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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고등학교방문
이번 출장여행의 목표들 중 중요한 하나는
한국의 기독교 사학들과 유대관계를 맺고우수한,
그렇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날개를 펴는데에 어려움이있는 학생들을 발굴해 오는 일 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해서 이미 유명한 명문사립 고등학교로 떠오른
경남 거창 소재 거창고등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거창고등학교는 전영창선생이 세우신 학교입니다.
아래는 존경하는 전영창 선생님에 관한 펌글입니다.
"전북 전주에 위치한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다.
공부를 마치자마자 고국의 모 대학으로부터
부총장 자리를 제의받은 그는 화려한 자리를 마다하고
꿈을 선택했다.
두메산골에 위치한, 재정 문제로 폐교 직전의 위기에 몰린
한 고등학교에 교장 선생님으로 부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의 꿈은 그 작은 학교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고
그 학교를 한국의 명문 고등학교로 만드는 것이었다.
꿈을 실현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폐교 위기부터 벗어나야 했다.
그는 돈 문제를 해결하고자 교장의 몸으로
교사들과 막노동을 하는가 하면, 식사도 국수와 감자로 때우면서
돈을 모았다.
심지어 월급도 거의 받지 않다시피 했다.
그의 정성에 감동한 교사들 역시 자진해서 월급을 반으로 줄였다.
그러나 학교 재정은 악화되기만 했고 급기야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폐교는 불을 보듯 뻔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한 그는 어느 날 교사들에게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 날 그는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취했다.
은행에 가는 대신 4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화전민들도 살지 않는 깊은 산속에 있는 한 동굴로 간 것이다.
동굴 속에서 그는 일주일 내내 식사도 하지 않은 채
'금식기도'를 했다.
일주일 후 그가 다시 40리 길을 걸어서 학교로 돌아오니
미국에서 조우복이라는 사람이 보낸
수표 한 장이 도착해 있었다. 2,050달러짜리 수표였는데
당시 그의 학교가 짊어지고 있던
채무 전액을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의 이름은 전영창, 그가 교장으로 있었던 학교는 거창고등학교,
그가 일주일 동안 했던 '무엇'은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였다.
<이지성_꿈꾸는 다락방2/2008/국일미디어/pp.225~226>
이 학교에서 교장을 지내신 원경선 선생님 역시
교육부 장관 직을 제의받으셨지만
거절하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직업 선택의 십계명(사진참조)으로 유명한 거창고.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선생은
이 학교에 두 아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학교에서서울과 전국 각지는 물론미국에서 왔다는 학생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졸업생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거고 정신"으로 잘 알려진 이 학교는 겉보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시골학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영창 이라는 위대한 교육자의 정신이 흐르는 이 학교는
시골학교로는 보기 드문 대학진학률과
또한 그토록 명문대학에 많은 합격자를 내고 있지만
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설립자 전영창 선생의 초상화(위 가운데)와 그의 장서들
평범한 모습의 거창고 운동장과 건물들의 모습
유명한 "거창고 직업 선택의 10계명"
빛의 반사로 보이지 않는 부분을 포함하는 십계명은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등입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런 곳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가기를 원하시는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출장으로 안계신 교장선생님 대신 우리를 맞아주셨던
오상헌 교감선생님.
오 선생님께서는 서슬이 퍼렇던 5공 시절, 삼청교육대에 보낼 학생들을 뽑아 보내라는 군사정권의 명령에 거역해서
"학교 문을 닫으면 닫았지 그렇게 할 수 없다"며
정의 편에 서셨던 전임 교장선생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역시 모교에서 가르치시고 계신 오선생님 역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 분이셨습니다.
화려한 건물이나 졸업생의 명단을 자랑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자부심으로 뭉쳐있는 졸업생들을 양심적이고 희생할 줄 아는 겸손한 기독교 지도자들로 배출해 내는 거창고등학교..
제 아이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감동을 받은 학교였습니다. 거창고등학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모습의 기독학생들을 길러내는 학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two 님의 블로그(http://blog.daum.net/dreampark21/702308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봉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 고향, 푸른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지금 나는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반시간 전에 강당에서 불렀던 노래인데, 아직까지 많은 느낌과 함께 가사로서 리듬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다. 노래 자체로도 좋지만, 사실 오늘 이 노래를 서두에 적은 것은 돌아가신 전영창 교장 선생님이 가장 좋아했던 노래이기 때문이다. 4,5교시때 추모예배를 드렸고, 예배 마지막에 이 노래를 불렀다.
나의 동기들(26회)이 전영창 교장에게 배운 마지막 학년이었다.
어떻게 보면 배웠다기 보다는 보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입학한지 3달이 채 되지 않은 5월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동기들 중에는 교장선생님의 설교말씀을 기억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러나 내 기억속에는 설교를 했다는 것만 저 멀리 남아있을 뿐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장례식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왔다는 것,
그리고 선배들이 엄청 울었고,
아무 추억도 없는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는 것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정말 무지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이 왔었다.
아마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거창읍에 사는 사람들의 절반,
그리고 졸업생의 거의 절발 이상이 참여한 장례식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는 우리 민족이 식민지가 된지 7년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즈음에 덕유산 아래
심심 산골 전라도 무주땅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크리스토(기독교) 집안이었으며,
그가 태어난지 2년 후에 일어날 3.1운동때에는
그의 부친이 그 지방 3.1운동을 주도하였다.
(전일봉씨) 따라서 당시 우리 사회에서는
개명한 집안이자 민족의식이 뛰어난 집안에서 성장했던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더물게
무주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전주로 유학을 가
기독교 계열 학교인 전주 신흥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당시의 성적은 내가 확인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독실한 크릿스토(기독교)인으로서
매우 성실하고 진실된 생활을 했음이 틀림없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자진해서 행한 화장실 청소는
교장이었던 선교사의 눈에 띄었고,
그 결과 교장의 추천으로 일본 고베 신학교에 유학할 수 있었다.
이때가 1938년이니
일제가 대륙침략에 나서 중일전쟁을 벌인지 1년 되는 때였다.
일제는 전쟁 동원 이데올로기로서 일본 미신인 신도를 강요하였고, 전 국민(식민지 민까지도 포함)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여담이지만 당시 일본의 실적 보고를 보면
우리나라 기독교인 80%가 신사참배를 했다는 사료가 있다.
당시 조선 크리스토(기독교)계의 공식입장은 신사참배는
[정치적 행위]라는 해석 이었다. 즉 우상숭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기독교인도 신사참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보이는 종교와 정치의 더러운 야합이었다.
진실한 신앙인, 행동하는 조선인 유학생 전영창에게 이러한
야합이 통할리가 없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로 고베 형무소에서 1년간 옥살이를 했고,
5년의 집행유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요시찰 인물로 해방을 맞게 된다.(이 글을 쓰고 나서 전성은 교장선생님으로 부터 확인한 사실을 첨가한다.
-전영창 교장님이 일제가 진주만 공습 전날 1941.12.6일밤 단행한 예비검속으로 구속되었고, 고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는 그의 큰 딸(전덕애 선생님)이 태어났다는 축전을 받고
친구들과 함께 축하 파티를 하는 장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죄목은 고베 한인교회에서 행한 주는 앙모하는 자는 독수리
처럼이라는 주제의 설교가 독립사상을 고취했다는 것이었다.)
해방 후 1947년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좌익과 우익의 치열한 싸움에 휘말렸던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의 선택은 기독교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웨스턴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트 신학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러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때
전영창은 졸업은 2달 앞두고 있었다.
그는 조국의 전쟁을 보고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할 수 없었다.
교장에게 자퇴서 제출하였다.
많은 동료와 교수들이 말렸으나 피끓는 젊은이를 말릴 수는 없었다. 학교측에서는 특별한 결단을 내려 전영창만을 위하여 2개월 앞서 조기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곧장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모아온 각종 구호제품을 피난민에게 나누어 주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때 함께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장기려 박사였다.
(장기려는 6.25 때 평영의대 의사로 있다가
북한에 마누라와 아이들은 남겨 두고 2째 아들과 남한으로 와서
남한에서는 재혼 하지 않고 살다가
1994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한상동 목사의 요청으로 부산 복음 병원을 설립한 사람이다)
그와 함께 천막 두개를 치고 무료진료소를 설치했으며,
이것이 현재 고신대학병원이 되어 있다.
그의 구호활동을 매우 헌신적인 것이었다. - 헌신적 성실성=이것이 그의 제1가능 성품이었다고 생각된다.
6.25전쟁이 끝나고 1955년 다시 유학길에 나섰으니,
이것이 세번째이다. 미국 콩코디아 신학대학원에서
마침내 공부를 끝낼 수 있었다.
귀국을 앞둔 그에게 한국의 많은 대학에서 초청장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곳은 도시도 아니요,
대학도 아닌 두메산골 거창 땅,
그것도 쓰러져가는 거창고등학교였다.
당시 거창고등학교는 오늘날과는 달리 호주 선교사 사택(지금 샛별초등학교 자리) 건물 두채-그것도 비가 오면 줄줄 새는 양철지붕집-뿐이었다. 그가 취임하여 학생앞에 열정적인 첫 연설을 했을때,
그의 앞에는 8명의 학생이 앉아 있었다.(1956년 4월 12일) 그리하여 그는 평생 뼈를 묻을 곳을 찾은 셈이었다.
그는 어떤 교장이었을까?
아니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왜 아직도 수많은 거창 사람들이,
그리고 졸업생들이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여기서 다 말할 길이 없다.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야 하며 그 분량또한 적지않을 것이다.
오늘 추모예배에서 설교를 한
거고 21회 제자 천종권 목사의 이야기를 요약한다.
그는 불의 앞에서는 사자와 같고
제자 앞에서는 참으로 다정한 사람이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였고, 일에는 열정적이었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참으로 진실(정직)되게 살었으며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이 정도만 말해야 하겠다. 아니 하나 더 남았다. 오늘 기도를 한 나의 친구로 모교에서 봉사하고 있는 유보성 목사의 기도를 실으면 그를 보지 못한 사람조차도 그를 눈앞에 보는 듯 할 것이다.
다음은 유목사의 기도문이다.
사람을 불러 당신의 뜻을 세상에 심고,
밝혀나가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는 이 학교의 스승으로 오셔서 불꽃같은 열정으로 살다가신 고 전영창 선생님의 삶과 죽음을 회상하고 추도하는
예배로 모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삶의 나태함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믿음의 연약함에 박차를 가하고
우리의 뒤틀린 꿈을 교정 받고 우리 안에 식어가는 정의와 헌신과 사랑과 눈물과 순수와 열정을 회복하는 시간으로 삼으려 합니다.
주님,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넓고 평탄한 길을 가는데 홀로 그 길을 따르지 않고 좁고 비탈진 길을 간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로 오를려고 안간힘을 써는데
자기에게 있는 힘을 오히려 아래로 내려가는데 다 써 버린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이 갖지 못한 명예와 저명한
이름을 얻으려고 발버둥치는데 이미 확보된 명예와 이름을 배설물 버리듯 버리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자네의 실력이라면 이 정도 갖추어진 자리가 있어라는
손짓을 망설임없이 뿌리치고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불모의 땅을 선택하는 한 등신(바보의 경상도 말-유목사는 갱상도 사람이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월급이 적다고 성토하는데 자기에게 있는 재산을 톡 털어 내어주고 빈털털이가 되고서야
오히려 만족하는 바보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과 군대를 두려워하고 돈을 무서워하는데 권력의 힘과 군대의 힘같은 것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들이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는
당신을 저 혼자 지독히 무서워 했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전문가를 찾아가고
아는 사람과 인맥의 힘을 빌려 풀려고 하는데
우리가 본 이 사람은 아무리 답답하고 위험에 처했다고 외쳐대어도 대답 한마디 없이 침묵하시는 당신에게만 대답을 요청하고
몸살을 앓는 참 보기에 답답한 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분은 우리가 써는 자와는 그 성질이 전혀 다른 자로 세상을 재었습니다.
우리는 땅을 재는 자로 내 길을 재어 나가는데
그 분은 하늘에서 쓰는 자로 땅을 재어 나갔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살고 간 지 어언 25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결국 우리가 쓰는 잣대보다 그 분이 썼던 잣대가 옳았습니다.
저기 강당 뒷벽에 붙어 있는 10가지 삶의 길은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꾸며낸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나 이론이 아니고 25년 전
여기 죽전 동산에서 자기 몫으로 주어진 땅에서의 삶을 살고 간
우리들의 스승의 삶의 발자취를
10가지로 정리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전영창 선생님이 가르치는 교육받고 그 분의 삶고 죽음을 체취하고 있는 목사님을 통해서 선생님의 신앙과 삶을 증언받을 때
여기 모인 우리들의 식은 가슴이 다시 더워지게 하옵소서.
잠자는 사람들이 깨어나게 하옵소서. 어디가 자기 갈길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걸어가야할 길을 선명히 보게 되는 시간 되게 해 주시옵소서. 삐뚫어지고 뒤틀린 꿈을 교정받는 시간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이 거창고등학교가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다시 꿈꾸고 다시 씨뿌리고, 하나님과 함께 다시 해 나가야할 씨름이 무엇인지를 듣고 깨닫는 은총의 시간되게 인도해 주옵소서.
죄인이 예수님 이름 받들고 기도 올립니다. 아멘.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래는 거창고에 관련된 또 하나의 펌글입니다.
출처는 정연이네 블로그 입니다.
http://blog.naver.com/kjyoun24?Redirect=Log&logNo=60072022726
2003년 거창고 50회 졸업식에 전 교장선생님의 아들 되신 전성은 선생님이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삼 년 전 진리의 배움터로, 오늘 졸업하는 151명의 아름다운 꽃들을 보내주신 당신의 섭리에 감사 드립니다. 이제 오늘은 이 아름다운 희망들과 헤어지는 시간입니다. 장미 만발한 꽃이 아닌, 가시밭길 험난한 세상으로 내보내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이제 저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저들을 축복하시어 아무리 자기를 미워하고 해코지하고 억울하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하는 사람일지라도, 바로 그 사람을 위하여 밤새워 기도하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베풀어 봤자 되돌려 받을 가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더욱 더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친구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할 수 있고, 친구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 되게 하여 주옵소서.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머리 숙여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무리 화가 나는 경우일지라도 예의를 잃지 않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항상 나보다 먼저 남을, 나라를, 민족을, 인류를 생각하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미움으로 성내어,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일을 그르치지 않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을 수 있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맞아죽고, 굶어죽어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참됨을 목표로 하는 삶 속에서만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남의 허물을, 아니 민족의 허물을, 인류의 허물을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소처럼 느리지만 뚜벅 뚜벅 걸어가는 삶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떤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도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두 발로 굳게 설 수 있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쓰러지고 자빠지고 넘어져 피투성이가 되어도 또 일어서고 또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다른 모든 일에는 실패하여도 사랑에만은 실패하지 않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보혈의 피를 흘리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감히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이 때 졸업생 대표 최지헌 학생의 답사는 이러했습니다.
“마음의 고향을 떠나는 오늘,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것 같은 오늘, 우리의 만남을 계획하시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3년 동안 먹고 자고 숨쉬었던, 때론 집보다도 편안했던 공간인데, 오늘은 왜 이리 이 자리가 어색한지 모르겠습니다. 만났으면 헤어지는 게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지만, 늘 함께 있었고 늘 함께 할 것 같았던 삶들과의 헤어짐이기에 아쉬움은 크기만 합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3년은 우리들에겐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어색했던 처음 만남,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긴장했던 선배들과의 대면식, 함께 거고 파이팅을 외치며, 함께 부둥켜 기뻐하며 아쉬워했던 연합 체육대회, 모두 지고도 재미있기만 했던 첫 봄 예술제, 함께 부둥켜안으며 즐거워했던 대동놀이, 우리도 몰랐던 우리의 능력을 발견한, 서로 다른 이들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어낸 가을 예술제, 흘러가는 시간 하나 하나가 너무도 아까웠던 지난 봄 예술제, 마지막 봄 소풍,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은 열광의 댄스파티.... 이 모든 시간들은 우리들에게 서로를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외롭고 힘들었던 시간 또한, 좋았던 시간들만큼이나 많았지만, 그 외롭고 힘들어서 흘린 눈물 또한 고난을 통해 더 크게 쓰시려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또 하나의 축복이란 것을 믿습니다.
이 순간 귀가 닳도록 들었던 '거고정신'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곳에서 3년이란 시간을 보내며 순간순간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크고 작은 학교행사를 통해서, 친구들을 통해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느끼며 그것이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었나보다 라고 했던 어는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이 자리에 있기에는 많은 분들의 울음이 있었습니다. 오직 우리들이 자라나는 모습만으로도 기뻐하신 선생님의 은혜로 저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늘 선생님들의 희생만을 강요하며 이해받기만을 원했던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도시보다 열악한 시골의 학교에서, 자신보다는 학교와 학생을 먼저 생각하시고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날마다 우셨던 선생님을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길게만 느껴졌던 수업시간, 함께 웃고, 즐거워하면서 그 속에서도 시대와 역사 속에 필요한 일꾼이 되라고 가르치셨던 선생님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평을 모두 들어 가시면서도 싫은 기색 한번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셨던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서무실 직원 분들께도 죄송했고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저희들을 낯선 땅에 보내시고, 돌아서서 눈물 흐리셨던 부모님을 기억합니다. 밥은 잘 챙겨먹었는지, 잠자리는 편안한지, 늘 괜한 걱정만 하셨던 당신들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늘 말뿐인 미안함이고, 늘 말뿐인 고마움이지만, 이젠 당신을 더 이상 걱정시키지 않겠다는 한 번도 지키지 못한 약속을 다시 하고 싶습니다. 미안하고 감사한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사랑하는 후배들아, 우리가 보았던 선배들은 정말 멋있어 보였는데, 너희에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모르겠구나. 우리가 숨죽여 시험 치르던 교실, 공을 좇아 달리던 운동장, 노인정과 중앙 현관, 이제 우리가 떠난 자리엔 너희들이 채우고,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꿈을 꾸며 살아가겠지? 어설프게나마 너희들에게 본이 되려 노력했고, 너희들을 이해하려 했던 선배들을 기억해다오. 진실한 마음 한 점주지 못하고 떠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후배들을 맞기 위해 설레임으로 기다렸던, 너희들만은 인정해주길 바랬던 우리의 마음은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아, 지금 우리 마음은 모두 같을 꺼야. 하지만 우리 서로를 축하해주며, 기쁨으로 서로를 보냈으면 한다. 평소에 했던 것처럼 그렇게 헤어져서 다음 만났을 때도 농담하고, 장난치며 전혀 어색하지 않게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살아온 시간보다, 앞으로 함께 살아갈 시간들이 더 많기에, 그동안 바빠서, 혹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 이제는 더욱 좋은 만남을 이루어 나가길 약속하자. 마지막 성경시간 기억나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무엇인지, 사람을 사랑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이젠 같은 하늘을 보며, 같은 태양을 보며, 함께 그 사랑을 이루어 나갔으면 좋겠다.
우리의 소망이 담긴 글 하나를 읽으며 답사를 정리하려 합니다.
거고인 건축가가 세운 다리는 무너지지 않고
거고인 농부가 키운 작물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으며
거고인 의사는 삶의 목숨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거고인 판사가 내린 판결은 믿을 수 있고
거고인 직공이 만든 옷은 단추가 잘 떨어지지 않으며
거고인 선생님에게는 안심하고 자녀를 맡길 수 있다.
거거인 관리는 뇌물을 받지 않고
거고인 기자는 거짓을 전하지 않으며
거고인 역사가는 그 무엇보다 진실을 목말라 한다.
그래서 세상은 거고를 빛이요 소금이라고 한다.
사람은 사랑을 할 때 세 단계를 거쳐 사랑을 이루어 나간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열정을 가지고 사랑을 하다가, 그 열정이 식어버리면 그동안 들어버린 정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정과 정 마저 식어버릴 때는 약속과 책임으로 끝까지 사랑을 한다고 합니다. 거고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뜨거운 열정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 될 정도로 정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오늘 , 이 시간 우리의 삶 끝까지 가져갈 약속을 합니다. 험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겠습니다. 비록 흩어져 서로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겠지만 같은 하늘을 보며, 같은 꿈을 꾸며 이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이 되겠습니다. 이제는 매섭게 춥던 거창의 새벽 추위를 느낄 수도, 유난히도 별이 많았던 거창의 밤하늘을 볼 수도 없겠지만, 이 모든 것들을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묻어주고 우리는 새로운 곳을 찾아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납니다. 우리의 만남을 계획하셨고, 우리의 또 다른 만남을 계획하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