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억양과 강한 힘이 묻어나는 소프라노 톤으로 “인생 신나고 재미있게 삽시다! 행복하소서∼”를 외치는 정덕희 교수(51·명지대 사회교육원).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람들 앞에서 ‘푼수’를 떨고 때론 스스로 한 농담에 자지러지기도 하는 그를 보면 인생이 정말 행복해서 견딜 수 없어하는 사람 같다.
그런 그가 자신의 힘겨웠던 과거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가 스타 강사로 성공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졌지만 가족간에 있었던 갈등까지 밝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열두 남매 중 열한번째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고2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선 학업도 포기해야 했어요.”
고3, 10월의 마지막 밤 그는 장항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가정형편상 더 이상 학업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것. 그는 출판사를 거쳐 한 화장품 회사 상담원으로 취직했다. 회사 근처의 자취방에서 늙은 어머니와 막내동생과 함께 살았던 그는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그렇게 2년여가 지났을 때 남편 이영덕씨(58)를 만났다. 같은 회사 동료였던 남편은 그보다 일곱살이나 위였으나 고시 공부를 하다 뒤늦게 직장생활을 시작한 터라 사회생활 경험은 그보다 적었다. 명문대에서 석사학위까지 받고, 2백 평이 넘는 대저택에서 사는 부잣집 아들인 이씨가 그에게 관심을 표하자 그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부잣집에 시집가는 게 꿈이었으니 드디어 성공했구나 싶었죠. 예단을 준비할 형편이 못되니까 시어머님이 따로 돈을 쥐어주셨어요.”
사회생활 원만히 해내지 못하는 남편 대신해 생업에 나섰다 스타 강사 돼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처음엔 아무런 마찰이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시부모가 부부 갈등 끝에 황혼이혼을 한 것.
“황혼이혼을 하게 되자 시어머니는 그 스트레스를 저하고 제 딸에게 풀기 시작했어요. 저한테 그러는 건 괜찮았는데 어린 딸에게 ‘계집아이가 태어나는 바람에 우리 집안 꼴이 이렇게 됐다’며 화풀이를 하실 때는…. 그 어린 게 무슨 죄가 있다고….”
하지만 그는 시어머니를 이해한다고 했다. 노년에 남편과 이혼한데다 투자를 잘못해 경제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 상황에서 딴살림을 내보냈던 아들 부부가 다시 본가로 들어오자 심기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들 부부는 시부모가 마련해준 집을 판 돈으로 봉천동에 조그만 선물가게를 연 참이었다.
“그때가 결혼 8년째 되던 해였어요. 가르칠 만큼 가르친 아들이 제 밥벌이도 못하고 또 얹혀살겠다고 식구들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오니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나봐요. 그 화를 식구들 중 가장 만만한 저한테 푸신 거죠.”
하지만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너 같은 며느리는 필요없다. 우리집에서 나가라”는 시어머니의 말에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추운 겨울, 마땅히 갈 데가 없어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한없이 울고 있던 그를 찾아 남편이 달려왔다. 그날부터 그는 선물가게의 창고로 쓰는 한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딸과 함께 웅크리고 잠을 잤다. 두어 달 후 남편도 아들과 함께 본가에서 나왔고 네 식구가 지하 월세방을 얻어 생활했다.
“깊은 지하 방이라 햇빛이 들지 않았어요. 그래도 참고 살려고 했는데 여름에 수해를 입고 말았어요. 물을 퍼내고, 장롱 등 세간들을 닦다 보니 설움이 북받치더라고요.”
|
첫댓글 얼마전에 회자가 되었는 이야기 지만 열심히 사신분께 찬사를 보내고 픈 심정에서 옮겼어요
자신을 크게 변화시킨 여성 참 대단해요.
행복하소~서 복받은 우리 친구들 !!
잠제되어있던 능력을 찾는데는 그런 큰 아픔이 있어야하는것인지 성공을해서 기쁘군요
정말 아픔을 승화시킨 인간승리네요. 열심히 사는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어요..
정교수의 웃음은 옆사람에게도 전염시킨다는데...이런 아픔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