습니다. 의상이 창건한 부석사는 무량수전 뒤편에 조그만 사당을 지어 선묘를 기리고 있습니다.  

 

  이 절집의 이름이 된 부석입니다. 부석사는 고려시대에 선달사(善達寺)라 불렸답니다.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과 같은 뜻입니다. 부석이란 뜬돌이란 뜻인데 큰 돌이 공중에 떠 있다고 과장합니다. 1723년 이곳을 방문한 이중환도 택리지에 노끈이 거침없이 드나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지형적으로 보면 이 지역은 화강암지역입니다. 지하 깊은 곳에서 마그마가 서서히 굳어 만들어진 화강암은 지표의 압력이 줄어들면 부피가 팽창하여 박리현상이 일어납니다. 박리(剝離)에 의해 바깥쪽 돌덩이는 절리(joint)에 의해 분리됩니다. 마찰력이 중력보다 클 때는 岩體에 붙어 있지만 비가 많이와서 물기가 많아진 그 어느날 중력이 마찰보다 커지면 무너져 버립니다. 그렇게되서 부석이 만들어졌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3층 석탑입니다.

 

무량수전

 

 

 

  국보 17호인 석등의 조각들입니다. 박혜성샘이 석등의 조각들을 유심히 보라고 일러줬습니다. 단단한 화강암에 속을 파고 예쁘게도 조각했습니다. 오직 망치와 정으로 쪼아 이렇게 만든 그 솜씨와 정성이 놀랍기만 합니다. 유홍준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석등이라 했습니다.

 

  무량수전의 옆면 벽입니다.

 

  이 절의 창건주 의상대사를 모신 조사당(祖師堂)입니다. 우연히 이곳에 싹을 틔워 자란 선비화(골람초)를 천년을 뛰어넘어 의상의 지팡이라고 전설을 만듭니다. 전설은 신비한 힘을 가져 선비화의 잎을 달여 먹으면 임신을 한다는 속설로 전해져 선비화는 수난을 당합니다. 전설도 지키고 수난을 막기 위해 조사당 앞에 철망을 설치해 조사당을 흉물스럽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조사당에서 내려오는 길에 아름다운 부석사의 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소수서원. 오후 6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더니 문을 닫았습니다. 금강송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원래 숙수사가 있던 이곳은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사건으로 폐사되고 그 절터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세워졌습니다. 당간지주만이 이곳이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위리안치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해 놓은 장소입니다. 형돈쌤이 초가 아래있는 구덩이를 자세히 보려다가 초가의 천정에 머리를 부딪혔습니다. '쿵' 소리가 구덩이에 공명이 되어 울렸습니다. 머리가 아픈 그에게 교대쌤은 '문화재훼손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멘트했습니다. 한참을 웃었습니다.

 

 

  어둠이 덮이기 직전 금성대군의 위리안치지로 갔습니다. 위리안치란 중죄인을 가두어두는 곳입니다. 바깥에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두르고 가운데 땅을 파서 죄인을 가두어 두었습니다. 세종의 6째 아들로 태어나서(1426년) 둘째형의 권력욕에 인생이 일그러졌습니다. 20대 청춘의 나이에 유배생활만만 거듭하다가 서른 둘의 젊은 나이에 조카의 복위를 도우려다 실패하여 이곳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안동대도호부로 이송되어 생을 마감(1457년)했습니다. 금성대군은 1683년(숙종9년)에 신원이 회복되고 1719년(숙종45년)에 금성대군을 배향하기 위한 금성단이 설치됩니다. 영주 순흥 땅은 금성대군의 혼이 서려있는 곳입니다.

 

  세종은 원칙도 없이 힘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는 현실에 몸부림쳤을 겁니다. 아버지(태종, 이방원)은 태조(이성계)의 5째 아들로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의 신하들을 죽인 끝에 왕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자란 태종의 아들들은 두려웠을 겁니다. 양녕은 미친짓으로 왕위를 포기하고 효령은 중이 되어 왕위를 포기했습니다. 왕이된 세종은 왕위 계승 원칙을 만들어 적어도 친족간의 피흘림을 막으려 했을 겁니다. 그래서 강건한 둘째 수양보다는 병약한 큰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원칙이 새로운 친족간의 피흘림을 되풀이 했습니다. 수양은 두 동생을 죽이고 조카를 왕에서 몰아내어 죽였습니다. 

 

  순흥을 구경하고 청량산으로 향했습니다. 봉화의 닭실(酉谷)로 갔습니다 어두워 살펴보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단지 충재 권벌의 종가가 수리 중이란 것만 확인했습니다. 봉성은 돼지숯불구이집이 많았습니다.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를 솔잎 위에 얹어 나왔습니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청량산 입구의 민박집(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서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는 깊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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