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1995년, 일본 도쿄에서는 옴 진리교 신자들이 출근길 지하철에서 맹독 가스를 살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보다 2개월 앞선 1월엔 고베 지역에 대지진이 덮쳐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 옴 진리교 사린가스 테러 사건과 고베 대지진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사회를 상징하는 종말론적 징후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이후 일본인들의 삶과 정신을 바꾸는 정말 중요한 변화는 같은 해 '조용히' 일어났다. 1995년 일본 경단련(경제단체연합회)은 <새로운 시대의 일본식 경영>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해 노동력의 탄력화와 유동화를 통한 인건비 절약과 임시직과 계약직, 파견 등의 전면적 도입을 새 시대의 경영 전략으로 제시했다.
일본에서 비정규 노동 확대는 1980년대부터 꾸준히 지속되어 온 현상이긴 하지만, 보고서의 내용은 비정규 노동의 '성격'이 변했음을 뜻했다. 과거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임시적 성격이었던 비정규직이, 종신 고용과 연공 서열을 근간으로 하는 전통적 고용 형태를 전면적으로 대체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시마 고사쿠라는 남자가 전자제품 회사 하츠시바에 입사해 승진을 거듭해 사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만화 '시마 시리즈'가 있다. <시마 과장>부터 시작하는 이 시리즈의 번외편인 <시마 사원>을 얼마 전 봤는데, 경력=승진으로 이어지는 안정된 회사 질서와 지금의 회사원 월급으론 벅차 보이는 소비 습관 등이 눈에 들어왔다.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 후반이다.
20대의 시마가 기리노 나쓰오의 2007년작 <메타볼라>(김수현 옮김, 황금가지 펴냄) 속으로 떨어진다면 어떨까. 이 소설은 기억과 존재 기반을 상실한 주인공이 오키나와에서 겪는 일들을 그리는데, 바다를 배경으로 한 우정과 사랑 얘기가 아니다. 나오는 젊은이들은 죄다 저임금 아르바이트, 호스트바·출장 안마소, 그도 아니면 허울 좋은 '무급 자원봉사'의 세계에 내몰린 프리터이며, 따라서 오키나와는 낭만의 배경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개미지옥의 은유처럼 등장한다. 주인공이 기억을 잃은 이유도 공장에서의 파견 노동과 관련이 있다.
<사원 시마>의 시마가 스물여덟, <메타볼라>의 주인공 유타가 스물여섯이다. 두 캐릭터의 세부 사항(가정환경, 학력 수준)은 차치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이의 아이콘만 놓고 살펴보면 1976년과 2007년의 격차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는 물론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의한 노동 규제 완화, 버블 붕괴 이후 대량의 실직 사태로 비정규 노동은 단순한 보조 인력이 아닌 사회의 기간(基幹)이자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된 것이다.
이런 흐름은 정규직-비정규직 간 임금, 대우 격차로 인한 양극화의 심화를 낳았을 뿐 아니라, 정규직조차 '우리는 안심'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악조건을 강요받게 만들면서 "'프리터적인 것'이 사회에 침투하여 주요한 생활양식"(문화연구자 모리 요시타카의 표현)이 되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의 삶 속에 불안정성이 급격히 증식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프리터'가 의미하는 존재 방식 속엔 일견 긍정할 만한 구석도 있다. 프리터란 '프리(Free)'와 '아르바이터(Arbeiter)'를 합친 말로, 정규직이 되지 않고 이런저런 파트타임 잡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자유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원래는 자발적으로 선택된 긍정적 직업이라는 뉘앙스가 더 컸으며, 실제로 지금도 그 장점은 유효하다.
가령 지난해 한국을 찾은 교토의 한 인디 밴드는 "음악과 생계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힘들지 않느냐"는 한국 다큐멘터리 감독의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노인 개호 보조나 클럽 직원으로 하루 몇 시간만 일하는 그들에게는 음악을 지속케 할 만한 '시급'이 있었고, 프리터와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분리할 만큼의 정신적 여유도 있었다. 이들이 딱히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큰 돈 욕심만 접으면 음악을 끌어안을 정도의 '비정규직/뮤지션으로 살아갈' 선택지는 있단 얘기다. 물론, 한국 아르바이트 시급으론 턱도 없는 얘기다.
▲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공모하라!>(이진경·신지영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이진경·신지영이 일본의 비정규 노동 운동가들을 인터뷰해 엮은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공모하라!>(그린비 펴냄)를 읽고, 저자들의 현실 인식과 맞닿는 부분들을 나름의 경험 위주로 위와 같이 정리해 봤다. 이진경은 서론에서 1990년대 중반을 전후로 한 임시직·파견 노동의 급증과 경영 체제 자체의 변화를 간단히 설명하고 나서 이로 인해 파생된 격차와 불안의 문제들을 짚는다. 그리고 곧장 2010년대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정규 노동 운동의 현장으로 달려 나간다. 전자, 즉 '비정규 노동'의 현주소가 아니라 후자, 즉 '비정규 노동 운동'의 현주소가 이 책의 이슈다.
일본에서조차 제대로 된 책이 나와 있지 않다는 비정규 노동 '운동'에 주목한 이유는 그것이 노동과 생산의 점차적 소멸이라는 공통의 상황에 직면한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에게 중요한 참조 지점을 줄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프레카리오(precario, 불안정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합성어인 프레카리아트는 원래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말로 임시직이나 파견 사원 등 불안정 노동자 계급을 지칭하지만, 일본의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노동자'란 테두리 바깥의 실업자나 노숙자, 히키코모리, 장애인 등 빈곤 문제를 겪는 매우 이질적인 사람들까지 하나로 묶어 주는 현실적인 기능을 한다. 6장의 인터뷰이인 아마미야 가린은 이 말 안에 힘차고 강한 이미지가 있다며 "(구제받아야 할) 가난뱅이가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킬 주체라는 의미"로 확장시킨다.
앞서 인용한 모리 요시타카의 말을 변형하자면 프레카리아트야말로 현재 대다수 일본인들이 처한 생활양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호화스러운 시대를 일찍이 떠나보낸 일본은 이제 전 세계가 그 전형이라 인정하는 '저성장 사회'로 진입했으며, 만들어지는 일자리라곤 일시적 경제 부양을 노린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생활양식에 순응하여 시대를 견딜 것인가, 얼마 안 되는 '괜찮은 직업(Decent job)'으로 향하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려 애쓸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를 요구하고 움직일 것인가. 당연히 책은 마지막 선택지로 가는 길을 제시한다.
저자들은 현재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안정적인 정규직화란 일시적이고 개별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비정규직을 정규직이라는 '정상 상태'에서 벗어난 일시적 '예외 상태'가 아니라 점차 확대될 '정상 상태'로 보"고, 비정규직인 채 살아가기 위한 방법, 비정규직으로서 운동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다양한 비정규 고용 형태를 인정하되 '원칙적인 직접 고용, 충분한 임금' 등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여 비정규직으로 노동하는 데서 오는 손해와 불리함을 축소하고 제거하는 방향이다.
기실, 저자들이 만난 일본의 활동가들은 어느 누구도 비정규직 철폐나 정규직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대체로 파트타임 등 다양한 비정규 고용 형태를 긍정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노동 운동을 '노동자'란 틀 안에 가두려 하지 않으려는 의지나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인식을 바꾸고 싶다는 주장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비.정.규직 철폐! 투쟁!" 혹은 "Be, 정규직!"이란 구호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의 노동 운동과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며, 이 차이점이 저자들로 하여금 책을 쓴 더 구체적인 목적을 밝히게 만들었다.
"한국 비정규 노동 운동이 그 강력한 열정과 강도, 투쟁 능력과 조직력 등을, 비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비정규직으로서 운동하고 투쟁할 길을 창안하는 데 투여할 수 있다면, 비정규직이 일반화된 지금 시대의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63쪽)
물론 비정규직이 일반화된 혹은 일반화될 미래를 상정하는 현실 인식에 공격적인 이견이 제시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암울한 이야길 들으면 사람들의 인식은 자연스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수의 예외일 가능성'에 꽂히고 마는 법이니까. (그래서 오히려 불안 노동의 험난한 현실을 다룬 책들이, 덮고 나서 토익 책을 드는 효과로 이어지곤 한다.)
한편, 이 책에서 '새롭다'고 소개된 노동 운동들이 보다 전통적 의미의 노동조합 운동과 그 조직 방식, 운동 방식에서 선을 달리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싶다. 즉 '우리는 다 망했다'는 인식이 널리 공유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과거에 해 왔던 노동 운동 방식과 다른 무엇을 발명해나가야 한다는 점이 이들이 처한 어려움에 해당할 것이다.
책에 등장한 인터뷰이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노동 운동을 하고 있다. 크게 보아 1~3장의 가모 모모요('전국 유니온')·세키네 슈이치로('파견 유니온')·이토 미도리('여성 유니온 도쿄')가 일반적인 의미의 노동조합이라는 틀 안에서 급여 인상이나 부당 조건 개선, 법 개정과 같은 좀 더 전통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면 나머지 네 개 장의 운동들은 보다 다양한 요구를 발산시키려는 네트워크 운동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프리터 전반 노조'를 다룬 4, 5장의 경우 저자들이 '새로운 노동 운동'이라 말할 때의 특징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다.
서문에서 이진경은 △조직 형태 △노동 운동을 넘어 '사회 운동'이 되고자 하는 운동의 성격 △문화·정서·스타일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새로운 노동 운동의 특징을 개괄한다. 프리터 전반노조를 예로 들면, 조직 형태에 있어 노조라기보다 상호부조적인 모임에 가깝다. 따라서 한국에선 '좋은 일 한다는 놈들이 무급으로 노동을 착취한다'는 식으로 비난받을 가능성이 있는 이들의 무급 원칙도 다른 맥락에서 그 정당성을 찾는다. 유급의 전임활동가를 두면 "직원의 생활을 위한 운동이 되"리라는 점을 경계하는 것이다.
또 부조적 성격을 유지하기 위한 '자연적인 규모'가 "30~40명이 한계"라는 인식 하에 일부러 조직을 작게 유지하려는 점도 인상 깊다. 집행위원인 야마구치 모토아키가 "(동네마다 있는) 파출소의 수보다도 더 많은 조합을!"이라고 외친 것처럼 이들은 기민하고 작은 조직의 더 많은 분산을 원한다.
한편, 7장의 인터뷰이인 '반빈곤 네트워크' 사무국장 유아사 마코토는 "현재 노동 문제와 생존 문제가 거의 구별 불가능해지고 있"음을 지적하는데, 이는 노동 운동을 넘어 '사회 운동'이 되고자 하는 운동의 지향성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언급이다. 유아사는 비정규 노동 운동이 '노동' 문제 이외의 것을 다루지 않는 노동 전문 기관을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직장 내에서 불거지는 트러블의 관리뿐 아니라 살 곳이 없고, 빚이 있고, 정신적인 병이 있고, 가족 트러블이 잦은 프레카리아트적 삶의 위기 전반을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사운드 데모·디제잉·코스프레로 상징되는 독특한 표현적 욕구와 '분노의 정서'가 중요하게 언급된다. 이러한 스타일은 정해진 양식대로 구호를 외쳤던 과거 데모로부터의 외형적 변화일 뿐 아니라, 하나의 대오로부터 이런저런 대항세력이 위계 없이 섞이게 된 내용적 변화도 포괄한다.
이러한 감수성은 세대적인 것, 즉 '젊은이들의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는데, 실제 운동 주체들은 젊은 사람만 힘들다고 말하는 방식이나 '청년', '20대'라는 카테고리를 의식적으로 경계하는 편이다. 다만 현재의 일자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너희가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부모 세대 대한 원망이 운동의 정서에 주는 영향까지는 부정하지 않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방식의 운동이 받았던 비난들에 대해 생각해 봤다. 예를 들자면 야마구치가 프리터 노조에 대해 "비전을 확실하게 갖고 무언가를 향해서 나아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운동 속에서 효율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와는 다른 운동 상(像)을 갖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의문을 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불안정 노동자·실직자·노숙자 등 다양한 이들이 축제적인 형태로 분노를 표출시킨다는 '자유와 생존의 메이데이' 행사에 대한 언급을 보면서, 지난 4월 30일 대학생사람연대·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수유너머가 주관하고 다양한 워크그룹이 참여한 '총파업' 행사와 이 행사가 받았던 비판을 떠올렸다.
민주노총이 주관하는 노동절 행사와 별개로 진행된 이 총파업에선 "비정규직, 백수, 실업자, 감정 노동자, 예술가 (…) 등 다양한 목소리와 요구를 가진 이들이 거리로 나"와 "'No Work, No School, No Housework, No Shopping'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행진을 벌였다.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공모하라!>의 저자 이진경도 총파업 기획에 참여했다. (☞관련 기사 : 비정규직과 백수, 어떻게 '총파업'할 것인가?)
이들은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했고, 예술 작업·성 노동 같은 비공식 부문 노동 의제를 포함시켰으며, '(수업 중) 자거나 멍 때리는 행위'도 총파업 매뉴얼로 끌어안으며 노동 의제를 확장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행사 홍보 당시에도 그렇고 이후에도 SNS 등에서 비판과 논쟁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가령 이런 사회 운동이 되고자 하는 노동 운동이 "(다양한 부문의 수평적 연대이기도 하지만) 운동을 부문들의 백화점식 나열로 전락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는 지적이나 "사실상 주류 운동 진영에 대한 광범위한 '인정 투쟁'의 장"이었다는 비평 같은 것. (☞읽을거리 : 메이데이와 총파업을 돌아보며 )
개인적으로 궁금한 부분이었으나 책에선 위와 같은 비판이나 운동의 조직 방식·'프레카리아트'의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 구도 같은 것을 잘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 "단결" "힘내라" "반대~"를 '습관적으로' 외치는 듯한 데모 방식과 형식 없는 데모 방식 사이의 호오 언급은 나오지만 말이다.
이는 이 책이 새로운 운동 방향을 보여주자는 원래 주제에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고, 나아가 추측하자면 운동사(史)에 있어 일본과 한국이 갖는 차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다루는 운동들은 사실상 사회 운동이 몰락한 자리에서 나온 것이며, 따라서 야마구치의 표현대로 "적어도 유일한 가능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비정규 노동 운동이 일본 사회를 고조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255쪽) 규모가 큰 '전국 유니온'이나 '파견 유니온' 같은 조직을 포함해도 실질 참여자의 숫자는 매우 적으며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률은 전체의 4~5퍼센트 정도에 그친다고 한다. 저자들은 2008년 말 진행된 '연말연시 파견 마을' 이벤트가 사회적 의제를 설정했음을 거론하며 운동의 영향력이 양적인 조직률을 상회한다고 말하지만,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관찰자의 접근법에 따라 다르고, 그 차이의 폭이 아무리 커봤자 '아예 모르는(관심 없는)' 사람의 비율엔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하지만 "운동 속에서 효율이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관점(야마구치)과 프레카리아트 운동이 좌우파와 관계없이 "무조건적인 생존에 대한 긍정"이라는 주장(아마미야)을 다시 읽으며, 이들이 말하는 '운동'을 놓고 영향력을 운운하기에 앞서 '확장 가능형으로 탄생한 삶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망한'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 이들의 '적응 상태'인 것이다. 그러면서 네트워크가 없는 사람들을 관계 속으로 불러들이고, 정신적인 문제를 상담해주고, 같이 있을 곳을 마련해주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의 홍기빈 소장이 언젠가 "몇 천 년 동안 인간 사회 성원들에게는 '안정된 맛은 있지만 지루한 길'과 '자유롭지만 불안정한 길', 대략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는데, 지금 우리는 '지루하고 불안정한 길'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루하고 불안했던 정규직 사원인 나는 이 감각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고 약간 안도했다. 노동 운동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일본과 한국이라는 차이를 넘어 최소한의 공통점을 취하며 읽었을 때, 이 책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망했음'을 가장 먼저 알아채고 그 망한 시대에서 여럿이 함께 살아남기를 고민하기 시작한 예민한 이들의 기록이다.
물론 이는 이 책의 여러 독해 방식 중 하나일 터다. 운동 차원에서 차이에 주목하는 독해도 필요하다. 얼마 전 친구로부터 "두리반·마리를 거점으로 활짝 피어올랐던 작은 조직이나 각각의 활동가들이 공간이 없고 생계가 지속 가능하지 않아 뭐가 잘 안 되고 있는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두 부분에 언급한 일본의 뮤지션들처럼 그들이 프리터라는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실질 최저 임금의 상당한 격차를 염두에 둔다면 프리터 전반노조의 활동가 무급 원칙 등도 다른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